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예수님을 주여 주여 라고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행동으로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 흔히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이라 불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단순한 언어적 신앙 고백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언어적 고백의 한계
예수님은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문제를 먼저 지적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주제를 강조합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문구를 반복하거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합니다. 이 메시지는 특히 그 당시 예수님을 언어적으로만 믿고 실제로는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중요했습니다.
신앙에서 행함의 중요성
22절과 23절에서 예수님은 예언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을 행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의 운명을 묘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겉으로 보기에 경건해 보이는 종교적 행위가 진정한 믿음과 순종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와는 동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거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행함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진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
예수님은 이 부분을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를 대비하는 비유로 마무리하십니다(마태복음 7:24-27). 지혜로운 건축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삶의 도전 속에서도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기초를 가진 사람으로 비유됩니다. 반면, 어리석은 건축자는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 삶이 어려움 속에서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기초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 비유는 듣는 것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분의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의 비유는 순종하는 믿음과 공허한 말로만 이루어진 신앙의 차이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적용
마태복음 7장 21-27절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종교적 정체성이 종종 말과 의식으로 표현되는 세상에서, 이 구절은 신앙의 진정성을 점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도전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단순한 언어적 고백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려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삶의 기초는 빈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7장 21-27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신앙이 단순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상기입니다. 이 말씀은 행동으로 옮기라는 요구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요구입니다. 우리 각자는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자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 have always emphasized the significance of not just professing faith but living it out through actions. In the passage from Matthew 7:21-27, often referred to as the conclusion of the Sermon on the Mount, Jesus delivers a powerful message that challenges mere verbal acknowledgment of faith and underscores the importance of aligning one's actions with God's will.
The Limitations of Verbal Profession
Jesus begins by addressing a critical issue: not everyone who calls Him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This statement is a direct challenge to those who believe that simply acknowledging Jesus with their lips is sufficient for salvation. In Matthew 7:21, Jesus clearly states,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the on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This verse highlights a central theme in Jesus' teachings: faith without obedience is incomplete. The mere repetition of religious phrases or declarations of faith is meaningless if it is not accompanied by a life that reflects God's will. This message was particularly relevant at the time, as many people professed faith in Jesus without genuinely following His teachings.
The Importance of Action in Faith
In verses 22-23, Jesus continues by illustrating the fate of those who, despite performing religious acts such as prophesying, casting out demons, and performing miracles, fail to live according to God's will. He says, "Many will say to me on that day, 'Lord, Lord, did we not prophesy in your name and in your name drive out demons and in your name perform many miracles?' Then I will tell them plainly,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s!'"
This passage serves as a sobering reminder that even seemingly impressive religious deeds are not enough if they are not rooted in genuine faith and obedience. Jesus rejects those whose actions, despite appearing holy, are ultimately self-serving and disconnected from a true relationship with God. The key takeaway here is that actions must stem from a heart aligned with God's purposes, not from a desire for personal gain or recognition.
The Parable of the Wise and Foolish Builders
Jesus concludes this section with a parable that contrasts the wise builder, who builds his house on the rock, with the foolish builder, who builds his house on the sand (Matthew 7:24-27). The wise builder represents those who hear Jesus' words and put them into practice, thereby establishing a firm foundation that can withstand life's challenges. In contrast, the foolish builder symbolizes those who hear the words but do not act on them, resulting in a fragile foundation that collapses under pressure.
The parable underscores the necessity of not just hearing, but doing. Jesus emphasizes that it is not enough to merely listen to His teachings; one must also live them out. The metaphor of building on rock versus sand vividly illustrates the difference between a life grounded in obedient faith and one based on empty words.
Application for Today
The message of Matthew 7:21-27 is as relevant today as it was when Jesus first delivered it. In a world where religious identity is often expressed through words and rituals, this passage calls believers to examine the authenticity of their faith. It challenges us to go beyond lip service and to live lives that reflect the teachings of Christ.
True faith manifests in actions that align with God's will. It requires more than just verbal acknowledgment; it demands a commitment to live according to God's principles, even when it is difficult or inconvenient. The foundation of our spiritual lives must be built on the solid rock of obedience to God's word, rather than the shifting sands of superficial faith.
