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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강 교수 - 다니엘 기도회 23. Day 2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3. 11. 2.

하나님 나라

강사: 김인강 교수

- 한국 고등과학원 교수

- 서울대학교, KAIST 교수 역임

- 서울대 수학과 졸업(1990.2), UC Berkeley 박사(1996)
- 1966년생. 대전중. 충남고 졸업

- 책 '기쁨공식'(좋은 씨앗, 2011) 저자

충남 논산의 한 농촌 마을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김인강 교수는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걷지 못하는 장애(소위 '앉은뱅이')가 생겼다.
혼자 힘으로 설 수도 없었기에 기어 다녔다. 비료 포대 위에 엎드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한 손으론 포대를 잡아끌었다. 맨땅 위를 기는 아이를 보고 사람들은 '나중에 크면 거지가 될 것'이라며 혀를 찼다.
초등학교 입학까지 거절당하기도 했던 그는 모친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11세에 집을 떠나 군대 같던 재활원에서 목발을 짚고 홀로 서는 법을 배웠고, 13세 때 비로소 목발을 짚고 일어서는 데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학창 시절 1등을 놓치지 않던 그는 서울대 수학과에 입학했고, 서울대 전체 차석으로 졸업한 후 장학금을 받아 미국 버클리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40여 년간 수학계의 난제였던 ‘서스턴 가설’을 처음 해결했으며, 기하학 이론인 쌍곡구조 변형공간의 가장자리를 이해하는 데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KAIST 교수, 서울대 교수를 거쳐 현재 고등과학원 석좌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 고등과학원' 수학과에는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을 수상하고 감동적인 서울대 졸업축사로 유명한 허준이 교수도 함께 재직 중이며, 강의보다는 '연구' 중심의 KAIST 산하 최고의 석학들이 모인 연구기관이다.

 

성경 본문 : 사 11:1~10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시편 8편 4절 말씀처럼 저희가 무엇이기에 저희를 살피십니까? 저는 감추고 하나님의 사랑만 보이게 하소서.

(시 8: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소아마비와 앉은뱅이... 어린 시절의 슬픈 초상

오늘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오직 내 삶에 나타나신 주님을 나누려 한다.

나는 2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서 걷지 못했기 때문에, 혼자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많았다. 내 평생이 땅바닥에서 올려다보던 저녁노을처럼 서글플 것 같기만 했다. 언제나 혼자였기에 어린 나이부터 고독과 외로움을 겪고 감내해 내는 법을 혼자 배워가야 했다. 

아버지조차 고된 농사일에 지쳐 술을 마신 날이면 “저런 쓸모없는 놈 제발 좀 갖다 버려라” 하며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어린 시절 내게 친구라고는 병아리들과 강아지, 마당에 지천으로 피어 있던 작은 꽃들이 전부였다.
바람이 많이 불던 봄이었다. 시골의 봄은 유난히 쌀쌀하고 황량한데, 나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려고 학교까지 찾아갔지만 끝내 거부당한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이 우셨다. 어머니 등에 업혀 있던 나도 서러운 마음에 눈물을 훔쳤다.
‘나는 배울 수 없는 사람이구나.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도 못 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집 밖으로 혼자 나갈 수 없으니 친구도 없었다. 대신 책을 많이 읽고, 이런저런 공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가끔 형과 누나가 마실 나갈 때 나를 업거나 자전거 뒤에 태우곤 했는데 그러면 나는 형, 누나들이 친구들과 노는 동안 자전거 위에 꼼짝 않고 앉아 있어야 했다. 겨울이면 온몸이 꽁꽁 어는 것처럼 추웠다.

