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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모리슨 - 다니엘기도회 23. Day 10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3. 11. 11.

세 번째로 가장 좋은 결정(The Third Best Decision)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삼으신,
IR-4가 아니라 IR-3 비자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를 입양하시고
늘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강사: 스티브 모리슨 장로

- 남가주 은혜한인교회 협동장로
- 한국입양홍보회 설립자
- 전) 미국 우주항공연구소(The Aerospace Corporation) 수석연구원(Senior Project Engineer)

성경 본문: 시 116:12~14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스티브 모리슨 장로의 한국 이름은 '최석춘'이었고 강원도 묵호가 고향이다. 그는 가정폭력이 난무하던 집안에 태어났고, 5살 무렵 이런저런 사정으로 동생(최대천)과 거리를 전전하는 고아가 됐다. 그리고 그는 6살 무렵 홀트아동복지재단으로 맡겨져 장애가 있던 다리를 수술할 수 있게 됐고, 14세에 파란 눈의 미국인 가정으로 입양됐다. 스티브 장로를 입양한 존 모리슨과 마거릿 모리슨 부부에게는 1남 2녀의 친자녀들이 있었고 경제적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스티브 장로와 또 다른 입양 아들 제임스 모리슨(혼혈 한국인, 신진남)을 사랑으로 훌륭하게 키웠을 뿐 아니라 이들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은행 대출까지 받으며 힘써 지원했다.
이후 스티브 장로는 미 퍼듀대 우주항공학과를 졸업했고, 미 우주항공연구소 수석연구원이 됐다. 또 스티브 장로는 동포 1.5세인 송경미를 만나 결혼(1995년), 입양한 두 아들을 포함해 2남 3녀를 키우고 있다. 그는 오랜 시간 미국 국제홀트아동복지회에서 봉사활동을 이어왔으며, 특히 1999년 한국입양홍보회(MPACK)를 창립해 입양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 홍보, 콘퍼런스를 전개해 오고 있다.(2005년 명예서울시민증 수여)

나는 한국계 미국인 입양인입니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LA근처의 노르웍(NorWalk)이라는 도시에 살고 있다. 미국 남가주 은혜한인교회(https://www.gracemi.com/, 담임목사 한기영)에서 장로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내가 입양인이다 보니 한국말이 영어보다 서툴더라도 양해 부탁드린다.

나는 14세에 미국으로 입양되었다. 우리 가족을 소개하자면 아내와 2남 3녀의 자녀가 있다. 두 친딸이 있었으나 두 아들(벤자민과 조셉)을 입양했기에 큰딸 헬렌과 두 아들이 모두 26세 동갑이고, 막내딸 제인은 의도하지 않게 태어난 놀라운 선물 같은 딸이어서 언니 케이(24세)와 여섯 살 터울이 있다. 

내가 오랫동안 일했던 미국 우주항공연구소는 전 세계 Navigation에 사용되는 GPS III 인공위성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 팀의 수석 연구원으로 일했다.

1969년에 나를 입양한 아버지 존 모리슨은 2006년에 소천하셨고, 어머니 마거릿 모리슨은 2년 전에 96세로 소천하셨다.

헤어진 형제

내 가장 어린 기억은 강원도 묵호에서 살던 때에서 시작된다.
바다에 해가 떠오를 때 바다에 고기잡이 배들이 떠있던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산에서 진달래를 따먹으며 놀았고, 마을에서는 오징어를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이런 모습을 전혀 볼 수 없다. 그 많던 오징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자연이 내게 무척 아름다웠던 추억인 반면에, 우리 집에 대한 기억은 몹시 좋지 못하다. 부모님과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어머니는 천사와도 같았던 반면에,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집에 오셔서 어머니를 때리고 아들들도 때리시던 폭력적인 모습뿐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몹시 심하게 때리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겨우 탈출한 어머니는 그날로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버리셨다. 그렇지만, 우리를 두고 집을 나간 어머니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고, 오직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깊었다. 결국 아버지도 옥살이를 하시게 되었고, 우리는 쓰러져가던 우리 움막집에서 부모님 없이 동생과 내가 몇 개월을 살았다. 쓰레기를 뒤지고 길에 떨어진 동전을 주워서 홈리스(homeless, 노숙자) 같은 시간을 보냈다. 매일 어떻게든 무엇이든 먹고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숙제였다.
그래도 묵호역 굴다리 밑에서 '삶은 개'를 팔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불쌍히 보셨는지 가끔 개고기를 주셨다. (그래서 미국에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개고기를 참 좋아한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 아주머니가 새 옷을 내 동생에게 사서 입히시면서, 동생을 데려다 키우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기 때문에 데려가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홀트 씨 양자회 고아원

