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노희송 목사
- 1.5세 영어권 목회자 출신으로 이제는 한국어권 담임목사로서 토론토 큰빛교회를 섬기고 있다. 그는 주도하는 목회보다 이끄심을 받는 목회를 추구한다. 또한 지역 사회에서 선교와 영성의 균형을 이루는 교회, 이민 1세와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다민족 회중을 섬기는 목회를 지향하고 있다.
- 그는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에서 영어권 사역을 담당하다가 2014년부터 현재 3대 담임으로 한국어권과 영어권 다민족 회중(New Hope Fellowship)을 동시에 섬기고 있다.
- 최근 '마음 디톡스'라는 책을 발간했다. 육체가 디톡스(해독)를 해야 건강해지듯, 마음도 정기적인 디톡스가 필요하다며, 나를 괴롭게 하는 불순물이 어떤 것인지 알고, 거기에서 벗어나 더 큰 평화를 얻도록 안내하는 내용이다.
- 미국 풀러 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고든 콘웰 신학교에서 영성 전공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틴데일 신학교 상담학 교수로 일하는 아내 노선영(Helen Noh)과 두 딸(새로미, 예닮이)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나는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에 캐나다 토론토로 이민을 간 1.5세 교포이다. 아내와 결혼 후 27년간 줄곧 영어권 목회를 하다가 (사역하던 토론토 큰빛교회에서 2014년부터는 영어권 사역뿐만 아니라 한국어권 사역도 아우르는 담임목사로서 사역하게 되었다.)
내가 지금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는 토론토 큰빛교회는, 우리나라에서 무척 유명하고 사랑받는 수많은 동요와 찬송가를 작곡하신 박재훈 목사님이 39년 전(그의 나이 50대 후반)에 캐나다에 교회를 개척해서 100여 명 성도들의 교회로 성장했는데, CCC간사 출신이었던 임현수 목사님이 캐나다로 유학을 온 김에 그를 담임목사로 세우시고 박재훈 목사님은 원로목사로 은퇴하신 후에 성가대 지휘를 담당하셨다.
박재훈(朴在勳, 1922년 12월 21일 ~ 2021년 8월 2일)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오르가니스트,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 개신교 목회자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해군 하사 출신이다.
강원도 출신으로, 194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첫 데뷔한 그는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유학을 하다가 징병을 피하여 일본 유학 생활을 포기 및 단념하고 귀국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1949년 대한민국 해군 하사 임관하여 대한민국 해군본부 정훈과에 배속되었다가 이듬해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해군본부 군악대 하사로 복무하였고 1952년 해군 하사 예편하였다.
이듬해 1953년 한국 전쟁 종전 이후 서울에서 초등교원과 중등교원을 지내다가 그만두고 장수철 등과 함께 기독교 음악 활동을 하며 서울 영락교회 장로와 한양대학교 음악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73년 미국을 거쳐 1977년 캐나다로 건너갔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토론토에서 개신교 목회자 겸 원로목사로 음악 활동과 사목 활동을 겸하다 2021년 8월 2일 캐나다 온타리오주 미시사가 병원에서 만 98세로 숨졌다.
그의 작품으로는 동요 《구슬비》, 《어머님 은혜》, 《송이송이 눈꽃송이》, 《시냇물》,《모두모두 자란다》, 《눈》,《봄》, 《내 주먹》 등과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 등과 오페라 《에스더》, 《손양원》《함성,1919》 등이 있다.
어린 박재훈은 아버지의 권유로 가난한 교회의 청소를 맡아 평일에도 교회를 드나들었다. 예배당에는 풍금(오르간)이 있었다. “라디오도 음악회도 없던 시절,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곳은 오직 교회뿐이었다. 3년 넘게 청소를 계속한 것은 성실했다기보다 예배당에 있던 오르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다.” 청소는 뒷전이었고, 오르간 건반만 만지작거렸던 그는, 매우 아름다웠다고 기억하는 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막연하게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 진학 대신 농사일을 도우며 3년간 학교 소사(小使)로 일하던 그는 평양에서 목회하던 큰 형 박재봉의 도움으로 평양요한학교에 입학한다. 마침 평양에서 열리던 유명 부흥사 조경우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한 17세의 소년 박재훈은 뜨거운 거듭남의 체험을 한다.
임현수 목사님이 25년간 목회를 하시는 동안 큰빛교회는 수천 명 성도가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폭발적인 성장을 했는데, 임 목사님이 평소에 뜻을 두고 계시던 북한 선교를 위해 조기 은퇴를 선포하셨다.