 

11살에 재활원에 입소해서 소리 없이 신음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곳에서 보았다. 거기에서 사회적 약자로 살다가 맥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한없는 분노를 느꼈다.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를 어린 나이에 나는 이미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하늘을 부정하지도, 하나님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들의 고통에 대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하늘을 원망할 뿐이다. - 카뮈

 

그렇게 혼돈스러운 10대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시는 분을 처음 만났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예수님이 그때 처음 내게 심어준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대전에서 혼자 고학하며 어렵게 학교를 마친 둘째 누나가 재활원을 소개해줘서, 나는 열한 살 나이에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결코 안락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이기기도 전에, 옆에 있던 아이들이 싸움을 걸어왔고 짠 김치와 마른 단무지를 반찬 삼아 허겁지겁 밥을 먹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나는 서글픔에 목이 메었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많이 난다. 재활원은 군대와 비슷했다. 식사 후 그리고 취침 전 청소를 했고, 콩나물시루 같은 작은 방에서 여섯 명이 함께 잤다. 일주일에 한 번 재활치료를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시간이었다. 치료실에 들어가면 뜨거운 팩을 무릎 위에 놓고 20분쯤 살이 벌겋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준비가 되면 치료사 한 분이 어깨를 잡고 다른 치료사가 무지막지하게 힘으로 굳은 다리를 펴기 시작했다. 목이 쉬어라 울고불고해도 절대로 봐주지 않았다. 굳은 다리가 펴져야 보조기를 끼우고 목발을 짚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그러나 그곳 재활원에서 내게 공부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시고 “반드시 끝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격려해 준 최화복 선생님을 만났고, 그분 덕분에 일반 중학교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선생님은 나를 대전중학교로 보내려 했지만 학교 측은 나를 거부했다. 몇 번이나 찾아가 사정을 하셔야 했다. 중학교에서는 늘 전교 1, 2등을 다투며 상위권을 유지했다. 몸이 불편한 나를 잘 챙겨주는 고마운 친구들도 많았다. 
고등학교 입학 연합고사에서 만점을 받아 대전시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고 충남고에 배정받았다. 그때 허리 디스크로 어머니가 거동이 어려워져서 시골의 과수원을 헐값에 팔고 대전으로 올라오신 부모님 및 다른 남매들과 함께 살게 됐지만 공부할 수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TV가 크게 틀어져 있는 안방 한구석에서 밥상을 놓고 공부를 했다.
체력이 약하니 잠도 많이 잘 수밖에 없었고 쉽지 않은 시간을 거쳐,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도 도전할 수 있는 순수 자연과학을 전공으로 택하여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입학 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신림동 고시촌 지하 단칸방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캠퍼스의 낭만은 뒤로한 채 학업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었다. 특히 매일 강의를 듣기 위해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옮겨 다니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다. 책으로 가득 찬 무거운 가방을 등에 지고, 목발을 짚으며 관악 캠퍼스와 건물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비 오던 어느 날 어김없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캠퍼스를 걷던 내게 우산을 씌워준 한 누나를 통해 내 마음에 복음이 들어왔다. 그 누나의 소개로 기독대학인회(ESF)란 동아리에 들어갔고 함께 성경 공부를 했다. 그 무렵 서울에 올라와 함께 생활하던 어머니도 신앙을 갖게 됐다. 새벽기도 하시며 날 끝까지 돌봐주시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신 어머니의 신앙을 보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느꼈다.

천국(天國)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 = 하나님 나라 = 하나님의 통치

수학은 시작할 때 항상 '정의'를 먼저 한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하자.

오늘 성경 본문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와 그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창조물과 피조물이 하나 됨을 보여주는 매우 희망적인 내용이다.

 

하늘나라 즉 천국을 히브리어로는 '말쿠트(나라) 샤마임(하늘)'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서 '말쿠트 야웨'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천국을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든 헬라어든 모두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천국은 흔히들 생각하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또 시간 측면에서도 천국은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곳도 아니며 성도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그의 통치에 곧바로 들어가는 것이다.

  • 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과 연합된 자는 믿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며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다.

천국은 어떤 곳인가?

  •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 사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천국은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구해야 하는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라는데 그 천국은 어떤 곳인가?
이사야서 11장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분이 통치하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다음 절들이 이어진다.
메시아가 통치하시는 그 나라에서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다.

이 세상 나라는 어떤 곳인가?