나는 동생과 헤어진 후, 남강애육원에 몇 개월 있다가 경기도 일산에 있는 홀트 씨 해외 양자회 (지금의 홀트 아동복지회)로 가서 8년을 그곳에서 살았다. 홀트 할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오리건(Oregon) 주에서 갑부로 사시다가 한국전쟁 이후에 한국으로 건너와서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입양을 통해 고아들에게 가족을 찾아 주는 일을 하셨다. (또 나는 거기에서 다리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희생을 잊을 수 없다. 그의 삶이 참된 크리스천의 삶이었다.

한국 전쟁 후 8명의 고아들을 입양하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올 때, 홀트 할아버지는 동경 호텔에서 의심과 두려움에 갑자기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6자녀를 장성하도록 키웠고, 농부 출신에 고졸인 내가 무엇이라고 이 일을 시작했을까?' 그래서 침대에서 일어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데, 확답을 주시기를 기도했으나 잠을 들 수 없어서 다시 일어나 성경을 읽기 위해 불을 켰을 때 보게 된 구절이 '이사야 43:5~7'였다. 

  • 사 43:5~7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무릇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 말씀에 홀트 할아버지는 큰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사역의 방향을 구하는 홀트 할아버지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수많은 고아들이 가정을 갖게 되었다.

 

나는 홀트 씨 양자회에 있던 아홉 살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예수 믿은 후에는 도박을 끊었다.

 

그런데, 홀트에 머무는 동안 부모님보다 그리웠던 것은 내 동생이었다. 동생과 함께 살 때 나는 못된 형이었다. 그랬던 것을 크게 후회하며 살았다. 동생을 지키지 못한 것이 늘 회한으로 남아있다. 많이 애썼지만 동생을 아직도 만나지 못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고아 수출국? 입양만의 문제일까 일반적 분포일까? 

서울 올림픽 이후 한국은 '고아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입양인'들이 홀트 아동 복지회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어렵다. 나는 대부분의 해외입양인들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입양된 것을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삶의 불만족을 느끼는 적은 수의 입양인들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마치 그들이 입양인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해외입양에 대한 인식이 나빠져 있다.

물론, 자기 자녀를 친부모가 키우는 것이 가장 좋고, 다음은 같은 민족과 사회에서 입양하여 키우는 것이 좋고, 세 번째 대안이 해외 입양이다. 홀트 할아버지가 남긴 유명한 구절처럼 "모든 어린이는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일반인도 성장하면서 또 사회에 나가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듯이, 입양인도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할 뿐이다. 입양인만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도 입양인들이 미국에서 시민권을 취득하도록 노력하고 있는데, 혹시 시민권을 취득하지 못하더라도 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추방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재 10명이 미국에서 추방되어 한국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리슨이 되었다 - 사랑으로 상처를 덮다.

14세 직전에 미국으로 입양을 갔다.(법적으로 입양을 할 수 있는 나이의 거의 마지막 때였다.) 나를 입양한 양부모님께는 친자녀가 1남 2녀 있었는데, 한국계 혼혈아를 2년 전에 입양했었고 그다음에 내가 입양된 것이었다.

그 전해의 성탄절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나님께 어떤 선물을 드릴지 상의하다가 기도를 통해 큰 결정을 내린 것이 한국의 아이 하나를 더 입양하는 것이었다.

