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세18. Day8. 하나님의 친구 (사무엘상 3:15~21) 유진소 목사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18. 11. 9.

유진소 목사 (57세)

현) 부산 호산나교회 담임목사 (2016)

전) 미국 LA한인타운 ANC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1996)

전) 서울 온누리교회 부교역자 (1992)

-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 장로회 신학대학원 졸업(M.Div)

- 풀러 신학대학원 졸업(D.Min.)


[들어가는 말: 실로... 안식의 장소]


처음 여러분 앞에 섰으니 본인 소개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내게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어서 고민이었다.
그래도 굳이, 내게 있어 조금이나마 특별한 것을 말씀드리자면, '성지 순례'를 그동안 8번 정도 다녀왔으니 상대적으로 많이 다녀온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지 순례도 특히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주로 갔는데, 내가 성지 순례를 비교적 자주 간 이유는, 성지 순례를 갈 때마다 듣게 되는 성지 곳곳에서의 특별한 '하나님의 음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중 한 가지를 나누자면..., 벌써 약 20여년이 지났는데..., 아마도 내 세번째 또는 네번째  성지순례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연히 '실로'라는 곳을 가이드가 소개했다. 사람들이 대개는 즐겨 가지 않는 곳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 얘기를 듣는 즉시 가보자고 주장했고, 실제로 실로에 가게 되었다.

'실로'는 팔레스타인 자치구 쪽이어서 위험했지만 우리 일행이 탔던 버스 기사가 팔레스타인 사람이어서 용기를 내어 갔다.
하지만 길을 찾기도 어려워서 고생을 했고 막상 가보니 볼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돌무더기만 덩그라니 있었다.(지금은 그렇지 않다. 여러 유물이 발굴되어서 볼거리가 많아졌다.)
그래서 나 때문에 그곳에 함께 간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사무엘상에 나오는 한나와 엘리 이야기를 들려주고 각자 흩어져서 기도하자고 제안 했다. 

더운 날씨에 돌무더기 위에 앉아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어떤 감동과 은혜를 주셔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가 내게 임했다.
'여기가 어디인줄 아니?' 성령의 말씀이었다.
'실로입니다.'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여기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이었을까?'

(창 49:9~10)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야곱의 유다에 대한 유언적 축복기도에 '실로'라는 말이 최초로 나온다. 그리고 '안식의 장소'라는 뜻의 실로는 최초의 성소로서, 매해 절기 때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오는 곳이었다. 하나님의 성막이 있고, 법궤가 있고, 제사가 일어났다. 절기 때가 되면 여인들이 와서 춤을 추기도 하고 함께 묵으면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그 실로가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돌무더기 밖에 없는 상황을 보며 나는 이가봇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가봇, 영광이 떠났다.]


이가봇이라는 말은 엘리의 죽음과 맞물린 그 손자의 탄생 이야기에서 나온다.

(삼상 4:21~22)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부인은 이러한 처참한 상황 가운데서 진통 끝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죽어 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 '이'는 '아니다',  '가봇'은 '영광'이라는 뜻이므로 합하면 '영광이 아니다' 또는 '영광이 떠나갔다'가 된다. 결국 무슨 말인가? 엘리의 집에서, 엘리의 삶에서, 나아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갔다는 것이다. 신앙인이라면 살아가면서 절대 들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실로, 그 아름다웠던 곳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시면 폐허 밖에 남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다가왔다.
우리네 신앙생활에서 은혜도 받고 여러 직분을 받았더라도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면 우리는 버려진 돌무더기에 불과해진다.

그리고 또한 한국교회가 생각났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믿음의 선배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우리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면 황폐해져 아무 것도 아니다.


[왜 영광이 떠났을까?]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가게 했을까?  왜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사람들을 떠나실 수 밖에 없도록 했을까?
그에 대해 성경은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얘기해준다.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제사는 행해졌지만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지도자의 잘못 때문이었다.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기 때문이었다.

(삼상 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제물을 제사 전에 갈고리로 마음대로 탈취하기도 하고, 고기를 구워 먹기 위해 날것을 빼앗기도 하며 그야말로 '날로 먹는' 패악을 일삼았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멸시였다. 

예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보이는 의식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해 문제가 되는 행동을 통한 멸시는,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되는 영적/윤리적 타락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삼상 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렇게 하나님의 직분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육적인 욕심 (식욕, 성욕, 물욕 등)을 채웠다.

문제는 엘리가 아들들을 하나님보다도 더 중히 여기는 '인간적인 마음으로' 자녀들의 행악을 금하고 제대로 바로잡지 못한 데 있다.

