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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교 목사 - 다니엘 기도회 23. Day 7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3. 11. 7.

내가 사랑할 예수님을 찾아

강사: 서진교 목사

- 작은예수 선교회 대표
- Next 세대 Ministry 주강사
- 「작은 자의 하나님」, 「예수행복학 개론」 저자

알코올 의존의 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자퇴를 했다.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임단에서 게이머(gamer)로 활동하다 주님을 만나 신학의 길에 들어섰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만난 노숙인을 통해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살라."는 소명을 받았다. 본인부터가 지극히 작은 자였고, 그런 자신을 만나 준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 노숙인과 장애인을 마음에 품고 살았다. 목사가 되기까지 1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네 번의 퇴학을 거치고, 깊고 음침한 광야 동굴을 지나와야만 했다. 교회 사역을 마무리하고 〈함께하는 재단〉 굿윌스토어'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장애인 자립 사역을 시작했다. 교회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증하면 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우리나라 교회 중 10%만 기증에 동참하면 10,000명의 장애인이 집 밖을 나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일만 장애인 파송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와중에 어린 딸아이가 소아뇌전증과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다. 아픔이 곧 사명이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서 자신과 같은 아픔을 가진 장애인 가족들을 돕기 위해 사역하고 있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 그리고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주의 길을 걷고 있다.

성경 본문 : 마태복음 25:31-40

지극히 작은 자 = 소외된 이웃들 = 예수님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유언처럼'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 모든 민족을 모으신 후 구원받은 의인들과 구원받지 못한 악인들을 구분하신다. 의인들에게 나를 사랑하고 섬겼으니 상을 받으라고 하시자, 의인들은 예수님을 섬긴 적이 없다며 의아해한다.

  •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의인들조차 예수님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이 바로 예수님이었던 것을 그때에 비로소 깨닫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언제나 지극히 작은 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셨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늘 마음에 두시고 그들을 먼저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역시 지극히 작은 자인 내게도 찾아오셨다.

중독자(中毒者)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알코올중독으로 참 힘든 시간을 보내셨다. 가장으로서 돈도 벌어오지 않고, 술주정과 폭행을 일삼는 아버지 때문에 참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기도와 헌신으로 어려운 시기를 잘 지나오셨다. 다들 목사님의 간중에 감동과 도전을 받느라 눈물을 훔칠 테지만, 나는 부러웠다. 그 목사님이 괜히 부러웠다. 어머니 한 분이라도 반듯하게 서 계셨다는 것이 부러웠다. 부모님 둘 중에 한 분이라도 비빌 언덕이 되어 주셨음이 몹시도 부러웠다.

왜냐하면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알코올 중독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을 안 하셔서 집에 먹을 것도 거의 없었다. 내 키가 193cm인데 그때 잘 먹지 못해서 더 크지 못한 것 같다.(유머? ^^)

끊임없이 술을 먹고 문제를 일으키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속이 상하여 술을 마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항상 똑같은 사고를 반복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끌려다니며 화목제물로 끊임없이 나를 밀어 넣는 어머니 사이에 낀 아이로 자랐다. 아무런 소망도, 탈출구도 없는 어두운 집에서 자랐다. 어릴 때는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점차 눈물도 사라졌다. 아무리 울어도 봐주는 사람이 없고, 소용도 없었다. 눈물 흘린다고 바뀌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내게 눈물은 사치였다. 나는 그렇게 표정도, 생기도 없는 우울한 아이로 자랐다.

게임 중독

중학교 3학년 때는 모든 친구들이 PC방에서 스타 크래프트를 즐겨했다. 어쩌다가 나도 PC방에 따라가서 게임을 했는데 내가 게임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과 3개월 만에 나는 우리 학교에서 스타 크래프트를 가장 잘하는 학생이 되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세계 랭킹의 최상단까지 올라갔다. 엄마의 간곡한 부탁을 생각하여 가급적 고등학교는 졸업하려 했으나 결국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고 자퇴한 후, 서울의 프로 게임단에서 하루 20시간씩을 게임만 했고, 나는 게임으로 무척 유명해졌다. 그동안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내가 게임의 세계에서 왕이 된 것이다.

