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수진 바이올리니스트
- 비에니아프스키 국제 콩쿠르 한국인 최초 최연소 수상자
- 사랑의 바이올린 홍보대사 ( ‘사랑의 바이올린’은 한국 및 전 세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17년째 ‘악기 무료 레슨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저소득층, 소외계층, 다문화가정 등 여건 상 악기를 배울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악기를 제공하고 기악 전공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무료 레슨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프로그램 수혜 어린이는 국내외 2000여 명에 달한다.)
-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7imOVWxAcmrA-7WJoDg3MQ/videos
학력
- 옥스퍼드 대학 음악학 수료
- 영국 런던 왕립 음악대학 석사 과정
- 크론버그 아카데미 최고연주자 과정 졸업
(연주) 마스네 타이스 명상곡 (반주 : 피아노 연이슬 * 연이슬 자매는 오륜교회 안수집사님의 작은 딸로서, 역시 미국 유학을 최우수로 마친 재원입니다.)
무대에서 인터뷰나 곡 설명은 해보았지만, 악기와 떨어져서 상당 시간 말씀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어서 긴장된다. 요청을 받고 망설였지만, 외삼촌(아마도 외가쪽의 5촌 아저씨로 추정됨)이신 테너 이용훈 집사가 (2015년) 다니엘 기도회에 나오셨던 비디오 클립(https://youtu.be/otIgSFR8UnY)을 보고, 잘 알던 내용이지만 더욱 새롭게 감동이 되어서, 나도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삼촌처럼 드라마틱한 삶의 사건은 없을 수 있지만, 잔잔하게 내 삶을 인도해주신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과 나누는 시간이 되기 원한다.
어린 시절 - 바다, Isle of Man
나는 1986년 7월 22일에 부산 (광안리)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대학원을 마친 후(아버지 한태준 교수. 1960년생. 서울대 학부/석사 86년 졸업) 유학을 준비하는 기간이어서 나는 외가에서 살면서 외할머니를 엄마처럼 가깝게 느끼며 유아기를 보냈다. 광안리 바닷가여서 아빠, 엄마, 다음에 배운 말이 '바다'였다고 한다. 돌잡이도 바이올린과 활을 골랐다.
두 살 때 해양생물학을 전공한 아빠(한태준 교수. 서울대 졸업 후 영국 리버풀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 후에는 인천대에서 줄곧 재직)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어릴 때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 학교는 리버풀이었고 우리는 만 섬(Isle of Man. 리버풀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등에 둘러싸여 비슷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작은 섬)에 살았다. 우리 가족은 포트 에린 (Port Erin)에 있는 감리교회를 다녔다. 주일학교도 다녔는데 세 살 때는 요한복음 3:16 성경 암송을 하게 되어, 목사님께 안겨서 예배 시간에 영어와 한국말로 암송한 기억이 있다.
만섬(Isle of Man)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사방이 모두 자연이어서, 어린 시절을 자연 속에서 보내며 자랄 수 있었던 점이다. 아침이면 '구구새(올빼미)'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고, 집 앞에는 고슴도치도 있었다. 그런 작은 소중한 추억들이 많았다. 특히 바다가 늘 보여서 좋았다. 바다는 잔물결이 아름답기도 했지만, 폭풍이 불 때는 순식간에 무섭게 변하는 바다의 모습도 보았다. 그런 경험들이 내 음악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음악평론가 이순열 선생님 (전 음악동아 편집장)이 내 연주에서 깊은 바다가 느껴진다고 평하신 것을 보고 놀랐다. (바다의 정적, 바다의 노도, 바다의 어둠, 바다의 빛, 노발리스와 하이네의 바닷속 옛 도시 이야기 등이 그녀의 연주에 담겨 있다.) 만섬이 내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것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보내주신 선물이었다. 아버지도 석사 졸업 후에 텍사스 유학을 준비하던 중에, 오히려 영국으로 가는 길이 먼저 열려서 만섬으로 가신 것이었는데, 아빠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은 길이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다.
4살에 학교에 들어가 글(알파벳, Alphabet)을 배웠는데 30~40분을 걸어 도서관에서 가서 책을 빌려 읽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다. 아울러 엄마의 교육방침에 따라서, 외할머니가 보내주신 한글 포스터를 벽에 붙여놓고 한글도 함께 배웠다. 그림책 성경책도 아빠가 사주셔서 그 성경을 읽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엄마와 함께 신앙에 대한 책을 읽으며 함께 이야기하는 그 시간이 가장 기대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좋은 부모님을 주신 것에 깊이 감사한다.
