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기쁨의 소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예수님)께서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향해 전달해 주신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우리가 깨우치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전하신 진리를 곰곰이 묵상하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삶을 더 아름답게 이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 안에 태어나 막막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갈피를 못 잡고 살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허무와 허탈감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본질, 이 우주의 본질을 알려 주십니다. 이 우주의 본질에는 “한없는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오늘날만의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 생전에 이미 사람들이 던졌던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고 기적도 행하시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분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루는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예언자라 합니다,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등등의 대답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그때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한 인간이시지만 보통의 인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경배받으실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자신을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정통적 견해이며, 성경을 통해 가장 지지를 받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만 해서는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라는 것이,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왜 기쁨의 소식인가?”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향해 전달해 주신 진리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 진리를 깨우치면 삶을 더 아름답게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예수님의 ‘생각’ 즉,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 사람(예: 김학철)은 누구냐?”라고 물으면, 직업을 말할 수도 있고, 성별이나 나이를 말할 수도 있으며, 외모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라고 말해 준다면, 저는 그 이야기를 해 주는 분이 더 고맙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지위나 외모도 나의 정체성이지만, 내 정체성의 핵심에는 “내가 가장 깊이 믿고, 생각하고, 동의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지금까지 예수님의 정체를 말해 왔지만, 오늘은 “예수님이 평생 가르치고 보여 주신 가장 핵심적인 생각, 예수님의 고갱이는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블레즈 파스칼이라는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가 남긴 글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파스칼은 무한한 우주를 생각했습니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광대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광대한 우주에서 매우 협소한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내가 태어나기 전과 죽고 난 뒤로 이어지는 시간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그에 비하면 내가 살아 있는 이 시간은 아주 작은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왜 하필이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습니다. 이 질문에 쉽게 답을 찾기 어려우며, 우주의 무한함을 떠올릴수록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가능케 하신 분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단순한 두려움이나 막막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우주의 중심, 즉 이 우주를 가능케 하시는 분의 ‘본질’에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요즘은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 대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혹은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눠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문화권에서 이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와 같은 극도로 무례하고 불손한 발언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으로 받은 재산을 처분해 돈으로 바꾸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건 싫고, 아버지 재산만 필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상 “아버지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 채로 집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다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이 둘째 아들은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돼지가 먹는 열매조차 얻어먹기 힘든 처지가 됩니다.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구나”라며 뉘우치기도 전에, 먼저 한탄하는 말은 “우리 아버지 집에서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생겼구나”입니다. 이는 회개라기보다, 배가 고프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그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말을 연습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먼 곳에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보고 달려 나갑니다. 당시 가부장제 문화에서 아버지가 달려 나간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단호히 권위를 지켜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아들이 준비해 온 고백을 듣지도 않고 곧바로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을 가져오라고 시킵니다. 좋은 옷과 반지는 그의 신분, 재산권을 완전히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이며, 신발을 신긴 것은 그를 종이 아닌 아들로 다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이때 첫째 아들이 돌아오다가 난데없는 잔치 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묻자, 둘째 아들이 돌아와 잔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기를 꺼립니다. 아버지는 또다시 집 밖으로 나가 첫째 아들을 설득합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반응을 보면, 둘째 아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여러 해를 함께 지내왔는데,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따집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으로 먼 나라에서 친구들과 방탕하게 살았고, 첫째 아들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친구들과 염소 잡아 즐기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결국 둘 다 아버지가 아니라 재산과 자기 즐거움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괴하면서도 놀라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바로 이 우주의 핵심, 즉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근본적인 마음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이 우주의 본질이 “한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성탄을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한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왔다”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기에, 우리가 또한 그 사랑을 전하며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드러내는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어 길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당시에 옷은 그 사람의 신분, 인종, 계급을 알 수 있는 표식이었는데, 완전히 벗겨진 상태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그를 보고도 지나친 것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줍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단으로 경멸했지만, 정작 이 사마리아인은 옷이 벗겨져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도 피해자를 보고 “이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내 이웃”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옷이 벗겨졌다는 이유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저 사람은 누군지 몰라” 하고 피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저 사람은 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야”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신분, 인종, 계급 등의 장벽을 넘어 ‘한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지혜와 따뜻한 가슴, 그리고 때로는 혁명적인 메시지를 주신 분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이 누구신가, 왜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본질이 ‘한없는 사랑’임을 알려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은 존재이며, 동시에 그 사랑을 서로에게 전하며 살 수 있는 이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한없는 사랑’이라는 생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작품으로, 저는 많은 분이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떠올립니다. 시의 첫 구절에 “하늘을 우러러”라고 나오는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한없는 사랑의 공간”을 우러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구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에서 “별”도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이 우주를 가득 채운 한없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신앙이 깊었기에, 그의 「서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성탄의 의미를 잘 전해 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예배를 드리고, 가족들의 대소사를 돌아보며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굳이 그렇게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과 장소, 그리고 ‘낮은’ 신분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보고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보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기쁨의 소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예수님)께서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향해 전달해 주신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우리가 깨우치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전하신 진리를 곰곰이 묵상하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삶을 더 아름답게 이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 안에 태어나 막막함과 두려움을 느끼고, 갈피를 못 잡고 살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허무와 허탈감에 시달리고, 어떤 때는 고통 가운데 몸부림치며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우리의 삶의 본질, 이 우주의 본질을 알려 주십니다. 