그래서 3대 목사로 제가 청빙을 받았는데, 영어 목회만 해왔기 때문에 주변의 우려도 컸기에 1년간 임목사님과 제가 반반씩 설교를 하는 동사 사역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담임목사가 된 지 2개월도 채 안되어서 임 목사님이 북한에서 2년 8개월간 억류를 당하시는 일이 발생했다. (https://governance.tistory.com/513)
그 당황스러운 시간은 기도하고 인내하는 연단을 통해 교회가 성숙하고 업그레이드되게 하였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많은 성도들이 체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는 ‘낭비되는 시간은 없다.‘ 우리의 실패도 하나님은 합해서 선을 이루신다.
임 목사님의 뒤를 이어 담임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한 후 큰빛교회에 닥친 큰 어려움으로 인해 성도들이 오히려 내 처지를 불쌍히 여겨 이해하고 도와주는 은혜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한국어 목회를 위한 적응의 시간과 경험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10년간 사역을 해 온 성도가 지쳐서 쉬고 싶다는 분이 계셨다. 감사한 마음으로 축복하고 보냈으나 그분을 말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분을 크게 서운하게 만들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한국 교인들은 대개 크게 웃으며 어떤 상황인지 이해함 ^^)
또 어떤 성도에게 심방을 가겠다고 했더니 담임목사님께서 굳이 오시지 말고 부교역자를 보내라고 해서 그렇게 했지만, 그분은 내가 심방하지 않은 것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우회적으로 계속 비치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배웠다. "오지 말라는 것은 와 달라는 것이다."
지난 8년간의 한국어 목회를 하는 동안 나는 성도들에게 '수치심과 원망에 대해, 마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코로나 기간을 통해 성도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그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싶은 생각이 깊어졌다.
Shame & Blame, 수치심과 원망
수치심과 원망은 죄성을 가진 인간의 즉각적인 반응이다!
shame 수치심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그들에게 가장 먼저 찾아온 감정이었다. (창 3:7)
그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수치심 shame 때문에 힘들어했고 원망 blame 하기 시작했다. 아담이 배우자인 하와를 원망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와를 주신) 하나님을 원망 blame 한 것이었다. 이러한 수치심과 원망은 단지 일회적인 것이 아니어서 평생 동안 반복되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입력되어 자동화된다. 습관이 된다. 감정의 chain이 형성된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 관계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수치심과 원망하는 마음, 이 두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신앙 관계에서도 큰 장애물이 된다.
어떻게 이 두 감정을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 수치심에 대한 영적 이해가 필요하다.
엡 5:11~12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죄책감(guilt)과 수치심(shame)은 다르다. 죄책감은 행위와 행동에 초점을 맞추지만, 수치심은 정체성과 존재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죄책감 (행동, 행위에 초점) vs. 수치심 (정체성과 존재감에 초점)
우리가 실패나 나쁜 행동을 하게 되었을 때, 죄책감은 그 나쁜 행위에 대한 아픔일 뿐이지만 수치심은 나를 ‘실패자’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죄책감에는 건강한 죄책감과 강박적인 죄책감이 있다. 건강한 죄책감은 우리를 회복으로 이끌어 주지만, 강박적인 죄책감은 역기능으로, 파괴적인 작용을 하게 된다. 건강한 자아상이 있으면 건강한 죄책감으로 연결되지만, 건강하지 못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회개를 해도 죄책감에 억눌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수치감은 언제나 역기능이 있을 뿐이다. 간혹 어떤 행위에 대해 문화적 차이로 인해 심각하게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도 수치감은 크게 갖는 경우를 보게 된다. 아담과 하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죄책감은 느끼지 못했으나 수치심을 크게 느꼈다. 그래서 그들의 벗은 몸을 가리려 했다.
아프리카 목사님들이 미국에 유학을 와서 논문을 쓰다가 표절을 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표절에 대해 엄격하지 않은 그들 고국의 습성으로 인해 죄책감은 느끼지 않았으나 표절 사실을 파송 교회에 알리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껴 곧바로 사과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 정서는 사람의 수치심을 건드리는 경향이 크다.
