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재훈 선교사 - 다니엘 기도회 23. Day 15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3. 11. 15.

길에서 만난 하나님

강사: 이재훈 선교사

- AFF(아프리카 미래 재단)-Madagascar 지부장
- 마다가스카르 의료선교사(외과 의사)
-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원 졸업

- 1967년생

https://www.medimission.or.kr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의료선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2005년부터 의료선교를 하고 있는 이재훈, 박재연 의료선교사의 홈페이지입니다.

www.medimission.or.kr

성경 본문: 신명기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나는 어떻게 의료 선교사가 되었는가?

오늘 성경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를 건너온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이제 내가 선교사가 된 지 20년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 광야를 다 건너지 않은 듯하지만 지난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며 그 과정을 나누려 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다

나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5세 때부터 혼자서 교회를 다녔다. 전도를 하면 교회에서 주는 성구가 적힌 책갈피를 모으는 것이 취미가 되어 반 친구들을 열심히 전도했고, 특히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책갈피 수집을 위해 친구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5학년때는 온가정이 불교인 친구를 전도하려고 그 친구 집에 6개월을 매주 찾아갔더니 그 친구도 마침내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 친구와 절친이 되었고, 누가 먼저 가족을 전도하게 될지 내기를 했다. 그 친구의 할머니로부터 부모님과 남매들이 모두 교회를 나오게 되었지만, 우리 집은 교회 이야기를 꺼낼 수도 없었다. 내가 유일하게 교회 가자고 말을 꺼냈던 대상인 내 동생이 '형 같은 사람이 교회 다니면 나는 평생 교회 안가!'라고 해서 그 뒤로는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중학교 1학년 때 성경책을 읽다가 사도행전의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께 따졌다.

"나는 주 예수를 믿는데 우리 집은 왜 구원을 받지 못합니까?" 그때, '네 믿음이 가짜이기 때문이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 믿음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잘한 것은 모두 다 하나님께 한 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내 내면에는 내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 가득했다. 가식과 위선이 분명했다. 내 신앙이 가짜라는 것에 겁이 났다. 나는 꼭 지옥에 갈 것 같았다.

아프리카 선교사를 서원하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판사판 걸어보려 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바다로 내려서는 결단을 하는 장면과도 비슷했다. 베드로가 캄캄한 바다에 빠졌을 때 다가오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건져 주신다.

크리스천은 길을 찾을 필요가 없다. 물에 빠지면 길이 다가온다. 우리는 그 길에 서있기만 하면 안전하다.

나는 어떻게 물에 빠졌을까?

'내가 아프리카 선교사가 될 테니, 나를 진짜로 여겨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당시 내 인식으로는 아프리카에는 식인종이 있고 맹수에게 잡아 먹히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한다면 내 인생 전부를 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판사판 All-in 한 것이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더니 모든 것이 변해서 제가 좋은 크리스천으로 살았을까요?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은 내 성질머리 그대로 나를 사용하실 수 없었다. 

법궤를 만드는 나무는 싯딤나무라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카시아나무다. 구불구불해서 다루기 힘들다. 그래서 '조각목'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법궤를 만들 때는 그 조각목을 정금으로 덮어 싼다. 우리의 믿음으로 푼다면 정금으로 덮어 싸는 것은 '예수로 옷 입는 것'이다.

예수로 옷 입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인생의 경험, 주변의 사람, 그 관계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 뜻대로 만들고) 이루어지는 것을 예수로 옷 입는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예수로 옷 입혀 가셨다.

의대생, 인천의 개척교회 목회자 부부와 청년집사, 가족 구원

고교 졸업 후, 아프리카 선교사 중에서도 특히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했다. 그 과정을 잠시 얘기하자면....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었으니 학생으로서의 최선을 다하려면 공부를 잘해야 했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공부를 잘하면 문과는 법관, 이과는 의사인데, 아프리카를 위해서는 의사가 좋을 것 같아 의대로 방향을 정하고 공부했고, 안암동 고대 의대에 입학했다.

