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믿쑵니다.
저는 기독교를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교를 '윤리'와 너무 강력히 연계해서 해석하고 요구하는 것을 극히 '경계'합니다. 별로 맞지 않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결과로서 높은 윤리적 기준을 맞출 수 있으나, 윤리와는 무관한 종교적 부분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본디 종교는 윤리와는 무관합니다. 사람사이의 윤리보다는 훨씬 높은 차원의 얘기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개망나니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 개과천선해서 올바른 삶을 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거듭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태도가 바뀌는 것은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거듭남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거듭남의 결과로서도 어떤 사람의 생각이나 태도가 바뀔 수는 있으나, 그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기독교의 거듭남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관계'가 맺어지고, 따라서 왕되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좀..어렵죠?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매우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어떻게 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거듭남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특히 기독교인들이 부지불식간에 오해를 저지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거듭남을 주는 것은, 또는 구원을 주는 것은, '믿음'이라는 내 행위가 강조되기 보다는,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갚아 주신 대속'을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핵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핵심이 되어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지...하실 수 있지만, 저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빠지는 오류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회의를 불러 일으키는 많은 상황들이 있고 그 가운데에서 믿음을 지켜 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련이 와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힘줘서 "믿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때로는 '주여, 제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잘 믿느냐 아니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 분을 믿는 것이어야 기독교의 믿음이고, 거듭남의 핵심이 됩니다. 내 믿음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내가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내가 중심인 것은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교만이요 죄입니다. 믿음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며 하나님입니다. 그 분의 희생이요, 그분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래서, 내 연약한 믿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사그라들지 않는 구원에의 확신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내게 무엇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며 내가 그것을 깨닫기를 바라고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2. 누림과 매임
예수님을 믿으세요...하면 많은 사람들이, 나중에 나이들면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 얘기의 배경에는, 예수를 믿게 되면 술/담배도 못하고, 내 직업상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도 많이 해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으니, 나중에 은퇴하게 되면 교회에 다니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고뇌에 찬 수도승과 같이 항상 찌푸리고 자기의 죄를 괴로워하며 거룩한 것만을 생각하며 살까요?
개신교의 소요리문답에서도 사람이 사는 목적은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 forever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며 누리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도그마와 규례에 '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윤리적 삶과 봉사와 사역은 성도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마지못해 율법적으로 매여서 하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즐긴 다음에, 그 은혜에 감동하여 기쁨으로 봉사와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마지못해 억지로 매여서 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공로가 되어 버려서, 결국은 지치거나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누리는 신앙생활만이 빌립보 감옥에서도 찬양을 했던 바울과 실라와 같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는 감옥 안의 차꼬에 매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찬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의 밤 가운데서도 우리는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또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즉 예수님 때문에 의롭다함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누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 화평을 잃어 버리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이는 스스로의 죄책감과 자신의 불완전성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하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느낌과 감정에 초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의 죄와 마음의 가책까지도 대신 짊어 지셨습니다. 내가 아직 경건하지 않던 그 때에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내가 선하든 악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초점을 맞추면 안됩니다. 우리의 감정은 항상 바뀌고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화평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누리는 화평입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불안한 화평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못믿을 내 공로로 얻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창조자이고 절대자인 하나님으로 인해 갖게 된 든든한 평화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하나님만 바라볼 때, 사단의 참소와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누리게 됩니다. 모든 매이는 것들을 끊어 버립시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Scots church에서의 예배 (0) | 2012.11.25 |
---|---|
결혼의 조건 그리고... 내 삶의 시각 (0) | 2012.07.29 |
스데반의 순교 (0) | 2012.06.24 |
아버지... (0) | 2012.06.17 |
분리 vs. 구별 (1) | 2012.05.20 |
우리 만나요...얘기해요...from 숲해설가 (1) | 2012.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