나는 한국에서 80년대에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는 시험을 보면 전교생의 석차를 벽에 붙여 공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적이 나쁜 학생들이 수치심을 크게 느껴 학업에 더욱 열심을 내도록 동기부여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년 전에 평양의 제1 고등학교에 가서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임현수 목사의 북한 지원 프로그램의 대표적인 내용) 그런데, 북한에서도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전교 석차가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어릴 때는 잠자다가 이불에 소변을 누게 되면 키를 쓰고 발가 벗겨 길가로 쫓겨났다. 창피함을 통해 소변 가리기를 강요받았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남과 비교하며 나무라는 문화도 ‘수치심’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한국에서는 신앙생활의 동기부여도 성도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 ‘체면’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게 했다. 출석과 눈도장. 이렇게 남의눈을 의식하게 하는 신앙생활은 코로나 기간에 모두 무너졌다.
죄를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치심을 느끼면 하나님께 달려가 해결해야 하는데, 인간은 자기 스스로 덮어서 해결하려 하는 것이 본능이다. 아담과 하와도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창 3:7)
어떤 사람은 거짓이나 위선으로 자기를 덮는다. 교만은 낮은 자존감이 그 근본 이유다. 완벽주의도 나뭇잎 치마다. 억지로 바쁜 척하기도 한다. 그러나 겉치장은 우리를 덮을 수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다.
죄는 금지되었기 때문에 아픈 것이 아니라 아프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다.
수치심은 미안함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낮은 자존감을 가져온다. 수치심 때문에 중독에 빠지거나 우울증을 겪게 된다. 공동체를 파괴하게 된다.
둘째, 원망에 대한 영적 이해가 필요하다.
창 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수치심과 수반되는 것이 원망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한다.
자녀가 입시에 실패하면 원망하는 부모가 많다. 부모를 원망하는 60세 성도를 만난 적이 있다. 배우자를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 성적이 안 좋은 학생은 선생님을 원망한다. 신앙생활을 잘하던 남자 집사가 외도를 하게 되자 사역에 스트레스를 많이 준 교회 탓이라며 그 부인이 교회를 원망하는 것도 보았다. 특히 대개 자기와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을 원망한다. 마음에 원망하는 대상이 있는가?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 당신에게 독소 영향을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와 다스리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원망을 하게 된다.
우리의 상황이나 사건이 하나님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상대나 상황에 더 큰 힘과 영향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원망한다면 하나님보다 그 사람이 당신의 삶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 따라 특정 반응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에 대해 습관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얼마 전에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했는데, 특히 ‘베드로 회복 교회 The Church of Primacy of Peter’가 무척 좋았다. 그곳에는 베드로를 예수님이 세우시며 '내 양 떼를 먹이라 Feed my sheep'고 하셨던 성경 말씀도 있었다. 그곳을 막 떠났을 때 마침 들판의 양 떼를 보았는데 너무 큰 감동이 되어 사역의 결단을 새롭게 하며 은혜를 받고 있는데 내 뒷자리의 사람이 양갈비를 떠올리는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도 무척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개면 사과....'로 자동 연상한다. 대개 먹는 것을 우리는 많이 생각한다. 모두가 습관적이다. 원망도 습관이다.
청년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까 봐 걱정하는 경우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전과 뜻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몰래 숨겨 놓고 우리가 애써 찾아내도록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원망하지 말라.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갔지만 형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실수하거나 실패해도 누군가를 원망하지 말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기를 기도해라.
임현수 목사님이 북한에 억류되었을 때 우리 교회에서도 대응 방법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것이 응답이었고,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이끄심만을 바라며 기도하며 살아가던 중에 우리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어 고정되는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
우리의 수치심과 원망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한다.
셋째, 십자가에서 인간의 수치심과 원망이 해결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뿐만 아니라, 수치심을 위해 고난당하셨다. Naked and shame!!! 발가벗겨 십자가에 매달리는 수치를 감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셨다. 우리 삶에 억울한 일이 생겨도 원망하지 말아라.
예수님은 베드로도 회복시켜 주셨는데, 그때도 전혀 수치심을 주지 않으셨다.
수치심으로 괴로워하는 베드로에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숯불 앞에서 베드로를 먹이시며 ‘세우셨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회복되었다.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수치심을 드러내지 않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이 복음의 디톡스 능력이다. 그때 비로소 복음의 정체성을 느끼게 된다.
탕자의 죄책감을 아버지는 뛰어가서 ‘덮어’ 주셨다.
누구 때문에…. 당신의 인생이 영원히 망가지지는 않는다. 넘어질 수는 있어도…! 왜냐 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역전과 반전은 주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다.
포로가 되지 말고 자유를 누려라. 수치심과 원망의 습관을 끊어 버려라!!!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죄는 심각하게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실패했다고 실패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회개하면 된다. 어리석은 일을 했지만 쓸모없는 자로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죽옷으로 덮어주신다. 주님이 우리의 실패는 모두 해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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