바울은 단지 죽기 위해 살아가는, 생사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참되게 살아가기 위해 날마다 죽는 ‘사생결단’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바울의 사생결단의 삶 자체가 세상에 보여주는 유언이었습니다. 아, 우리의 삶 자체가 유언이 되는 그 삶의 동력은 바로 ‘고독’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는 그 고독이 사생결단의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새벽에 한적한 곳에서 혼자 고독하게 하나님과 독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는, 종적(縱的)인 고독 없이 행적으로 사단과의 바른 관계가 맺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격리하는 고독이 있을 때만 자기의 실체를 망각하지 않고, 그 고독 속에서 자기 부인이 가능하며, 그 고독 속에서 사생결단의 삶이 지속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바울 유언의 결론입니다. 25절입니다.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을 아노라.”
바울은 지금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영원히 작별하기 때문에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마지막 작별을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말 어순상 바울이 실제로 헬라어로 말했던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전해 주지 못합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내가 안다(οἶδα)”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첫날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헬라어 동사는 동사 어미의 변화로 주어와 인칭, 시제, 수(單複수) 등을 나타내기 때문에 별도로 주어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도 별도로 주어(ἐγώ, ‘내가’)를 사용할 때에는 그 주어를 ‘강조’할 때입니다. 바울은 제일 처음부터 “보라, 내가 안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을 시작했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면 이런 말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제’ 내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사생결단의 삶을 살던 이 얼굴을, 여러분이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유언을 하면서 “여러분이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난 알고 있다”라고, ‘나는’을 이렇게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들은 아직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천 년 만 년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내가 유언을 전하면서도 여러분은 또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닙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만나고 싶고, 보고 싶고, 마주 보고 싶은 그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손흥민 선수가 이번에 영국에서 큰 업적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아시아 선수로서 처음으로 EPL 이번 시즌 득점왕이 되었습니다. 서울에 와서도 A매치에서 2경기 연달아 골을 넣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손흥민 선수가 축구선수로 그렇게 대단한 족적을 남겼다고 해서 신문 기사에 손흥민 선수의 ‘발’만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손흥민 선수의 발을 클로즈업해서 찍어 신문에 싣는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게 누구 발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나가다가 손흥민 선수를 보고 “아, 손흥민 선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선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요, 우리 얼굴은 화장되어 재가 되거나 매장되어 썩어버립니다. 그게 죽음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제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 내가 여러분 앞에 서 있을 때 내 얼굴을 잘 보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나도 여러분이 이 세상을 다 산 뒤에 나와 같은 얼굴을 지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 유언으로 이 말씀을 남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도대체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었는가? 26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우리 성경은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말을 참 쉽게 해요. 100년 200년 계속 앞으로도 ‘오늘’을 맞이할 것처럼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맞는 ‘오늘’은 평생 단 한 번밖에 없는 ‘오늘’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지금 에베소 장로들에게 유언을 남기는 그 ‘오늘’은, 에베소 장로들과 바울 사이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입니다. 헬라어로 “엔 테 세메론 헤메라(ἐν τῇ σήμερον ἡμέρᾳ)”라고 해서 정관사를 붙여서 ‘그 오늘’, 즉 단 한 번밖에 없는 ‘그 오늘’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바울이 지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27절입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내가 꺼리지 않았다’는 건 ‘불이익을 감수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여러분에게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
바울이 지금 이 말을 하는 것은 에스겔서의 말을 자기에게 적용시켜서 하는 말입니다. 에스겔서 33장 2절에서 6절 말씀을 제가 세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사람아, 너는 네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전하여라.”
(모두에게, 어느 특정인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모두’입니다. 그 ‘모두’ 속에는 우리도 포함됩니다.)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라. 만일 내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이르게 할 때,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하자. 그 파수꾼이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보를 하였는데도, 어떤 사람이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해서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자기 탓이다.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이다.”
옛날 성의 파수꾼은 항상 파수탑 위에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멀리 볼 수 있습니다. 먼 데서 적군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나팔 소리를 듣고도 “설마…” 하다가 경계하지 않다가 적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면, 그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해 파수꾼은 책임이 없습니다. 파수꾼은 자기 책임을 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 목숨을 건진 것이다.”
나팔 소리를 듣고 사람들이 전부 경계를 해서 전쟁에 대비했다면, 이것은 파수꾼도 살고, 그 경보를 들은 사람들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서, 그 백성이 경보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다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나는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파수꾼에게서 묻겠다.”