'Children who need a home'이라는 홀트가 발행하는 Newsletter에 내 사진이 실려 있었는데, 뉴스레터의 여러 아이들 중에서 아버지가 나를 선택하셔서 내가 입양된 것이다. 어머니의 의견은 달랐다고 한다. 나는 이미 13세가 되었기 때문에 나보다 어린아이들을 원하셨으나, 아버지가 고집하셔서 내가 입양되었다. 먼저 입양되었던 동생 James도 일산의 홀트 씨 양자회에서 지낼 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Get him'이라며 나를 데려오도록 의견을 드렸다. 아버지는 원래는 고집이 센 분이 아니셨는데, 그때는 예외적으로 강한 확신을 가지고 나를 선택하신 것이다. 그분들이 나를 아들로 입양한 것은 그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성탄절 선물이었다. 그리고 그 선물이었던 내가 오늘 여러분과 하나님의 은혜 선물을 나눌 수 있는 것에 감사한다. 양부모님은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입양을 했을 뿐, 내가 훌륭하게 잘 자랄 것으로 기대하고 입양한 것도 아니라고 하셨다.

여러분은 이번 성탄절에 어떤 선물을 드릴 것인가? 최고의 선물을 준비하셔서 하나님께 드리시면 좋겠다.
입양을 꼭 하라는 것은 아니다. 입양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도 있다. 입양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가 있어야 가능하다.

 

1970년 5월에 미국에 처음 들어갔다. 그때는 해외 입국자는 공항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이 규칙이었다. 한국을 떠날 때 어떤 분이 새 옷과 사주셔서 그 차림으로 미국으로 갔는데, 새 옷과 신발을 모두 포기하고 모리슨 가정에서 보내온 청바지와 신발로 갈아입고 갈아 신어야 했다. 그런데 모리슨 가정에서 보내온 청바지는 여기저기 구멍이 뚫어져 있었고 운동화도 낡아서 구멍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한국에서 입고 갔던 새 옷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속상했다.

또 내가 미국으로 입국했던 아름답고 큰 도시인 샌프란시스코가 아니라, 유타 주의 Salt Lake City ('쏠렉시티'로 들렸지만 한글로는 '솔트레이크시티' ^^)가 우리가 살 곳이어서 마중 나온 아버지를 따라 그곳 공항에 내렸을 때, 아버지께서 주차되어 있던 여러 차들 중에서 제일 낡은 차로 가셔서 문을 열고 타라고 하셨는데, 차 옆이 녹슬어 있었다.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어서 소금(제설제, 염화칼슘)을 많이 뿌리기 때문에 그곳에는 녹슨 차들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 양아버지는 70년도에 56년형 쉐보레 차를 몰고 다니며 사셨다.(10년이 넘은 차라는 뜻) 아버지는 정부기관의 연구자로서 생물학자였기에 절대 가난한 분이 아니었다. 단지 매우 검소한 분이셨을 뿐이다.

 

집에 도착하니 모든 가족들이 나와 환영해 주었고, 한국에서부터 알던 제임스도 반겨 주었다. 거실을 지나다 보니 이상한 음식이 선반에 있어서 쳐다보았더니 어머니가 만든 '김치'라고 하셨다. 김치라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저 어머니가 얼마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김치를 먹어보신 기억으로 담그신 김치였다. 볶음밥도 주셨는데 고소한 중국식 볶음밥이 아니라 'Spanish Rice'라고 부르는 한국 입맛에는 어색하고 맛없는 밥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김치병을 열었을 때는 이상한 식초 냄새가 진동했는데 김치의 신맛을 흉내내기 위해 어머니가 사과 식초 (cider vinegar)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배추가 아니라 양배추를 소금에 저리지도 않고 그냥 썰어 넣었고, 마늘이 아니라 양파를, 매운맛을 위해 후춧가루를 잔뜩 넣었기 때문에 김치라고 부르기 어려웠다. 매우 모험적인 성격의 어머니였기에, 또 나를 향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상한 김치였다.(나는 나중에 그것을 '아일랜드식 김치'라고 불렀다.) 양어머니의 그 따뜻한 마음에 감동했다. 그렇게 잊을 수 없는 미국에서의 내 첫날이 지나갔다.  

 

첫날은 낯설었지만 매일 그 가정에서 자라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영적으로, 심리적으로 깊이 느끼며 살았다. 주변이 모두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에, 불과 3개월 만에 나는 대화를 할 수 있을 수준의 영어를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유타 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남침례회 교회를 다녔지만  주변의 몰몬 교도들과도 잘 지냈다.

