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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철 목사 - 다니엘 기도회 23. Day 4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3. 11. 4.

예수님께서 나를 보셨다

강사 : 양진철 목사

- 시각장애 청소년·청년 사역자
- 지저스아이즈 선교회 (Jesus Eyes Ministry) 지도목사
- 애능중앙교회 청년부 목사, KOSTA 강사

 
성경 본문: 요한복음 9:1-3, 로마서 5:8
 
소개 영상으로 먼저 시작한다.
https://youtu.be/UXZKcYALEho

시각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에게 묻습니다. '딱 하루만 볼 수 있다면?'
"엄마와 동생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누나가 예쁘다는데 예쁜 게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요. 누나를 보고 싶어요."
"내 모습을 직접 거울로 보고 싶어요."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이 내가 혼자 상상한 것과 비슷할지 너무 궁금해요."
"학교 친구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요. 하루라도 볼 수 있다면 나도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싶어요 - 사진과 동영상 등 알고 싶은 내용들을 모두 보고 싶어요"
블로거 개인의 부탁 : 무척 은혜로운 동영상이었습니다. 양 목사님 사역을 돕는 마음에서도 '다시청TV'의 구독, 좋아요, 그리고 링크를 널리 나누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양진철 목사님 간증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20대 초반에 시각장애인 사역에 대한 소명을 받고 지금까지 하나님 은혜 가운데 귀한 길을 걸어오고 있으며, 특히 청년 사역에 집중하여 즐겁게 사역하고 있다.
나는 시각장애인 사역을 하는 목사이지만, 오늘 스물다섯 분의 농인(聾人, 청각장애인) 사역 목회자들께서 이 자리에 오셨다고 하는데 크게 환영한다. 시각이든 청각이든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이지만 함께 연합하여, 육체적으로는 건강해도 영적으로는 눈이 어둡고 듣지 못하는 영적 장애인들의 눈을 뜨게 하는 사역을 해나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촉망받던 불교 고교생

금년 37세인 나는 부산에서 태어났다.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종립고등학교(해동고?)를 다녔는데, 불교학생 동아리에 가입하여 임원활동을 했다. 한마디로 불교계의 촉망받는 다음세대였다. 108배를 매일 10분 만에 했고, 9시간에 걸쳐 3000배를 하기도 했다. 불교학생회 임원들만 가는 캠프에도 참여하여 수료증을 받았고, 반야심경은 불교의 ‘주기도문’ 같은 것인데, 매일 읊었다. 
내가 이렇게 부처와 관세음보살을 붙들고 살았던 것은 내 안에 상처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황반변성, 부모님의 이혼, 발달장애 동생의 3중고 속의 청소년기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막 2학년이 되었을 때다.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한쪽 눈을 뜨면 방안의 책상이 안 보이고 두 눈을 뜨면 보였다. 그런 상태가 여러 날 계속되어, 동네 안과에서 소견서를 받아 대학병원에 가서 여러 검사를 받았다. 매우 힘들고 어려운 검사들의 결과, 의사 선생님은  이미 우안의 시력은 황반변성으로 상당 부분 상실하였고, 좌안에도 병변이 있어 언젠가는 실명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 1.0 1.0의 좋은 시력의 눈을 갖고 있다가 실명될 수 있다는 정식 진단을 들으니 너무 낙심되고 두려워 잠을 잘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아직도 눈을 잘 관리해 나가고 있다.)
 
내게는 금년에 서른한 살이지만 지능은 3세에 불과한 동생이 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진수는 태어날 때부터 뇌에 심각한 장애가 있었고 중증 자폐성 장애까지 갖고 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동생의 장애로 인해 더욱 예민해진 부모님은 서로에게 말을 함부로 하며 자주 다투셨는데, 집안의 모든 유리창이 다 깨지고 유혈이 낭자하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집을 나가셨고 두 분은 끝내 이혼하셨다.
당시 중학교 1학년으로 어렸던 나는 만 7세 되던 더욱 어리고 정상이 아닌 내 동생을 홀로 보살펴야 했다.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셨기 때문에 일감을 따라 며칠씩 집을 비우시는 경우가 잦아서 동생은 내가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아, 매일 아침마다 동생을 챙겨 먹이고 입혀 학교를 보낸 후에야 비로소 나도 학교로 서둘러 갔다가, 하교 시에는 다시 동생을 데려오는 어려운 생활을 해나갔다.