Conclusion
In conclusion, the teachings of Jesus in Matthew 7:21-27 serve as a powerful reminder that faith is more than words. It is a call to action, a demand for a life lived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As believers, we are encouraged to build our lives on the firm foundation of obedience, ensuring that our faith is not just professed but practiced. Only then can we truly be counted among those wh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7절의 단락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겠지만, 그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설교 전문이 기록된 첫 번째 설교문입니다. 주님께서 산 위에서 모여든 사람에게 설교를 쭉 하시다가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내리시는 거예요.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미 이때 초기부터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 라고 말하여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입으로 나를 부른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거 절대 아니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믿는다는 동사 '피스튜오'가 입증하다 의미를 가진다고 했지 않습니까? 네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네가 행함으로 네 믿음을 입증해야 되는 거야.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야.
불법을 행하는 자들
22절,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러분, 선지자 노릇을 하려면 많았겠죠.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통달한 사람이겠죠.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 자기 딴에는 굉장한 기도의 사람이겠죠. 주여 주여 하고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귀신도 쫓아냅니다. 권능도 행합니다. 요즘 우리는 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23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기도하면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뭔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함인 거예요. 자기 물욕을 위해서, 명예욕을 위해서, 권력욕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사람들, 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겁니다.
1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행하는 자라고 표하십시오. 그리고 행하는 자와 지혜로운 사람을 연결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왜 지혜로운 사람인가? 25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춧돌을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여러분, 쉽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출생은 죽음을 향한 첫 걸음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출생했다는 것은 죽음을 향한 열차 위에 탄 거예요. 어느 역에서 내리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인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건 참으로 허망한 존재입니다. 마치 찢으면 그냥 힘없이 찢어지는 종이 같은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입증하는 것은 이 연약한 종이쪽지에 불과한 나를 반석과도 같은 하나님에게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를 붙이는 거예요. 아무리 태풍이 와도 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무너지지 않아요. 나는 이 종이쪽지 한 장에 불과하지만 내가 붙어 있는 그 반석이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겁니다.
26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행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공표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공표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걸 또 선을 그어 놓으십시오. 연결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인간이라는 게 흙에서 태어나서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끝나 버리는데,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자기를 믿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보세요. 어느 날 죽음의 창수가 몰아쳤을 때 그냥 바람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남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쇠가 있는데, 쇠가 얼마나 단단합니까? 그런데 그 쇠에 녹이 나와요. 쇠에서 분명히 녹이 나왔는데, 쇠에서 나온 녹이 쇠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인간의 욕망이 그렇습니다. 내가 대단히 견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등지고 내 욕망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갈 때, 내 욕망이 나를 갉아먹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창수가 어느 날 불현듯이 나를 덮칠 때, 나는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내 인생은 끝나 버리는 겁니다.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정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등져도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섭리를 성취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살아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손해가 가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살면 나는 망합니다. 나는 죽음의 밥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5장 3절 말씀입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게 무엇입니까? 지킨다는 것은 나의 삶으로 행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뭡니까? 입으로 고백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는 거야, 행하는 거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왜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 했기 때문에 무거웠지요. 이 계명대로 사는 것이 내 인생을 위한 거야. 내 인생을 영원에 접붙이는 길이야. 그걸 알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무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가운데도 돈을 주고 헬스클럽 가서 운동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왜 돈 들여서 시간 들여서 헬스클럽 가서 그 무거운 기구 들고 왜 합니까? 그게 나한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옆집에 있는 아저씨가 말입니다. 어느 날 나를 찾아와서 내가 지금 암에 걸려서 내가 지금 꼼짝을 못 하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더러 운동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나는 운동을 하지 못하니까 당신이 나 대신 운동 좀 해 줘라, 당신이 운동하면 내가 그래도 좀 힘이 오를 것 같다. 여러분, 옆집 아저씨를 위해서 내가 가서 운동을 해보세요. 그 역기가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똑같은 거예요. 요한복음 14장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하지 마라. 내 계명, 내 말씀, 내 로고스를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자, 보세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내 계명을 지키면 나도 그에게 나를 나타낼 거야. 바꾸어 말하면 나도 그와 함께 동행할 거야.