어머니는 제게 영어를 가르쳐 주셨고 14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싸미 스트릿 (Sesame Street) 과 미스터 로저의 이웃 (Mr. Roger’s Good Neighborhood) 이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보게 하셨다. 어니와 버트 (Ernie &Bert), 빅버드 (Big Bird), 그리고 쿠키 먼스터 (Cookie Monster) 등이 아직도 생각 난다. 그리고 또 저는 거꾸로 숫자를 세는 법도 배웠다.
모리슨 집에서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하는 저녁 시간이 되면 우리는 돌아가면서 식사기도를 하곤 했다.


나는 한국에서는 수학을 가장 못했지만 미국에서 낯선 영어로 배우는데도 불구하고 수학의 어려운 방정식과 공식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가정이 있었기에 안정감과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한 아이에게 가정이 생길 때 주는 변화가 이렇게 좋고 소중한 것인지 미처 몰랐었다."

 

미국에 갈 때 중학교 2학년이었지만 몇 가지 챙겨간 물건 중에 윷과 화투가 있었다.

양부모님 가정에서는 거실에서 대게 보드게임을 많이 했다. 땅따먹기 게임인 Monopoly를 해서, 네 명의 다른 남매의 부동산을 내가 싹쓸이한 적도 있다. 누나 둘과 남동생 둘을 앉혀 놓고 한국에서 가져간 화투로 민화투를 가르쳤다. 화투 숫자도 1~12번까지 가르쳐 주었다. 청단, 홍단 30점. 광은 20점. 똥도 가르쳐 줬다. 누나와 동생들은 불과 2시간 만에 잘 배워서 우리는 자주 화투를 즐겼다. 그래도 '나이롱 뽕'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다. 

 

양아버지는 내게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시는 롤 모델이었다. 교회에서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셨고, 평소 삶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으며, 어머니를 사랑하셨고, 우리 다섯 남매를 똑같이 사랑해 주셨다. 사랑이 많고 천사 같은 양아버지는 원래의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내가 입양아였지만 전혀 차별이 없었다. 그분이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셨다. 세금도 전혀 탈세하지 않는 정직한 분이셨다. 자녀들 앞에서 어머니에게 다정하게 대하시는 모습이 내게는 큰 충격이고 내게도 꿈을 주었다. '나도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엄마 같은 아내를 만나 자녀를 낳고 살고 싶었다.' 그 꿈이 하나님의 은혜로 오래전에 이루어졌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직전, 갑자기 아버지가 심장이 좋지 않아 쓰러지셨던 일이 있는데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어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이라 혹여나 아버지가 잘못될까 무척 걱정되었었다. 다행히도 큰 고비를 넘기셔서 졸업장을 가지고 병원에 계신 아버지에게 보여드렸고, 아버지는 아프신 와중에도 너무 좋아하셨다. 이후 아버지의 간병을 위해 직장이 있는 LA로 가는 것을 한 달 미루고 아버지와 시간을 보냈다. 다른 형제자매들은 외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한 달 동안 부모님과 나만 집에 있었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아버지와의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프러포즈하기 위해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배워서, 나도 아내에게 그 방식으로 접근해서 결혼에 성공했다.(^^)

블로거 추가: 간증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그 비법을 전수하지 못했지만, 아버지 장례식 조사 내용에서 그 비법을 발췌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만나게 된 얘기를 해주곤 하셨는데, 어머니를 세 번째 만나고 난 다음에 어머니와 함께 집 앞 현관에 앉아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의 미래를 예언해 보겠는데, 언젠가 나는 당신과 결혼하여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이요”
나중에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 데이트를 하던 중, 저도 그녀를 향해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예언해 보겠어요. 언젠가 나는 당신과 결혼하여, 우리는 함께 주님 안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게 될 것이예요."
네! 그 방법이 확실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 수법에 넘어간 아름다운 여인이 제 아내가 되어 저와 여기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의 회복을 위해 동네 한 바퀴를 함께 부축해서 돌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께서 "우리는 너를 도와주려고 입양했는데 긴 세월을 함께 살다 보니 오히려 우리가 너를 통해 훨씬 큰 복을 받았다."라고 말씀하셔서 큰 감동을 받았다.
내가 LA 쪽으로 나가서 일을 하기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일부러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티브, 나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몇 가지 좋은 결정을 내렸단다. 
그중 최고로 좋은 결정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네 어머니와 결혼을 한 것, 
그리고 세 번째는 너를 우리 가정에 입양한 것이란다.”