안암동 학교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다닐 교회를 찾다가 고등학생 시절 고향 우리 교회의 전도사님이셨던 분이 인천 백운역 근처에 개척했다는 말을 드도, 2시간이나 걸려 찾아갔다. 너무 멀어 가까운 교회를 가려다가, 아프리카 선교를 가려는 사람은 그 정도의 거리는 극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그 교회로 다녔는데 결혼하고 자녀 셋을 낳을 때까지 그 교회를 다녔다.(^^)

 

'형 같은 사람이 교회 가면 나는 안 가!' 라며 원망하던 동생도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동생이 서울로 대학 시험을 보러 왔을 때 학교까지 데려다주는 일을 내가 맡았다. 어렸을 때 크게 한 번 때려줬던 일이 생각나서 "재권아, 형은 너를 사랑한다. 어렸을 때 잘못한 것을 용서해 줘."라고 용서를 구했다. 동생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합격자 발표일에 신촌에 있는 동생이 지원한 대학교로 가서 함께 합격자 발표의 긴장과 기쁨을 나누었다.
합격 후 동생도 교회를 다니겠다고 해서 인천 교회로 인도했다. 동생은 늦게 예수님을 알게 된 것이 억울했는지 경영학을 전공하면서도 신학을 부전공했다. 또 방위 복무를 고향에서 했는데, 그 기간 동안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쳐 드려서 부모님을 모두 전도했다. 형은 미국 유학을 가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가족 구원이 이루어졌다.

 

개척교회에서 21세에 청년 집사가 되었다. 수요예배, 청년부, 주일학교, 성가대 등의 봉사를 다 했다. 방학 때는 인형극도 배웠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미자립교회였지만 성실하게 기도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또 말씀대로 살아내며 한 영혼 한 영혼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는데, 내가 훗날 마다가스카르 사역을 할 때의 Role-model(역할모형)이 되어 주셨다. 그 모습이 아카시아 나무 같은 내게 정금같이 둘러싸였다.

의대에서 만난 평생 동역자들

의대를 다니며 평생 동지를 만났다. 처음에 입학했을 때 내 꿈을 묻는 친구가 있었다.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라며 함께 생각을 나눠줬다. 당시 고대 의대 우리 학년 140명 중에서 15명 정도가 의료선교사가 되겠다고 했지만, 당시 전 세계에서 의료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은 고작 10명 이하였다.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마음은 포기하기 쉬운데, 둘이 서로를 지켜주자고 마음을 함께 하고 모임을 만들었다. 캠퍼스 찬양도 하고, 선교사 지원을 위한 일일 찻집도 했다. 또 모임의 친구들끼리 파트별로 나누어서 그룹과외를 하니 전문성이 있어서 인기가 좋았고 학생이었지만 돈을 제법 모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선교사님들께 차도 사드리고 선교비도 지원할 수 있었다. 모임은 교회에 십일조를 하고, 또 모임에도 십일조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기에 많은 수는 모일 수 없었지만 소수 정예 회원들이 지금까지도 우리를 후원하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남자를 찾던 여자 - 내 아내

다른 동지를 만났다. 바로 지금의 내 아내다.

아내를 만나기 전에 몇 명의 예쁘고 지혜로운 자매들에게 아프리카에 함께 가자고 고백(?) 했으나 거절당했다.(그저 잘 다녀오라고 했다.)

결혼을 하고 선교사로 갈지, 선교지에서 결혼을 할지를 놓고 기도하다가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의 '하나님의 지하 운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공산치하 루마니아에서 감옥에 가 있던 때의 내용이다. 그 목사님이 감옥에 갇힌 것은 사실 '사바나'라고 하는 사모님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공산치하의 교회에서는 공산당이 지명한 목사가 설교하게 되었는데, 그의 거짓 설교를 들을 수 없어 사모님이 목사님을 강권해서 결국 앞에 나가 설교를 했다가, 비밀경찰에게 잡혀 감옥에 간 것이었다. 이런 여인이야말로 선교사 아내의 조건이라고 생각되었다.