예수님을 '가슴으로' 만나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어느 날 밤새 게임을 하다가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어? 새벽기도 시간이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어나 걸어서 새벽 기도회에 갔다. 6개월 만에 처음으로 교회를 간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안아주는 듯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교회의 모든 예배를 다 나갔다. 중고등학교 때도 교회를 나갔기 때문에 수련회에 몇 번 갔었지만, 눈물 흘리며 은혜받는 친구들과는 대조적으로 나는 눈물이 없어서 수련회에 대한 좋은 추억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청년부의 겨울 수련회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따라갔다. 첫날부터 마음에 감동이 왔고 강사 목사님의 안내에 따라 회개기도를 시작했는데, 내 삶과 내 죄가 파노라마처럼 눈에 보여서 눈에 보이는 대로 회개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막혔던 내 눈물샘이 마침내 터졌다. 그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슴으로' 믿어졌다.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했었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던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눈물과 웃음을 되찾았다. 어둡던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였다. 알코올 중독 부모님과 가난한 집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이 바뀌니 모든 것이 새로웠다.

 

목회 소명을 받아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보고 수능을 거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인생의 모토로 삼고 지극히 작은 자들을 섬기는 삶을 시작했다. 청량리의 노숙자들을 찾아가 빵을 주고 식당에 데리고 가고 손 잡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신학교에서 장애인 봉사 동아리에 들어가 장애인을 돌보는 사역도 하고, 방학 때는 별도의 장애인 캠프나 소록도 방문도 했다.

노숙인 (露宿人) - "교회 가면 사람들이 싫어해서 못 가요"

금요일에는 신학교 친구들과 함께 삼각산에 올라가 산기도를 했었는데, 어느 날 삼각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발견해서 부축해 일으켰다.  정신을 차리셔서 어디에 사시는지 물었다. 주저하던 아저씨가 가리킨 길 건너편에는 금요일 저녁이어서 불 켜진 교회가 하나 있고 그 뒤로 삼각산 자락에 허름한 천막이 하나 있었다. 그분이 노숙자임을 알게 되었고, 그 날씨에는 길 위도 그 천막도 추위를 이겨낼 수 없는 곳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길 건너에 불 켜진 교회를 가시라고 했더니, 그분은 " 교회 가면 사람들이 싫어해서 못 가요."라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가지고 있던 적은 돈이나마 드리고 손을 잡고 기도해 드린 후에 헤어졌다. 동료들의 뒤를 쫓아 산에 올라갔는데, 그날은 다른 기도는 하지 않고 오직 그 아저씨 한 분만을 위해 밤새 기도했다.

사람들이 싫어해서 죽을 형편에 처한 노숙자라도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곳, 그곳이 교회였다. 단지 길 건너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교회가 동일할 것이었다.

예수님이 마구간 먹이통에서 태어나신 이유 - 목자들도 메시아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날의 우리 교회들과는 다르게 사셨다. 탄생부터 예수님은 초라했다.

  • 눅 2:11~14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할 때, 여기서의 '너희'는 '목자들'이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비천한 처지였지만, 메시아 탄생을 경축하는 천군천사의 영광스러운 찬양의 목격자는 목자들이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를 보았다는 감동에 더하여, (양 떼들 틈에서 잠을 자는 목자들 자신들처럼) 마구간 동물들 사이에서 잠드신 아기 메시아를 보고 더욱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왕궁이었다면 목자들이 메시아 탄생을 알았더라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목자 같은 사람들을 위하여 오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지금의 노숙자처럼 천대받던 사람들이 목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은 먼저 그들을 만나주시기 위해 누구라도 찾아올 수 있도록 가장 천한 마구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지극히 작은 자를 먼저 찾아가신 예수님 - 병든 자, 십자가, 강도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에도, 가만히 앉아서 밀려오는 군중들에게 전도하신 것이 아니라, 항상 낮은 데와 지극히 작은 자가 있는 곳을 찾아서 다니셨다. 그들을 먼저 찾아가셔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수가성 여인이 그러했고, 삭개오가 그러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를 다 모은 후 다음 말씀을 하신다.

  • 요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곧 십자가를 지시고 죽을 것을 아시면서, '기쁘다'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 말씀 직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심한 통곡과 기도를 하셨다.

  • 막 14:36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던 예수님의 예외적 기도인 '옮겨 주시기를 간구'할 정도로 십자가는 무거운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더 큰 사랑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셨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모든 부모는 자식이 아프면 자신이 자식을 대신해서라도 자식이 나을 수 만 있다면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다는 마음을 갖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음을 먹는다고 대신 아플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못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대신하실 수 있었다.