왼쪽 귀가 안 들리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학교에 들어간 후였다. 숙제를 못 알아듣고 준비물을 챙기지 못하는 일이 생기자 선생님께서 부모님께 병원에 데리고 가보라고 말씀하셨고,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다. 모계에 유전적 성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길을 건널 때에 위험하기도 했고, 주변에서 부를 때 알아듣지 못해 오해를 받기도 했다. 또 관현악단과 협연을 할 때 불편함은 있었지만, 왼쪽 귀에 대해 불평과 원망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한쪽 귀로만 듣게 되어 (모노 mono로 듣다 보니) 다른 사람과는 듣는 방식이 달라서 내 연주 소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특별해진 것 같다. (다른 곳에서 얘기한 문장도 정리에 좋습니다. "나 자신도 한쪽 귀로만 듣는 장애가 있지만 오히려 이런 다름 때문에 두 귀로 듣는 사람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듣고 다른 음색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장애가 나에게는 축복의 통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 처음 기도드린 기억은 세 살 때였다. 부모님께 좋은 분이라고만 들었던 하나님을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드렸던 기도였다. '하나님을 보게 해 주세요...' 하는 기도였다. 그때는 물리적으로 보고 싶다는 기도였지만, 장성해서 보니 내 삶의 여정을 통해 계속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셨음을 깨닫고 울며 감사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렇게 하나님을 확실하게 보여주셨으니, 이제 어떤 상황이 닥쳐와도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만섬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
London - 성장의 기반
만 섬에서의 3년 여 시간 후에, 5세 반이 되었을 때 엄마의 학위를 위해 런던으로 이사를 가서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더욱 신앙 교육에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그림책을 벗어나 글자가 점점 많아지는 성경책을 아빠가 때에 맞춰 사주셨다.
우리 부모님은 엄마의 외숙부 (이용훈 집사의 아버지, 남부성결교회 이종욱 원로장로)의 소개로 만나셨다. 아빠는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고, 엄마는 아빠를 좋은 사람 정도로 생각했는데, 세 번째 만났을 때 '다윗보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하셔서 엄마도 확신을 갖고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신앙을 제일로 삼았던 분들이셔서 내게도 신앙적인 영향력을 주셨고 일찍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 주셨다.
여섯 살 때 한인교회 부활절 예배 후에 성도들이 우리 집에 모였을 때였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영화를 함께 보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에 너무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울게 되었다. 아빠는 예수님이 그렇게 죽으심으로 내가 죄 사함을 받았다고 설명해 주셨는데, 나는 예수님에 대한 감사함과 동시에 더욱 마음 아픔을 느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부모님은 절대 나를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push하지 않았다) 공부도 바이올린도... 강제로 밀어붙이시지 않았다. 창의적으로 refresh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셨다. 영국에서는 눈 오는 것이 매우 드물었는데, 모처럼 눈이 많이 온 어느 날, 아빠와 함께 밖으로 나가서 눈 위에 누워서 자유를 만끽하며 구르던 추억이 소중하게 남아있다.
학위를 마치고 한국에 자리를 잡게 되신 아빠는 내 음악 공부 때문에 본의 아니게 기러기 생활을 하셨는데, 신앙서적을 읽으시다가 감동받으신 내용과 책을 보내 주셔서, 나는 거의 매일 아빠와 (국제) 통화하며 함께 나눌 수 있었고,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그 좋은 아빠보다 더 넓고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해주셔서, 하나님에 대해 더욱 궁금해하고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었다.
엄마는 영국에 나와 함께 계셨기에, 엄마를 내 role model로 삼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었다. 엄마는 억울한 일이 있어도 불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best를 아시고 뜻이 있어서 억울한 일들도 생기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포용하시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존경스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세상적으로는 지혜가 없어 보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지혜로 보였다.
두 분은 내게 항상,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길이라고 해주셨다.
바이올린 Violin
만 8세 직전에 한국에 잠시 들렸을 때 바이올린과 진지하게 만나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제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할머니가 또래 아이들을 칭찬하시는 모습에 나도 칭찬을 받고 싶어서 바이올린을 배웠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어린이들을 잘 가르치는 선생님께 가서 배웠다. 레슨 시간도 15분에 불과해서 집중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런 방식으로 어린이들을 참 잘 가르치는 분이셨다.
