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포교회 원로목사이신 박영선 목사님의 설교 내용인데, 제게 깊은 감동을 준 내용이어서 제 이해대로 정리하여 올립니다.
실존주의적 신앙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첫 번째로 제자들을 찾아왔을 때는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도마(Thomas)가 없었습니다. 그 후,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만나 보았다고 증언을 했을 때 도마는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그럴 리가 없다, 내 손으로 그 못 자국과 창 자국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다음에 도마도 함께 제자들과 모여 있는 자리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네 손으로 확인해라, 그리고 보고 믿는 자가 돼라. 그러나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그러나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더욱 복되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예수를 만나는 것보다 더 큰 복과 확신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려울 때 또는 간절한 형편에서 다른 음성은 못 들어도 예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강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실존주의적 믿음이라 합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이것은 믿음을 '인격 대 인격의 만남'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인격 대 인격으로의 만남을 부흥 시대에는 무척 많이 보았습니다. 전혀 아무런 전조도 없고 어떠한 낌새도 없이 그저 갑작스럽게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운명을 깨닫게 되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정말 넘쳐나게 많았던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중의 하나이기도 했고,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무척 많은 증거들이 우리의 교회들에 넘쳐나서 당연히 그래야 되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실존(existence)은 본질(essence)에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즉 인간이나 사물의 본질이 이성/정신 등 보편적 원리라는 '가능적 존재'에 대비하여,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존재가 실존이라는 사상이며, 따라서 실존주의에서의 인식 주체는 '나'가 됩니다. 신앙적으로도 실존주의에서는 자기가 인식하고 경험한 신을 중시한 것입니다. 실존주의는 키르케고르, 야스퍼스 등의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뉩니다. 일반적 의미로의 '실제로 존재한다'는 뜻으로는 '실존'이라는 표현보다는 '현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본 설교에서는 '실존주의'가 맞습니다.
역사적 신앙
그러나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신앙 문제에는 실존적 신앙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신앙도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역사적 신앙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온 우주 역사와 인류의 운명의 주인이 되시며, 시작과 끝, 그리고 그 과정을 인도하시고 장악하고 계시며 진전시키신다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대개 실존주의적 신앙의 경험을 더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신앙은 초월적입니다. 이때 초월적이라는 것은 자연을 넘어서는 초월을 말할 뿐만 아니라(초자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존재한다는 것, 특히 시간의 초월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만 만나면 해결이 되고, 모든 것이 믿음만 가지면 문제가 없는, 그렇게 하여 전/후를 오가는 맥락이 없이 지극하고 굳센 믿음, 간절함 같은 내용들이 설교와 신앙 고백에 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실존주의적 신앙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얘기하시는 것은 그러한 개념의 실존주의적 신앙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 아닙니까? 게다가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고,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공생애를 줄곧 함께 한 제자가 그 공생애와 죽으심, 기대가 무너진 허탈 속에 있다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직접 느끼고 확인하게 되는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예수님은 오히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 예수를 믿는 신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가지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기본적인 세계관은 자연주의적 세계관입니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이란 생로병사가 반복되는 것이죠. 우리 부모가 그렇게 살다 죽었고 내가 살다 죽고 우리 자식들도 살다 죽는데, 그동안의 그 짧은 삶의 기회 속에 예수 믿고 죽어서는 천국 가고… 이렇게 되어 있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부모가 믿고 죽은 것은 무엇이며, 내가 믿고 죽은 건 무엇이며 내 자손이 믿고 죽을… 이렇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무슨 차이나 소용이 있을까? 이렇게 곰곰히 따져 물어야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역사적 신앙관입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 성경은 드라마다
우리가 역사를 보면, 지금 역사주의적 신앙을 논하려면, '역사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되는데 우리 보통 인류가 아는 역사는 제국의 흥망성쇠이거나 문명사회에 대한 것으로 제한됩니다. 인간의 발전이나 인간의 이상은 역사를 논할 때는 크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고, 인류 역사가 헛되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을 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유명한 ‘성경은 드라마다’ 책에서는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를,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전진시키고 있고 개입하여 일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 거기서는 역사를 6개 막의 드라마에 비유합니다.
