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처음 어린이날의 유래를 배울 때, 소파 방정환 선생이 그전에는 '아이, 애새끼, 계집애' 등으로 함부로 불리던 호칭을 '어린이'로 제창하면서 존엄성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제게는 그다지 새롭지 않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자주 소중하게 드러내신 이야기들을 배우며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어린이'라는 표현을 성경에서 사용하는 데 매우 느립니다. 그나마 처음 '어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제 견해로는 1977년 공동번역 성경이 처음이고 개신교에서 비교적 널리 사용된 것은 1990년대의 '새 번역' 성경이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교단이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어린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륜교회 중등부 사역을 맡은 '박성광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제 표현으로 풀어봅니다.
마가복음 9장과 10장에도 예수님이 어린이들에 대해 언급하시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어린이 한 사람에게 잘 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9장에서 언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막은 제자들을 크게 나무라시는 모습이 10장에 나옵니다.
어린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 vs. 말린 제자들 vs. 예수님
여기에서 우리는 두 그룹의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어린이들을 그저 약한 노동력으로만 바라보던 그때, 예수님의 만져 주심(사랑과 관심)을 기대하고 어린이들을 일부러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이를 소중하게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꾸짖으며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지 못하게 막은 제자들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판단기준으로 지레 짐작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린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허용할지 여쭙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상식적 행동이 무서울 잘못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 두 그룹을 향한 예수님의 반응은 상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노하셨습니다'. 원어를 직역하면 '많이 괴로워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득권자의 질서, 즉 '너는 아니야!'라는 판단과 정죄의 모습, 즉 사탄의 접근은 보셨기 때문에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어린이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경험이나 기준을 앞세우지 않고 모든 것을 순전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전적으로 부모님을 의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잠자고 일어났을 때 어머님이 안 계실 때 엉엉 울면서 느꼈던 그 절망과 두려움을 누구나 겪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도 고난을 겪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린이처럼 자기 기준이나 집착 등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의 실력 없음을 고백하며 (Nothing of Mine, Only Jesus!), 오직 예수님만 의지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성도의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내게 '있는' 것은 '잊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예수님의 무리수? -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구제 헌금을 하라
연약하고 존중받지 못하던 어린이들과 대조되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곧바로 이어져 나옵니다.
그는 부와 명예와 도덕성 등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의 질문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여기지 않고 선한 선생님으로 여긴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바로 그 잘못이 드러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
선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선은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 내가 노력하여 쌓고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선은 은혜로 거저 주시는 것이지, 자기의 계명 준수나 공로와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게 필요한 것은 청년의 거대한 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청년을 사랑하셔서, 영생은 자기 자랑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것임을,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자기 확신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여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계명을 지켰다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부자 청년에게 '네 모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라'라고 무리한 말씀을 하신 것은, 그것 자체의 중요성 때문이 아니라 존귀하고 놀라운 영생은 종교적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청년에게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그 청년을 '사랑하는 마음' 위에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도전을 하신 것입니다. 그 청년이 살인하지 않았어도 이웃을 마음속에 미워한 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간음하지 않았어도 아름다운 여인에게 본능적인 음욕을 품은 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별 감동 없이 의무적으로 임했을 수도 있습니다. 구제했지만 아까운 마음을 품었을 수도 있습니다.
즉,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하거나 지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방향으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고,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고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삶을 살아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린이처럼 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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