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함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겁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니? 내 말을 지켜. 네가 정말 나와 동행하고 싶니? 내 말을 지켜. 그러면 네가 의식하지 않는 삶 가운데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어.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다. 그래서 행함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장 1절이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1장 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데오빌로여, 아까도 말씀드렸죠? 이 데오빌로는 사도행전을 받는 사람 이름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누가복음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 내가 너한테 먼저 써보낸 누가복음의 핵심은 이런 거였어 이러고 보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가 이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을 써 보낼 때 자기가 데오빌로에게 경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 한 사람이 많은지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본 목격자들이 그분이 행하신 것을 저술하는 일이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라.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알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에 떠도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데오빌로 당신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복음서를 써 보냅니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 나온 데오빌로와 누가복음 첫 단락에 나온 데오빌로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도행전 1장 후에 쓴 편지에는 데오빌로라는 이름만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에게 첫 번째 편지를 써 보낼 때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했습니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라.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각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크라티스테'는 로마 제국 시스템에서 총독 이상의 고위 관리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입니다. 평민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이 '각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를 빼고 나면 사도행전에서 벨릭스 총독, 그다음에 베스도 총독 두 사람뿐입니다. 두 사람을 향해서 사람들이 '각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누가복음을 처음 데오빌로에게 써 보낼 때 누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관리였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예의를 다 갖추어서 데오빌로 각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쓸 때는 '각하'를 뺐습니다. 데오빌로 이름만 불렀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의사였다 할지라도 로마 제국 시스템 하에서는 평민입니다. 평민이 자기 임의대로 총독을 빼고 '각하'를 빼고 이름만을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가 써준 누가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영접하게 된 데오빌로 각하가 예수님의 행하심을 모두 보고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따라서 자기 손으로 계급장을 내려놓고 형제 자매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 자매들, 앞으로 나보고 '각하'라고 하지 마세요. 나 그냥 데오빌로라고 부르세요.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어서 인간들과 같아지셨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마음을 너희들에게, 주님의 이 마음을 너희들이 품고 살아라. 예수님을 데오빌로가 만난 거예요. 이 예수님을 만난 데오빌로가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각하' 소리를 듣겠습니까? 여전히 밖에서는 '각하'이지만 예배당 안에 들어와서 자기 스스로 계급장을 떼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를 낮춘 겁니다. 형제 자매들, 나를 데오빌로 형제로 불러 주십시오. 그래서 누가가 그를 두 번째 편지에서는 (누가복음의 시작에서 붙였던 '각하'를 떼고 그냥) 데오빌로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두 단어가 합쳐진 겁니다. '데오'는 '테오스', 하나님입니다. '빌로'는 친구라는 뜻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테오필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두 번째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 두 뜻이 다 됩니다. 그러니까 이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이름이 사도행전 1장 첫머리에 딱 박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데오빌로가 된다. 너희들도 다 이렇게 살아라 그 말입니다.
프랑스어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말을 우리 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 속에 집어넣는다'입니다. 정확하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손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대로 내 손이 움직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에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에, 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해서 육신을 입는 거예요. 그래서 내 삶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데오빌로로 삼아 주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손과 발에 집어넣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오빌로가 되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데오빌로가 되십시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울산 더함 교회를 이 세상을 맑고 밝히시는 당신의 행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각자 우리 자신을 위함인 것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말씀인 것을 마음속에 각인하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살아가는 당신의 아들과 딸들을 이 땅에 당신의 행로로 굳게 세워 주시고 이 공동체를 통해 울산 땅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입으로 예수님을 주여 주여 라고 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단순히 믿음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행동으로 그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왔습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7절까지의 말씀, 흔히 산상수훈의 결론 부분이라 불리는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단순한 언어적 신앙 고백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언어적 고백의 한계
예수님은 "주여, 주여"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중요한 문제를 먼저 지적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주제를 강조합니다: 순종 없는 믿음은 완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문구를 반복하거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따른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합니다. 이 메시지는 특히 그 당시 예수님을 언어적으로만 믿고 실제로는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 중요했습니다.