그래서 성공하고 싶었다. 중증 장애를 가진 내 동생을 평생 돌보기 위해서라도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짬짬이 열심히 공부했고, 덕분에 중학교 때는 1,2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황반변성으로 언젠가 실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보니, 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중학교 때는 성실하여 개근을 했지만, 눈에 이상이 생긴 후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내내 잦은 결석을 했고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수업시간에는 늘 엎드려 있었고 '선생님은 선생님 할 일 하세요, 저는 제가 할 일 할게요.'라는 마음이었다.

찬양으로 위로를 얻다

아픔과 눈물의 이야기를 접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눈물과 아픔의 '과정'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함부로 조롱하며 이야기한다.
그런데 한 친구가, 그렇게 수렁 속에 빠져 있던 나를 다르게 대해 줬다. 내게 노래 한 곡을 들어보라며 자기가 듣고 있던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아 줬는데, 생전 처음 들어본 노래였다. 바로 송명희 시인이 작시한 곡 '나 가진 재물 없으나'였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그 가사 한 구절 한 구절이 정말 나를 알고 쓴 것 같았다. 그야말로 내 가슴에 와 박혔다.
우리 집은 가난하였고, 성적도 떨어졌으며, 눈은 실명 과정에 있었다. 모두가 내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우울한 마음도 당연했다. 며칠 만에 집에 돌아오면, 발달장애인 동생은 '어버버' 밖에 못하며 어두운 방에서 바닥에 자기 머리를 박아대는 전형적 자폐성 행태를 보이고 있었고, 큰아들인 나는 실명 위기 속에서 낙심하여 있었으니, 약주에 취한 아버지를 내가 파출소에서 모시고 온 것도 부지기수였다.
(오늘은 특히 이 자리에 동생도 와 있고 가족들이 여럿 함께 있다 보니 감정이 북받친다.)
 
하나님께서는 그 암울하던 고교 시절에 그 찬양을 통해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 주셨다.
우리 학교에는 법당이 있었는데 마룻바닥이 있었는데 덕분에 그곳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기에 나는 그곳에 즐겨 갔다. 나는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늘 그 법당에 가서 이 노래를 들었는데, 도저히 원래 가사 그대로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어서 하나님을 부처님으로 바꿔 개사해서 불렀다. 
'공평하신 부처님이~'

서울에서 CCC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여 상경했다.
내가 서울로 온 후에도 동생은 늘 전화를 했다. 우리의 대화는 동생이 ‘형, 있다!’라고 말하고 내가 ‘그래, 형 있어!’라고 대답하면 동생이 전화를 끊는 단순한 것이었지만, 그렇게 하루에도 숱하게 걸려오는 동생의 전화를 받으면서 동생 걱정 속에서 학교를 계속 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죄인 된 마음이 들어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 집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친구 하나가 내 동생을 위해 기도해 준다며 동아리 방으로 인도해 주었는데, 그곳이 바로 CCC였다. 그곳의 친구들이 내 동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들으며 내 마음도 점점 열려 갔다.
10,00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수가 모이는 CCC 캠프에 갔는데, 실내는 장소가 비좁아서 야외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어느 날 비 내리는 야외 예배 중에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났다. 십자가 고통 당하사.....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짓밟힌 장미꽃같이 되신 예수님이 내 안을 가득 채우셨다. 내가 짓밟힐 때도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셨고 현재와 미래까지도 언제나 함께 하실 것을 믿게 되었다. 내가 오래전 고등학교 법당에서 '이것이 나의 죄 때문입니까, 업때문입니까'라고 수없이 내뱉던 그때도 항상 나와 함께 계셨고, 십자가 고통당하사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은 늘 함께 하고 계시고 지금도, 이후에 죽는 순간까지도 함께 하신다는 예수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고백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강권적으로 임하시며, '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강렬하게 만날 수 있었다.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오니,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교 학생회 후배들이 맨 먼저 생각났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중 몇몇은 진중하게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아이들도 있다.

