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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서

Others/이것 저것 2014. 8. 15.

한 동창 친구가 초등 밴드에 올린 글입니다.

가수 정훈희의 "꽃밭에서"라는 노래 가사는 본래 조선 세종때 이조참판을 지낸 최한경 이란 분이 성균관 유생 으로" 있을 때 지은 시라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사모했던 고향의 이웃처자 박소저를 
그리워하며 자신의 일생을 기록한 반중일기(泮中日記)에 수록된 작품이라고 하네요. 

坐中花園 (좌중화원) 
꽃밭에 앉아서  

膽波夭嶪 (담파요업) 
꽃잎을 보네  

兮兮美色 (혜혜미색) 
고운 빛은  

云河來矣 (운하래의) 
어디에서 왔을까  

灼灼基花 (작작기화) 
아름다운 꽃이여  

河彼矣(하피의) 
그리도 농염한지 
(아름다운 꽃이여)  


斯于吉日 (사우길일) 
이렇게 좋은 날에  

吉日于斯(길일우사) 
이렇게 좋은 날에  

君子之來 (군자지래) 
그 님이 오신다면  

云何之樂 (운하지락) 
얼마나 좋을까  

臥彼東山 (와피동산) 
동산에 누워  

望基千(망기천) 
하늘을 보네  

明兮靑兮 (명혜청혜) 
청명한 빛은  

云河來矣 (운하래의) 
어디에서 왔을까  

維靑盈昊 (유청영호) 
푸른 하늘이여  

河彼藍昊 (하피람의) 
풀어 놓은 쪽빛이여  

吉日于斯 (길일우사) 
이렇게 좋은 날에  

斯于吉日 (사우길일) 
이렇게 좋은 날에  

君子之來 (군자지래) 
그님이 오신다면  

美人之歸 (미인지귀) 
그 님이 오신다면  

云何之喜 (운하지희) 
얼마나 좋을까. 

YouTube에서 정훈희 - 꽃밭에서 (1970) 보기
정훈희 - 꽃밭에서 (1970): http://youtu.be/DBAvmD6rmrc

꽃 향기 가득한 향기로운 시간들 맞이 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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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한경에 대하여...

1. 친구가 올린 글에 대한 제 댓글입니다.

최한경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달리.... 세종26년에 과거에 합격했으므로 세종 때 이조참판까지 올라가기는 어려웠던 것 같아. 단종보다는 세조 쪽에 줄을 잘 서서 2등공신 정도가 되었고...강원관찰사, 충철관찰사 등을 거쳐 이조 참의와 대사성 정도까지 올라간 것 같아.

그런데...

세조가 왕이 된 후에, 최한경이 기생 청루월과 간통해서 첩을 삼았다가 (두 집 살림..ㅎ) 잠시 어렵게 되었다는 기록이 인터넷에서 보이네?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기에, 또 옆 집의 처자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마음 여린 사람이기에, 어쩌면.... 세상 시각으로 '기생과의 간통'까지도... 완전 전주행 표끊고 짐싸려 했던 내 주관적 시각으로는 ... 인생의 로맨스처럼 보이니...어쩌면 좋아? ㅎ


2. 신문에서 어느 분이 최한경에 대해 이 문맥과는 다른 흐름에서 쓰신 글을 퍼옵니다.

최한경이라는 이름 석자는 조선왕조실록 세종~예종 연간에 30여차례나 나온다.

첫 기록은 최한경이 성균관 생원 시절로 추정되는 세종 20년(1438년)이다. 그해 8월 최한경은 냇가에서 멱을 감다가 벌거벗은 채 길 가는 여염집 부녀자를 희롱하는 사고를 친다. '조선판 바바리맨' 사건이라고 해야 할 이 일은 일파만파 커져서 성균관 직숙관(直宿官)을 거쳐 조정에까지 알려진다. 사헌부에 끌려간 최한경은 "다만 희롱했을 뿐"이라고 발뺌하지만 세종은 곤장 80대의 장형을 명한다.

씻을 수 없는 어두운 이력에도 불구하고 최한경은 벼슬자리에 나선다. 단종실록에 보면 "최한경이 글씨를 잘 써서 춘추관 벼슬을 할 만하다"며 왕이 높이 평가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명문가 자제로 영민한 구석이 없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최한경은 이후 성균관직강, 호조정랑, 첨지중추부사, 이조참의 등을 거쳐 강원·충청관찰사에까지 오른다.

승승장구하던 최한경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실록에 또 이름을 올린 것은 단종 3년(1455년)의 일이다. 이번에는 경제사건이다. 실록에 따르면 최한경은 폐문멸족한 환관 최습의 가산을 월권으로 나눠 가지는 독직 사건을 저지른다. 그러나 의금부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로운 왕(세조)의 배려로 속전(贖錢·죄를 벗기 위한 돈)을 내고 살갗에 전과를 표시하는 자자(刺字)와 곤장 40대의 중벌을 면제받는다.

하지만 몇 년 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구설에 또 오른다. 시쳇말로 개버릇 남 못준다고 했던가. 소싯적 성희롱 전과가 있던 최한경은 또 여자 문제가 화근이 돼 파면의 불명예를 안게 된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최한경은 기생 청루월과 간통하고 첩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관아의 심부름꾼을 시켜 청루월과 통정하는 자가 있는지 감시하게 하는 등 탐락(耽樂)·방종(放縱)하여 파직 처분을 받는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한경이 또 관직에 나간다는 사실이다. 파직된 지 3년 만인 1459년 복직한 최한경은 이듬해 당상관에 오르면서 사간원 좌사간대부에 제수되는데 지금으로 치면 언론기관의 장을 맡게 된 셈이다. 어떤 배경이 그를 자꾸 벼슬에 나갈 수 있게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도를 넘는 회전문 인사나 무원칙 인사가 있었던 것은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그러나 오뚝이처럼 부활을 거듭한 그의 최후가 꼭 영광스러웠던 것 같지만은 않다. 세조 13년(1467년) 강원도관찰사로 세조의 교지를 받는 것을 끝으로 실록에서 자취를 감춘 최한경은 2년 뒤인 예종 1년 또 모습을 드러내는데, 2년 전 함경도 지역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과 연루된 자들을 유배시켰다는 기록에 그의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 본인의 이름이 직접 거론된 것은 아니지만 예종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역적 이시애의 연좌인을 구처(區處)하는 바, 최한경의 조카 최도치를 유배시켜 옥에 가두고, 최한경의 아내 내은이는 하동의 노비로 영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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