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세18. Day2. 강물에 던진 떡 (전도서 11: 1 ~3) 이한영 교수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18. 11. 2.

강사: 이한영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구약학과 교수,

노스웨스트대학교 대학원 포체프스트룸캠퍼스 박사

미국 메모리얼 슬론케터링 암센터 박사 후 연구원

책 <명자 누나: 고난의 신비 그리고 공감>의 저자


[오늘의 본문 이야기]

오늘의 본문 (전도서 11: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좀 어렵게 느껴진다. 이 말씀은 인색함이 없는 너그러운 행동을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떡'은 히브리 원어로 lah-me-ka인데 이는 '빵(bread)'라는 뜻이다. 또한 여기에서의 '물'은 히브리 원어로 ham-ma-yim인데 이는 '흘러가는 강물'을 의미한다.

그러면 왜 전도서 본문은 '빵을 흘러가는 강물 위에 던지라'고 했을까?

무신론자인 데이비드 흄이 '이성은 마음/감정/욕구의 노예다.' 라고 했는데 이는 곧 사람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마음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해아래 무신론자란 없다.  왜냐하면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우상을 마음에 품고 산다.'는 말도 있는데, 그 우상이 바로 '빵'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은 그 빵을 '과감하게' 던져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는 말씀에서도 곧 '던지면... 찾으리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의 메시지를 볼 수 있다.


오늘 본문 2절은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은 살아 가면서 7~8명의 이웃 즉 무한의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앞에 1절에서 살펴보았듯이 '떠내려가는 강물'은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한다. 남편도 이웃도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즉 7~8명의 무한의 이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님은 이와 같이 떠내려가는 강물과 같은 우리들에게 자신 곧 생명의 떡을 던져 버리신 것이다.


3절 본문의 상반절에는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라고 말씀하신다. 구름이 비를 가득 품에 안고서도 땅에 비를 뿌리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다.

(고후 6:9~10)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말씀은 빵을 강물에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이 말씀은 비를 뿌리지 않는 구름과 같은 사람이다.


3절 하반절과 4절을 보자.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어떤 사람은 만일 자신이 큰 부자라면 빵 하나 정도는 흘러가는 물에 던질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곧 본문 4절의 '풍세를 살펴보는 자'와 같아서 실제로는 형편이 좋더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명자 누나의 고난과 공감의 섬김]

친 누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나(이한영 교수)는 1남4녀의 가족이어서 어려서부터 가족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랐는데, '명자 明子'라는 이름을 가진 세째 누나가 있었다. 어린 시절 브라질에서 자랐고, 그 명자 누나와 객지 생활을 함께 하며 입시를 준비했기에 가장 가까이 지냈다.

공부도 무척 잘해서 주변의 백인 남성들에게 인기도 무척 좋았던 명자 누나가 결혼을 했는데 아기를 갖지 못했다. 그러다가 본인의 백일기도 후에 임신을 했기에 누나는 그 태아를 기도 응답이요, 하나님이 주신 아기로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엄청난 통증을 호소해서 가보니 척추가 눌린 증상이었다. 임신으로 인해 에스트로겐이 태아 뿐만 아니라 척추의 육종(암)도 빨리 자라게 해서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이었으나 누나는 그 고통을 태아를 위해 오랫동안 참아냈다. 고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져 미국 병원으로 옮겼으나 그 곳에서도 오진을 해서 누나는 그저 고통을 견뎌냈는데 결국은 암이 온 몸에 다 퍼지게 되었다.

겨우 태아는 수술을 통해 빼어내어 살렸으나 누나는 전신마취를 하고 3~4일만에 죽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온 가족이 7월3일에 모두 모이기로 했다. 뉴욕암센터 유전면역학과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죽음을 앞둔 누나를 만나러 가는 길에 이교수는 하나님에 대한 회의까지도 갖게 되었다. "왜 하나님은 누나에게 임신의 복과 함께 이런 병을 주셨을까...."