 

아버지의 이 말씀에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감동을 받았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평생 이 말을 잊지 못할 겉 같다.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으니까. 

이러한 아버지의 삶의 순서가 내 삶의 순서가 되었다. '하나님- 배우자-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을 삶 전체를 통해 보여주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나는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랑과 안정감 속에, 수학을 잘하게 되어서 공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퍼듀 대학에 입학해서 우주항공학을 전공하고 미국 항공우주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오래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3월에 40여 년의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은퇴했다. 나는 감사하며 산다.

  • 시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의 은혜를 갚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저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더욱 빚진 자로 살아가는 것이 맞다.

 

내 생부에 대한 증오심이 깊었으나, 모리슨 아버지의 사랑으로 내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었다. 그래서 생부에 대한 긍휼의 마음으로 용서를 하며 자유를 얻고 신앙적 성숙함도 얻게 되었다.

 

내가 좋은 양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지낼수록, 한국에서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는 아이들에 대한 부담감이 컸다.

"나만 입양을 통해 축복을 받으면 될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 도전을 주께서 주셨다.

그래서 국내에 입양홍보를 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비밀 입양이 아니라 공개 입양을 주장했다. 떳떳하게 이웃에게 알리고 건강하게... 그 일을 24년 전에 시작했다. 이제는 미국 내의 한인 가정들도 한국인 입양을 많이 하게 되었다. 

공포 속에 아버지의 학대 속에 불안하던 나, 잊을 수 없는 홈리스의 삶을 살던 내가 좋은 부모님을 만난 입양의 축복으로 생부까지 용서하게 되었다. 나는 아홉 살에 선교사님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모리슨 양부모님의 삶을 통한 설교로 인해 믿음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감사해하신다.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며 여러 활동을 하는 동안에, 우리 모리슨 아버지가 내 대학 학비를 위해 은행 대출까지 받으셨던 것을 늦게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내게 그동안 아무 걱정도 안 하시고 "너는 학생이야. 돈 걱정하지 말고 공부에만 열중하라."라고 하셔서 정말 공부만 열심히 해서 미국 대학 우등생들이 가입하는 Honor Society member까지 되었기에 너무 감사했다.

그래서 부모님의 동남아 여행을 보내드리기로 하고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했다. 이모님이 남편과 함께 대만에서 20년 넘게 선교사역을 하고 계셨는데, 이모가 무척 언니를 보고 싶어 했지만 우리 부모님은 재정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한 번도 못 가셨던 것이다.

부모님은 한 달간 이모님 집에 거하시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셨고 방콕, 싱가포르, 홍콩도 여행하실 수 있게 해 드렸다. 부모님은 너무 뿌듯해하셨다. 

내게 고맙다고 하시고 만나는 사람마다 내 자랑을 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깨달았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천국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감사하는 우리에게 더욱 감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자.

곧 다가올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행동으로 옮기자. 교회든, 이웃이든, 보육원의 아이들을, 입양기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 기도하자.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동을 하면 하나님이 더욱 감사해하신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행동에 감동하신다.

  • 시 116:12~14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는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감사할 이유를 찾자. 우리 부모님의 60년대 말 크리스마스처럼.