동생과의 서울 생활, 그리고 애능중앙교회

초등학교 졸업반 나이가 된 동생을 서울로 데려와서, 안국동의 특수학교에 입학시키고 학교 근처에 반지하 셋방을 얻어서 동생과 함께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형편이 나아진 것을 없었지만, 내 안에 예수 그리스가 계시니 견딜만했다. 그리고 동생을 위해 장애인부가 있는 교회에 출석하며 평일에는 동생을 돌보며 함께 하는 시간들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혹시 내 눈이 갑자기 나빠지면 나와 동생을 누가 책임져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는데,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내 동생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곳은 교회라는 생각에서 시각 장애인이 있는 공동체를 찾았고 마침내 ‘애능중앙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내 나이 스무 살 때였다.  내 삶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애능 중앙 교회 바닥에는 노란색 시각장애인 점자유도블록이 교회당 바닥 전체에 설치돼 있다.
계단 손잡이와 벽 곳곳에는 점자 안내판이 있다. 
예배당 입구에는 일반 주보와 '점자가 가득 찍힌 하얀색 A4용지 크기의 점자 주보'가 놓여있다.
뿐만 아니라 좌석 사이마다 구비된 점자 찬송가와 교독문은 얼핏 백과사전을 떠오르게 하는 두께와 크기다.
(일반 교회에도 이런 배려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에서의 찬양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또 애능중앙교회는 교회당이 작아서 복도에서 맹인 성도들 끼지 자주 부딪히는데, 그때마다 서로 웃으며 지내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곳에서 말할 수 없는 하나님 은혜를 경험하며 세례를 받고 청년부 임원이 되었고 또 교사로 지내며, 각자의 사연과 원인은 다르지만 어린 나이에 실명한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을 섬기라는 소명을 갖게 되어 신학을 공부하고 지금까지 시각장애 청년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다.
이 사역을 오랫동안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많은 열매를 허락하셨다. 제자들 중에서 지금은 청년부 리더로 섬기는 친구들이나 찬양단으로 섬기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과 즐겁게 사역하고 있다.

장모님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

제 장모님은 자주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위, 나는 어렸을 때, 매우 예쁘고 귀여웠어~"
그냥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우리 장모님(영옥)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어느 날 '엄마가 저녁 준비 해놓을게 조금만 놀다 와~'라는 말씀에 소꿉장남을 나갔다가, 잘 모르고 불발탄을 가지고 돌에다 내려쳤는데 그것이 폭발하여 손가락들이 상당 부분 잘라지고 몸에는 흉터가 생겼고, 최악은 박힌 파편 때문에 두 눈의 안구를 적출해야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밖에 나갈 수도 없었지만 다행히 미션 스쿨 계열의 맹아 학교에서 안마를 배우고, 예수를 만나고, 또 시각장애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장모님이 임신을 하게 되었을 때 '내 아이는 부모처럼 맹인이 아니게 해 주세요. 믿음의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마침내 딸을 출산하였고, 그 딸이 너무 예쁘다고 사람들은 얘기했지만, 엄마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이가 걸어 다니기 시작했을 때는 딸의 다리에 방울을 달았다고 한다. 계단과 가스레인지 등 위험물에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경계하며 사랑으로 딸을 키웠다. 그 딸이 자라서 애능교회에 모녀가 함께 나오게 되었고, 그 딸은 나를 만나 결혼을 했다.
어느 날 장모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만난 하나님은 폭발 사고 후 맹인으로 살아온 그 고통과 아픔보다 더 높으신 분이셨고, 내가 만난 하나님은 남편 없이 맹인 여성 혼자 두 딸을 키우며 겪은 아픔보다 더 큰 분이셨단다. 이제 하나님 은혜를 자녀들 앞에서 고백하고, 그 믿음이 딸과 사위와 손녀들에게 이어져 예수 믿는 가정을 이루게 하신 것을 감사해."
 
이런 간증은 우리 장모님 뿐만 아니라 애능교회 성도들 모두의 이야기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원주, 동두천, 경상도 등 멀리에서 예배를 사모하여 케인(cane. 맹인용 스틱)을 짚어가며 매주 나아오셔 눈물로 기도하는 성도들과 사역자들이 함께 한다.
선배들의 이렇게 뜨거운 신앙을 전해주는 사역을 하기 위해 Jesus Eyes Ministry라는 선교회를 출범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되어 사명자, 선교자, 기도자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만든 선교회다.
각자의 캠퍼스와 직장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기도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귀한 제자들과 함께 연합하여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연합의 기도회 운동을 시작하려 한다. 영적인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믿음의 친구들이 그 은혜를 선포하는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한복음 9장 1~3절

  •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 요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이 맹인을 먼저 보셨다. 예수님께서 나를 보셨다. (1절)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맹인을 보셨다.
그 맹인은 앞이 보이지 않으므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
맹인은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맹인을 보셨다. 일평생 흘리는 그의 눈물을 보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적인 맹인이어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맹인인 우리를 보셨다.

