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한 여러분은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모두 ‘사랑의 교회’ 교인입니다. 2011년 이 교회가 창립될 때, 설립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세상에 전하며 그 사랑의 통로로 쓰임 받자는 뜻에서 ‘사랑의 교회’라 이름 지었을 것입니다. 이후 등록한 분들도 의식하든 아니든, 이 교회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사랑의 교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행정상 주소는 부산 사하구 낙동대로 몇 번지일까요? 그 주소가 이 건물을 가리킨다면, 여러분이 주일마다 “교회 간다, 사랑의 교회 간다”라고 할 때 떠오르는 게 이 건물이라면, 다시 묻겠습니다. 천재지변으로 이 건물이 사라진다면 ‘사랑의 교회’도 없어지는 걸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건물이 백 번 무너져도 ‘사랑의 교회’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는 제 개인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 고린도전서 1장 2절에서 교회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즉,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또한 바울은 또 “각처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을 교회라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번듯한 예배당도, 제도도 없었지만, 그들은 집집마다 모여 ‘형제, 자매’라 부르며 예배했고, 그들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교회 가자” 할 때 건물이 떠오른다면 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곳은 ‘사랑의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이 예배하는 ‘예배당’ 일뿐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부산 사랑의 교회 예배당”이라 해야 합니다.
교회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교회’가 되겠다고 모였으니, 사랑을 실천할 주체도 여러분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그 고린도교회에 편지들을 써 보냈는데, 그 편지들이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라고 불립니다. 그 편지 속에서 바울이 ‘교회’가 무엇인지를, 오해할 수 없는 단어로 정확하게 정의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 말씀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특정 건축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달리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 거듭난 사람들이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계속됩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를, 인근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돌려가며 읽었는데, 그 지역에 있는,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곧, 구원받아서 삶으로 주님께 응답하는 사람들이, 그 지역의 교회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고린도에는 번듯한 건축물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처럼 번듯한 제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면서,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분명히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던 고린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그들이 바로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드렸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주일 아침에 “교회 가자”고 할 때 건물이 떠오른다면,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이 건물은 ‘사랑의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 위한 목적의 ‘예배당’ 일뿐입니다. 그래서 정확히 간판을 붙이려면 “부산 사랑의 교회 예배당”이라고 표기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인들이 “예배당 간다”라고 말하지, “교회 간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왜? 교회는 바로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교회’가 되겠다고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을 실천해야 할 주체는, 이 건물이나 교회 제도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교회가 예배하고, 성경 공부하고, 조직을 짜고, 미래에 대한 전략을 세우고, 전도하는 것은 모든 교회가 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것만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사랑을 실천하겠다”라고, 우리 교회를 ‘사랑의 교회’라고 이름 붙인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우리가 사랑의 교회다”라고, 교회 이름을 ‘사랑의 교회’라고 명명해 놓고도, 일상에서 여러분의 삶이 사랑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면, 입만 열면 ‘민족, 나라’를 외치지만 사실은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있는 어떤 정치인들처럼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사랑의 교회’, 그 자체로서 과연 이 세상 삶 속에서 교회 이름 그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 아니면 무늬만 ‘사랑의 교회’인가. 여러분의 실체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랑장이 말하는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도 바울이 썼는데, 흔히 ‘사랑장’이라고 부르죠. 성경이 가지고 있는 문헌 중 그 내용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장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어느 위대한 대문호가 정의한다 하더라도, 이 사랑장에 비하면 필적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랑장은 사랑의 필수성과 특성, 그리고 사랑의 영원성을 강조하면서도 완벽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사랑의 교회’라면, 즉 내가 명목상인지, 명실상부한 교회인지를 이 사랑장에 비추어 보고, 어떤 점을 고쳐야 할지 이 사랑장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사랑의 교회’라면 참된 사랑을 익혀야 할 텐데,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오늘 본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 나는 구리 = 소음
1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여기서 ‘사람의 방언’이라고 하는 것은 타 지역 언어를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은 주로 히브리어를 썼고, 로마 사람들이 쓰는 라틴어를 몰랐죠. 그런데 그 라틴어를 배워서 구사할 줄 안다면, 그건 다른 지역 방언을 하는 겁니다. 또 ‘천사의 말’이라는 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이 방언을 하는데,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교통 한다는 것이죠.
요즘 말로 풀이한다면, 미국말도 할 줄 알고, 프랑스말도 할 줄 알고, 이태리말도 할 줄 알고, 일본말도 할 줄 알고, 스페인말도 할 줄 알고, 그래서 여러 외국어로 소통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천사의 방언까지 한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당시에 관악기를 청동으로 만들어서 연주했는데, 그게 소음을 일으켰죠. 마찬가지로 사랑이 없으면, 내가 방언을 하든 외국어를 많이 하든,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꽹과리나 시끄러운 관악기의 소음일 뿐이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예배당에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찬송하고 기도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이 이 예배당 문을 나가서 전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예배당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러분이 부르는 찬송 소리와 기도 소리가 소음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입만 열면 ‘사랑’한다는 사람들, 오늘도 손만 들면 ‘주여!’ 한다”라고 들릴 테니까요.
