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난 것을 통해,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3절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지금 바울은 주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서 가는 것이지, 고린도에 연고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 갔더니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서 아굴라라는 유대인 부부를 미리 그곳에 포진시켜 두고 계셨습니다. 아굴라는 사람은 본도(Pontus, 소아시아 북동쪽 흑해에 인접한 곳)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아굴라가 유대인이라고 해서 유대 땅에서 태어난 본토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땅 밖에, 지금 터키 대륙의 북동쪽, 다시 말해서 흑해 남동쪽에 있는 이방 땅 본도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였습니다. 디아스포라들은 이방 땅에서 태어나서 이방 언어,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당시의 세계인들이었는데, 주님께서 바울을 위해서 그 아굴라를 포진시켜 두셨는데 본문이 이렇게 계속됩니다.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고 한 고로,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는 그냥 본도에서 평생을 산 것이 아니라, 청운의 꿈을 품고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텐트 생산을 하면서 사업적인 기반을 닦았습니다.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죠. 그런데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을 다 로마에서 추방하라 명령했습니다.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에 의하면, 유대인이 선동해서 제국 수도에 살던 약 2만 명의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킨 거예요. 그랬더니 황제가 로마 시민권이 없는 유대인을 전부 추방시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이때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추방을 당했다는 것은 로마 시민권이 없었던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에 로마 시민권자였으면 로마를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고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로부터 새로 온 지라, 황제가 유대인들을 다 추방시켜서 그동안 일하면서 해둔 사업을 다 포기하고 이제 정처 없이 떠나야 합니다. 로마 제국이 얼마나 넓습니까? 지중해를 중간에 두고 그 둘레에 있는 땅은 다 로마 제국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때 아굴라 부부가 새로운 정착지로 어디를 선택해서 갔는가? 고린도로 갔습니다. 우리는 다 압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위해 미리 포진시켜 두셨다는 것을.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탈리아로부터 새로 온 지라,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서 추방을 당해서 지금 막 고린도에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새로 정착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들에게 갔습니다. 아테네에서 사흘 길을 걸어서 온 바울이 그들을 만났습니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우리는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부터 바울을 선택해 주셨던 그 바울을 위해서 로마에서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때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 두 사람이 만나게 하셨습니다. 아멘! 그래서 바울도 정착하는 겁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음으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아굴라 부부는 텐트 제조 사업가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텐트 제조를 했습니다. 유대인 부모는 자식들에게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한 가지 기술들을 어릴 때부터 익혀줬습니다. 바울이 태어난 다소는 텐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가죽 생산지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아버지가 바울에게 자연스럽게 텐트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줬겠지요. 이 바울이 텐트를 만들 줄 아니까 가서 만난 아굴라 부부가 텐트 제조자니까 그들을 도우면서 그 집에서 정착을 합니다.
조금 지난 뒤에는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 아굴라 부부가 바울의 제일 후원자가 됩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는 이들이 사업을 다 접고 바울을 따라서 함께 고린도를 떠납니다. 그러니까 아굴라 부부가 정착하는 것을 바울은 잠시 도와주고,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바울의 제일 후원자가 됨으로 바울을 통해서 비로소 복음이 온 고린도 땅에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자, 여러분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 만약에 로마 제국의 수도에 가지 않았더라면 바울과 로마의 고린도 만남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가 어떻게 로마 제국 수도에 가서 살 생각을 했겠는가? 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 내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통행과 이주와 거주의 자유를 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가서 살 수 있었습니다. 수도인 로마에 가서 살 수 있었습니다.
왜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유대 땅에서 태어나지 않고, 그 조상들이 로마로 이주해서 이방인 땅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가 되었는가? 예루살렘이 바벨로니아에 멸망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지중해 세계로 디아스포라 했습니다. 로마에서 사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잘 살던 아굴라 부부가 어떻게 고린도로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 크리스투스, 유대인의 선동으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바울과 아굴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바울과 아굴라의 만남은 지극히 개인적인 만남인 것 같지만,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그 속에는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흥망과 예루살렘의 멸망, 페르시아 제국의 바벨로니아 제국 정복, 헬라 제국에 의한 페르시아 제국 정복, 헬라 제국을 멸망시킨 로마 제국의 지중해 세계 재패, 크리스투스에 의한 유대인들의 폭동,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들 수도에서 추방령이 역사적인 사건들이 전부 얽힌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아굴라를 고린도에서 만나게 하시려는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아멘!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실 수가 있습니까? 역사의 주관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바울이 그런 사실을 회상할 때, 바울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정하시고 사랑하시고 거룩하게 흠 없이 세우셨다고 하는 바울의 고백은 절대로 과장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을 회상할 때마다,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 드린 바울의 생은 절대적인 의미를 품게 되고, 그 바울은 세상 사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행복 속에서 매일매일을 사는 것입니다. 아멘!