세상이 맹인을 바라보던 시각은 폭력이었다. (2절)

제자들은 묻는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입니까?'
이것을 고등학교 때 불교를 믿고 있던 내 의문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었다. 중증 자폐성 발달 장애인으로 태어난 동생과, 사랑하는 부모님들이 끔찍하게 다투시고 가정이 파탄 난 것 등이 모두 내 업(業)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자들의 시선은 예수님의 시선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그 시대가 맹인을 바라보던 시선이었다. 
남의 일이라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평가하는 소리들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그 소리에 얼마나 무너지고 상처받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3절)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큰 위로를 받는다.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 사람이 맹인 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함께 외쳐보자.

“나는 하나님의 듣보잡입니다.

 
무슨 뜻인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잡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아닌 세상 사람들의 말을 듣.보.잡. 하며 살던 삶에서 벗어나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확증하셨느니라

  •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게 레마(Rhema)로 주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묵상 중에, '세상에서는'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이 세상에 쓸모가 없어지면 죄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녀가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는 죄를 지은 것은 아닌데, 죄인 아닌 죄인이 된다.
회사에서도 능력이 없으면 죄는 아닌데, 죄인 아닌 죄인이 된다.
그러나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를 '메시지 성경'을 통해 다음과 같이 의역했다.

  • 롬 5:8 (메시지 성경)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아무 쓸모가 없을 때에 당신의 아들을 희생적 죽음에 내어주심으로, 그렇게 우리를 위해 당신의 사랑을 아낌없이 내놓으셨습니다.

어느 기사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12달러를 주고 금붕어를 산 호주 여성이 있었다.
그 금붕어가 너무 예뻐 수초 등 여러 부속물도 사서 1년 동안 키웠다.
그런데 그 금붕어가 돌을 삼켜서 곧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동물병원에서 그 금붕어를 고치기 위해 그녀는 500달러를 써야 했다.

일반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겠으나 나는 너무 이해가 된다. 다른 이유 없다. 그 금붕어는 그녀에게 ‘내 금붕어’였기 때문이리라.
 
이 기사를 보며 내 동생 진수가 생각났다. 특수학교 졸업 후 법적 나이로는 성인이 된 진수를 나는 진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여러 장애인 기관에 보냈지만 번번이 퇴출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수를 포기할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다. '내 동생이니까…'
 
우리가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 세상은 우리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모두 너무 연약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주시고 이끌어 가신다.
자기가 아무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그때도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자.

나는 삶으로 설교하고 정직하게 선교할 것이다. 말로만 번듯한 목회가 아니라 솔직한 삶으로 설교하겠다.
기도 :
내가 쓸모없을 떼 세상은 나를 퇴출시켜도,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김은호 목사님 정리와 기도.

1. 주님께서 맹인을 보셨는데,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그것은 그 맹인의 인생에 배인 아픔과 눈물을 보신 것이었다. 우리도 주님의 관점으로 못 보던 사람들을 보게 하소서. 그들의 눈물과 아픔을 보게 하소서.
2. 우리가 아무리 연약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변함없으며 끊을 수 없다. 이것으로 당당하게 살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수화 찬양과 기도

날마다 다니엘 기도회를 통해 부어주시는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 Day 4는 특별히 환우들을 위한 기도제목과 간증, 그리고 초청 손님들의 날이었습니다.
현장 예배에 농인(청각장애인) 사역을 하시는 25명의 목회자가 참석하셨고 강단에서는 그분들을 위한 수화통역이 시종일관 계속되었습니다. 그 뒷자리에 앉아 있던 저로서는 수화로 드리는 찬양과 기도를 처음 보았고, 마음에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 감동을 나누고 싶어서 어제 찬양 실황에서 수화 부분만 발췌해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강단이 아닌 부분은 농인교회 목사님들의 찬양 장면입니다.
https://youtu.be/Vx-oAQTHniY?si=R7zpUtRKKYRmOteA


애능중앙교회 한소리 찬양대의 2023.11.05 주일예배 찬양입니다.

양진철 목사님의 간증을 듣고 애능중앙교회 맹인 성도들의 예배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던 중에 유튜브에 막 올라온 찬양의 링크를 덧붙입니다. 간증 본문처럼 예수님이 이 분들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예수님 옆자리에서 함께 찬양을 듣는 마음으로 들어봅니다.

https://youtu.be/FR-QTNh8zIk?si=YVDx8atLWnyv722n


참고 인터넷 자료 - 국민일보 기사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8822009&code=61221111&cp=nv

 

“다음세대 시각장애인 위한 사역자 절실해”

서울 마포구에 있는 애능중앙교회(장찬호 목사)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다. 이 교회의 유일한 다음세대 시각장애인 사역자인 양진철(37) 목사를 지난 23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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