그런데 병원 문을 열자 마자 환상을 보게 되었다. 누나의 얼굴이 늑대로 보였다. 누나가 갑자기 내게 쌍욕을 하며 '내가 너를 증오한다. 난 오늘 지옥 간다~'라고 소리쳐서 무척 당황했다. 그 때, 기독교로 개종한 후로는 평생 거의 매일 밤을 철야 기도로 지새우셨던 할머니께서 들어오셔서 누나를 잡고 '주여~'하고 기도를 하셨는데,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옆에 주저 앉아서 기도하며 엉겁결에 '누나를 살려 주시면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했다. (이교수는 그 이후, 미국 비블 리컬신학교(BIBLIC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석사(M.DIV)와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은 후, 남아공 노스웨스트대학 포체프스트롬 캠퍼스(NORTH-WEST UNIVERSITY POTCHEFSTROOM CAMPUS)에서 “역사비평에서 내러티브까지의 인식론적 해석학”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누나는 쓰러져서 무슨 말인지 '쏼라쏼라~'하며 기도를 했고, 또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서 '천국에 가서 보자'고 아버지께 이야기 하고 잠들기도 했다. 이교수는 아버지의 간청으로 누나의 수술실에 들어갔었는데, 누나에게 마취를 하려는 순간에 누나가 눈을 뜨고 한국말로 '배고파~'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술 계획을 취소하고 다시 수술실 밖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누나는 조금씩 나아져서 그 이후로도 27년을 더 살았다.

명자 누나가 죽지 않은 것은 기적이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누나의 27년 세월은 하루 24시간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1년이면 6개월 이상을 병원이나 집에서 병상 생활로 보냈으며, 힘든 치료와 수술을 받아야 했다. 아버지가 적어두신 기록에 의하면, 명자 누나는 27년 동안 크고 작은 60여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약물로도 통제가 안 되는 심한 통증이 지속되었고, 피부가 썩어 들어 가기도 했다. 복벽을 뚫고 대소변을 체외로 배설하기 위해 수술한 장루와 요관조루에서는 늘 피가 흘렀고 염증이 떠나지 않았다. 하반신의 부분적 마비로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는 있었지만, 감각을 잃어 반복되는 요도염과 방광염을 초기에 인지하지 못해 혈액을 통해 온몸에 균이 퍼지는 패혈증에 걸려 정신을 잃고 죽음의 문턱을 드나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때로는 해열제와 항생제로도 고열을 억제할 수 없어 차디찬 병원 얼음 탱크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재활 병원에 3개월 동안 입원해 있던 어느 날 밤, 명자 누나는 옆에서 간병을 하던 나에게 속삭였다.

“한영아, 너는 화장실에 가서 대소변을 볼 수 있는 것, 잠자리에서 몸을 마음대로 돌릴 수 있는 것, 창문을 열고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이 누나에게는 절대 누릴 수 없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누나의 병상 옆에는 교통사고로 얼굴 표정 외에 온몸이 마비된 한 청소년이 있었다. 명자 누나는 그에 비하면 감사하다며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교수의 책에서 발췌)

그러나, 명자 누나는 암으로 27년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 가운데서도 고난을 뛰어 넘어 타인에 대한 공감과 봉사로 한 평생을 살았다. 누나는 금요일마다 교회 화장실을 청소했다. 그 몸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형무소의 죄수들을 섬겼다. 대변/소변 주머니를 모두 차고 봉사를 다녔다. 그 엄청난 아픔을 가지고도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며 다녔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A4 종이로 내용을 적어오셔서 책으로 내보라고 권하셨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제목은 '이런 사람도 있다'였다. 여기의 이런 사람은 바로 우리 매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매형은 27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섬겼다. '나같은 사람에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바로 곁에 주셨는데 얼마나 감사하니?'라고 매형은 얘기하곤 했다.

우리 마음에서 하나님을 빼버리면 빵이 들어 온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서 그 빵을 빼내 던져 버리라고 하는 것이다.


[구속적 공감 - 메시아의 고난과 우리 모두가 직면하게 되는 고난의 연결]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그 아픔을 통해 우리의 아픔을 '공감'하시는 것이다.

메시아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분은 메시아가 아니다. 메시아의 대속적 고난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근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된다.

메시아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가족보다 더 깊은 공감으로 우리의 고난에 참여하시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

(저자의 책에서...) "나는 대속이 전제된 고난의 종의 모습에서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시고, 우리의 고난을 공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은 저 높고 높은 영화로운 보좌에 앉아 단순히 우리에게 수직적으로 호령하시고 질문에 답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래, 너 아프니? 이런저런 이유로 아프지? 내가 주는 약 먹어 봐!”
천사들을 보내 우리의 문제를 단순히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은 낮고 낮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오셔서 우리보다 더 낮은 종의 모습으로 우리의 고난을 공유하고 공감하셨다. 그분은 실제로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함께 당하시는 분이다. 멋지고 화려한 주인이 아니라 흠모할 것이 없는 머슴으로 오셔서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고 섬기시는 분이다.