- 1막 -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세우시다: 창조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 - 2막 - 반역이 일어나다: 타락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 3막 - 왕이 이스라엘을 택하시다: 구속의 시작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인간에게 죄의 경각심을 주었고, 구원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멸망하였습니다. - 막간: 끝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신구약 중간기
- 4막 - 왕의 오심: 구속의 성취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지불하셨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 5막 - 왕에 대한 소식이 전파되다: 교회의 선교
지금은 은혜의 시대입니다. 이 성령과 교회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 6막 - 왕의 귀환: 구속의 완성
종말, 즉 새 하늘과 새 땅 시대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죄와 사망이 없고,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역동적이고 진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계시며, 그 역사는 완성될 것입니다.
개개인의 신앙에서의 역사주의적 신앙과 실존주의적 신앙
이렇게 인류 역사 속에서 역사 전체를 한 인류로 볼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 진전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각각의 시대별로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역동성 있게 전진시키고 있음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각 개개인 성도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한 인생 속에서 반복적으로 우리를 이끌어(또는 밀어서) 하나님의 특정 목적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인격 대 인격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구원을 확인하는 실존주의적 신앙에서는 치열함과 진실함이 구원에 필요한 자격이고 보상받는 개념이었지만, 역사적 신앙에서는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를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서 하나님이 창조 세계와 인류의 역사를 진전시키고 일하고 계시다는, 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즉 교회 시대와 성령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대는, 한 편의 드라마로 생각한다면 제1막, 제2막, 제3막... 이렇게 진행이 되면서 기승전결이 있듯이, 앞에서 어떤 일들이 시작이 되고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게 어떻게 반전을 이루고 어떻게 절정에 이르고, 그리고 모든 결론으로 맺어지는가와 같이 이렇게 드라마가 진전되어 가는 중에, 어떤 진정한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예수로 말미암는 새로운 세상 창조가 모든 더럽혀진 것을 하나님이 회복하게 하시고, 비록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인간들이 그 회복에 걸맞은 보조를 맞추지 못해 율법 아래 정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이 취소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완성이 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늘 쓰던 대로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됩니다.
실존주의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이해하여 부활을 환호하고 감사하다가도, 본인의 신앙이 침체되면 또 의심스럽고 '나는 뭔가' 싶고 '하나님은 왜 아무 답도 안 하시는가?' 싶은 곳으로 반복적으로 돌아오곤 하지만 그건 우리 개인사정이고, 역사 속에서 우리가 탄 배는 여기(교회와 성령의 시대)까지 와 있어서 (역사의) 배 자체가 거슬러 후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을 보고 믿은 자'는 죄에서 구원을 받은 개인의 실존주의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자'는 역사적 관점에서 교회에 성령으로 약속하신 새로운 시대를 사는 자를 의미하며, 예수님의 말씀은 그 둘의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예수를 만나고 본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예수가 시작하신 새로운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종말이 올 것입니다. 종말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무서운 심판' 보다 더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그의 창조의 완전한 승리를, 영광을 마무리 짓는 자리'입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기대를 가져야 되고, 우리가 지금 여기 이 자리, 성령 시대를 살고 있으며 교회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구원에 관한 내용은 우리가 이제는 죄악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롬 6: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시대는 예를 들어 학교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했다 못했다만 있는 거지, 살인을 했다 안 했다의 유무죄를 다투는 데가 아니듯이, 즉 그 해당 장소나 기관이 전혀 다른 곳인 것처럼,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는 세상이 전혀 다른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우리가 더 이상 법과 사망 아래 있지 않고 은혜와 기적 속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7장 말미(롬 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의 비탄이 섞인 현실에도 불구하고, 8장의 시작(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에서 완전한 해방의 선언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묶인 바 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그만 회개하라’는 말을 새겨야 합니다. 언제나 과거의 그 차원에 머물지 말고, 이렇게 완전히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마음껏 새로운 경기를 해야 합니다. 어린 시절에 사방 놀이 할 때, 금을 밟으면 죽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웃일 뿐이었습니다. 경기장에서 금을 밟으면 아웃일 뿐이지 실제 죽지 않습니다. 금에 서서 금을 밟을까 봐 전전긍긍할 것이 아니라, 금 안으로 들어와서, 즉 규격 안으로 들어와서 진짜 중요한 경기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껏 경기를 즐기라는 것이 우리한테 주어진 사명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그러나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더 복되다’의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이제는 여기에서 마음껏 경기를 해야 합니다.
(요 16 :5~11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는지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러한 신앙의 삶을 우리에게 살라시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우리에게 힘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로, 죄와 사망의 위협과 도전 속에서 거기에 상관없는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좋다'와는 다릅니다.
