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창세기 18:1-15) 설교자 : 주경훈 목사님


서론: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가면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천장화, '아담의 창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놀라운 메시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가로질러 온 힘을 다해 아담을 향해 손을 뻗고 계십니다. 그분의 눈은 오직 아담만을 향하고 있고, 그분의 온 존재가 아담에게로 향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자세는 어떻습니까? 그는 무언가 마지못해, 조금은 교만한 자세로 팔을 겨우 들어 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절함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몸과 손은 아래로 축 처져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눈동자는 하나님이 아닌, 아직 창조되지도 않은 하와를 향하고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그림은 마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토록 적극적으로 다가오시지만, 인간은 얼마나 수동적으로, 때로는 다른 곳에 마음을 둔 채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이것은 단지 그림 속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위대한 메시지,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일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신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본문, 창세기 18장은 바로 그 하나님의 '찾아오심'의 절정을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일상적 삶의 마당인 그의 장막으로 친히 심방 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언제 찾아오셨습니까? "날이 뜨거울 때에" 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중동의 가장 뜨거운 한낮, 모든 생명이 활동을 멈추고 그늘을 찾아 쉴 때입니다. 인생의 가장 힘든 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 같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바로 그 절망의 시간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어디로 찾아오셨습니까?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 바로 아브라함의 장막이었습니다. 이곳은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이 롯을 떠나보낸 후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던 바로 그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하나님은 바로 그 삶의 예배의 자리로 찾아오셨습니다.

누가 찾아오셨습니까? 2절은 "사람 셋"이라고 말하고, 3절에서 아브라함은 그들을 "내 주여"라고 부릅니다. 주어는 계속해서 '여호와'와 '사람 셋'을 오고 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두 천사와 함께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신비로운 사건, 바로 '하나님의 심방'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오늘 만남이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이 필요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무덥고 어려운 순간마다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만날 때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2] 찾아오실 때마다 선명해지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인생에 여러 번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이 거듭될수록, 아브라함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은 안개 속에서 조금씩 그 윤곽을 드러내듯 선명해졌습니다.

  • 처음 부르실 때 (창 12장), 하나님은 막연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너는 복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그 땅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떠나야 했습니다.
  • 롯이 떠난 후에, 갈등의 상태에서 (창 13장), 약속은 조금 더 구체적이 됩니다. "너는 눈을 들어...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 목숨을 건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창 15장), 상속자에 대한 불안에 휩싸인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 이스마엘을 낳고 13년이 흐른 뒤 (창 17장),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바꿔주시고, 태어날 아들의 이름까지 '이삭'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 그리고 오늘 본문, 이삭을 낳기 불과 1년 전 (창 18장), 마침내 가장 구체적인 약속을 주십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마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알려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만큼, 단계적으로, 때로는 격려하시고 때로는 설득하시며 우리 인생을 친히 이끌어 가십니다.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환영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왜 하나님은 한 번에 다 말씀하지 않으실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전체 계획을 한 번에 보여주시지 않을까요?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큰 배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감당치 못할 짐이라는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요 16:12).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내 계획의 모든 그림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길을 운전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동차 전조등은 고작 100미터 앞만 비출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빛에 의지하여 밤새 운전해 머나먼 목적지까지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길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불빛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400km 앞을 내다보는 지도가 아니라, 내 앞의 1미터를 비춰주시는 신실한 인도자,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찾아오심을 환영하며 동행할 때, 그분께서 우리 인생을 가장 아름답고 선한 자리로 이끌어 가실 줄 믿습니다.