나는 내 병과 신체적 어려움으로 인해, 사람들이 내 외모와 신체적 조건, 또는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판단하는 경험을 숱하게 해야 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됐다.
어떻게든 나를 학교에 보내보려고 나를 업고 초등학교에 가셨던 어머니는, 입학을 거절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등에 업고 소리 없이 우셨다. 내 꽁꽁 언 발을 어머니 호주머니에 넣어 녹이시며 '아가야 춥지?'하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내게는 가장 따뜻한 말씀이었다. 나는 그 이후 내 삶 속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의 냉대를 겪을 때마다 그 따뜻한 말씀을 항상 떠올리며 이겨냈다. (그 말씀은 내가 대학 1학년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내게 해주신 말씀과 같았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집에서 1시간 떨어진 초등학교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학교는 '장애인이란 이유'로 그의 등교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그날 교문 밖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들을 등에 없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슬픈 마음으로 어머니는 아들의 꽁꽁 언 발을 만지며 “아가야 춥지?”라고 따뜻하게 물으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그에게 다른 어떤 말보다 값지고 힘이 났으며, 세상의 힘든 일들이 비수처럼 다가왔을 때 기억나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은 어둠 가운데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그날 이후 아들은 평안해졌고,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7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눈물 속에서 세상의 비정함을 보았다. 그리고 차별 없는 나라가 그리웠다.

하나님 나라는 이러한 곳이다 - 중심, 포용, 공의, 정직

나는 언제나 1963년 8월 미국 워싱턴에서 행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I have a dream...' 연설문을 즐겨 인용한다. (이 연설의 전반부는 오늘 성경 본문인 이사야서 11장을 기반으로 전개된 것으로 유명합니다.)

https://governance.tistory.com/1095

 

I have a dream 마틴 루터 킹 목사

https://youtu.be/vP4iY1TtS3s?si=syXtKKkREy-WX28R 우리가 이곳에 모인 이유 - We have come to cash the check. I am happy to join with you today in what will go down in history as the greatest demonstration for freedom in the history of our nation. F

governance.tistory.com

나에겐 지금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one day), 내 아이들이 피부색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우리와 자녀들이 어떤 나라에 살기를 원해야 할까? 하나님 나라는 인종이나 피부색이 아니라, 오직 우리 영혼의 색깔(믿음)만이 중요한 나라이다. 오로지 우리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며 주께 가까이 있는지만 중요한 나라다. 우리의 재산이나 가족 배경이나 외모가 중요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한 나라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에 살고 싶지 않은가?

 

나는 대학 1학년 때,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다음 말씀을 읽으며 하염없이 울었다.

  •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요 8:15, 16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세상 사람들은 상처 속에 살지만,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곳이다.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시는 사랑 많으신 왕이 다스리는, 그 누구라도 포용되는 나라다.

  • 사 11: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을 위해 왕을 세우기를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왕이 오히려 그들을 착취할 것이라고 하셨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정의가 무너지고 왕국은 분열되었으며 결국은 각각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혼자 살아보겠다고 하는 모든 피조물의 종말이다.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 - 하나님의 구속사

인간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의 풍성함을 떠나 아담과 탕자의 궁핍에 빠진 길 잃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 나라로의 초대'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공의가 사라지고 진리가 무너진 나라를 살아보았는가? 나는 격동의 80년대를 대학 캠퍼스에서 살았다. 최루탄 자욱한 관악에서, 신림동 작은 다락방에서 성경 공부를 하며 희망을 찾아보기 어렵던 그때 그곳에서 나는 이사야서 11장을 계속 읽으며 언제가 임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기도했다. 언젠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해서 젊은이들이 독재와 싸우며 목숨을 버리지 않고 진리와 삶을 고민하는 날이 오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10년 후 내가 교수가 되어 돌아간 관악 캠퍼스에는 민주화의 바람으로 독재와의 싸움은 사라졌지만, 배금주의와 세속주의가 대신 자리 잡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와 정치 선동이나 사회보장으로 우리의 본질적인 욕구를 절대 만족시킬 수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필요한 피조물이며 그분의 생명으로 채워져야 하는 하나님의 시민이기 때문이다.

