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니엘 기도회 22. Day 5. 함께 - 전은주 전도사

Jesus Christ/다니엘 기도회 2022. 11. 5.

강사 - 전은주 전도사

- 싱어송라이터
- 전) 어노인팅 예배인도자 (2004년~2022년 1월 )
- 「교회여 일어나라,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등 작사, 작곡 (소원 One Thing) 

- 유튜브 채널 https://tr.ee/qHPLxnSDB2

미국 텍사스 침례교 대학교 (Dallas Baptist Univ.) 워십 리더십 석사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CFNI(Christ for the nations institute) 선교 과정

한국 장로교 신학교 (광나루) 신학과 졸업

(저는 개인적으로 이 분의 목소리를 '온 맘 다해' 찬양의 시작 부분 여성 솔로를 통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입니다.

예수님은 내 친구 ('가깝게' 오래 사귄, '함께 한' 사람)

인사 말씀 - 내 인생의 신앙 고민들을 나누겠다

나는 내년에 마흔이 되는, 네 살 아이의 엄마이며 한 남자의 아내인 전은주이다. 어노인팅 찬양 사역자의 역할을 금년 초에 내려놓고, 지금은 여성 풋살도 하며 다양한 여러 시도들을 하며 행복한 시간을 지내고 있다.
아직 젊은 나이지만, 내 인생 과정에서 신앙인으로서 고민한 것과 그에 대해 해결 받은 것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오늘의 찬송과 간증을 통해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삶 속에서도 주님께서 이미 함께 동행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심을 다시 기억하시면 참 좋겠다.
(어노인팅의 한경숙 간사님이 오늘 찬양을 위해 반주로 도움을 주실 예정이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내 좋은 친구

우리 외할머니가 즐겨 부르셨고 나도 어린아이일 때부터 좋아했던 찬송으로 시작한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받겠네

짝짝이 눈으로 왕따가 되었기에, 모범생이어도 내게 친구는 없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왼쪽 눈이 안검하수(눈꺼풀이 처져서 시야를 가리는 현상으로 눈꺼풀 올림 근육의 기능이 떨어져서 생김)로 인해 눈을 거의 뜰 수 없었다. 시야가 장시간 가리어지면 시각 기능도 약해지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시술을 어려서부터 받아야 했다. 5세 때 왼쪽 허벅지의 근육을 떼어서 눈꺼풀에 이식하는 큰 수술을 했으나 경과가 좋지 않아서, 허벅지 근육의 힘이 너무 세었기 때문인지 왼쪽 눈이 너무나 크게 되어 심한 짝눈이 되었고, 그로 인해 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눈 병신'으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아니 그들은 내게 친구가 아니라 나를 조롱하는 두려운 무리였다. 그런 큰 수술은 우리 집의 경제 형편에도 큰 어려움을 주었기에 마음의 부담도 컸다.

부모님도 위로가 되는 친구는 아니었다

내 짝눈으로 인해 제대로 결혼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하신 어머니는 내가 다른 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도록 애를 써서 엄격하게 교육하셨다. 그런 hard training이 더 없을 정도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학원도 다니고 교회도 다니며 완벽한 사람이 되도록 요구받으며 정말 여러 가지 것을 잘 해내야 했다. 아버지도 엄격하셔서 집은 따뜻한 안식처라기보다는 내게는 외롭고 두려운 공간이었다.

찬양 가운데 예수님이 내 친구와 위로였다.

그래도 외할머니 등에 업혀 모든 예배를 다녔기 때문에 아주 어릴 때부터, 일찍이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겨우 여섯 살이었지만 내 믿음은 진지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고, 신앙대로 살려고 애썼다. 내 심한 짝눈으로 친구들이 나를 놀릴 때, 이 찬송의 뒷부분 가사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받겠네'가 내게는 무척 큰 위로가 되었다.

인생과 신앙의 사춘기를 겪다

유아기를 벗어나 청소년기가 되면서 점점 내게는 기독교 신앙이, 믿음이 너무 어렵고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를 조롱하는 친구들이라는 현실과 나를 위로하시고 지키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너무 상반되게 느껴졌다. 그 간극이 너무나 커서 내 믿음은 겉돌았고 신앙의 사춘기를 겪게 되었다.