왜냐하면 파수꾼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 33장 7절에서 9절을 계속 세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여라.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는데도, 네가 그 악인에게 말하여 그가 악한 길에서 떠나도록 경고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나는 그가 죽은 책임을 네게서 묻겠다. 그러나 내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에서 떠나도록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기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너는 목숨을 건질 것이다.”
즉, 우리가 복음의 파수꾼으로서 충실하게 ‘전보의 나팔’을 불어야 하는데, 악인들을 향해 “그 불의한 길에서 떠나라!” 하고 경고하지 않아서, 그들이 죄 가운데 죽어버렸다면, 하나님은 그 죽은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서 찾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의 파수꾼의 역할을 충실히 했는데도, 그 복음의 경고를 듣고도 귀를 막고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깨끗합니다. 왜? 우리는 복음의 파수꾼으로서 책임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바울은 이 에스겔서의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시켰습니다.
“내가 어떤 불이익을 당해도 너희에게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전했다. 그 말씀 가운데는 너희가 듣기 싫은 말씀도 있었다. 너희를 후벼 파는 말씀도 있었다. 너희 양심이 찔리게 하는 말씀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사랑해서 그 말씀을 다 전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해서 깨끗하다. 왜? 복음의 파수꾼으로서 사명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었는가?
바울은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내가 일평생 너희 가운데서 복음의 파수꾼으로 살았던 이 얼굴, 이 얼굴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복음의 파수꾼은 구체적으로 어떤 얼굴인가? 28절입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여러분은 자기를 위해서, 또 온 양 떼를 위해서 삼가라.’ 삼가야 할 이유는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감독자로, 보호자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 ‘감독자’라고 번역된 이 헬라어 단어(ἐπίσκοπος)는 교회의 ‘주교’나 ‘감독’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원래는 ‘보호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너는 너 주위에 있는 신자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사람으로 주님께서 세우신 보호자다.” 그래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호자입니다.
어느 장로님을 보고 실족하거나, 어느 권사님·집사님을 보고 “저렇게 막 살아도 되는구나” 하며 실족하게 하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됩니다.
저는 3년 동안 스위스 제네바 한인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럽은 중동처럼 물에 석회질이 많아서, 수돗물을 그냥 마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도 중동처럼 포도주가 대단히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밥 먹을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술’을 마신다기보다, 그냥 음료처럼 마시는 것입니다.
저는 3년 동안 있으면서 포도주를 입에 대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권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식사할 때, 성도들은 포도주를 즐겨 마십니다. 그래도 저한테 권한 분은 없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한동안 술독에 빠져 있을 때, 늘 마음에 양심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어느 날 술 마시는 생활을 칼로 무 자르듯이 딱 끊으시고 그리스도인이 되셨는데, 나는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왜 이렇게 술독에 빠져 있나? 늘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4년 8월 2일 새벽 2시에 주님께서 저를 사로잡아 주셔서 술을 끊게 되기 전까지, 제가 그나마 죄책감 없이 술독에 빠져 살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사업 파트너와 함께 술을 먹는데, 그 파트너가 다른 분 두 사람을 더 모셔 왔습니다. 넷이서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면서 무슨 거룩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온갖 세속적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한참 술을 마시고 나서, 제가 교회 다닌다는 것을 알고, 그 두 분 중 한 분이 난데없이 “내가 목사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한 분은 “나는 장로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술을 마시면서 ‘면죄부’를 얻었습니다. “아니, 목사님도 술을 드시네? 장로님도 술을 드시네? 그럼 나도 뭐…” 내 양심에 꺼릴 게 없구나.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스위스에서 제가 포도주를 마시는 걸 보고 혹시 누가 “아, 저분도 역시 술을 드시는구나” 하면서, 알코올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갈등을 하던 사람이 “어, 이제 처음 보는 목사도 포도주 마시네?” 하며 면죄부를 얻을까 봐, 저는 거기서 포도주를 입에도 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어떤 얼굴을 지니고 있는가?
주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주신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지키고 보호하며,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자신을 삼가고, 그들을 돌보는 보호자의 얼굴이었습니다.
29절,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리라.”
지금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내가 이제 떠나가면 사나운 이리들이 와서 교인들을 덮칠 것이다. 거짓 선지자, 거짓 교사, 교인들을 위해 생애를 헌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팔아서 자기 배를 불리는 거짓 일꾼들이 와서 성도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외적 도전’이 교인들을 괴롭힐 것이라는 말입니다.
30절,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 내가 아노라.”
여기에도 ‘내가 안다(ἐγώ οἶδα)’라는 주어를 썼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은 3년 전 바울이 와서 복음을 전해주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그들을 장로로 세웠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과는 다시는 못 보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덕담을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내가 떠난 뒤에도 잘할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들, 비록 나와 3년 동안 살면서 주님을 잘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분 중에서도 주님을 따르게 하지 않고 제자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아서 자기 배만 불리려고, 말씀을 왜곡(διαστρέφω)하는 자가 일어날 줄 내가 알고 있다!”