[4] 아브라함,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맞이하다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아브라함은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그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 첫째, 그는 달려나가 영접했습니다 (2절).가장 뜨거운 시간, 100세의 노인이 달려 나갔습니다.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그의 불타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환영했습니다.
  • "눈을 들어 본즉...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 둘째, 그는 최상의 것으로 대접했습니다 (6-8절).아내 사라에게는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약 22리터, 20kg)를 가져다가 떡을 만들라"고 합니다. 세 사람이 먹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양입니다. 먹다 남은 것을 드린 것이 아니라, 가장 곱고 신선한 가루로 지금 막 빵을 굽게 합니다. 이것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했습니다.
  • 곧이어 그는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주어 급히 요리하게 합니다. 마블링이 가장 좋은, 최고의 송아지로 만든 스테이크가 메인 디쉬였습니다. 디저트로는 신선한 우유와 엉긴 젖, 즉 요거트까지 준비했습니다.
  •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아이처럼 뛰어다닙니다.
  • 셋째, 그는 곁에 서서 섬겼습니다 (8절).모든 것을 지시하고 준비한 아브라함은, 그들이 식사하는 동안 마치 종처럼 곁에 서서 수종을 들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을 섬기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 "나무 아래에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혹시 '내가 편한 예배', '나를 위한 예배'에 익숙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아브라함처럼, 찾아오신 하나님을 향한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한 예배, 나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5] 사라를 찾으시는 하나님, 심방의 진짜 목적

아브라함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신 하나님은 식사 후에, 오늘 심방의 진짜 목적인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9절)

하나님이 사라의 위치를 몰라서 물으셨을까요?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위치를 물으실 때는, 그 대상의 마음과 믿음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지금 장막 문 뒤에 숨어 하나님의 말씀을 엿듣고 있는 한 여인의 상처 입은 영혼에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선포됩니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0절).


[6] 상처 입은 영혼의 웃음,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

이 놀라운 약속을 장막 문 뒤에서 엿듣고 있던 사라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2절).

이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오랜 기다림과 실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말라비틀어진 영혼의 냉소적인 웃음, 밖으로 터져 나올 힘조차 없는 맥없는 웃음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아들 문제는 단순한 자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도 있었지만, 사라에게 이스마엘은 위로가 아니라 위협이었습니다. 당시 13세, 곧 성인이 될 이스마엘이 후계자가 되고 남편 아브라함마저 세상을 떠나면 자신의 인생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두려움과 상처가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사라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녀를 위로하시기 위해 친히 심방 오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3절).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사라의 '속으로' 한 생각을 정확히 꿰뚫어 보셨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라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엿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책망하거나 무안을 주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그 흔들리는 마음, 그 상처와 눈물을 끄집어내어 어루만져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라야, 내 앞에서는 괜찮다. 너의 그 마음을 내가 안다. 솔직해도 괜찮다."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였습니다.

저 또한 9층 사무실에서 교회로 들어오는 성도님들을 보며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저 성도님의 발걸음을 축복하시고 오늘 예배를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게 하소서.'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과연 저분들이 내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그때 주님께서 제 마음에 물으시는 것 같습니다. "너는 알고 있니? 내가 너를 지켜보며 너의 기도를 듣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니?"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신음과 속으로 삼키는 눈물까지도 다 듣고 계십니다.


[7] 결론: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하나님의 이번 심방은 결국 상처 입은 사라, 바로 그녀를 위한 심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흔들리는 사라에게 가장 강력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4절).

"기한이 이를 때에(에트 하야, עֵת הַחַיָּה)" 라는 말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의 시간'이 오면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때가 오면, 불가능은 가능이 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이 질문은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인간적인 계산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 앞에서 낙심하고 있습니까? 말라비틀어진 사라의 태와 같다고 느끼는 절망의 영역이 있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겠느냐?"

지난주에 한 성도님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목사님, 그럼 오늘 이후로 아브라함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나요?"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또 흔들렸습니다. 지겨울 만큼 다시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겨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그를 또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열심이 특출나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도 나의 장막을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연약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줄 믿습니다. 그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예배를 통해 한 주를 살아갈 새 힘을 얻고, 그 한 주 한 주가 쌓여 마침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이루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은생 (金殷生) 개인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