  • 사 11:6~8 그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어쩌면 이 말씀의 내용은 우리에게는 너무 유토피아 같은 그림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너무 분열되어 있어 전쟁의 소식이 전 세계를 흔들고, 소리 없는 경제 전쟁은 온 세상에 만연해 있다. 상위 1%가 이 세상 부(wealth)의 50%를 차지하며, 인구의 하위 절반이 전 세계 부의 1%도 갖지 못하고 있는 부의 편중과 불평등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절대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들이 한 상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는 나라다.

블로거의 개인적 생각 추가 :
이사야 선지자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성령을 통해 꿈을 꾸고 예언한 주전 8세기 중근동 지역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정복 전쟁의 광기가 휩쓸고 있던 때였다.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꿈꿨다. 이제 오늘 여기, 우리 삶의 어두움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 나라를 꿈꾼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회당에서 선포한 이사야서 내용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다.

  •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숫양의 뿔로 나팔을 만들어 희년에 불었기에 희년을 '요벨'이라고도 한다. 희년에는 빼앗긴 땅을 다시 되찾고 종이 자유인이 되고 빚도 탕감받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해이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쉼과 해방과 회복이 있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은가?

나는 파리에 자주 출장을 가는데, 내가 파리에 살 때 함께 성경 공부를 하다가 만난 노부부(프랑스 어느 대학의 전 총장 부부)가 그곳에 계시다. 파리에 갈 때마다 아무리 바빠도, 또 늦은 시간에라도 그분들을 늘 만난다. 나는 그분들에게서 나를 기다리시고 한없이 베푸는 하나님의 얼굴을 느낀다. 내가 그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처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는 언어와 국적과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는 모든 주님의 자녀들이 한상에서 희년을 누릴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희년을 선포하시는 왕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다. 절대자 하나님의 권능을 포기하고 이 땅으로 오셔서 부유하고 강한 자가 아닌 사회적 약자 곁에서 사랑으로 함께 하심으로 이 세상을 치유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절대자의 사랑으로 가득 차서 어떤 상처와 불의와 모순도 치유받고 모두가 하나가 되는 나라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까? 누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까?

  • 마 22:2~10 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누구든 하나님 나라로 '이 모습 이대로' 초대받았다

나님은 우리가 선하든 악하든, 우리 과거를 묻지 않고 천국으로 초대하신다.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부르신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 '헤세드'라고 부른다.

나는 어릴 때 바닥을 기어 다니던 '앉은뱅이'였다. 모두 내가 거지가 될 것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달랐다. 그의 나라로 부르시고 그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셨다. 우리 각자를 인생의 바닥에서 건져내주신 주님의 은혜를 꼭 기억하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천국을 경험한다.

  •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천국을 경험한다고 경고의 말씀을 하신다. 

누구나 천국으로 초대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이냐는 우리의 '의지적'선택이기 때문이다.

(우리 매일의 삶에서는 적당한 은혜와 회개의 가면으로 적당히 타협하고 감추어)
당신은 적당한 거룩함으로 2000년대의 바리새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향유 옥합 깨뜨린 여인의 눈물처럼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너무 간절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부로 삼는 사람이 될 것인가?
하나님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 나라는 실체가 되며 증거가 된다.

우리 믿음은 허상을 좇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오늘,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실상이요 증거가 된다.

  •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누가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는가? 인격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다.
자기 부족함을 예수로 채워야 하는 사람들, 너무 연약하여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것이다.

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이 힘든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이 땅에서 사는 것은 녹녹하지 않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큰 '고난'이 인생에 닥쳐올 때다.
내가 욥과 같은 고난 속에 있을 때, 어두움 속에 누워 지내며,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생의 상황에 대해서 여러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다음 말씀은 그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이다.

  • 욥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수학을 공부하고 여러 어려운 일들을 풀어 나가며 창조의 비밀의 파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며 그 비밀을 우리는 알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세상의 어떤 철학과 지식으로 누가 다른 말을 할지라도 내게 분명한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깊은 절망의 시간을 겪었으나...