  •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을 통해 우리를 살리실 때가 다가왔기 때문에, 피하고 싶은 무거운 십자가 지시는 것을 기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처음부터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기뻐하셨다.

 

갈보리산 십자가 위의 예수님 양 옆에는 강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예수님은 군중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신다. 그 간구의 결과로 옆에 있던 강도 하나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다.

  • 눅 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 마지막 순간에 강도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 오늘 본문에 나온 가장 작은 자들 여섯 유형의 마지막은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예수님은 감옥에 갇힌 자를 넘어 사형 집행 현장의 사형수까지 구원하신 것이다. 목자로 시작하여 사형수로 마친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에서 예수님은 시종일관 작은 자를 위해 사셨다.

노숙자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교회가 이땅에 있을까?

나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상처도 많이 받았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다.

신림동의 희년 중앙교회에서 사역했었다. 작은 개척교회였지만, 매주 빵과 우유를 사서 노숙인들에게 제공하는 사역을 했다. 그 교회 목사님이 '노숙인 중의 큰 형님'을 교회로 인도했다. 그리고 그분이 술을 끊겠다며 교회에서 2년간 기거하더니, 마침내 술을 끊고 자립해서 아파트 경비를 하고 있다. 나는 거기에서 복음의 능력을 보았다. 복음은 도저히 바뀔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누구든, 모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분으로 인해 노숙인들이 많이 교회로 찾아오셨는데 대개는 취한 채로 오셨다. 예배에 방해가 될 때도 있지만 우리 교회는 그분을 쫓아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분들에게는 복음을 들을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노숙인은 행려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즉 갑자기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예배는 언제든 마지막 예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예배 중이던 노숙인 두 명이 서로 주먹다짐을 하며 싸웠다. 나는 보수적 교단인 '합신' 측 목사이기에 예배가 소란해진 것으로 인해 마음이 무척 상했다.  마음이 심란한 중에, 예전에 삼각산에서 만났던 노숙인 생각이 났다. '하나님 노숙인이 언제라도 들어올 수 있는 교회를 개척하거나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내 기도였고, 나는 기도 응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원망이 감사로, 아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경험을 했다. 

나는 깨달았다.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예배에 집중할 수 없는 사람들 곁을 지켜주는 예배에도 특별한 은혜를 하나님이 부어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애인 (障碍人)

하나님께서는 나를 장애인의 자립을 돕는 굿윌 스토어에서 일하게 하셨다. 

굿윌스토어는 아름다운 가게와 똑같이 기증품을 판매한다. 그런데 한 가지가 다르다. 바로 장애인이 직원으로 일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자립한 장애인 직원들과 함께 기쁨으로 일하고 있다. 그들의 자립을 돕는 일이 너무 행복했다.

내 아이보다 하루라도 더 사는 것이 소원

그런데 3년 전에 내 3살 된 딸아이가 뇌전증과 발달장애 진단을 받았고, 지난달에는 자폐아 진단을 받았다.

장애인 사역을 하던 내가 이제는 '이해당사자'가 된 것이다. 부모로 인해 무척 힘든 삶을 살았는데 자녀를 통해서도 나를 힘들게 하신다는 생각이 들고, 왜 내게만 시련을 주시는지 원망도 잠시 했다. 그러나 금방 사라졌다.

왜냐하면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는 자기 자식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아이가 장애인이 아니에요'라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남들과 똑같은 것이다. '장애인'이 아닌 자녀를 둔 여느 부모가 자식 보듯이 너~무 소중하고, 너~무 존귀하고 너무나 예쁜 '내 새끼'로 보이는 것이다.

 

단, 딸 지휼이의 앞날에 대해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사회적 편견이었다.

장애아를 가진 부모들 사이에서 도는 말이 하나 있는데 '고등학교 졸업하는 날은 사형선고 날이다'라고 한다. 왜냐면 졸업과 동시에 모든 보호와 지원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에 내던져진 장애인들은 사회의 냉대와 차가운 시선으로 인해 스스로 숨어버리게 되고 불 꺼진 방에 누워있는 그들을 돌보는 것이 평생의 사명이 되어버린 것이 장애인을 둔 부모들의 현실이다.