(삼상 2: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그 시대는 캄캄한 시대였다.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시대였다.
그렇게 비극의 첫장면이 시작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시면 그것은 정말 영적으로 캄캄한 암흑기다.
'신구약 중간기'를 우리는 영적으로 캄캄한 '암흑기'라고 한다.
또 다른 말로는 '침묵 시대'라고 한다. 말라기 이후 세례 요한이 나타나기 까지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던 암흑기였던 것이다.
엘리의 시대가 그러했다.

죄가 무서운 것은..., 그리고 영적 타락과 우리의 위선이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음성이 끊기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관영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끊이지 않고 그 음성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죄는 절대 '하나님의 사랑'보다 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십자가'이며, 또 십자가는 '승리, 최후의 승리, 죄를 이긴 승리'가 나타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죄를 이긴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들을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때에도,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나서시고 찾아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끊어지지 않는다.

(요 4:23~24)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내게 가장 큰 은혜가 된 것은, 바로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의 부분이었다. (seek)
전능자는 부족하고 아쉬운 분이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배자를 찾으시느라'라는 표현은 우리 하나님께 적용하기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며 그 적절해 보이지 않는 구절의 비밀도 함께 드러내 주셨다.
23절 본문에서 예수님은 (24절 본문처럼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신 것이다.

전능자는 필요한 것이 없을지언정 '아버지'는 사랑 때문에 그 음성을 들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녀와의 관계를 끊으실 수 없기 때문에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당신의 음성을 들을 사람을 찾으신다.
우리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그 말씀을 들을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다.
사랑이다. 아버지와 자녀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엘리와 그 아들들이 죄악 가운데 있던 그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찾으셨다.
사실 그 때, 객관적으로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삼상 3:7)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사무엘은 너무 어렸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해프닝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세 번씩이나, 사무엘은 (하나님이 아닌) 엘리에게 뛰어갔다.
(부를 때마다 대답만 하고 전혀 다른 곳으로 뛰어가는 사무엘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황당한 모습을 생각해 보라.)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인격적으로 체험하지 못했던) 사무엘에게 엘리가 마침내 바르게 가르쳐준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런데, 이 때 엘리의 마음은 어땠을까? 결코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의 불편함이 어쩌면 하나님의 엘리에 대한 마지막 경고였을 것이다.
예배 드릴 때 옆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그저 박수만 치고 있으면 안된다. '거룩한 시기심'을 가져야 한다. 
'왜 내게는 저런 은혜가 임하지 않지? 왜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못들을까?'
나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이는 자복하고 회개할 일인 것이다.
'내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이렇게 캄캄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못듣는가?'
이것은 가장 심각한 경고이다. 그런데 엘리는 이 마지막 경고를 그냥 흘려보냈다.
반면에 네 번 만에, 하나님의 사무엘과의 접속은 마침내 성공한다.

성경은 왜 이토록 상세하게 해프닝에 가까운 하나님과 사무엘 사이의 첫 만남 얘기를 하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마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무엘과 나누고 싶으셨던 것, 메시지인가 마음인가]


그토록 포기하지 않고 네 번 만에 계시에 성공하신 하나님은 사무실에게 어떤 얘기를 하시고 싶으셔 그토록 애쓰신 것일까? 

하나님의 음성은 주로 1.긴급한 경고.  2. 깊은 위로. 3. 긴급한 방향 제시와 인도. 4. 아주 소중한 소명을 맡기실 때 등을 위함이다.

(삼상 3:11~14) 그 중에서도 특히 (삼상 3: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접속이 성공한 후에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엘리의 집에 내려질 저주였다.
'이게 뭡니까?' '그렇게까지 어렵게,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어린아이를 깨워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아픈 마음, 속상한 마음을 쏟아낸 것 아닌가?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친구...라는 말이 떠올랐다.

(출 33:11상)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이 순간 사무엘은 하나님의 친구였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픈 마음을 들어 주고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찾으신 것이었다.
진실로, 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친구였다.
하나님을 믿어서 내가 무엇이 되고, 또 무슨 응답을 받고... 등등의 목적을 가진 이런 비즈니스 관계의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친구삼은 사람들.... 하나님이 좋은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무조건 '나는 하나님 편이야...'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
하나님이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다.

찬송가 442장. '저 장미 꽃 위에 이슬'의 작사 작곡자는오스틴 마일스(C.A. Miles)이다.

여러 비극적 사건 속에서 위안이 필요했던 친구 가이벨로부터 부탁을 받은 그 날, 마일스는 요한복음 20장의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던 장면을 묵상하다가 큰 영감을 받고 찬송시를 쓰고 곡을 만들었다. 

