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93세로 소천하신 아버지는 생전에 자주 옛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일제 강점기 시절, 할아버지를 따라갔던 오뎅 백반 식당 이야기가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따끈한 국물에 깔끔한 오뎅을 왜간장에 찍어 먹으며 아버지가 어린 시절 느꼈던 그 따스함을 제게도 전해주시곤 했죠. 이제 저는 오뎅을 볼 때마다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그 맛과 냄새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아버지의 목소리와 미소로 오뎅 국물 김 속에 서려 제게 다가옵니다. 오늘은 오뎅 한 꼬치에 담긴 추억과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
오뎅, 그 이름 속에 담긴 시간
아침 일찍 기차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뜨끈한 국물을 머금은 ‘오뎅’이죠. 국자로 가득 퍼낸 국물을 종이컵에 담아 후후 불어 마시고, 꼬치 하나 둘 셋… 다 먹고 나면 그 꼬치 개수대로 계산하는 정겨운 풍경 말입니다. 도시락보다 간편하고,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이 작은 행복은 늘 여행의 시작을 든든하게 해 줍니다.
이 음식은 오뎅(일본식 어묵탕)과 덴뿌라(튀김), 그리고 한국식 ‘어묵’ 등 그 이름도 약간의 혼란과 역사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제는 우리가 분명히 구분하듯이, 일본에서 ‘덴뿌라(天ぷら)’는 오늘날 주로 해산물이나 채소 등을 얇은 튀김옷으로 감싸 튀긴 음식을 가리키고, 우리가 “튀겨낸 어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본에서는 보통 ‘사츠마아게(薩摩揚げ)’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튀겨낸 어묵을 ‘덴뿌라’라고 부르는 지역적·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점에서 약간의 혼동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부산에서 시작한 오뎅의 역사
부산은 일찍이 개항(1876년)과 함께 일본으로부터 많은 문화가 들어온 도시입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일본식 ‘오뎅’이었습니다. 원래 일본에서 ‘오뎅(おでん)’은 여러 종류의 생선살 반죽(가마보코), 무, 곤약, 달걀 등을 깊은 국물에 오랜 시간 끓여 내는 탕 요리 또는 전골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어묵탕’ 혹은 ‘어묵찌개’라고 해도 무방하지요. 저희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를 데리고 가셨던 일제 강점기 일본인 식당의 오뎅도 그런 탕 또는 전골 요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산에 정착한 일본인들이 즐기던 이 오뎅탕에는 우리 입맛에 맞춰진 변형이 조금씩 더해졌습니다. 특히 부산 앞바다에서 잡힌 신선한 생선을 갈아 모양을 만든 뒤 기름에 튀겨낸 어묵, 즉 ‘가마보코(魚のすり身)’가 주재료로 쓰였죠. 일본어에서 ‘튀김’은 ‘덴뿌라(天ぷら)’라고 하는데, 이 튀긴 생선살 반죽을 가리켜 부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덴뿌라’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말이 점점 전국으로 퍼져나가면서, 부산뿐 아니라 인천을 비롯한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도 ‘어묵’을 ‘덴뿌라’라고 부르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묵... 'since 1986'
그렇다면 ‘어묵’이라는 말은 언제부터 공식적으로 쓰이게 된 걸까요? 1986년, 식품위생법이 개정되면서 ‘오뎅’을 대신하여 순우리말인 ‘어묵(魚묵)’이라는 용어가 권장·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말 그대로 ‘물고기 살을 묵처럼 만들었다’는 의미죠. 한때는 ‘생선떡’, ‘생선묵’, ‘고기떡’ 같은 다양한 후보 명칭도 거론되었다고 하는데, 결국 ‘어묵’으로 굳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어묵을 ‘오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덴뿌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문화와 언어는 우리가 살아온 흔적이 묻어나는 것이기에, 어느 한순간에 완벽하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오뎅’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입에 남아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말속에 담긴 익숙함과 정겨움이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어묵 속에 흐르는 이야기
오뎅이든 어묵이든, 이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오랜 시간을 품고 있습니다.
겨울에 기차역에 도착해 뽀얀 김을 내뿜는 어묵 국물을 마주하면, 저절로 “아, 이제 여행 시작이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어묵 꼬치를 호호 불며 먹고,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몸도 마음도 금세 뜨거워지죠. 일본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오켄키 데스까(お元気ですか)?”라는 인사를 장난스럽게 “오뎅 다 됐으까?”라고 바꿔 부르는 우스개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아재 근성일지도 모릅니다.
어묵은 이렇듯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습니다. 맵고 짠 한국식 양념으로 볶기도 하고, 떡볶이에 넣거나 각종 국물 요리에 활용하기도 하면서 계속해서 진화해 왔지요. 어린 시절 도시락 반찬의 단골 메뉴이기도 했고, 바쁜 아침 잠깐의 허기를 달래주는 길거리 간식이 되어 주기도 하고, 시장 골목 어귀에 서서 ‘두 꼬치만 주세요!’ 하면 사장님이 잔뜩 웃으며 국물까지 한가득 따라주시는 푸근한 정을 느끼게 하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어묵은 떠나는 사람에게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도 작은 위로가 됩니다. 새벽 기차를 기다리며 허기를 달래는 여행자에게, 시장에서 하루를 보내는 장사꾼에게,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출출함을 느낀 이들에게, 어묵은 늘 곁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에게 어묵은 아버지의 추억을 되살리는 맛입니다. 오뎅을 먹을 때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식당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그 따뜻함은 이제 제게로 이어져,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맺는말
오뎅 한 꼬치에는 단순한 맛 이상의 것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가족의 이야기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기도 합니다. 오뎅 국물 한 모금, 꼬치 한 조각 속에 누군가의 추억이, 그리고 삶의 온기가 녹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아버지의 미소가 담겨 있듯, 여러분에게도 소중한 기억 하나가 떠오를지도 모르니까요.
“오뎅 다 됐으까?”라는 어린 시절 장난처럼, 이 작은 음식이 우리 모두에게 따뜻한 순간을 선물해 줄 수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