내 아내의 배우자에 대한 유일한 조건은 '하나님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남자'였다. 남자를 사지로 보낼 수 있는 여인이라면 선교사 아내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아내와 결혼했다. 실제로 내 아내는 남편을 사지로 잘 보낸다. 그 구체적 예시가 노엘리 마을의 무당 사건이다.

노엘리와 무당

마다가스카르에서 처음 갔을 때 노엘리라는 자매가 있었다. 성탄절에 태어났기에 노엘리였다. 그녀는 성서유니온과 함께 사역하고 있었는데, 한 번은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게 성탄절 선물을 주려면 저 무당을 치료해 주세요." 그 편지를 읽은 선교사님은 내게 부탁을 했지만, 우리 팀리더는 우기(雨期)여서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했다. 그때 (남편을 사지로 잘 보내는) 내 아내는 내게 가라고 했다. 결국 노엘리가 말한 무당을 만나러 떠났으나, 길이 빗물에 파여 절벽이 되었고 결국은 차가 미끄러져 수로에 빠져서 밤새 차 속에서 고생했다. 아침이 되어 비는 그쳤지만 차는 뺄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동을 걸었더니 차가 빼낼 수가 있어서 무당을 만나러 갔다. (아프리카의 무당은 대개 남자다. 본래 우리말에서 무당은 여성 무속인을 의미한다.) 무당은 다리에 정체성 궤양이 있었다. 만성 정맥부전의 마지막 단계였다. 나는 그저 탄력붕대로 잘 감아주었다. 그리고 그는 나았다. 나중에 노엘리가 편지를 보내줬다. 무당이 치유되어 자기 성경 공부반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할렐루야!) 이렇게 조금씩 내게 믿음이 생겨갔다.

신실하고 용감한 남성들이여, 아내를 맞이할 때는 각오를 하라. 특히 아름다운 여자들은 갈수록 강해져서 아줌마가 된다.(유머^^)

공중보건의 시절의 여러 경험들 

하나님은 사람들 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도 선교사가 되도록 나를 준비시키셨다.

경북 예천군 호명면에서 공중보건의를 했는데, 바쁜 농부들이 하루 1회밖에 버스가 없어서 웬만해서는 보건진료소로 오시지 않기 때문에 내가 차를 타고 찾아가는 이동 진료를 했다. 보건진료소로 돌아오면 내 처방을 다시 살피고 다양한 영역의 질병에 대해 공부를 무척 많이 했다.

그러다가 수원 가족계획 협회로 옮겼다. 경기도 내 모든 직업여성들의 성병 관리를 했고 정기적으로 성병에 대한 교육도 해야 해서 공부를 또 많이 했다. 가난한 산모들의 출산을 돕는 일도 했다. 성병 환자가 많았던 마다가스카르에서의 사역을 위해 이 모든 것이 꼭 필요한 경험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세브란스에서의 여러 전공들

용어 설명:
의대 졸업 후 의사국가고시를 응시하여 합격하면 '의사' 자격증이 생기는데, 이것만으로는 특별하게 전문 의과가 없는 '일반의(GP. General Practitioner)'입니다. 특정 의과에 대하여 전문가가 되기 위하여 수련을 받는 과정에 있는 의사가 전공의입니다.
'전공의'에는 '인턴(intern, 수련의, 전공 없이 여러 과를 맛보기 훈련)'과 '레지던트(resident, 전공의, 특정 과에 지원)' 과정이 있고, 전공의 수련 과정을 마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하면 '전문의(specialist)'가 됩니다. 대개는 인턴은 '수련의'라고 하고 레지던트를 '전공의'라고 합니다. 
전문의를 딴 후에 개원을 하거나 대학병원에 남아 펠로우 과정을 밟습니다. 이 펠로우(Fellow)를 '전임의'라고 합니다. 교수직이나 연구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이 과정을 밟으며, 이후에 조교수, 부교수, 교수 등으로 승진을 합니다.