신앙에서 행함의 중요성
22절과 23절에서 예수님은 예언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기적을 행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의 운명을 묘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은 겉으로 보기에 경건해 보이는 종교적 행위가 진정한 믿음과 순종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행위가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와는 동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거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행함이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진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의 비유
예수님은 이 부분을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건축자와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건축자를 대비하는 비유로 마무리하십니다(마태복음 7:24-27). 지혜로운 건축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삶의 도전 속에서도 견고하게 설 수 있는 기초를 가진 사람으로 비유됩니다. 반면, 어리석은 건축자는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으로, 그 삶이 어려움 속에서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기초를 가진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 비유는 듣는 것뿐만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그분의 가르침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의 비유는 순종하는 믿음과 공허한 말로만 이루어진 신앙의 차이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적용
마태복음 7장 21-27절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종교적 정체성이 종종 말과 의식으로 표현되는 세상에서, 이 구절은 신앙의 진정성을 점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 이상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도전하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단순한 언어적 고백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려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영적 삶의 기초는 빈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라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마태복음 7장 21-27절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내용은 신앙이 단순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상기입니다. 이 말씀은 행동으로 옮기라는 요구이며,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요구입니다. 우리 각자는 말로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신앙을 실천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는 자로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The teachings of Jesus Christ have always emphasized the significance of not just professing faith but living it out through actions. In the passage from Matthew 7:21-27, often referred to as the conclusion of the Sermon on the Mount, Jesus delivers a powerful message that challenges mere verbal acknowledgment of faith and underscores the importance of aligning one's actions with God's will.
The Limitations of Verbal Profession
Jesus begins by addressing a critical issue: not everyone who calls Him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This statement is a direct challenge to those who believe that simply acknowledging Jesus with their lips is sufficient for salvation. In Matthew 7:21, Jesus clearly states, "Not everyone who says to me, 'Lord, Lord,' will enter the kingdom of heaven, but only the on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who is in heaven."
This verse highlights a central theme in Jesus' teachings: faith without obedience is incomplete. The mere repetition of religious phrases or declarations of faith is meaningless if it is not accompanied by a life that reflects God's will. This message was particularly relevant at the time, as many people professed faith in Jesus without genuinely following His teachings.
The Importance of Action in Faith
In verses 22-23, Jesus continues by illustrating the fate of those who, despite performing religious acts such as prophesying, casting out demons, and performing miracles, fail to live according to God's will. He says, "Many will say to me on that day, 'Lord, Lord, did we not prophesy in your name and in your name drive out demons and in your name perform many miracles?' Then I will tell them plainly, 'I never knew you. Away from me, you evildoers!'"
This passage serves as a sobering reminder that even seemingly impressive religious deeds are not enough if they are not rooted in genuine faith and obedience. Jesus rejects those whose actions, despite appearing holy, are ultimately self-serving and disconnected from a true relationship with God. The key takeaway here is that actions must stem from a heart aligned with God's purposes, not from a desire for personal gain or recognition.
The Parable of the Wise and Foolish Builders
Jesus concludes this section with a parable that contrasts the wise builder, who builds his house on the rock, with the foolish builder, who builds his house on the sand (Matthew 7:24-27). The wise builder represents those who hear Jesus' words and put them into practice, thereby establishing a firm foundation that can withstand life's challenges. In contrast, the foolish builder symbolizes those who hear the words but do not act on them, resulting in a fragile foundation that collapses under pressure.
The parable underscores the necessity of not just hearing, but doing. Jesus emphasizes that it is not enough to merely listen to His teachings; one must also live them out. The metaphor of building on rock versus sand vividly illustrates the difference between a life grounded in obedient faith and one based on empty words.
Application for Today
The message of Matthew 7:21-27 is as relevant today as it was when Jesus first delivered it. In a world where religious identity is often expressed through words and rituals, this passage calls believers to examine the authenticity of their faith. It challenges us to go beyond lip service and to live lives that reflect the teachings of Christ.
True faith manifests in actions that align with God's will. It requires more than just verbal acknowledgment; it demands a commitment to live according to God's principles, even when it is difficult or inconvenient. The foundation of our spiritual lives must be built on the solid rock of obedience to God's word, rather than the shifting sands of superficial faith.