바울은 듣기 좋은 말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떠나가면 외적·내적 도전이 많을 것이다. 그때 너희는 그 모든 도전에 맞서는 전사가 돼야 한다.”
바울은 모든 유혹과 도전에 맞서는 ‘전사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31절,
“그러므로 여러분이 깨어 있으라. 내가 3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 ‘훈계’만 하면 그 사람은 우월해집니다. 항상 자기는 잘하고, 상대는 잘못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훈계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냥 훈계하지 않았습니다. “눈물로” 훈계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정을 알고, 그들의 마음과 함께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면서 “저 사람을 바로 세워 주십시오. 저 사람에게 맞는 말씀을 제 입에 넣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며 훈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기도자의 얼굴’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32절,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지금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을 남겨두고 떠나갑니다. 영원한 작별입니다. 다시는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에베소 장로들을, 에베소의 권력자에게 찾아가 “이 사람들 좀 잘 부탁합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의 재벌을 찾아가 “이 사람들 좀 경제적으로 잘 지켜주세요”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떠나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여러분을 든든히 세우고, 하나님의 약속의 유업을 받게 해주신다.”
그것을 바울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말씀에 맡기고 떠납니다. 바울 자신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고 살아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씀에 의탁한 사람’의 얼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장로들이 바울의 얼굴을 보면, 말씀이 먼저 생각났을 것입니다.
33절에서 35절입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였노라.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인 것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하리라.”
우리가 첫날 본 ‘구제’가 아닙니까? 당시의 말씀 사역자들은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헌금으로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권리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복음을 전한 그들로부터 헌금을 받아 생활하지 않았습니다. 혹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한 게 자기 먹고살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복음에 걸림돌이 될까 봐 바울은 자기 손으로 텐트를 만들며 자비량으로 전도했습니다.
첫날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자기의 경제적 필요만 자기 손으로 채운 것이 아니라, 자기와 함께 전도 여행에 나선 일행들의 필요도 채웠습니다. “나는 자비량으로 전도할 테니, 여러분은 교인들 헌금 받아서 쓰세요.”가 아니라, “그들까지도 내 손으로 만든 장막을 팔아 먹여 살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본을 보인 것처럼, 여러분도 수고하고 약한 사람을 도우라.” 원문에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뜻의 조동사 ‘δεῖ(데이)’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본을 보인 것처럼, 여러분도 반드시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우라.” 그리고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굳이 이렇게까지 했던 것은, 사람은 ‘거룩한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낳고 어떻게 키우셨습니까? 여러분은 ‘인생을 낭비’하며 키웠습니다. 물질을 낭비하고, 시간을 낭비하고, 아이가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 여러분의 모든 가능성을 그 아이에게 쏟아부었습니다. 왜? 부모의 사랑 때문입니다.
부모가 아이 기저귀 갈 때마다 금전출납부 적어서, “며칠 며칠 몇 시 기저귀 얼마. 나중에 커서 다 갚아라.” 이러지 않습니다. 그건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는 ‘낭비’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모 자식 간에 언제부터 문제가 생깁니까? 어느 순간 부모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며 ‘계산’하기 시작할 때, 부모 자식 관계가 어그러집니다. 부모는 죽을 때까지 낭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내 삶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고 남는 여분을 나누어주는” 그런 차원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을 위해 나 자신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생명 자체를 십자가 위에서 송두리째 낭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바울은 어떤 얼굴의 소유자였는가?
‘사랑할 자를 사랑하기 위해’ 거룩하게 자신을 낭비하는 얼굴이었습니다.
36절에서 38절입니다.
“이 말을 한 후에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누가 제일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까? 바울이 먼저 무릎을 꿇었습니다. 바울이 유언을 다 끝낸 뒤 무릎을 꿇자, 에베소 장로들도 따라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함께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사람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웁니다. 그제야 “아, 이것이 영원한 작별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한 것입니다.
38절,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세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들이 가장 마음 아파한 것은,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바울의 말 때문이었다. 그들은 바울을 배 타는 곳까지 배웅하였다.”