"내 소원은 아이보다 하루라도 더 사는 거예요" 장애인 자녀의 평생을 책임지는 것이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의 소원이 되어 버렸다. 그런 극들이지만, 아이가 홀로 살아갈 수 있다면 부모 마음의 한이 풀린다. 굿윌스토어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 장애인 자녀들이 매일 출퇴근하는 모습을 보며 무척 기뻐하신다.

일만 장애인 파송운동

일만 장애인 파송 운동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교회의 10%만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기증하면, 집에 있는 만 명의 장애인을 세상으로 파송할 수 있다.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만 명의 장애인이 일을 할 굿윌스토어가 전국 방방곡곡에 생긴다면, 수십에서 수백만의 비장애인의 편견이 해소될 수 있다. 굿윌스토어에서 자연스레 장애인과 '만남'으로 우리 안에 있는 편견을 벗겨낼 수 있다.

주님은 추수 때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과부들을 위해 놓아두라고 하셨다. 이 계명은 지금도 적용된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기증할 때 장애인을 자립하게 한다.

김경호 목사는 경기 북부에서 숲스토리(https://soopstory.net/)를 운영하신다. 정신장애인을 바리스타로 훈련시켜 자립하게 하는 히즈빈스(https://www.hisbeans.com/)... 장애인들이 빵을 만들게 하는 큰숲베이커리, 큰숲 빵집 (안산에 3개 점포)... 이런 곳을 찾아가셔서 기증을 하거나 물건을 구매하면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일터들이 생긴다. 1만 명이 일할 장소가 생긴다면 비장애인의 편견이 해소된다. '만남'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된다. 만나면 그냥 똑같은 사람들이다. 가서 돕고 기증하고 구매해 주기를 바란다.

 

지난주에 굿윌 스토어의 사목직을 사임했다. 딸을 돌보느라 정상 출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굿윌스토어를 떠났지만 일만 파송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딸아이가 저기 뒷자리에 와 있는데, 우리 아이가 맞이할 세상이 더욱 좋은 세상이 되도록 앞으로도 끝까지 걸어가겠다.

예수님을 찾아서 - 낮은 곳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나자

결론이다.

아내와 연애할 때, 아내는 20대의 나이에 고등학교 교사를 하며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 박사 과정만 마치면 모든 자리가 보장되어 있었다. 반면, 당시에 나는 신학대학원을 자퇴하고, 변변한 직업도 없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가난한 나를 살뜰하게 여러 모로 챙겨 줬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아내가 목도리를 사 왔는데 키가 큰 내게도 충분하게 긴 목도리였다. 백화점 한정판이라고 했다. 이것만은 노숙자에게 주지 말라고 당부했다. 2주 정도 잘 매고 다니다가, 아내를 만나기 위해 추운 겨울 이른 아침에 논현역에서 노숙자 한 명을 마주쳤다. 아내의 당부를 기억하면서도 그분 목에 내 목도리를 감아드렸다. 그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그분이 예수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을 나는 오랫동안 '지극히 작은 자'를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어느 날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위한 말씀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워할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만날 방법을 알려주신 것이다. 인생의 험한 길에서 예수님이 그리우며 '하늘이 아니라' 낮은 데를 바라보고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면,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었다.

아무리 하늘을 우러르며 소리쳐도 응답은 없는 것 같고 괴로울 때는 낮은 곳으로 가라. 서울역으로 가고 청량리로 가서 작은 자들의 손을 잡아 줬다. 예수님이 거기에서 나를 만나주셨다.

예수님과의 동행이 인생에서의 참된 행복인데, 예수님은 여전히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를 만나주신다.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추상적인 신앙생활에 머무를까? 실제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할까? 

예수님을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 기도하며 여쭤보면 된다. 떠오르면 가라. 고민이 되더라도 가면 아무렇지 않다. 예수님을 만날 뿐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양의 무리에 설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실 것이다. 지금 당장 낮은 곳으로 가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추억을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과의 동행을 시작하자. 이 땅에서 천국을 살자.

지극히 작은 자들과 더불어 살다 보니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저 하늘이 아니라, 언제든 닿을 수 있는 우리 주변에 계셨다. 주님은 높은 하늘이 아니라, 낮은 데 계셨다. 그래서 언제든 주님을 찾아갈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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