나는 어려서부터 병원에서 보냈고 특히 대학 때는 1년간 몸이 아파서 누워 지낸 적이 있었다. 신림동의 햇볕도 들지 않는 반지하 어두운 곳에서 성경과 기도로 1년을 누워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왜 살아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삶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반지하 방에 누워있으면 창밖 길가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잘 들린다. 그들은 내 존재를 알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하나님을 모른 채 그곳에 누워있었다면 나는 영원히 절망 속에서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반지하방에 누워있으면 그곳으로 지나다니는 발소리가 잘 들린다. 재잘거리며 달려가는 초등학생들의 발소리, 출근하는 여성분들의 하이힐소리, 힘없고 고단한 가장들의 퇴근 발걸음.... , 그들은 매일 지나가는 길 아래 해가 닿지 않는 어두운 방에 누워있는 나의 존재에 대해 알까? 아마 오늘 죽어나간다 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나를 보며 미소 지어 주실 하나님을 모른 채 그곳에 누워있었더라면 나는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영영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봄과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몇개월만에 처음으로 방을 나와 바깥세상을 구경했다. 가을 하늘이 이렇게 투명하게 푸르렀던가 남은 잎 사이로 반짝이는 황금 햇살이 이렇게 눈이 부셨던가, 뺨 위를 스치는 공기가 이렇게 가슴이 툭 터지도록 시원했던가,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고 세상에 고통 없이 숨 쉴 수 있고 마음껏 태양빛을 즐길 수 있는. 그것보다 더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인식하지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것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가슴으로 채득 했다
  • 창 15:1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통해, 내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내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분의 사랑과 약속 없이는 우리는 이 세상에 살 의미가 없음을 알게 해 주셨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캠퍼스 선교단(ESF·기독대학인회) 활동을 하며 신앙을 키워나갔지만, 대학교 3학년 때 새로 맞닥뜨린 시련 앞에서 나는 또다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폐에 구멍이 나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숨을 쉴 때마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픈 고통을 느끼며 나는 회의에 빠져들었다. 퇴원하고 일 년 가까이 반지하방에 누워 있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대학에 와서도 몸이 아파 누워만 있어야 하는 현실에 화가 났던 것이다.
또 중학교 때부터 해결하지 못했던 의문 들, 기아·가난·억압… 이 원인 모를 고통들에 대한 분노가 커지는 것이었다. ‘도대체 산다는 건 무엇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고 나에게, 그리고 세상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시는 걸까.’ 많은 물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신앙에 의지하는 마음은 더욱 커졌고, 결국 ‘내가 겪은 아픔을 통해 또 다른 고통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보듬는 것이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해답을 얻었다. 그때부터 정말 거짓말처럼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그만큼 슬퍼했으면 됐다. 이제부터는 나를 평온한 삶에 놓아두자’하는 자기애도 생겼고요. 결국 신앙은 제 인생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나처럼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셨다

1년 동안의 깊은 절망의 시간을 통해, 아니 평생 안고 사는 내 장애를 통해, 하나님은 나처럼 이렇게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셨다. 나처럼 외로워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아기로 오신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라고 그 많은 고난과 아픔을 허락하셨음을 알게 해 주셨다.

우리 삶에 닥치는 이유 없는 고난을 이유 있는 고난으로 승화해야 한다. 주님의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

  • 히 11:35~38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이 고통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이 우리가 상속받을 하나님 나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만 무릎 꿇는 길은 좁은 길이지만 그 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힘내서 믿음의 경주를 마치자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 감사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염려대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살아가야 한다.

  •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내 몸이 병들고 약해도, 한없는 사랑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감사하자.

 

나는 다음 3가지를 감사하게 되었다.

1.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부모님을 주신 것을 감사한다.

부모님의 가난 속에서 느낀 어머니의 온기가 세상에서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이 되었고, 그분들의 가난으로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었으며, 그 가난으로 인해 나는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법을 배웠다.

혹시라도 부모에 대한 원망, 자녀의 부족함에 대해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라.

2. 나는 초등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감사했다.

학교에서 내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했던 연유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주도' 학습 방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리해 보이는 많은 것들을 좋은 것으로 바꿔주신다.

  • 롬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고전 1:27~29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내게 주어진 것을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모든 것이 은혜일 뿐이다.
또한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인해 슬퍼하지 말자.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된다.