예수께 붙어있지 않은 능력자와 자선가는 티끌에 불과합니다
2절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섭리의 비밀에 통달했고, 거기에 더해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지녔다고 합시다. 쉽게 말해서 현대판 모세요, 현대판 여호수아요, 현대판 엘리야가 될 수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신령한 척, 믿음이 대단한 척 보여도,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붙어 있지 않다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지 않은 사람은, 그가 행하는 어떤 결과도 한 줌의 티끌이 될 뿐이니까요.
3절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구제를 위해 내 전 재산을 쾌척하고, 내 몸을 불사르듯 헌신한다고 하면 대단한 신앙인 아닙니까?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방금 말한 것처럼 사랑이신 예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에게서 떨어진 사람이 전 재산을 쾌척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듯 헌신한다고 해도, 결국 자기 과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께 붙어 있지 않으니, 자기를 과시하면 할수록 무의미하게 자기 인생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결국 초라하게 무너지고, 공동묘지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시기, 자랑,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4절부터 설명해 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여기서 오래 참고라는 것은, 헬라어로 ‘마크로 뒤미아(makrothymia)’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내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 내게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를 억제하고 참고 인내하는 모든 형태의 관용을 의미합니다. 사랑의 출발점이 ‘참는 것’이라는 겁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감정, 분노, 독선적인 주장으로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짓밟거나 부정해 버립니다. 하지만 스스로 참는 사람, 즉 ‘마크로 뒤미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수용하고 존중하면서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스스로 ‘사랑의 교회’를 이룬다고 하는 여러분은 오래 참는 사람들입니까?
계속해서 4절입니다. “사랑은 온유하며.”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때의 ‘온유’와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온유하다’에서 쓰인 단어는 헬라어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셨을 때의 온유는 ‘프라우테스(prautés)’인데, 야생동물의 품성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야생마는 거칠어서 사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야생마를 포획해 와서 조련사가 훈련시키면, 야생마의 거친 성품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그 성품을 자기만을 위해 쓰지 않고, 주인이 가자는 대로 쓰게 됩니다. 이게 바로 ‘프라우테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은 온유하다”라고 할 때의 온유는 ‘크레유오마이(chréuomai)’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말로 하면 “친절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오래 참을 때 친절할 수 있습니다. 참지 못하면 결코 친절할 수 없습니다. 내가 상대를 볼 때,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분노를 터뜨리고 감정을 폭발시켜 버리면, 그다음부터는 관계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참는 사람이 친절한 사람이 되고, 그래서 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교회’를 이루고 있는 여러분은 가족끼리, 교인들끼리, 또 일터에서나 예배당 주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행동합니까?
4절, “시기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여기서 사랑을 설명하면서 두 가지 방법을 쓰는데요. 긍정적으로 “사랑은 ~~ 이다”라는 표현과, 부정적으로 “사랑은 ~~ 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입니다. 사랑을 깨뜨리는 첫 번째 원인이 시기심입니다. 헬라어로 ‘젤로(zelóo)’인데, 남이 잘되는 것을 배 아파하고, 그걸 못 견디고 미워하고 불타는 마음. 그것은 사랑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절대로 시기하지 않는 마음과 같습니다. 시기심은 잘못된 경쟁의식에서 발로 합니다. 그러니 상대를 경쟁상대로 삼아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매여 있으면, 결코 사랑할 수 없는 겁니다.
이어서 4절,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리말로 ‘자랑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는 ‘페뤽세우오마이(perpereuomai)’인데, ‘과장한다’는 뜻입니다. 자랑이라는 것은, 상대에게 칭찬받고 싶은 열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모든 자랑은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과장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좀 낫다고 생각하면, 내 우월성을 과장해서 말하고, 열등감에 쌓인 사람도 자기가 행한 일을 과장해서 이야기합니다. 자랑하면 할수록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일을 자랑하고자 할 때, 그 일에 관여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돋보이게 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국 교회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헌금은 말 그대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주보에 헌금을 드린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까? 그게 사랑입니까, 자랑입니까? 저는 오늘 부산 사랑의 교회 예배당에 처음 와서, 주보를 자세히 못 봤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교회마다 헌금한 사람 이름을 주보에 적는 풍습을 두고 한번 생각해 보자는 말입니다. 또 한국 교회 대부분이, 자신들이 돕고 있는 미자립 교회나 선교사 이름을 주보에 크게 실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아니면 자랑입니까? 부모가 자식이 좋은 학교 갈 수 있도록 애쓰고 돈을 쓴 뒤에, 곳곳에 “내가 이렇게 썼다”라고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게 진짜 사랑이니까요. 한국 교회가 자기 교회가 돕는 미자립 교회나 선교사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말없이 돕기만 하면 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면 되지요. 왜냐하면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4절,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교만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푸시오이(pussyoo)’입니다. 풀무질을 해서 부풀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본래 모습보다 자기를 부풀려서 높이는 거죠. 실제보다 더 크게 스스로를 여겨, 자신이 대단하다고 착각합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사랑의 대상에게 먼저 나를 맞춰 주는 것이지, 나를 부풀려 “너희가 다 나에게 맞춰라!”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가 부산 사랑의 교회에서 봉사 제일 많이 하고, 내가 기도 제일 열심히 하고, 헌금 가장 많이 했다”라고 스스로를 부풀린다면, 그는 명목상 ‘사랑의 교회’ 일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참된 사랑의 교회일 수 없습니다.