 

세브란스에서 외과 레지던트와 펠로우를 했다. 피크타입 때는 일주일에 겨우 14시간 자며 일해야 했었는데, 이런 경험이 마다가스카르에서도 지치지 않고 이동진료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 원래 펠로우(전임의)는 특정 영역에 대해 과정을 진행하는데 내 경우는 세브란스에서 선교를 위해 예외적으로 여러 진료 과를 다양하게 공부하게 해 주셨다. 위장과 대장 항문, 간담도, 유방갑상선, 소화외과,....  응급의학과에서 외상환자도 다룰 수 있었고, 차병원에서 산부인과 수술도 배웠다.

 

그때 그렇게 배우지 않았으면 마다가스카르에서 제대로 치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도록 인내심을 가지고 준비시켜 주신다. 애굽의 압제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지도자를 준비시키기까지, 모세 탄생에서 출애굽까지 80년이나 걸렸다. 답답하지만 철저하게 준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선교사역을 직접 하신다.

요나가 처음부터 니느웨에 가서 외쳤어도 그들이 회개했을 수도 있겠으나, 내 생각에는 요나가 도망갔기에 나중에 물고기에 먹히고 바닷가에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나 뱉어낸 그 이상한 사람이 전한 소식이어서 어쩌면 니느웨 사람들이 귀를 기울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비록 지중해와 니느웨는 300km 이상 상당히 떨어진 곳이기는 하다.)

하나님의 선교 방법은 이런 식이다. 내가 거역하고 잘못해도, 내가 실력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극적인 어떤 것을 만들어서 직접 선교를 하신다. 하나님이 하신다. 앞으로 여러분과 나눌 이야기들이 모두 그런 것들이다. 내가 잘나서 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많은 동역자들을 보내시기도 하고, 내가 한 조그마한 일을 엄청나게 부풀려서 사람들이 놀랍도록 만드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척교회를 섬기고 공중보건의로, 인턴으로, 외과 레지던트로, 펠로우로, 바쁘고 피곤할 때에 그 힘든 시간을 지나게 하신 이유는,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오랫동안 광야에서 단련하고 시험하여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보시려고 했다는 것처럼 나를 단련시키시고 준비시키셨다고 생각한다.

예수로 옷 입고 예수를 연기하라

오늘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준비다. 어렵고 힘든 일일수록 더 좋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또 다른 미래의 준비가 된다. 이 모든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하더라도,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무대라고 생각하고 주인공처럼 연기하라. 그것이 예수로 옷 입는 것이다. 우리 실체는 부끄럽지만, 예수로 옷 입고 예수로 연기하라. 그래서 우리가 아니라 예수가 보이게 하라.

남양주 사능교회가 파송하다

나는 학생 때 과천에서 살다가 결혼 후 처가가 있는 반포로 이사를 갔다. 우리 아이들의 양육 도움을 부탁드리기 위함이었다. 또 처가가 남양주로 이사 가셔서 우리도 남양주로 따라가야 했다. 나는 병원 일로 바빴기에 아내가 혼자서 애들 셋을 데리고 남양주에서 인천까지 교회를 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오래 섬겼던 인천의 교회를 떠나, 남양주 사능에 있는 교회로 옮겼다. 사능교회에서 남선교회 활동을 하며 또한 성도들의 큰 사랑을 느꼈다. 그분들은 병원 퇴근이 늦은 내 퇴근 시간에 맞춰서 구역모임을 밤 10시에 시작해서 새벽까지 모임을 하는 식으로 조정해 주셨다. 또한 나중에 내가 펠로우를 마치고 선교사로 나갈 때는, 교회 건축 50주년 기념 파송 선교사로 전액 지원을 해주었다. 의사 친구들에게 후원을 쉽게 받을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전화 걸 시간조차 나지 않았다. 사능교회에서 우리를 후원해 주셨고, 오늘 이렇게 간증할 수 있게 되었다. 

