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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 윅스 (Kim Wickes) 이야기

Jesus Christ/주님과 함께 2023. 12. 11.
오륜교회 주경훈 목사님의 설교 말미에 인용된 킴 윅스 이야기에서 궁금증이 생겨 상세한 내용을 찾아 정리합니다.
(한국일보 윤여춘 고문의 글과 유튜브 동영상들의 내용으로 정리했습니다.)

 

1947년생인 윅스 (Kim Wickes) 여사는 자기 본명을 모른다. 본래 한국의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3살 때 한국전쟁이 터져 피난 가다가 인민군 포격의 섬광에 실명했다. 포탄이 떨어질 때 엎드리게 하고 위를 올려다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호기심에 올려다보았다가 눈을 크게 다쳐 마침내는 시력을 잃고야 만 것이다. 


한국 전쟁 중 피난길에서 처자를 이끌고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좌절한 아버지는 달려오는 트럭 앞에 온 가족을 모아놓고 집단자살 하려다가 실패하자, 절망 가운데 윅스와 여동생을 강물에 던졌다. 동생은 떠내려갔고 어머니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윅스는 구조되었지만 결국 어머니는 낙심하여 아버지를 떠나버렸고, 아버지도 그녀를 대구에 있던 월드비전 장애자 고아원에 위탁하고 떠났다. 고아원에서의 삶은 매우 고달팠지만 한편으로는 고아원에서 복음을 전해 들을 수가 있었고, 또한 복음성가를 배우면서 킴 윅스는 자신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홀트 양자회의 주선으로 10살 때인 1957년 미국 인디애나주 데이턴(Dayton, Indiana)의 독실한 크리스천이며 홀트의 친구인 조지 윅스 부부(George, Eva Wickes) 가정에 추수감사절 날 입양됐다. 그들에게는 이미 자녀가 네 명이나 있었지만 그들은 기꺼이 그녀를 입양하였다. 그 후 윅스는 순탄하게 성장했다. 노래를 썩 잘했고 학교 성적도 탁월했다. 인디애나 대학을 졸업(인디애나 음대와 대학원 전 과목 A학점)하고 박사학위 과정까지 마친 그녀는 풀브라이트 장학생이 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유학했다.

 

그녀는 입양 2년 뒤인 12살 때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한 달간 이어진 그레이엄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영접했다. 그리고 16살 때 월드비전 (World Vision)의 창설자인 밥 피어스(Bob Pierce)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헌신한 그녀는 복음성가 가수로 전국적 명성을 쌓게 되었고, 1974년에는 LA 할리우드 보울에서 열린 그레이엄 목사의 25주년 전도집회에 특별 초청돼 성가를 불렀다. 당시 그레이엄 목사는 “할리우드 보울에서 들어본 노래 중 가장 아름다웠다”라고 극찬했고, 윅스 씨는 그 뒤 조지 베벌리 셰어와 함께 빌리 그레이엄 전도단의 찬양 독창자가 돼 미국은 물론 세계 방방곡곡을 누볐다. (아래 첫 번째 유튜브 동영상 참고)
특히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오순절대회에서 불렀던 찬송이 그 후 널리 퍼지게 되었는데 그 찬양이 바로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The Love of God)이다. (아래 두 번째 동영상 참고. 그 이후에 부른 것이지만 같은 찬송)

 

한국일보 기사(1972년)를 본 아버지가 수소문 끝에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병이 들었다며 죽기 전에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비엔나에 2년째 유학 중이던 윅스 씨는 아버지가 이미 별세했을 것으로 추측했었다. 그녀는 1974년 대규모 기독교 집회에 독창자로 초청받아 이웃 스위스 로잔에 체류 중이었다. 그 무렵 한국일보가 윅스 씨에게 보낸 전보를 대신 읽어준 김장환 목사는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의 수원 중앙침례교회 근처에 살고 있다며 그녀에게 한국에 가자고 권유했다. 윅스 씨는 스위스 주재 미국대사가 마련해 준 여비로 1974년 여름 한국을 방문해 부녀상봉을 이뤘다. 거의 한 달간 체류하며 아버지와 TV 쇼에 두 번 출연했고 이어 전국 순회공연도 가졌다.

그 이후에도 한국정부는 1981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킴 윅스 초청 자선음악회를 열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무대 뒤로 윅스 씨를 찾아와 그녀의 강한 의지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앞을 보지 못하는 나를 인도해 갈 때, '저 100미터 앞에 장애물이 있다거나, 저 200미터 앞에 무엇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분들은 단지 "바로 앞에 물웅덩이가 있으니까 한 걸음 옆으로 떼라 혹은 조금 앞에 계단이 있으니까 발을 조금 높이 올리라"라고 말해줍니다. 설령 100미터, 200미터 앞에 무엇이 있다고 말해주어도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나는 바로 앞에 있는 한 걸음만 알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떼어 놓을 자리를 알려주면, 나는 그 말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인도함을 받아 마침내 목표 지점까지 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신 것도 그런 방법이었습니다. ​
시각 장애자가 되었을 때 어떻게 살 것인지 암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음 발 한 걸음을 떼어놓을 자리를 내게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도함을 받아 오늘에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은 나와 늘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와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녀는 현재 아칸소주 멤피스의 ‘킴스 선교회 (Kim's Ministries)’ 대표로 시각장애인들을 섬기고 있다.

https://youtu.be/tUJJI6TTuyw?si=OMZ1ZF6nZ7m8tCB2

 

https://youtu.be/LEvmPuWY-0I?si=2FvZT8IspAPGU7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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