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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Jesus Christ/주님과 함께 2011. 12. 18.


*오늘 목사님의 설교에 제 느낌을 덧붙여서, 제 글 tone으로 적어 봅니다.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어서요. 이런 영성의 오리지날은 제게 없어요. ㅠ.ㅠ)

제가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은 얘기 중 가장 감명 깊었던 내용은, 장병림 교수의 '온유와 겸손'에 대한 권면이었습니다.
'범죄 및 사회비행 '이라는 자유교양과목을 맡으셔서 Freud의 이론을 기반으로 많은 자극적(?)인 강의를 하신 분이신데,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왜 서울대학교 학생들이 졸업 후에는 연세대학교 졸업생들보다 사회에서 선호도가 더 높지 못한가..에 대한 관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강조한 것은, 아름다운 이화여대생들의 영향과 매주 채플의 영향으로,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4년 동안 계속 '온유와 겸손'을 미덕으로 배우며 성장하게 되지만, 서울대 학생들은 성공적인 입시에 도취하여 주변의 칭찬 일변도에 익숙해져 더욱 교만해지고, 결과적으로 졸업 후에는 기업과 사회가 좋아하지 않는 유형의 사람이 되어 버릴 위험이 높다는 지적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온유와 겸손을 미덕으로 내세우는 종교입니다. 저는 비교적 겸손해 보이는 쪽에 속한다고 오랫동안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겸손은 겸손해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전투력이 약하거나 마음이 여려서 겸손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겸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반대 쪽에 서 있는 '교만'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겸손 자체보다는 교만을 엄중하게 경계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만은 무엇입니까? 자기의 성공이나 소유에 만족하여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기독교의 교만은 훨씬 '종교적'인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교만이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마음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그 원인이 자기의 육체적 삶의 편안과 정신적 만족에서 오는 것이든, 아니면 간구하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낙담과 삶의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생긴 것이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은 것처럼 사는 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교만입니다. 마음의 교만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가 얘기하는 '죄'입니다. 우리의 인간적, 도덕적 그릇됨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가 죄인 것입니다.
 
이러한 교만을 경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단골 레퍼토리가 되었습니다. 출애급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하나님은 교만해지지 말 것을, 즉 하나님을 잊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셨고,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에게도 육체의 가시(A thorn in my flesh)를 주혔는데, 이는 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To keep me from becoming conceited)  이러한 가시는 시험과 낙망일 수 있는데, 누구보다도 성령으로 충만했고 영적인 체험을 많이 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던 바울에게도 '가시'는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생 가운데 육체의 가시가 주어졌을 때, 그저 이를 괴로워하거나 또 우리 기독교인들이 남의 일이라고 쉽게 얘기해버리듯이 그저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체념해버리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Gethsemane)동산에서 기도하셨듯이 세 번씩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인생에 가시와 같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 삶에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는데, 오늘 제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간절히'요.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으니, 우리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 알고 감사해야 하겠죠? 그러나, 바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삶이 순탄하고 형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는 '가시'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나보다도 나를 잘 아시는 분으로서, 가시를 없애주시는 대신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응답하셨습니다. 바울이 그 엄청난 영적 체험과 능력 가운데서도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는 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육체의 가시로 인해 항상 자기의 무능함을 고백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바울 스스로 얘기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를 만나서 기도를 할 때, 우리 기도대로 문제 자체를 없애 주시기 보다는 문제는 그대로 두고 대신에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중간고사/기말고사가 얼마나 부담되었습니까? 시험기간이 코 앞에 다가오면 '전쟁이라도 확 나면 좋겠다..', '지구는 멸망하지 않나?'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중간고사/기말고사를 없애시기 보다는, 또 전쟁을 일으키시기 보다는, 내게 시험을 준비하고 능히 잘 치루어서 그 시험을 통해 내 노력과 능력을 평가받고 보상받을 수 있게 해주시곤 했죠.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아는 바울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을 때, 여전히 육체의 가시가 괴롭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기도의 응답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갖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무능력을 깨달을 때 겸손해집니다. 이를 '약함의 영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거절을 통해서 바울은 약한 가운데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그래서 크게 기뻐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삶의 가시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관계'의 가시입니다. 자녀가 속을 썩일 때, 배우자가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이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너무 힘든 가시가 됩니다. 멀리 있는 가시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으므로 아무 관심거리도 되지 않지만, 가까이에 있는 가시는 매우 아프게 하고 위협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시는 항상 가까운 관계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진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거하게 된다면, 이 가시들로 인하여 우리는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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