동역자를 엮어서 함께 일하게 하신 하나님

마다가스카르에 갔는데, 외과의사이므로 도구가 필요했다. 마침 모임의 선배였던 산부인과 의사 한 분이 산부인과 병원을 정리하시면서 수술도구 등을 모두 내게 보내주셨다. 그 도구로 15년 넘게 마다가스카르에서 이동진료를 할 수 있었다. 또 한 NGO 단체에서는 최선을 다해 때맞춰 함께 환자를 돌보고 물품을 공급해 주시고 치료가 어려운 환자는 한국으로 초청을 해서 치료해 주었다.

이런 분들을 하나님께서 주변에 모이게 하시고 엮어 주셔서 함께 일할 수 있었다.

마다가스카르 길에서 만난 하나님

마다가스카르는 인구가 3000만에 육박하고, (아프리카 대륙 옆에 있는 작은 섬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지만) 땅도 한국보다 6배나 넓지만, 의료 환경은 열악하다.(세계 8대 빈국) 그나마 있는 의사는 돈을 벌 수 있는 도시에만 있고, 인구 80%가 있는 시골에는 의사가 거의 없다.

2006년부터 MAF 비행선교단, Harbor Aid 수륙양용 보트를 타고 복음 사역을 하는 단체, 등과 내가 속한 '아프리카 오지 선교회'가 연합하여 '마다가스카르 메디칼 사파리'라는 공동 사역을 하게 되었다. MAF 비행선교단은 우리를 오지에 데려다주고 (오지여서 활주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풀밭에 경비행기가 내림), Harbor Aid는 텐트를 치고 숙식을 제공하고 그곳에서 우리를 필요한 곳까지 옮겨주었다. 그러면 우리 오지 선교회는 약품과 수술도구를 챙기고 가서 환자를 치료해 주는 일을 했다. 이런 사역을 116회 했다.

첫 사역지 - 베루루하 베이스캠프

처음에는 베루루하 베이스캠프 (마다가스카르 남서쪽 망고키 강 근처 위치)에서 사역을 했다.

하루는 우리가 Harbor Craft를 타고 어느 마을을 방문했더니,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가 얼마 후에 촌장 어른이 무장한 청년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우리가 의사라고 했지만, 이들은 평생 의사를 만나본 적이 없어서 의사가 뭐 하는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긴 설명 끝에 그들은 우리를 '소 잡는 일을 하는 사람' 즉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무당'이라고 인식했다. 결국 우리는 '외국에서 온 무당'이 되었다.

이윽고 우리를 환영해 줘서 소를 잡는 신성한 나무 곁에 진료소를 설치했지만, 처음에는 아무도 오지 않고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 혼수상태에 빠진 청년이 들것에 실려 왔다. 말라리아에 걸린 것이었다. 그 상태면 80% 이상이 죽는다. 수액을 놓고 약을 먹였다. 그다음에는 설사를 너무 많이 해서 축 늘어진 아이가 왔다. 수액을 주고 항생제를 주고 해열제를 주었더니 조금 후에 곧바로 기운을 찾아 마당을 걸어 다녔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몰려와서 각종 병을 치료했다. 그다음 날에는 혼수상태였던 말라리아 환자도 일어나 밥을 먹고 있었다. 평생 약을 먹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준 약에 잘 반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영험한 무당이 되었다.

첫 교회가 생긴 마을

어느 날은 소강도들 수십 명이 베루루아 지역에 몰려들었다. 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바라 족은 주업이 목동인데, 목동들끼리 서로 소를 훔친다. 특히 성년의식으로 소를 훔치는 풍습도 있었다. 그날은 소를 훔치는 사람들과 지키려는 사람들이 서로 자상을 입히며 싸웠다. 부상이 심한 사람부터 치료하다 보니 소를 훔치려던 쪽 사람을 먼저 치료해야 했다. 그러자 지키려던 사람들이 우리를 적으로 오인하고 모두 떠나버렸다. 다음 날 그 마을을 찾아가 해명을 하고 그들도 치료해 주었더니, 그들이 오해를 풀고 결국 그 마을은 우리에게 가장 협조적인 마을이 되었다. 베루루아에 교회가 5개가 생겼는데, 그 마을에서 첫 교회가 생겼다. 그 마을은 10명 중에 3명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오해를 받아 무당들의 독살 타깃이 되다