기도의 응답을 믿었지만 내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

초등학교 때 주일학교 선생님은 기도를 참 많이 하신 분이셨다. 어린이 여름 성경학교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수영 시간'에 비가 오게 되면 너무 실망스러웠는데 그때 선생님은 우리와 함께 비를 멈추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셨고, 그러면 정말 비가 멈췄다. 어린 시절의 그런 경험들로 인해 내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절대 들어주지 않으신 2가지 기도 제목이 내게 있었다. 첫째, 내 두 눈이 같은 크기가 되게 해 주세요.(짝눈을 고쳐 주세요.) 둘째, 아빠가 술을 끊고 화내지 않게 해 주세요. 다섯 살 어린 나이부터 시작한 기도였지만 청소년이 될 때까지 이 두 가지 기도는 전혀 응답되지 않았다. 그래서 기도를 조금 바꾸었다. '눈의 크기가 같아지지 않는다면 교문 앞에서 나를 놀리는 아이들이 없게 해 주세요.' 그 기도도 응답되지 않았다.

 

심지어 내 눈은 부모님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비참하게 여겨지는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었다. 가정에 수술로 인해 경제적 부담을 끼친 것도 미안해서 나는 가급적 모범적인 삶을 살려고 애썼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이렇게 응답해주지 않으시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이렇게 인생 사춘기와 교회 사춘기를 동시에 겪게 되었다. 교회의 삶과 학교의 삶 사이의 그 큰 간극을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중등부 최고의 자랑거리요 모범생에서 벗어나 교회의 걱정거리로 바뀌게 되었다. 교회를 소홀히 했다.

기도 응답을 위해 내 공로를 쌓았지만 해답이 아니었다

고2가 되었을 때 교회로 돌아가 찬양인도자도 되었지만, 사춘기의 해답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내 인생의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고 싶었기 때문에 교회로 돌아갔고, 더 나아가 더욱 열심히 여러 가지 봉사를 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헌신'을 하면서 더욱더 자기 의(義)가 쌓이기 시작했다. '하나님, 제가 이것 이것을 했는데, 이제는 제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되지 않았나요?' 내 공로를 하나님께 내놓고 내 문제 해결을 요구했다.

 

그래도 삶의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믿음은 더 어려워졌다. 앞에 서서 찬양을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의 갈등을 감추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 모습이 너무 위선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나는 '전도 못하는 전도사'가 되어버렸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전도에 열심이고 그 열매 맺는 삶을 살았으나, 그분들의 딸이며 손녀인 나는 아무 열매도 없었다. 전혀 기쁨이 없었다.

말씀을 통해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회복되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었다
- 내 어둠의 날에 주님은 어디에 계셨나요?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께서 참으로 감사한 만남들을 내게 허락해 주셨다. 어려서부터 친구들의 놀림과 왕따로 인한 트라우마 속에서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라고 생각했으나, 그 상처가 점점 치유받게 되었다. 예수 안에서 여러 좋은 친구들의 사랑과 섬김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아픔을 물어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와 함께 울어주는 친구들을 내게 보내 주셨다.

(다른 인터뷰 내용을 인용합니다. "예전에는 ‘완벽한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족한 나를 과연 사랑하실까?’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동체를 통해서 ‘보호’라는 것을 받게 되고, 유학 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저를 말도 안 되게 품어 주고 말도 안 되게 이해해 주는 경험을 통해 ‘인간도 나를 이렇게 품어 주는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실까?’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이런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주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그 도구가 되어 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렇게 치유와 회복의 시간이, 사랑이 내 안에 쌓였을 때, 나는 여전히 내가 하나님 앞에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연약함과 문제들을 올려 드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음을 확인받아야 했다. 내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내세울 때는 사탄의 참소에 늘 넘어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 앞에 솔직해져야 했다. 비신앙의 질문이라도 한 번쯤은 하나님께 던지고 해결 받아야 했다. 내 슬픈 마음을 토로해야 했다.


시편에도 예레미야 애가의 애가처럼 '슬픈 노래'들이 많이 있었다. 시 22:1,6절과 같은 슬프고 기가 막힌 표현과 기도들이 가득했다. 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진실한 모습보다는 늘 괜찮아 보이는 위장된 모습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도 마태복음 27:46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시편을 인용한 깊은 탄식을 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의 가장 깊은 연합된 관계였기에 우리 죄로 인한 그 절망까지도 온전히 드러내고 탄식하신 것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이 질문을 한 번쯤 해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내 삶의 어두운 기억들에 대해 한 마디만 해주세요....그 때 어디에 계셨어요?' 그때의 마음으로 드린 찬양이 이제 부를 '그날'이다. 우리의 그날은 이웃들의 그날이고 우리나라와 사회의 그날이다. 그날의 치유를 위해 기도한다.

그날 거기에 내 곁에... 주님

그날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그날
가슴속에 묻고 살았던 그날을 기억해요, 그날을 기억해요.

그날
여전한 기억 속의 그날
마냥 덮어 두고 싶었던 그날을 기억해요, 그날을 기억해요.