나는 아직도 양발에 보조기를 차고 목발을 짚고 서 있어야 한다. 오래 서 있기 어렵고 이동이 매우 불편하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나는 항상 기도하게 된다. 내가 가는 그 길에 주님이 동행하여 주시고 돕는 자들을 붙여주시라고...

내 다리와 목발이 불편해 보여도, 열세 살 때 이것이 내게는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뜻깊은 걸음마였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속으로 기도하며 산다. 내가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매우 가까워졌다.

3. 내가 갖지 못한 것으로 감사하는 것도 배웠다.

내가 가진 것을 아직 못 가진 이웃을 위해 기도하라. 그것이 감사의 본질이다.

그리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간구하는 기도만 하지 말아라.

우리 모두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기를 소원한다.

  • 사 11:9~10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旗幟, 깃발 또는 표지)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주님의 나라, 완성된 그 나라에는 해함도, 상함도, 눈물도, 아픔도, 분열도, 이별도 없을 것이다.

사별한 자녀나 부모님 등도 주님 나라가 완성될 때는 모두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부활을 믿는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나도 건강한 다리로 덩실덩실 춤을 출 날을 기다리며 산다.

  • 시 30:11~12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마치기를 소망한다.

마무리하는 기도

주님, 우리를 어둠 속에서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여 주셔서 우리 삶 속에서 참된 사랑과 평화를 알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겉사람은 날로 쇠하여져도 속사람은 주님 안에서 더욱 새롭게 하소서.

우리 평생에 주님 따라가며 쓰러지지 않게 하소서.


다음은 오늘 간증에는 포함되지 않은, 인터넷에서 가져온 내용들입니다.

대학 때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이야기

나뭇잎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하는 그해 가을 어느 날, 구세주 같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느 때처럼 강의를 마치고 힘겹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비가 쏟아졌다. 우산을 쓸 수 없는 나는 오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걸어갔다.
갑자기 연한 화장품 냄새가 나는 듯했다. 누군가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었다. 여자가 혼자 쓰는 우산이라 둘 다 비에 흠뻑 젖었다. 나는 (대학원생)그 누나에게 말했다. “저는 이미 젖었으니 혼자 쓰고 가시지요.” 나는 나 자신에게 희망이 없음을, 그러한 나 자신을 포기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누나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학교 정문을 나설 때쯤, 그는 참았던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나는 순간 용수철 같이 답했다. “수백번, 아니 수천번 더 생각했을 겁니다.” 그 말은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 의미에 대해 나의 존재 목적에 대해 얼마나 많이 물었던가. 그 누나는 나를 신림동 단칸방까지 바래다주었다. “기독대학인회(ESF)라는 선교 동아리가 있어요. 그룹 성경공부가 있으니 참석해 보세요.”
며칠 후 나는 ESF사람들과 인문대 빈 강의실에서 요한복음을 공부했다. 형들은 내가 늙어 보인다며 재수생인지 물었다. 아마도 내 가시밭길 인생이 나를 겉늙게 했었나 보다. 나는 요한복음을 통하여 빛으로 오신 예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 세상의 로고스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고 미소지어주면 나는 평생 이렇게 살 수 있어요.”
내 책도 아닌데 그만 빨간 줄까지 긋고 말았다. 1985년 초겨울, 서울대 도서관에서 받은 감동과 은혜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주인공은 나이가 마흔이 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가난한 광부들을 돌보는 간호사였다. 어느 비바람이 치는 밤에 갱이 무너졌다. 광부들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다 그만 전봇대에 부딪쳐 척추를 다치고 만다. 그러나 몇 년 후 그녀는 다시 휠체어를 타고 그곳에 나타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광부들을 치료한다. 누군가 그녀에게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담담히 ‘하나님의 미소’ 때문이라고 했다.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 나에게 조용히 미소지어주는 한 분이 계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동안 수천 번 자문했던 ‘왜?’에 대한 의문의 거대한 빙산이 한순간에 스르르 무너졌다. 목발을 짚었지만 마음은 날아가고 있었다. 내가 외로우면 그분은 더 괴로워하셨다. 내가 슬픔에 빠지면 그분은 서럽게 우셨다. 낮은 자들의 고통을 그분은 온몸으로 견디시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었다. 나보다 수천 배, 수억 배 아파하셨을 예수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배우자 - 5년 만의 만남과 결혼