밀레도 항구까지 바울을 따라갔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배에 오르는 것을 보고 “안녕히 가십시오…” 한 것이겠지요. 배가 떠나가고, 그들은 항구에서 배를 쳐다보며,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서 바울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바울의 얼굴이 자신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의 마음속에 바울의 얼굴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 ‘서로 삼가며 함께 지키는 보호자’의 얼굴, ‘내적·외적 유혹에 단호히 맞서는 전사’의 얼굴, ‘성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기도자’의 얼굴,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말씀의 사람’의 얼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거룩한 낭비자’의 얼굴. 그 바울의 얼굴이, 그들의 마음속에 새록새록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초상화라고 전해지는 그림들을 보면, 미남배우 같은 얼굴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도, 예수님의 초상을 그릴 때는 세상 어느 미남보다 더 잘생긴 모습으로 그립니다.
그런데 바울의 초상화들은 대부분 바울이 미남이 아니었다고 전합니다. 키도 작았고, 다리도 휜 편이었고, 얼굴도 볼품없고, 지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참 초라한 외모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 장로들에게 바울의 얼굴이 ‘세상적 미추’와 무슨 상관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미(美)·추(醜) 관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바울의 얼굴을 기억했습니다. 그 얼굴은 그들이 ‘담고 싶은 얼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얼굴 하나로도 바울의 유언이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얼굴을 마음속에 떠올릴 때마다, 바울이 살았던 삶이 눈앞에서 펼쳐졌고, 그들도 바울처럼 살기 위해 사생결단을 다졌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어떤 얼굴을 남기고 있습니까? 어느 날 불현듯 죽음이 여러분을 덮칠 때, 여러분은 어떤 얼굴을 이 땅에 남기고 가시렵니까? 사람들은 여러분의 얼굴을 기억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얼굴을 아름답고 세련되게 가꾼다고 해도, 그거 다 썩어버립니다. 그런 얼굴은 세월이 흐를수록,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생명을 주는 유언으로 성화’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을 유언으로 남길 수 있는 얼굴은, 아름답고 세련되고 잘 꾸민 얼굴이 아니라 ‘사생결단의 삶’이 묻어 있는 얼굴입니다.
20세기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눈다면, 전반기에 ‘세기의 전설적인 여배우’가 있었습니다. 그 여배우는 자기 젊은 시절의 얼굴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서른 후반부터 일체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이 드는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였습니다. 사람들이 평생 자기의 20~30대 모습만 기억해 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은둔하며 살던 그녀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어떤 파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혀서 신문에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아, 저 여배우 늙었구나”라고 봤습니다. 30대에 한창 예쁘던 사진은 남아 있었으나, 30대 후의 40년 세월은 사라져버렸고, 70대 할머니 모습만 드러났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오랜 시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20~30대 미모의 여배우는 그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여배우보다 조금 뒤에 나온 또 다른 전설적 미모의 여배우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오드리 헵번입니다. 그는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이 사진에 찍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이 들어서 아프리카에 가서, 화장기 없는 얼굴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직접 안아주며, 선진국 사람들에게 “제발 도와주십시오” 호소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홍보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죽었지만, 사람들이 기억하는 오드리 헵번의 얼굴은 30대에 청순하고 빛나던 영화 속 모습만이 아닙니다. 주름진 얼굴로 흑인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그 모습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30대의 외모는 육적(肉的) 아름다움이었지만, 나이 들어 주름진 얼굴로 아이를 안고 있는 헵번은 ‘내적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얼굴에 주름이 있고, 골격이 안 맞아도, 나이가 들어 바울처럼 지병을 앓는 얼굴이라 해도, 그것에 개의치 말고 사생결단의 삶을 사는 얼굴로 살아가십시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남기는 얼굴이, 우리 유언의 ‘완성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 사람들은 우리가 남긴 그 얼굴을 통해 우리가 살았던 사생결단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을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00년 전 바울의 얼굴이 실제로 미남이었는지, 혹은 추남이었는지는 우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美)와 추(醜)를 초월하여,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잊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 ‘얼굴’을 닮고 싶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위해 삼가야 할 것을 삼가는 ‘보호자’의 얼굴,
온갖 모함과 죽음의 고난 속에서도 내적·외적 유혹에 단호하게 맞서는 ‘전사’의 얼굴,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위해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자’의 얼굴,
말씀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한 ‘말씀의 통로’ 된 얼굴,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거룩한 낭비자’의 얼굴,
일평생 지병에 시달리면서도 병의 노예가 되지 않고 병의 주인으로 산 얼굴…
우리 모두 복음의 파수꾼이 되어, 사생결단의 믿음으로 바울의 그 얼굴을 닮은 ‘진짜 예수쟁이’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단 한 마디 말로도 유언을 남기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얼굴이, 우리의 삶이 드러내는 유언의 완성판이 되게 하시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우리의 그 얼굴로, 우리가 살았던 사생결단의 삶을 기리고 본받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In His Ste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