베루루아에서 남자는 소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축복받은 것이다. 여자는 애를 많이 낳으면 축복받은 것이다. 가임연령만 되면 아이를 낳기 시작한다. 남편이 없어도 애만 많이 낳으면 좋다. 애가 많은 미혼모도 부자들에게 훌륭한 배우자로 환영받는다. 소를 키우기 위해 애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여러 여자들이 내게 와서 애를 낳게 해달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들어보니 성병에 걸렸던 여인 몇 명이 우리 처방을 통해 나아서 임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대의학으로 치료를 하니 원래 있던 무당들이 화가 났다. 우리가 아이의 눈을 빼가고 간을 빼갔다는 소문이 났다. 내가 언청이 아이를 수술을 할 때 눈에 붕대를 하고 있던 아이의 일이나, 왼쪽의 고름 주머니를 절개하여 검은 쓰레기봉투에 버린 것을 눈을 빼고 간을 빼갔다고 오해한 것이었다. 그 소문을 빌미로 무당들이 우리를 죽이겠다고 했다. MAF director는 그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다음 달에는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죽어도 가겠다고 했더니 조건을 걸었다. 헌병대장 등에게 안전보장 서명을 받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베루루아에 찾아가 단체장을 만나며 사인을 받았다. 

아이의 극심한 피부병을 고치고 무당의 위협에서 벗어나다

한 성인 남자가 베이스캠프로 목에서 허리까지 고름이 가득 찬 아이를 데려 왔다. 오늘은 약이 없어서 우리가 치료할 수 없다고 했더니, 우리가 기도해 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의료팀이 치료를 할 때 선교팀이 옆에서 기도를 해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신유의 은사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간청을 하니 별 수 없이 내가 아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물에 타먹는 항생제가 잡혔다. 깜식이네 주막집 한식당 주인이 요청해서 약을 가져다 주기로 하고 주머니에 넣었다가 깜박 잊었던 것이다. 그 약을 먹였다. 원래는 그 약은 14병을 먹어야 낫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음 달에 가보니 그 아이의 피부병이 다 깨끗이 나아있었다. 내 기도에 응답하신 것인지, 항생제가 들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선교사님의 유머 코드로 이해됨 ^^)

 

그 마을을 찾아갔더니 마을 이장이 '당신이 피부병 아이를 치료한 의사냐?'라고 묻더니, 그 동네 중앙으로 모셔가서 환영식을 하고 진수성찬을 대접했다. (즉, 닭을 삶아주었다.) 이미 소문이 퍼져 다음 마을에서도 환대는 똑같았다. 이 아이가 3년 동안 피부병을 위해 모든 무당을 다 찾아갔으나 낫지 않았는데, 나 때문에 나았기 때문에 무당들도 이제는 우리를 독살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했다.

암바투부리 무당을 전도하다 

베루루아 지역에서 가장 센 무당이 우리를 찾아왔다. 암~바투부리 무당!
'바투부리'는 시체가 썩은 흙을 항아리에 담아 놓은 곳에 돌을 세워놓은 것으로 종묘 같은 곳을 의미한다. 암바투부리는 왕족의 종묘가 있는 곳의 무당이었다. 그가 오자 동네 사람들이 모두 예를 표했다. 그는 심한 탈장이 있었기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다. 수술 동의를 위해 보호자를 찾았더니, 12살 먹은 여자아이가 왔는데 자기가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무당이 귀신을 쫓아낸 후 값을 치르고 부인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우리가 수술을 하는 동안 국부 마취를 했더라도 느낌이 있었을 텐데 꿈쩍도 하지 않는 특별함을 보였다. 우리는 수술받은 사람에게는 성경책을 준다. 수술 후, 그 무당이 성경책을 받더니 손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우디가시로 약을 만들지 않겠다'라고 했다. 그렇지만 자기 직업인 제사는 지내도 되는지 물었다. 내가 난처해할 때, 옆의 선교사님이 지혜롭게 가르쳤다. "사랑하는 당신의 어린 아내가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당신 마음이 어떻겠는가? 당신이 하나님 외의 다른 신을 사랑하면 하나님 마음은 어떻겠는가?" 그가 꼭 자기 마을로 와달라고 했지만, 걸어서 하루 반 길이어서 몇 해동안 갈 수 없었는데, 그가 성경책을 더 달라며 나를 찾아다닌다고 해서 한 박스 20권을 보내 주었다.