그 덕분에, 예후디 메뉴힌 (Yehudi Menuhin) 음악영재학교 오디션에 합격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지 8개월밖에 안되어서 기대하지 못했는데 의외로 합격했다. 오디션에서 준비한 곡은 무난히 마쳤으나 초견(연습 없이 처음 악보를 보고 하는) 연주에서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내게 악보를 한 번 훑어본 후에 다시 해보라고 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완주할 수 있었다. 연주에서는 정신적 (mental) 준비가 매우 중요함을 깨달았다. 신체적 (physical) 준비뿐만 아니라 마음의 준비가 더욱 중요하기도 하다. 내 실력보다는 잠재력을 보고 합격을 시켜 주신 것이었다.
예후디 메뉴힌의 낮 시간 (day time)은 너무 좋았으나, 기숙학교여서 너무 엄격해서 어린 나이의 내게는 잘 맞지 않았다. 집에서는 자유롭게 지냈는데, 기숙사에서는 오후 8시면 소등을 해야 했다. 아빠는 한국에 자리가 생겨 귀국하셨고, 내가 바이올린을 하게 되면서 엄마는 나와 함께 런던에 남아주셨다. 기숙사에서 주말에 집에 왔다가 다시 기숙사에 들어갈 때는 너무 싫었다. 그렇게 1년 여를 억지로 버텼으나 결국은 적응하지 못하고 퍼셀 학교 (Purcell School)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퍼셀 학교에서 만들어진 내 음악 인생에는 세 분의 큰 스승들이 계셨다. 안드리옙스키(Felix Andrievsky), 로즈마리 라파포트(Rosemary Rapaport), 찰스 비어 (Charles Beare) 등이다.
안드리옙스키 선생님
안드리옙스키 선생님은 예후디 메뉴힌이 러시아에서 모셔온 분이었다.(안드리옙스키는 촉망을 받고 있었던 음악가였는데 젊은 시절 소련을 탈출해 영국에 정착하자, 메뉴힌은 ‘소련이 비장해온 핵무기의 비밀이 남김없이 서방 세계로 넘어온 것과도 견줄 만한 바이올린 연주 기법과 오의(奧義)에 관한 소련의 비밀 금고를 송두리째 가지고 왔다’고 그를 반겼다.)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난 것은 메뉴힌 음악학교에서 퍼셀 음악학교로 옮겼던 열 살 때였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난쟁이처럼 귀가 커서 외모는 이상했지만 정말 좋은 선생님이셨다. 첫 레슨을 받으러 가면서 으레 스케일부터 시작하려니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좋아하는 곡'이 뭐냐고 묻고는 그걸 연주해보라고 주문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분은 비타민 따위의 영양제를 별도 복용하기보다는 그런 양분이 포함된 좋은 음식을 음미해가면서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 안드리옙스키 선생의 생각이었다. (그는 기계적이고 기능적인 훈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한 작품 속에 잠들어 있는 넋의 맥을 짚어내고 함께 호흡하면서 생동하는 연주를 하도록 이끌어주었다.)
내게는 세상에 다이아몬드 복제품은 많으나 진품이 드문데 너는 진품이라고 해 주셨다. 선생님과의 레슨은 시간이 갈수록 더 좋았다. 스토리텔러가 되도록 리드해주셨고, 감정과 소리가 일치되도록 가르쳐주셨다. 때로는 춤도 추고 연기도 하며 레슨을 해 주셨다. 레슨마다 새로운 영감을 갖게 해 주셨다.
로즈마리 라파포트 선생님 - My Kindred Spirit
어릴 적 무척 좋아했던 책 ‘빨간 머리 앤’에서 ‘영혼의 단짝(Kindred Spirit)’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주인공 앤이 ‘영혼의 단짝(Kindred Spirit)’인 다이애나를 만난 것처럼, 나 또한 그런 인연이 생기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데 같은 또래 친구를 만나기를 바랐던 기대와는 달리,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은 ‘영혼의 단짝’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로즈마리 선생님이다. 1918년생이시니 나와는 70년의 연배 차이가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영혼의 단짝이 되어 주셨다.