거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 있었던 것 같다.
막달라 마리아가 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까?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떤 기대도 끝나버린, 어떤 유익도 있을 수 없는 그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비즈니스 파트너로 만났던 예수님의 12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버린 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결코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가, 시체를 접할 수 없는 안식일이 끝나자 마자 곧바로 그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 무덤으로 간 것이었다.

이 신앙은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신앙이 아니었다. 그냥 예수님이 좋은 것이었다.
이 찬송의 영문 제목은 'Come to the garden alone. 나 홀로 동산에 왔다'이다. 무덤 밖에서 홀로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부르신다 '마리아야'
죽음의 슬픔을 부활의 기쁨으로 바꾼 그 예수님의 목소리. 이른 아침 마리아가 예수님과 나눈 그 기쁨을 알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 찬송의 가사를 모두 읽으면 모든 시각과 청각이 동원되는 아름다운 시어 속에 빠지게 된다. 예수님과 마리아가 있던 그 동산에 나도 함께 있는 것 같은, 그 곳에 함께 들어가 있는 느낌을 갖게 된다. 친구로서 온통 함께 나누고 느끼는...)

자신의 법궤를 이방인에게 빼앗기려는 가슴 아픈 결정을 앞두고, 그 아픈 마음을 나누고 싶으셔서 아이 사무엘을 친구로 찾으셨던 하나님.
자신의 눈동자같은 공동체라도 죄악으로 인해서는 깨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 그 때 하나님은 그 아픈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하신다. 바로 그 누군가가 하나님의 친구이다.


[기도의 중보자, 친구를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그 아픈 마음을 나누실 때는 그것은 단순한 나눔이나 하소연이 아니다.
'나는 사랑하는 이들을 포기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회복하고 싶으며 네가 내 파트너가 되면 좋겠다. 기도의 사명자가 되어달라.'는 의미다.
오늘 단세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런 부름을 모두 받은 것이다. 이 민족과 교회의 회복을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 민족과 교회의 회복을 위한 중보기도자를 찾으신다.

먼저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음성을 들을 사람을 찾고 계신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대신에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고 계신다.

이 음성을 듣는 것이 중보기도자가 되는 첫걸음이다. '내가 뭐기에'라는 생각이 든다면 바로 그 생각을 거두라.그 날 사무엘은 말도 안되는 어린아이였다.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하물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따르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하고 답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 그 아픈 마음을 느껴야 한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내가 품고서 중보기도 해야 한다. 그 마음을 품고서 울어야 하고 통곡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바로 중보기도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지 않고는 중보기도를 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단한 기도가 아닐 수도 있다. '열방은 커녕 우리집 앞마당도 못치우고 있다...'는 상태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기도를 해야 한다.

쿠바에 가서 너무 은혜를 받아 통곡한 적이 있다. 어느 가정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울면서 기도하길래 물었더니,
'터키의 지하교회'를 위해 그렇게 울면서 기도한다는 것이었다. 터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니까 터키를 위해 통곡하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그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을 위하여 '중보기도자'가 되자. '중보기도 사역자'가 되자라. 그것이 오늘의 메시지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눈물로 이 시대를, 이 교회를, 이 나라와 민족을 품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기도) 하나님의 친구... 우리는 차마 감당 못할 이름이지만 아멘..으로 받아 들입니다. 우리 입술에 그 기도를 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하소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

(기도 인도 by 김은호 목사님) 

우리 모두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품자.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 알아... 내 모든 삶 당신의 삶되기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엘리 제사장의 시대와도 같다. 이가봇...성경에 나오는 가장 저주스러운 단어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이가봇.

그러나 그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도 못하는 사무엘을 찾아 오셨다. 그것은 바로 사무엘이 하나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아픈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우리와 나누고 싶어한다.


기도를 받으러 올라오신 어느 권사님의 기도 제목은 국민일보 기사에 서 알게 된 '개종을 거부해서 포로에서 풀려 나오지 못하는 소녀의 이름'을 대며  그 소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신문에 나오는 소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친구... 서로의 속상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되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길 원합니다. 부르심에 순종하기 원한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도... '그 심정을 느끼며' 기도해야 한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할 때도 내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자. 단순한 속상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자.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저주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복이다. 고난이 저주가 아니라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면 고난이 복이다. 우리가 형통하여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다. 이 풍랑 인연하여서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간다면 그 것이 복이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Neer to Thee 주께로 가까이...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는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기에 그리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영적 권위를 갖는 부모가 되기를...  , 이런 영적 권위의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하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