 

나는 현대 의학의 도움으로 치료를 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이 있었다고 믿는다. 내가 특별한 훈련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의 신음 소리를 들으셨던 것처럼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신음을 들으신 하나님이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내가 환자들을 만나게 하시고 치료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의료를 넘어 선교로... 슈퍼샤이 '미케야 부족' 복음화, 교회가 서다

내가 의료선교를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비난했다. 내가 하는 일은 선교가 아니라 봉사활동이라는 것이었다.

수술을 통해 복음을 전한 어느 부족 이야기만 하나 더 하겠다.

마다가스카르 남서부에 아직도 나무를 비며 불을 켜고,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미케야 부족이 있었다. 그들은 다른 부족 사람들이 자기들이 사는 숲으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해서, 주누루라고 하는 말라가시 선교사도 들어가지 못하고, 그 근처의 마시꾸리 족속 마을에서 살았지만 그들조차도 선교사님을  싫어했다.

마시꾸리 마을에서 학교를 운영하며 사역을 하던 주누루 선교사가 HAM 무전기로 긴급 도움 요청을 해 왔다. 학교 선생님이 갑자기 죽고 선교사님의 아들도 거품을 물며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MAF의 요청으로 나도 함께 가서 그 가족을 데려 왔다. 주누루 선교사는 내가 의료 선교사임을 알고 내게 자기 사역을 도와달라고 해서, 우리가 함께 가서 현대의학으로 치료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낫게 되었다. 큰 기적을 맛본 많은 무당들이 주누루와 친구가 되었다.

또 미케야 숲 출신의 한 사람의 소개로 미케야 족장 중의 한 명을 주누루에게 소개해줬고, 숲에서 쫓겨날 위험에 빠진 그 판다하라 족속을 주누루가 정부에 변호해 주어서 그들이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미케야 숲 속 사람들이 많이 아프다고 연락이 왔다. 숲에 들어가서 치료를 해주었다. 그들은 해열제로 머리가 개는 것을 머리부터 신이 내려오는 느낌이라고 했다. 그 상황에 곤란해진 무당은 숲을 떠났다가 얼마 후에 바닷가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우리가 치료를 하는데 한 아이의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탈장이 심한 상태로 왔다. 수술을 위해서는 아이를 마취해야 했기 때문에 부모에게 마취 동의를 요청했는데, 그 부모가 갑자기 아이를 데리고 사라졌다. 우리가 마취를 설명한 내용이 '통증을 모르는 깊은 잠'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에게는 곧 '죽음'이었다. 우리가 그 아이를 죽였다가 수술 후에 다시 살려주겠다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결국 수술이 잘 끝났다. 내게 한마디 하라고 해서 요한복음 3장과 1장을 섞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해서 아들을 보냈는데 그 아들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는 내용이었다. 듣고 있던 족장이 춤을 추더니, "그 신이 우리 숲에 왔다. 닥터 리는 오늘부터 내 아들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나는 미케야 족속의 한 멤버로 편입되어 언제든 환영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그 족장이 아프다고 했는데 바로 가지 못했다. 겨우 갔더니 이미 죽어 있었다. 족장의 무덤 곁에서 그 유가족들에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고인이 내가 전한 예수님을 믿기로 했었던 것을 상기시켰다. 족장의 춤을 보았던 사람들이 증인이 되었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신을 믿을 것인지 물었을 때, 그들이 이제는 무당이 없어서 그 신을 어떻게 섬길지 모르겠다고 해서 1주일간 사경회를 했다. 옆 마을에 교회가 있었지만 타 종족과 어울리는 것을 기피하는 미케아인을 위한 교회도 지어줬다. 한국에 왔을 때, 구리의 한 집사님이 인도에 교회를 지을 길이 막혀서 마다가스카르에 교회를 지어주고 싶다고 해서, 미케아 교회를 지어주도록 연결해 주었다.