퍼셀 음악원 재학 당시, 비자 문제와 한국의 IMF 경제 위기가 겹쳐 원치 않은 귀국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 사정을 들은 퍼셀 음악원 교장께서 후원자 음악회를 열어, 학교 설립자와 지역 국회의원 등을 초청해 나의 사정을 알렸다. 그날 연주회에서 사라사테의 ‘치고이너바이젠’을 연주했다. 공연이 끝난 뒤, 나이 지긋한 한 여성분이 다정하게 다가오셨다. 오늘 연주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세프 하시드(1923~1950)를 연상케 하는 연주였다며 나를 후원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가 나의 ‘영혼의 단짝’이 된 로즈마리 라파포트이다.
퍼셀 음악원 설립자이자 영국 왕립음악원(RAM) 바이올린과 교수였던 그는 예쁜 이름만큼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후 부모님과 함께 감사 인사차 로즈마리 댁을 방문한 것이 70년의 나이 차를 극복한 우정의 시작이었다. 또래 친구들과 나누지 못한 고민도 그녀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고, 주말이면 자연으로 소풍을 떠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댁에 갈 때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엘더플라워로 만든 주스를 준비해놓고 맞아 주시곤 했다.
당시 나는 영국 왕립 음악대학(RCM, Royal College of Music)의 바이올린과 교수인 안드리예프스키(1936~)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바이올린의 쇼팽 콩쿠르라고 불리는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하기 6개월 전쯤, 한 선생님께 오랜 기간 배웠으니 다른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을 때가 되었다는 주변 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영국 왕립음악원의 한 교수님께 오디션을 받으러 갔다. 그 결과 4년 전액 장학금과 함께 예상치 못한 입학 제안을 받게 되었다. 당시 만 14세였기 때문에 영국 왕립음악원 역사상 최연소 입학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로즈마리에게 전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18세(만 16세)까지 중·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마치기를 바란다며 음악적으로 잘 이끌어 주신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과 더 공부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기대와 달리 회의적인 그의 반응이 의아했다.
2001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준비가 한창이던 그때, 불의의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드닝 (Gardening), 즉 정원을 가꾸고 있던 로즈마리께서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병원으로 달려가 평온히 잠든 로즈마리 앞에서 한없이 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로즈마리 가족들의 요청으로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바흐의 ‘아다지오’를 장례식에서 연주했다.)
4개월 뒤 학교에서 마련한 그의 추모식이 있었다. 하지만 추모식 날짜와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날짜가 겹쳐 두 곳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했다. 결국 콩쿠르 위원회에 사정을 말하고 내 순서가 첫날이라면 출전을 포기할 것을 알렸다. 이미 폴란드 언론에 노출도 되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다행히 위원회의 배려로 며칠간 열리는 콩쿠르의 마지막 순서로 참가하게 되어, 턱없이 준비가 부족했던 본선 곡을 며칠 더 연습할 수 있었다. 로즈마리가 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동안 로즈마리에 대한 그리움을 음악 속에 담았다. 그 결과, 2위에 입상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는 내 일생에서 기적 같은 대회였다. 내 준비가 너무 미흡해서 기권하고 싶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니 기도해보라고 엄마가 말씀하셔서, 나도 울며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막히던 부분이 3일째에 풀리게 되어서 무대로 올라갈 수 있었다. 불이 켜지고 청중들을 보니 아무 생각이 없어져서 나는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만 의지했다. 그렇게 입상하게 된 것이다.
나중에 전해 들은 사실은 로즈마리가 돌아가시는 날 점심 때도 지인들에게 내 얘기를 하시며, 내가 계속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과 공부하기를 바라셨다고 했다. 나는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결국 영국 왕립음악원 입학을 미루고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께 가르침을 이어받았다. 다른 선생님께 갔으면 또 다른 모습으로 성장했겠지만, 나의 음악 세계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신 안드리예프스키 선생님과 중요한 시기를 행복하게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찰스 비어, 정경화, 정명훈 선생님
세 번째 큰 스승은 찰스 비어다. 12세 때 로즈마리의 소개로 찰스 비어 (Charles Beare)라는 세계적인 현악기 딜러를 알게 되었다. 위그모어홀 데뷔 무대에서 만난 뒤로 오늘날까지 악기 관리를 해주고 계신다. 그뿐만 아니라 찰스의 소개로 지금 사용 중인 스트라디바리 소유자를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최근 그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로즈마리를 함께 추억했다. 당시 그녀는 세계를 놀라게 할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의 악기 관리를 부탁한다며 찰스의 손을 꼭 잡았다고 한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며 로즈마리의 말대로 되어가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했다.