무례하여 상대의 존경을 빼앗거나 이기적이거나 성내거나 악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5절입니다.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무례히 행한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아스케모네오(askémoneo)’입니다. 이 말은, 상대에게 돌아가야 할 칭찬과 존경, 명예를 돌려주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큰 무례입니다. 사랑은 잘한 사람에게 그가 받아야 할 칭찬과 명예를 아낌없이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부풀린 사람은, 주위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박수를 받으면, “그거 내가 도와줘서 된 거야”라며 상대가 받을 존경을 가로챕니다. 예를 들어 이 교회를 11년 전에 세우신 분들이 계시고, 나중에 등록한 분들이 있을 텐데, 나중에 들어온 분들이 먼저 교회를 세운 분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없었으면 이 교회가 없었겠죠”라며 존경을 돌려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례한 것입니다. 반대로, 초창기에 교회를 세웠던 분들이 “우리가 이 교회 세웠습니다. 후에 들어온 여러분보다 우리가 더 위입니다”라고 한다면, 그 역시 서로에게 돌려야 할 존중과 명예를 주지 않는 것이므로, 결코 사랑의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5절,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경 원문을 보면, 여기 ‘유익’ 앞에 ‘1’이라고 표시되어 있고, 아래쪽 각주를 보면 “헬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득만 말하는 게 아니라, 나의 기분, 감정, 이익 등 나와 관련된 어떤 것이든 집요하게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배만 부르면 되고, 내 기분만 좋으면 되고, 나만 손해 안 보면 된다는 식으로는 절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너무 이기적이다.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자식 좋은 학교 보내고, 남편 사업 잘되고 돈 더 벌고,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 가고, 큰 차 사고… 그게 전부 아니냐”라고 비판합니다. 자기 것만 구한다고 보이니까, 감동이 없고, 전혀 사랑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어지는 “성내지 아니하며.”
여기서 말하는 ‘성내다’는, 불의를 보고 내는 거룩한 분노가 아닙니다. 헬라어로 ‘파록시노(paroxyno)’인데, ‘발작적인 분노’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전혀 화낼 상황이 아닌데도, 순간 욱 해서 확 폭발하는 것 말이죠. 자기 것만 챙기다 보니, 조금이라도 손해 보거나 기분이 나빠지면 발작적으로 분노해 버리는 겁니다. 그 순간에는 날카로운 흉기를 든 것처럼 말이 튀어나옵니다. 상대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망쳐 버립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렇게 발작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사시는 분이 계시다면, 정말 주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허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꼭 필요합니다.
5절,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여기서 ‘악’이란, 어떤 형태로든 공동선을 해치는 것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헬라어로 ‘로기조마이(logizomai)’, 곧 ‘심사숙고하고 계산한다’는 뜻입니다. 공동선을 해치는 악을 심사숙고하고, 그것으로 어떻게 하면 더 큰 이득을 볼까 계산하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 이득이 더 크면,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많아져도 상관하지 않는 거니까요. 그래서 불법, 탈법을 서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공동선을 세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공동선을 해치고 자신만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람입니까?