이 우주의 본질에는 “한없는 사랑”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오늘날만의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 생전에 이미 사람들이 던졌던 물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고 기적도 행하시니, 사람들은 예수님을 두고 “이분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루는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예언자라 합니다,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등등의 대답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그때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한 인간이시지만 보통의 인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경배받으실 분이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자신을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으로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정통적 견해이며, 성경을 통해 가장 지지를 받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만 해서는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고 참 인간이라는 것이,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유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크리스마스가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왜 기쁨의 소식인가?”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분이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향해 전달해 주신 진리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 진리를 깨우치면 삶을 더 아름답게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오늘은 예수님의 ‘생각’ 즉,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 사람(예: 김학철)은 누구냐?”라고 물으면, 직업을 말할 수도 있고, 성별이나 나이를 말할 수도 있으며, 외모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라고 말해 준다면, 저는 그 이야기를 해 주는 분이 더 고맙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지위나 외모도 나의 정체성이지만, 내 정체성의 핵심에는 “내가 가장 깊이 믿고, 생각하고, 동의하며 실천하고자 하는 가치”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지금까지 예수님의 정체를 말해 왔지만, 오늘은 “예수님이 평생 가르치고 보여 주신 가장 핵심적인 생각, 예수님의 고갱이는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결론적으로 두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로, 블레즈 파스칼이라는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가 남긴 글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파스칼은 무한한 우주를 생각했습니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광대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 광대한 우주에서 매우 협소한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 내가 태어나기 전과 죽고 난 뒤로 이어지는 시간은 무한에 가깝습니다. 그에 비하면 내가 살아 있는 이 시간은 아주 작은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왜 하필이면 나는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있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품습니다. 이 질문에 쉽게 답을 찾기 어려우며, 우주의 무한함을 떠올릴수록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가능케 하신 분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단순한 두려움이나 막막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우주의 중심, 즉 이 우주를 가능케 하시는 분의 ‘본질’에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요즘은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 대신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 혹은 “아버지의 사랑의 비유”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나눠 달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문화권에서 이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습니다”와 같은 극도로 무례하고 불손한 발언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재산을 나누어 줍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으로 받은 재산을 처분해 돈으로 바꾸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사는 건 싫고, 아버지 재산만 필요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사실상 “아버지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 채로 집을 떠난 것입니다.
그러다 그 나라에 큰 기근이 들어, 이 둘째 아들은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는데, 돼지가 먹는 열매조차 얻어먹기 힘든 처지가 됩니다.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구나”라며 뉘우치기도 전에, 먼저 한탄하는 말은 “우리 아버지 집에서는 먹을 것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생겼구나”입니다. 이는 회개라기보다, 배가 고프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수준입니다. 그는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말을 연습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직도 먼 곳에서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보고 달려 나갑니다. 당시 가부장제 문화에서 아버지가 달려 나간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단호히 권위를 지켜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달려가서 아들을 끌어안고, 아들이 준비해 온 고백을 듣지도 않고 곧바로 좋은 옷과 반지, 신발을 가져오라고 시킵니다. 좋은 옷과 반지는 그의 신분, 재산권을 완전히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이며, 신발을 신긴 것은 그를 종이 아닌 아들로 다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이때 첫째 아들이 돌아오다가 난데없는 잔치 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묻자, 둘째 아들이 돌아와 잔치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기를 꺼립니다. 아버지는 또다시 집 밖으로 나가 첫째 아들을 설득합니다.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런데 첫째 아들의 반응을 보면, 둘째 아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여러 해를 함께 지내왔는데,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있습니까?”라고 따집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으로 먼 나라에서 친구들과 방탕하게 살았고, 첫째 아들은 집 안에 있으면서도 친구들과 염소 잡아 즐기는 것이 관심사였습니다. 결국 둘 다 아버지가 아니라 재산과 자기 즐거움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기괴하면서도 놀라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아버지”가 바로 이 우주의 핵심, 즉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근본적인 마음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이 우주의 본질이 “한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성탄을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한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왔다”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기에, 우리가 또한 그 사랑을 전하며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드러내는 비유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도 다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되어 길에 버려져 있었습니다. 당시에 옷은 그 사람의 신분, 인종, 계급을 알 수 있는 표식이었는데, 완전히 벗겨진 상태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그를 보고도 지나친 것은,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 대한 두려움과 불편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도와줍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단으로 경멸했지만, 정작 이 사마리아인은 옷이 벗겨져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도 피해자를 보고 “이 사람은 도움이 필요한 내 이웃”이라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옷이 벗겨졌다는 이유로 유대인 지도자들은 “저 사람은 누군지 몰라” 하고 피했지만, 사마리아인은 “저 사람은 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야”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신분, 인종, 계급 등의 장벽을 넘어 ‘한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지혜와 따뜻한 가슴, 그리고 때로는 혁명적인 메시지를 주신 분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이 누구신가, 왜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가?”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의 본질이 ‘한없는 사랑’임을 알려 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은 존재이며, 동시에 그 사랑을 서로에게 전하며 살 수 있는 이들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한없는 사랑’이라는 생각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작품으로, 저는 많은 분이 사랑하는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떠올립니다. 시의 첫 구절에 “하늘을 우러러”라고 나오는데, 이는 단순히 물리적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근본적인 “한없는 사랑의 공간”을 우러른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 구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에서 “별”도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이 우주를 가득 채운 한없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결심으로 이어집니다. 윤동주 시인은 기독교 신앙이 깊었기에, 그의 「서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분들에게도 성탄의 의미를 잘 전해 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거창한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예배를 드리고, 가족들의 대소사를 돌아보며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굳이 그렇게 열악하고 어려운 환경과 장소, 그리고 ‘낮은’ 신분을 택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탄생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금 곱씹어 보고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