이렇게 세 분이 내 음악세계를 지켜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분들이셨다.
그 후로 정경화 선생님께 사사할 수 있었고, 그 동생인 정명훈 선생님과도 알게 되어 6차례나 협연을 할 수 있었다.
턱관절 수술로 인한 암흑기 - 6년의 공백
턱관절 수술로 암흑기를 보냈다. 어렸을 때 머리를 다친 것이 나중에는 직업병으로 비화했다. 처음에는 치료 기간을 1년 6개월로 예상했으나, VIP syndrom이라고 할까 너무 잘해주려다 보니 오히려 잘 되지 않는 증후군처럼, 내 턱관절 1차 수술이 잘 안 되었다. 그때 하나님께 만약 재수술을 하게 되어도 수용하겠다고 기도했다.
목마른 사슴 (연주) - (클래식이 아닌 익숙한 곡의 연주에서 오히려 최고 연주가의 깊은 맛을 느끼게 되어 놀랍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기도록 허락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재충전 시간으로 생각했으나, 점점 늘어나 6년간의 공백 기간을 갖게 되니, 한참 활동해야 하던 20대 중후반의 나는 너무 치명적 영향을 받았다. 그렇지만, 이해할 수 없어도 나중에는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공백 기간 동안에도 스트라디우스가 계속 나와 함께 있도록 원소유자가 허락해 주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무대에 다시 세워주실 것을 믿었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말씀을 붙잡을 때, 하나님께서는 소소한 감사부터 회복시켜 주셨다. 숨 쉬는 것이나 내 의지대로 걷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너무 감사할 일들임을 깨달았다. 음악이 내 심장을 뛰게 하는 것임을, 음악에 대한 간절함을 다시 찾게 해 주신 기간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회복시켜 주셨음을 이제는 감사하게 되었다. 예전보다 더 새로운 차원의 연주로 거듭나게 되어, 감사하다. 나는 이해하지 못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2019년 9월에 목사님 자녀인 두 음대생들이 운영하는 채널에 출연하게 되면서 그것을 계기로 재기를 할 수 있었다. 많은 분들께 사랑받으며 행복한, 감사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바이올린에 대한 소명을 깊이 느끼게 된 일이 있다.
바이올린의 거장 이브리 기틀리스 (Ivry Gitlis)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날 때가 17살 때였는데, 그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됐을 때는 내가 심한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였다. 그분께 가서 조언을 얻고 슬럼프에서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분 앞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곡인 포레(Gabriel Fauret) 소나타를 연주했다. 연주가 끝났는데 그분께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계시는 것이었다. 실수를 했는지 걱정하고 있는데, 그렇게 한참 있다가 고개를 들셨는데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는데 네 음악을 들으며 다시 살 소망이 다시 생겼다. 너는 그런 일을 계속해야 한다"라고 하셨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유태인) 그분이 "너는 하나님의 메신저가 되어서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라고 너무 강력하게 얘기하셔서 홀에 있는 사람들이 다 놀랐다. 내게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 같아서 너무 은혜받았고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슬럼프에서 꺼내 주셨다.
재능을 영어로는 talent라고도 하지만, gift로도 표현한다. 내게 음악 재능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또한 음악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선물을 받은 내가 아니라, 선물을 주신 하나님만 경배와 찬양을 받으셔야 마땅하다. 오늘 나눈 내 삶도 내 자랑이나 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만 드러나기를 원한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위로의 정직한 메신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기도 부탁드린다. 감사하다.
(하나님의 은혜 - 연주) (진짜 앞으로는 바이올린을 농담으로라도 '깽깽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바이올린의 '풍성함'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에 부침(An Die Musik)' 앙콜곡처럼 마지막으로 짧은 곡으로 연주하겠다. 이 곡은 원래 슈베르트의 가곡이다. Musik라고 되어있지만, 원래 가곡의 가사에는 음악이라기보다는 예술이다. 즉 원래는 '예술에게 쓰는 글'이란 뜻이다. 인생이 잿빛일 때 음악이 빛을 주었다는 의미다.
김은호 목사님 정리
오늘은 '만남'이 키워드다.
좋은 부모님,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님을 만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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