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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시편 42:5) 김은호 목사

Jesus Christ/주님과 함께 2020. 1. 1.

2020년 송구영신예배에서....

누구나 새해 소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보신각의 타종 소리에, 떠오르는 해를 향하여 소원을 빌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우리네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본 시편 42편의 저자도 매우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이 시를 썼다.

<시편 본편(제42편)의 배경>
시편 42편의 저자는 '고라 자손'이라고 되어 있는데 시편 43편의 저자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후렴구 (42:11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가 같기 때문이다.
요컨대, 바빌론 유수로 끌려갔던 고라 자손 중의 하나가 나라를 잃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시를 쓴 것으로 보인다.

<낙심되고 불안한 상황> 
저자는 본문(5절)에서 세 가지 이유로 인해 낙심되고 불안했다.

첫째,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때문이었다.
"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그는 바벨론 포로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하나님이 그를 여기까지 끌려 오도록 방치했는가?...라는 조롱과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도 우리 성도들이 듣고 있는 조롱과 멸시 아닌가?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갖고 우리를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도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운운하며 우리를 조롱한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네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냐?"
그때 이 시인은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며 비탄에 잠겼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당할 때 이 시인처럼 '칼이 찌르는 것처럼 아픔'을 느꼈는가? 이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는지, 하나님과 연합되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와 조롱을 받을 때 아파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찌하여'를 여러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우리도 고난이 길어지면 내가 하나님께 잊힌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되지 않나?

셋째,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 42:1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Ad Fontes'
이 시인은 원수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해 '갈급'해 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 우리 영혼은 불안과 낙심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예배 시간은 생수를 공급받는 시간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목마름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예배에 대한 얘기를 하시고 이어서 생수에 대해 얘기하신 것이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영혼은 목마르게 된다. 우리의 모든 낙심과 불안은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이고, 그것은 예배와 관련이 깊다.

시인은 이상의 세 가지 이유로 인해 낙심되고 불안해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낙심한 영혼이 소생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은, 내 영혼을 향하여 외치는 것이다. "내 자신에게 외쳐라!"
로이드 존스 목사가 얘기하기를, "영적인 침체(spiritual depression)를 극복하는 원리는 (성도들을 변화시키려고 설교를 했다가 변하지 않는 성도들로 인해 낙심해서 영적 침체에 빠지지 말고) '나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내 영혼에게 외치라>
그러면, 내 영혼에게 무엇을 외칠까?

첫째. 어찌하여 낙심하며 불안해하는가?
내 영혼을 점검해 보았더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불안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기에, 자신의 영혼을 향해 외친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시인은 자신의 영혼을 자신이 처한 상황과 느낌으로부터 '분리'시키기를 원했다. 현실을 부정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가장 먼저 내 영혼을 향해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시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다윗) 송축하라(바라크: 축복하라는 뜻)는 말은, 인간은 하나님을 축복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축복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자신의 상황이나 문제 속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에게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소망을 두라'는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것이다.

셋째. 내가 여전히 찬양하리로다.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원어: 다시, 반복하여)" 즉, 상황이 전혀 변하지 않았을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아직 손바닥만 한 구름도 아직 나타나지 않았어도....  언젠가 때가 되면 그분이 나타나 나를 도우실 것을 믿기 때문에 내가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라는 것이다.

<맺는말>
인생을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고 나를 잊으신 것처럼 느껴져서 불안하고 낙심되어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내 영혼을 향해 외쳐라. " 왜 낙심하며 불안해하는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리라"  이때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를 찾아오실 것이며, 우리는 더 크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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