그는 서울대 전체 차석으로 졸업한 뒤, 전액 장학금을 받고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사랑도 찾았다. 대학 선교단에서 함께 활동하며 친하게 지낸 한 선배 누나로부터 지금의 아내, 박희령 씨를 소개받은 것. 당시 독일 쾰른에서 유학 중이던 그 누나는 어느 날 그에게 ‘첼로를 전공하는 아주 좋은 자매가 있으니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격려해 보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김 교수는 기쁜 마음에 바로 답장을 보냈고, 이후 두 사람의 순수한 교제가 시작됐다.
“둘 다 외국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많은 위로가 됐어요. 편지 내용은 주로 신앙, 교회, 주위 사람들 등 일상에 대한 거였는데, 아내의 편지는 착하고 겸손했어요(웃음). 기쁠 때나 힘들 때나 편지에 각자의 생각과 기도를 담아 보냈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내면을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은 지 5년이 지나서야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김 교수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드디어 박 씨를 만나기로 한 것. 친구와 함께 파리를 찾은 박 씨는 밝고 따뜻한 모습으로 그를 가족처럼 자연스럽게 대했고, 김 교수는 이날 박 씨와 함께 샹젤리제 거리를 걷고, 에펠탑에 올라가면서 속으로 ‘부디 이 여인이 나의 반쪽이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해 결혼했다. 박 씨 부모의 반대가 있었을 법하지만, 김 교수의 장인 장모는 딸의 의견을 존중해 그를 사위로 따뜻하게 맞아줬다.
다리가 불편하다 보니 그는 보통 남편들에 비해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장을 볼 때도 아내가 카트를 밀어야 하고, 천장에 있는 형광등을 갈 때도, 못질을 할 때도 다 아내가 팔을 걷어붙인다. 하다못해 아이를 안고 얼러줄 수도 없는 그는 늘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하다.

 

다른 인터뷰 언급 내용들

“포로로 끌려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처럼 우리도 삶 속에서 신앙을 지켜내려 노력한다면 하나님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보게 될 것”이라며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 삶으로 증명하자”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은 다 달라요. 하지만 분명한 건 어떤 인생이든 시작과 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 인생이 싫든 좋든 상관하지 말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아름답게 인생을 일궈내기를 바랍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특히 어려운 인생을 가진 사람들은 더욱더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세상의 부조리나 죄 혹은 죄인을 만나면 그것을 나눠버려 죄 사함과 용서, 흠 없는 자녀로 만듭니다. 또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하는 사람과 사회가 만나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무한대의 평강과 기쁨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 천국을 만듭니다." 
“기쁨의 공식의 원천은 내 삶에 동행하며 이끄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우리의 모든 지식, 모든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한이라 나누면 ‘0’이 됩니다. 그분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경건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됐으면 합니다.”

 

《기쁨 공식》 책의 “불완전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 내용 일부

나는 끔찍한 고문과도 같은 재활 치료 끝에 초등학교 6학년 때 보조기를 끼고 목발을 짚고 처음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대학교 3학년 초, 목발을 짚고 무거운 가방을 멘 체 너무 많이 걷다 보니 갈비뼈와 폐가 부딪쳐 폐에 큰 구멍이 났다. 의사가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기도원 한 구석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왜 나한테만 이렇게 가혹하신가요? 항상 아프기만 하고.. 아무 쓸모없는 나를 데려가 주세요.”
그때 문득 등 뒤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 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
그 순간 자아가 꺾이며 회개가 터져 나왔다. 욥처럼 하나님의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처럼 연약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셨다.
나는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 ‘기도하는 법’과 ‘성경 읽는 법’을 배웠다. 고통하는 가운데서도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육신의 나약함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인해 『약한 데서 강해지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예수님은 나에게 ‘세상의 모순과 절규’를 알려주었고,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방법’을 알게 하셨다.
세상이 나를 죄인 취급할 때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시며 당신이 하실 일을 계획하셨다.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질그릇이 되게 하신 것이며 나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이름과 선하심을 나타내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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