고난으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 아픔에만 머문다면 그는 작은 고통에도 절망할 것이다. 고난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위로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원망에만 머문다면 그는 항상 불행할 것이다. 고난 앞에서 정답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 그에게는 최선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답이 없는 질문에만 머문다면 그는 좌절하고 비평할 것이다.

그런데, 고난을 이웃에 대한 공감으로 승화시키는 사람이 있다. 그는 서로의 아픔을 통해 발화되는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웃는 자와 웃고, 우는 자와 울며 열방을 중보하는 복의 통로가 될 것이다. 고난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이웃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는 고난의 신비가 함축하고 있는 구속적 공감이다.

"고난 앞에서 정답은 정답이 아니다. 공감만이 정답인 것이다."

어느 날 암환자 병동을 지나오는데 어린 소년이 온 몸에 암이 퍼진 상태에서 너무 고통스러워 신음하는 것을 보았다. 누나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게 된 내게는 너무 고통스러웠다.

예수님은 우는 자와 같이 울라고 하셨다. 그 소년에게 돌아가서 누나 이야기를 해주며 위로하니 그 소년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를 해주었는데 그 밤에 그 아이는 소천했다. 의학도로서 냉정하기만 했던 내가 명자 누나로 인해 구속적 공감을 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난은 나를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시킨다.
내가 겪은 고난을 통해 이웃의 고통에 참여하고 나눌 수 있다. 고난을 통해 타인에 대한 연민이 생기기도 한다.

고난은 모든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명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난의 본 모습을 알기도 전에 멀리 달아나고 싶은 마음을 갖는다. “고난은 변장한 축복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고난은 인간을 성장시키는 하나님의 비밀 병기다. 부인하고 싶지만 사람은 고난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인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2009년 말, 《광야에서의 실패와 소망》이라는 제목으로 민수기 본문 강해를 출판하게 되었다. 첫 페이지에 짧은 헌사를 실었다.
“《광야에서의 실패와 소망》을 지난 26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신 저의 셋째 누님 이명자 집사에게 헌정합니다. 광야에서 질병과 싸우시는 누님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꼭 승리하시기를 바라며.”
출판된 책은 2010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했는데, 그해 8월 말, 한 권을 잘 포장해 미국에 있는 명자 누나에게 보냈다. 전화가 왔다.
“한영아, 나 책 다 읽었어. 정말 좋더라. 네가 자랑스러워! 좀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나 이제 죽어도 될 것 같아. 네가 이렇게 잘 사역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일주일 후, 9월 6일 새벽 4시 30분에 나의 부모님과 명자 누나의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명자 누나는 그렇게도 험악했던 세월을 뒤로하고 이 세상을 조용히 떠났다. 

이제 명자 누나는 기나긴 27년간의 암 투병을 마감하고 지금은 천국에서 안식하고 있다. 누나는 생전에 자신의 불행한 아픔을 원망하기보다는 이웃의 고난에 공감하는 존엄한 근거로 삼았다. 언젠가 누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영아, 나는 내려가려야 더 내려갈 데가 없는 것 같아…. 솔직히 나는 내가 예쁘고, 똑똑하고, 잘난 줄 알았는데 이게 뭐니? 대변 주머니, 소변 주머니를 차고 있으니…. 이제 나는 마음을 다 비웠어….”
명자 누나는 그 비운 마음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새겼고, 이웃의 고난을 향한 공감으로 가득 채웠다. 그 공감은 누나가 죽은 이후에도 누나가 기증한 장기들을 통해 누군가의 눈을 밝히고 있으며, 누군가의 폐와 간이 되어 숨쉬고 있다.


[맺는 말]

어떤 이들에게 고난으로 가득찬 세상은 영원한 밤이며, 인생은 불치의 상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합력해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과의 실존적인 씨름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나의 고난은 선을 완성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그 소망을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또한, 예수님은 '나는 섬기러 왔다'고 하셨다. 내 빵을 과감하게 던지고 그 안을 예수로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내 빵을 흐르는 강물에 던진다는 것은 '섬김'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움켜쥐지 말고 흘려 보내자.


[적용 기도]

일본의 기타모리 가조 저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는  "아픔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우리 인간의 아픔을 해결하여 주는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의 상처로 우리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여 주는 주님이시다."라고 한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도하자.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