 

"입양은 창피하고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고 기쁜 것입니다. 입양아를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진정 용감한 부모들입니다.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그 값진 교훈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을 물려줄 때입니다." -스티브 모리슨

MPAK 사역소개
• 한국입양홍보회 (MPAK)
• 1999년도 미국에서 설립, 한국에 뿌리내림
    - 한국 국내입양 활성화를 위한 운동
    - 미주 한인들을 위한 입양 장려
• 한국의 부정적인 입양 인식을 아름다운 입양문화로 만들어 나가기 위한 운동
• 가정이 필요한 어린이들의 대변인 역할
• 보육시설 아동들에게 (1:1) 교육멘토/과외 공부 사역 시작
블로거 개인적 생각
오늘 간증을 통해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존과 마거릿 모리슨 부부와 같은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복을 구할 뿐 아니라 선물을 할 마음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 스티브 모리슨 장로님처럼 어려운 형편에서도 하나님과 처지를 원망하지 않고 또 그저 억척스럽고 모질게 자라지 않고, 따뜻하며 사랑의 향기만을 품어내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롤 모델도 갖게 되었습니다. 정말 닮고 싶은 분입니다.
반면에, 별 관심도 없던 해외 입양에 대해 이번 간증을 통해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해외 입양에 대해 감정적으로 무조건 모든 일이 잘 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 무조건 모든 것이 다 사악했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어두운 면을 해결하고 보호해야 하는 것도 우리가 할 일인 듯합니다.
모리슨 잘로님 말씀처럼 '입양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인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따뜻한 사람들도 있고 그러나 그 따뜻함으로도 미처 돌보지 못한 어두운 면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시대가 변하여 한국 전쟁 직후의 사정과 지금은 어쩌면 상황이 달라진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일에 대해서는, 비둘기처럼 순전하되 뱀처럼 지혜로워야 하겠습니다. 객관적 데이터와 해외 각국의 입양에 대한 정책 리서치, 개별 사례에 대한 구조 지원 등이 함께 있어야 할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유형의 입양 사례와 문제점
- 미국으로 입양됐던 한인 김(47세)씨는 추방돼 한국으로 왔다. 1974년 전북 군산에서 버려진 후 주한미군에서 일하던 남성과 그의 여자친구가 걸음마도 못 하던 김 씨를 입양해 미국으로 데려갔다. 양부모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해 입양을 선택했다. 하지만 입양 8개월 만에 아이가 들어서면서 김 씨는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동생이 차례로 생겼고, 넷째 동생이 태어나던 해 초등학교 2학년이던 김 씨는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가정 형편을 이유로 교육 기회를 갖지 못했던, 더구나 양아버지의 폭력까지 감당해야 했던 김 씨는 12세 때 처음 가출했고 14세 때부터는 거리에서 살았다. 김 씨는 11세 때 불법체류자 신분이 됐다. 양부모가 김 씨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 씨는 입양 부모가 2년 안에 주법원에 자녀 시민권을 신청해야만 미국 국적자가 될 수 있는 입양 목적 이민비자(IR-4.입양이 아니라 '입양 예정'아동에게 주는 비자)로 미국에 갔다. 이 경우 10년 만기 영주권을 부여받고 그때까지 시민권 취득 절차가 진행되지 않으면 불법체류자가 된다. 하지만 양부모는 김씨에게 그만큼의 관심도 없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시민권도 없었던 김 씨가 자립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군 복무를 마치면 시민권을 받을 기회가 생기지만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그에겐 입대 자격조차 없었다. ​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노숙 생활을 전전하다가 지난해 범법 혐의로 김 씨를 체포한 경찰이 추방을 결정했다.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가 컸다. 법적 대응으로 추방을 피할 길이 없진 않았지만, 변호사 선임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던 김 씨는 40년 전 떠나온 길을 홀로 되돌아왔다. 그는 아동권리보장원이 추방 국외 입양인에게 주는 월 50만 원의 생계비 지원금으로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미국으로 입양 간 한인 가운데 최소 4만3,830명은 시민권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한국전쟁 직후부터 2013년까지) 입양기관이 한국에서 입양 절차를 완료하지 않고 대부분 '입양 예정' IR-4 비자로 아이들을 보낸 탓이다. 정부는 사설 기관에 해외입양 절차를 일임하고 뒷짐지었다.
보건복지부로부터 제출받은 해외입양인 국적 취득 현황에 따르면
- 1970년 이후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아동은 10만6,332명
- 이 가운데 국적을 얻은 것으로 확인된 인원은 6만 2,502명에 불과
- 미국 입양이 많았던 1950년부터 1969년까지 20년간은 아예 통계도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 점을 감안하면 시민권이 없는 한인 입양인 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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