불의를 반기지 않고 진리를 실천하여 살아내는 것을 기뻐합니다
6절입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의를 행할수록 많은 사람이 손해를 보고 고통받기 때문입니다. 대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하는데, 여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헬라어로는 ‘신카이로(syncairo)’인데, 단순히 ‘진리를 기뻐한다’가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배워서 ‘아, 좋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을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진리 자체를 기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성경 공부에 사람들이 모이고, 그걸 배울 때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막상 밖에 나가 그 진리를 살아내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건 ‘진리를 기뻐하는 것’이지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를 실제로 살아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공부를 100번 해도, 집에 가서 미운 남편이나 미운 아내, 미운 사람을 예쁘게 보지 못한다면, 그건 아직 진리를 살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참된 ‘사랑의 교회’는 진리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으며, 미래의 소망을 사랑하는 태도로 상대 아래에서 이해하며 받쳐줍니다
7절입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여기서 ‘참는다’는 것은 헬라어로 ‘스테고(stegó)’인데, ‘덮어준다’는 뜻입니다. 명사형 ‘스테게(stegé)’는 ‘지붕’입니다. 사랑이란, 상대의 허물과 부족함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지붕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가 술에 취해 하체가 드러난 채 곯아떨어졌을 때, 두 아들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보고 거꾸로 걸어 들어가 이불을 덮어 주고, 혹시 그걸 다시 볼까 봐 엉덩이로 뒤돌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아버지를 위한 지붕이 되어 준 겁니다. 허물을 본다고 해서, 허물이 없다고 하는 건 아닙니다. 허물을 덮어준다는 것은 그 허물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허물을 보고 즉시 떠벌리는 건, 그 허물에 내가 사로잡혔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허물을 보고도 그것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의 교회’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지붕이 되어 줍니다.
7절, “모든 것을 믿으며.”
여기서 ‘믿는다’는 동사는 ‘피스튜오(pisteuó)’,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라고 할 때의 동사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수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실 수 있다. 비록 지금은 부족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새롭게 빚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내가 그 사람을 내 뜻대로 조종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남편이나 아내, 자녀, 부모조차도 온전히 사랑하기 힘듭니다. “왜 이 사람이 내 옆에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셨지? 왜 이 아이를 우리 가정에 보내셨지?”라는 믿음이 있어야,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의 교회’는 믿음의 사람들, 진짜 예수쟁이들의 모임입니다.
이어서 “모든 것을 바라고.”
여기서 말하는 바란다는 건, 내 욕구를 성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헬라어 ‘엘피조(elpizō)’, 즉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혹은 미워한다고 할 때, 그 사람의 현재 모습만 바라보고 판단하면, 현재가 미우면 그냥 밉고, 예쁘면 예쁘게 보이지요. 그런데 사람의 현재 모습 안에는, 미운 모습도 있지만 예쁜 모습도 있고, 또 미래의 모습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 부족함을 발판 삼아, 앞으로 5년, 10년, 15년 뒤에 점점 새롭게 빚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가 그 사람을 대하는 눈초리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사랑은 현재만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보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미래까지 사랑하기에, 지금 내게 고통을 안겨주어도,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바꿔 가실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 사랑할 수 있는 겁니다. 참된 ‘사랑의 교회’는 욕구의 사람들이 아니라 소망의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7절,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기서 ‘견딘다’라는 것은 헬라어로 ‘휘포메노(hypomenō)’인데, ‘휘포(hypo)’는 ‘~아래’라는 뜻의 전치사이고, ‘메노(meno)’는 ‘서 있다,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위에 올려놓고 내려다보며 “너 왜 이것도 못해? 빨리 고쳐!”라고 하지만, 사랑은 그 사람 아래로 들어가, 그 자리를 같이 지켜 주는 것입니다. 영어 ‘이해하다(understand)’에서 ‘under’와 ‘stand’가 결합되어 있듯, 그 사람을 아래에서 받쳐 주며 이해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under-stand’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각 교회가 교회의 이름에 걸맞게 살아갑시다
여기까지 성경이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사랑을 살펴봤습니다. ‘사랑의 교회’가 되겠다고 교회 이름을 정한 여러분, 여러분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과연 명실상부한 ‘사랑의 교회’였습니까, 아니면 명목상 ‘사랑의 교회’였습니까?
한국 교회가 오래전부터 ‘교회 개혁’을 이야기해 왔습니다만, 개혁되지 않고 있습니다. 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가 자기들이 내건 신앙고백, 혹은 교회 이름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이름을 ‘사랑의 교회’라고 붙이고 하나님께 신앙고백 드렸다면, 실제 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교회 개혁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살아갈 때, 이 교회는 대한민국 교회를 개혁시키는 마중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면, 주님은 여러분을 통해 이 사회를 밝혀 주실 겁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 그런 교회를 자신의 통로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의 주님, 주님께서 죽임 당하심으로 우리가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그 크신 사랑을 이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삶으로 살아 내겠노라 결단하고, 스스로 ‘사랑의 교회’가 되기를 자처한 이들이 지금 머리를 숙였습니다. 부디 이분들의 결단을 열납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분들이 날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장을 거울삼아 하루를 시작하고, 사랑장 말씀 앞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게 해 주십시오. 사랑장에 기록된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분들의 삶 속에서 모두 ‘육화’ 되게 하셔서, 이분들의 삶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사방으로 스며들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명실상부하게 ‘사랑의 교회’를 일구는 이분들의 삶이, 한국 교회 회복의 마중물이 되게 하시고, 이분들을 통로로 삼아 주님께서 이 세상을 더 밝게 비추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사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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