Conclusion
In conclusion, the teachings of Jesus in Matthew 7:21-27 serve as a powerful reminder that faith is more than words. It is a call to action, a demand for a life lived in accordance with God's will. As believers, we are encouraged to build our lives on the firm foundation of obedience, ensuring that our faith is not just professed but practiced. Only then can we truly be counted among those wh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27절의 단락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여러분들께서 잘 아시겠지만, 그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설교 전문이 기록된 첫 번째 설교문입니다. 주님께서 산 위에서 모여든 사람에게 설교를 쭉 하시다가 마지막 결론을 이렇게 내리시는 거예요.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미 이때 초기부터 예수님을 보고 주여 주여 라고 말하여 입으로만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입으로 나를 부른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거 절대 아니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믿는다는 동사 '피스튜오'가 입증하다 의미를 가진다고 했지 않습니까? 네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면 네가 행함으로 네 믿음을 입증해야 되는 거야.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거야.
불법을 행하는 자들
22절,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러분, 선지자 노릇을 하려면 많았겠죠. 자기 나름대로 말씀을 통달한 사람이겠죠.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면 자기 딴에는 굉장한 기도의 사람이겠죠. 주여 주여 하고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귀신도 쫓아냅니다. 권능도 행합니다. 요즘 우리는 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이라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23절, 그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면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기도하면서 귀신도 쫓아내고 권능도 행하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뭔가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함인 거예요. 자기 물욕을 위해서, 명예욕을 위해서, 권력욕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사람들, 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인 겁니다.
14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행하는 자라고 표하십시오. 그리고 행하는 자와 지혜로운 사람을 연결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왜 지혜로운 사람인가? 25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춧돌을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여러분, 쉽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출생은 죽음을 향한 첫 걸음이 아닙니까? 왜냐하면 영원히 사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출생했다는 것은 죽음을 향한 열차 위에 탄 거예요. 어느 역에서 내리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인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건 참으로 허망한 존재입니다. 마치 찢으면 그냥 힘없이 찢어지는 종이 같은 거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행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으로 입증하는 것은 이 연약한 종이쪽지에 불과한 나를 반석과도 같은 하나님에게 갖다 붙이는 것입니다. 내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나를 붙이는 거예요. 아무리 태풍이 와도 나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내 인생은 무너지지 않아요. 나는 이 종이쪽지 한 장에 불과하지만 내가 붙어 있는 그 반석이 영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는 겁니다.
26절,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 행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공표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공표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그걸 또 선을 그어 놓으십시오. 연결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등지는 사람이 왜 어리석은 사람인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인간이라는 게 흙에서 태어나서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끝나 버리는데,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자기를 믿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보세요. 어느 날 죽음의 창수가 몰아쳤을 때 그냥 바람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남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쇠가 있는데, 쇠가 얼마나 단단합니까? 그런데 그 쇠에 녹이 나와요. 쇠에서 분명히 녹이 나왔는데, 쇠에서 나온 녹이 쇠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인간의 욕망이 그렇습니다. 내가 대단히 견고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내가 하나님을 등지고 내 욕망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갈 때, 내 욕망이 나를 갉아먹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창수가 어느 날 불현듯이 나를 덮칠 때, 나는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내 인생은 끝나 버리는 겁니다.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정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굉장히 어렵게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아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내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등져도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당신의 섭리를 성취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살아도 하나님에게는 아무 손해가 가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살면 나는 망합니다. 나는 죽음의 밥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5장 3절 말씀입니다.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게 무엇입니까? 지킨다는 것은 나의 삶으로 행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뭡니까? 입으로 고백하는 것인가요? 아니요, 그 하나님의 계명, 말씀을 지키는 거야, 행하는 거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왜 지금까지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 했기 때문에 무거웠지요. 이 계명대로 사는 것이 내 인생을 위한 거야. 내 인생을 영원에 접붙이는 길이야. 그걸 알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무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가운데도 돈을 주고 헬스클럽 가서 운동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왜 돈 들여서 시간 들여서 헬스클럽 가서 그 무거운 기구 들고 왜 합니까? 그게 나한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옆집에 있는 아저씨가 말입니다. 어느 날 나를 찾아와서 내가 지금 암에 걸려서 내가 지금 꼼짝을 못 하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더러 운동을 해야 된다고 하는데 나는 운동을 하지 못하니까 당신이 나 대신 운동 좀 해 줘라, 당신이 운동하면 내가 그래도 좀 힘이 오를 것 같다. 