당신은 어디 계셨나요, 왜 날 지켜주지 않았나요?
다른 이들의 서툰 위로가 아닌 당신께 듣고 싶어요.
...
그날
나와 함께 있었다고 그날
나와 함께 울었다고 그날, 거기에.... 그날, 내 곁에

여러분께도 그날이 있을 것이다. 이런 아픔의 날들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얘기하시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실까?
내가 눈물 흘릴 때 주님은 어디 계셨어요?

신약성경을 통독하는 기간 내에 한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분명하게 응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날 주님은 어디에 계셨는지...

신약성경 첫머리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온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는 의미의 그 이름이, 내게는 전혀 이해가 안 되고 반갑지 않았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내가 얼마나 사람들을 증오하는지 아신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셨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내게 일어났을까?' 하는 아픔들 때문이었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마 28:18~20 오늘의 본문 말씀을 통해 내 마음의 뭉친 것들이 조금씩 해결되고 풀리기 시작했다.
오래 왕따를 당했던 나였다. 그 응어리로 인해 내가 마음속에 담고 있던 것은 크게 성공을 해서 'TV는 사랑을 싣고'와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게 되면, 주축이 되어 나를 놀려댔던 그 친구를 찾아내서 전 국민 앞에서 망신을 주고, 꼭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오늘의 본문은 절대 내가 처음 읽은 구절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익숙하던 이 성경 본문에서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에만 마음이 사로잡혀 있었다. 그 권세를 주시겠다는 약속에 마음이 온통 쏠렸고, 아직도 내가 능력을 받지 못하여 갖고 있는 분노/불안/두려움/괴로움의 원인은 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참 좋은 친구 예수님

그런데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리라'라고 하신 20절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때가 언제인가? 3년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기적과 사랑으로 가르치고 보살폈음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고 심지어 십자가의 예수님을 배신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향해서, 사랑보다는 그저 지긋지긋할 법한 그 제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예수님도 우리 안에서 영원히 함께 사시는 것이다. 그 약속의 말씀이었다.)

내 이름은 '함께 하는 하나님'이지 않니? 내가 온몸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겪으면서 너희의 아픔과 연약함을 너희와 함께 겪었듯이, 죽음을 이긴 부활의 승리를 이루었으니, 이제 진실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살 것이라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내가 어떤 상태이든 (무지하든, 배신자이든, 넘어졌든, 더럽고 추하더라도), 예수님은 진실로 나와 함께 하시고 함께 겪어내심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이 나와 정말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큰 기쁨을 얻게 되었다. 

내 아버지 그 품 안에서 나는 안전합니다.

예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그 진한 감격의 만남 이후에도 내 삶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함께 하심'을 예수님은 내 삶 속에서 점점 깨닫게 해 주셨다. (주님 내 안에, 나는 주 품 안에)

신혼여행 후 1주일 정도 되었을 때였다. 요리에 서툴러서 매일 메뉴를 바꿔가며 그나마 간단한 전골, 탕과 같은 단품요리를 했는데, 연하의 남편이 간이 부었는지 '간단하게' 밑반찬과 밥만 먹자고 했다. 주부들은 아시지만, 밑반찬 만드는 것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 결혼 전처럼 쉽게 생각하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지만 냉장고 안에는 아무런 밑반찬도 없었다. 채워 넣은 사람이 없으니 있을 리가 없었다. 빨래도 세탁기가 다 해주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결국 빨래도 세탁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밑반찬을 만들고 빨래를 하셔서 내가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이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명예로울 때나 조롱받을 때나 언제나 오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

내 아버지 그 품 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주 손길로 내 삶을 안으시니 그 평강이 나를 덮습니다


나 비록 넘어지며 흔들리지만 주 내 안에 거하며 나를 붙드시니
내 생각을 주께로 돌리고 주시는 평강의 옷을 입습니다.

 

주 약속 안에서 내 영혼 평안해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 나 신뢰해
두려움 다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해 주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이러한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고통받는 사람들 속에 계신 줄을 믿는다.
우리 안에 참된 평강을, 샬롬을 허락해 주시도록 기도하자.

김은호 목사님의 정리 기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영적인 사춘기를 누구나 겪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풀어야 할 숙제들이 많다.
오늘의 간증을 통해, 여러분의 그 숙제들이 해결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알게 되셨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왕따를 당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때 주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이런 마음이 드는 영적 사춘기가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주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셨음을 알게 되었다.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징계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시고 함께 하셨다.
우리의 과거에 아픈 기억들 속에서도 주님이 언제나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존심으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풀지 못했던 우리 숙제가 풀리게 하소서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실까?
그렇다면 왜 내게, 우리 가정에 이런 일들이 생길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심을 다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임마누엘이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우리의 참된 신앙이 되게 하소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