300명의 오지통합의료 전문인 양성 계획으로 이끄신 하나님

마다가스카르에서 이동진료를 하며 많은 오지 사람들을 돕기도 했지만, 대학병원을 위해서도 여러 일을 했다. 특히 코로나 기간에는 마다가스카르 코로나 대응 사업을 했고,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을 만났을 때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더니, 본인도 오지에 이동진료를 통해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싶다고 해서, 나와 같은 오지 통합의료 전문인 300명을 키우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는 곧바로 의대학장과 보건부 장관을 불러 그 사업 추진을 지시했다. KOICA의 도움도 받게 되어 나와 같은 의사를 교육하기 위한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있는데, 그다음에는 마다가스카르 114개 지역에 300명의 의사를 양성할 계획이다.

그리고 플랫폼 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의사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이나 단기, 중장기 봉사자가 일할 수 있는 플랫폼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맺는말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기억하라고 하신다.

오늘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나누었는데, '내 인생이 가짜!'에서 시작하여 각각의 과정마다 일일이 간섭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끼기 위해 때로는 베드로처럼 캄캄한 바다의 풍랑 속으로 투신할 필요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의) 길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우리 환경과 주변 사람들은 정금과 같이 우리를 둘러싸는, '예수로 옷 입는' 분들이다. 그들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일하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것이다.

세계 8대 빈국의 섬나라. 그 손엔 ‘선교사-의사’라고 적힌 명함이 사실상 전부였다. 잘 나가는 의사의 부인은 그의 선택을 응원했다. 아니 오히려 아프리카행을 재촉했다. 3명의 어린아이들(아들-딸-아들)은 사실 영문도 모르고 부모를 따랐다. 그때가 2003년. 그는 ‘꿈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19년. 그는 동안(童顔)이었다. 50대 중반(1967년생)을 넘겼지만 보이는 것은 40대 중반처럼 보였다. 아프리카에서 사는 사람이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하얀 피부다. 전북 전주에 사시는 부모님은 당시 잠시(2~4년) 봉사하고 돌아오는 줄 알고 계셨단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 그는 부인과 함께 ‘아프리카 오지(奧地) 선교단’(대한예수교장로회)에 가입했다. 나이 36세.

“마다가스카르는 거의 대다수의 현지인들이 의사의 존재를 몰랐고 지역 무당들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었다. 실제로 환자들을 치료한 후 현지 주민들이 나를 무당으로 여긴 사람들도 많았고 심지어 무당들에게 독살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의사였지 기독교 선교사가 아니었다. 오지로 가려면 ‘선교사’가 돼야 했다. 후원 교회와 연세대는 그를 영국으로 보냈다. 2003년과 2004년 2년 동안 그는 영국에서 선교사 교육을 받았다. 아프리카 오지 선교단이 추천한 곳이 외과 의사가 없는 ‘마다가스카르’.
2005년 초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리보 이바트 국제공항(​Ivato International Airport, Antananarivo)에 내렸다. 꿈의 시작이다. 여우원숭이, 바오밥 나무로 유명한 아프리카 남동부 섬나라, 마다가스카르!

이재훈 선교사는 마다가스카르 현지에서 이동진료뿐 아니라 오지통합의료전문인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이재훈 선교사는 “마다가스카르는 의사 및 간호사의 인력이 면적 대비 턱없이 부족하고 대부분이 전문의가 아닌 일반의사”라며 “그동안 이동진료를 하며 쌓인 환자들의 데이터를 분석해 보니 100~150가지 진단명만 잘 가르치면 95%의 환자를, 외과수술 20가지를 가르치면 94%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며 오지통합의료전문인 양성의 배경을 설명했다.

https://youtu.be/OYivhhz2ALg?si=8I3Z1t4qbkGhHV8E

 

https://youtu.be/RFLeTLUm98E?si=fNHq0IcivHBZETuW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