여러분, 옆집 아저씨를 위해서 내가 가서 운동을 해보세요. 그 역기가 무거워서 들어 올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똑같은 거예요. 요한복음 14장 21절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입으로 고백하지 마라. 내 계명, 내 말씀, 내 로고스를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자, 보세요. 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로고스 예수 그리스도,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리고 내 계명을 지키면 나도 그에게 나를 나타낼 거야. 바꾸어 말하면 나도 그와 함께 동행할 거야.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함이라는 것을 주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겁니다. 네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니? 내 말을 지켜. 네가 정말 나와 동행하고 싶니? 내 말을 지켜. 그러면 네가 의식하지 않는 삶 가운데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어.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다. 그래서 행함의 사람이 되어야 된다는 것을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1장 1절이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1장 1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데오빌로여, 아까도 말씀드렸죠? 이 데오빌로는 사도행전을 받는 사람 이름입니다.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누가복음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 내가 너한테 먼저 써보낸 누가복음의 핵심은 이런 거였어 이러고 보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가가 이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을 써 보낼 때 자기가 데오빌로에게 경의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을 들어보십시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 한 사람이 많은지라.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본 목격자들이 그분이 행하신 것을 저술하는 일이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라.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알게 하려 함이로라. 세상에 떠도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데오빌로 당신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내가 이 복음서를 써 보냅니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장에 나온 데오빌로와 누가복음 첫 단락에 나온 데오빌로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나요? 사도행전 1장 후에 쓴 편지에는 데오빌로라는 이름만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에게 첫 번째 편지를 써 보낼 때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했습니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라.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이 '각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크라티스테'는 로마 제국 시스템에서 총독 이상의 고위 관리에게만 적용되는 호칭입니다. 평민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이 '각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은 누가복음에서 데오빌로를 빼고 나면 사도행전에서 벨릭스 총독, 그다음에 베스도 총독 두 사람뿐입니다. 두 사람을 향해서 사람들이 '각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누가가 누가복음을 처음 데오빌로에게 써 보낼 때 누가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고의 관리였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예의를 다 갖추어서 데오빌로 각하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쓸 때는 '각하'를 뺐습니다. 데오빌로 이름만 불렀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의사였다 할지라도 로마 제국 시스템 하에서는 평민입니다. 평민이 자기 임의대로 총독을 빼고 '각하'를 빼고 이름만을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가 써준 누가복음서를 읽고 예수를 영접하게 된 데오빌로 각하가 예수님의 행하심을 모두 보고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따라서 자기 손으로 계급장을 내려놓고 형제 자매를 만난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 자매들, 앞으로 나보고 '각하'라고 하지 마세요. 나 그냥 데오빌로라고 부르세요.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 마음을 품으라 말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본체가 같으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낮추어서 인간들과 같아지셨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마음을 너희들에게, 주님의 이 마음을 너희들이 품고 살아라. 예수님을 데오빌로가 만난 거예요. 이 예수님을 만난 데오빌로가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각하' 소리를 듣겠습니까? 여전히 밖에서는 '각하'이지만 예배당 안에 들어와서 자기 스스로 계급장을 떼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자기를 낮춘 겁니다. 형제 자매들, 나를 데오빌로 형제로 불러 주십시오. 그래서 누가가 그를 두 번째 편지에서는 (누가복음의 시작에서 붙였던 '각하'를 떼고 그냥) 데오빌로여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이 두 단어가 합쳐진 겁니다. '데오'는 '테오스', 하나님입니다. '빌로'는 친구라는 뜻도 있지만,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테오필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두 번째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 두 뜻이 다 됩니다. 그러니까 이 데오빌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의 이름이 사도행전 1장 첫머리에 딱 박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데오빌로가 된다. 너희들도 다 이렇게 살아라 그 말입니다.
프랑스어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말을 우리 말로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행함 속에 집어넣는다'입니다. 정확하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손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대로 내 손이 움직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발에 집어넣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에, 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해서 육신을 입는 거예요. 그래서 내 삶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데오빌로로 삼아 주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손과 발에 집어넣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오빌로가 되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데오빌로가 되십시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울산 더함 교회를 이 세상을 맑고 밝히시는 당신의 행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라 우리 각자 우리 자신을 위함인 것을 잊지 말게 해주십시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말씀인 것을 마음속에 각인하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살아가는 당신의 아들과 딸들을 이 땅에 당신의 행로로 굳게 세워 주시고 이 공동체를 통해 울산 땅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