초월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 속으로 들어오셔서 무한이 유한 속에 갇혀서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그는 목마르시고 배고프시고 피곤하셨습니다. 이 점에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 교회 시대를 사는 것은, 예수가 오셔서 인류를 구한 것같이, 우리가 함께 있어서 우리 이웃이 구원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과 함께 배 타고 건너다가 피곤하셔서 주무십니다. 폭풍이 일자 제자들이 놀라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자 들아, 내가 있는데 어찌 너희가 죽겠느냐? 내가 누워있는 이 배가 어찌 침몰하겠느냐?' 그렇게 호통을 치신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위로의 말씀들이 무척 많습니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지금 이 시대가 '역사적으로' 어느 만큼 진전된 1막, 2막,...., 5막을 지나서 6막에 거의 와 있는데, 이 역사적 진전이 무효화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특권들을 다 놓친 채, 그저 매일의 허물을 지우느라고 힘들어하고, 이생의 평안함에 매달려 매일 분노하고 비명 지르느라고 하루를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놀라움은 이런 것들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사서 애굽으로 팔려 가서 무고를 당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를 족쇄가, 쇠사슬이 묶어 놓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바로가 꿈을 꾸고 그 꿈을 해몽하고 그는 총리가 되어 온 세상을 구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다. 온 세상을 구할 아무런 조건도 준비도 기대도 상상도 못 했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온 세상을 구하는 그의 사람을 하나님은 어두운 곳에 묻어 두셨습니다. 사망 속에, 고통 속에, 우리의 분노 속에 우리는 다 묻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단코 헛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러나 여러분은 실존주의적 신앙관에 더욱 익숙하기 때문에, 예를 들면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등의 말씀들을 당연히 실존주의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으로 각오하고 계실 겁니다. 매일 성경을 얼마만큼 보고, 기도를 얼마만큼 하고, 세상으로 나가서 전도를 얼마만큼 하고… 그리고 어느 날은 딱 구별하여 지키고… 하는 것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신앙의 깊이이고 단계였습니다. 이제는 그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어떻게 넘어설 수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우선 고집을 꺾고 죄악 된 생각을 버리고..등등의 도덕적 이거나 헌신의 의미에서의 준비가 아니라, '우리가 죄인이다'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뜻이 여기에서는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복과 명예가 진정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수준까지 우리 삶을 묶어야 합니다.
즉, 로마서 3장에서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을 얘기할 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라’라고 하듯이, 우리가 만드는 영광은 하나님이 목적한 영광과는 비교도 안되고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려는 영광, 우리가 생각하는 명예,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 같은 것들은 모두 다 참된 행복도 아니고, 그것은 보람도 없고, 그건 다 무가치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만이 해 주실 수 있는 것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묶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성육신의 생활에 묶인 것같이, 예수님이 오해받고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시고 조롱의 대상이 되고 참람한 말을 들으신 것처럼, 거기까지 우리도 묶여야 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려와 보라…'를 견디십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지 못하고, 실존주의적 신앙관 속에 우리 소원이 가득 차서,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상응하는 보상을 주십시오.'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이것이 우리를 괴롭히게 됩니다.
그다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입니다. 십자가는 치열한 헌신과 희생일까요? 아니요, 십자가는 '순종'입니다. 순종이라 함은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자주 인용되는 이 구절의 말씀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순종해야 합니까? 내가 잘못한 것까지 다 포함해서 모두, 우리의 그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잘못했으면 잘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러나, 잘못한 것은 잘못인대로 그 잘못이 변하여 오히려 더욱 큰 일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됩니다. 앞뒤가 안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크게 들어 쓰실 것이었으면 바울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로 들어왔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박해하던 자였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고 죽이고 돌로 쳤고 그렇게 스데반을 죽인 자가 변하여 대사도가 됩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 인생과 우리 시대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 없으며 우리에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역사주의적 믿음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입니다.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엡 3:14~21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게 하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 왜 대답 안 하세요?’ 이렇게 우리는 밤낮 울부짖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라 함은 믿음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각자, 신약시대의 성도를 교회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와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현실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큰 권능 아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 인생을 살아 낼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위대한 일꾼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님 한 분 만으로 난 행복할 수 있는 이유 (0) | 2023.08.01 |
---|---|
Le sacrifice d’Isaac (0) | 2023.07.16 |
내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0) | 2023.07.05 |
현실을 살아가는 법 (0) | 2023.06.17 |
신명기 - 신신당부 (0) | 2023.05.15 |
죽음보다 더 확실한 부활 (고후 5:1~5) (0) | 2023.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