고난과 죽음의 길이라는 성령의 메시지와 인도를 경고가 아니라 행복한 소명으로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어제도 잠시 말씀드렸습니다만,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서 유언을 남깁니다. 그 유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22절에서 24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지금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은 바울의 뜻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인도하시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를 출발해서 베레아, 데살로니가, 네아폴리스를 거칠 때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아, 네가 가는 이 길은 결박과 환난의 길이다. 계속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저 같으면, 제가 예루살렘을 가려고 기도하고, 아, 이게 하나님 뜻이겠다 하고 가는데, 부산에서 출발해서 서울까지 가는데 대구에서, 대전에서, 천안에서 계속 성령님께서 제게 "너 서울 가면 결박과 환난이 너를 기다려." 그렇게 가르쳐 주시면 아, 이거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가르쳐 주시는구나, 하고 감사헌금하고 할렐루야 하며 딴 데로 갈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령님께서 계속 환난과 결박을 일러주시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바울아, 지금 네가 가는 길은 출세와 사람들로부터의 환영의 길이 아니다. 네가 가는 이 길엔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는 길이다. 그러나 나는 바울, 네가 나를 위해서 이 길을 끝까지 완주해 줄 것을 믿는다. 바울은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0장에서 이렇게 고백이 계속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이 선언을 비장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의 행복 선언입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하신 주님, 이 주님이라면 나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다. 지금 바울의 심정은 이런 심정인 것입니다. 주님, 모든 사람들이 꺼려하는 길, 그 결박과 환난의 길로 나를 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나를 선택하실 때부터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사나 죽으나 오직 주님을 위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아무도 가려 하지 않는 길 언제든지 불러 주십시오. 감사함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행복 선언문을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을 바울에게 맡기실 때 그 바울의 행복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임박한 죽음을 내다보면서 남긴 증언이 디모데후서 4장 6절에서 8절입니다. 세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이미 부어 드리는 제물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 아니라 주님께서 그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죽음의 순간을, 참수를 당하는 것을, 잘려져 떨어질 자기의 목을 내다보면서 초조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거나 안절부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목이 떨어지는 순간에, 자기의 코끝에서 호흡이 멎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선한 싸움 다 싸운 것 아시죠? 달려갈 길 다 달려간 것도 아시죠?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굴하지 않고 지킨 것도 아시죠? 이제 당신이 주실 의의 면류관, 저 고대합니다. 최고의 행복 속에 있습니다.
바울의 절대적인 의미의 삶 속에 바울만이 느끼는 이 행복을 로마 황제가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참수형으로 로마 황제가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천재지변이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삶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고 사용하십니다.
1950년대 초에 젊은 남자가 결혼을 해서 일남일녀의 자녀를 뒀습니다. 젊은 부부는 한 살 터울의 아들과 딸을 얻은 것으로 만족해서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다섯 살, 딸이 네 살일 때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우신 사이에 네 살짜리 딸이 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통에 잠겨 있던 그 부부는 자식을 더 낳지 않겠다던 생각을 버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을 대신할 아이를 한 명 더 갖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1년 후에 새 아이가 태어났는데 딸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딸이 성인이 되어서 제 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허랑방탕하게 살던 저를 제 처를 통해서 핀셋으로 집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내시기 위해서, 제가 어린 시절부터 제가 알지도 못하는 제 처가의 가정사를 주관하셨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제 아내의 언니를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로 데려가셨습니다. 제가 열 살 되던 해에 제 아내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제 아내가 되게 하시고, 그 아내를 통해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이 아내를 선택하시고, 이 아내를 사랑하시고, 이 아내를 거룩하고 흠 없이 세워 주셨다는 바울의 고백이, 이 아내의 고백이 되게 해주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제가 그 하나님을 안 이상 저에게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은 그 하나님께 드리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사용해 주시는 삶 외에 이 세상 무엇이 제 행복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아침마다 일어나면 주님께 드리는 여러 기도문들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쓴 기도문입니다. 그 기도문들 가운데에 이런 기도문이 있습니다.
"주님, 39년 전 방탕의 수렁에서 아내를 통해 나를 핀셋으로 집어내고 나를 인도하시며 주님의 도구로 사용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구원만 해주시고 내팽개쳐 두셨더라면, 저는 방탕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대형 승용차를 타고 대형 아파트에서 떵떵거리며 산다 한들, 숨을 쉴 때마다 죽음을 향해서 한숨 한숨 다가가다가 결국은 썩어 들어가고 말 삶을 살 텐데, 그런 삶에 억만금을 가진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용해 주심으로 하찮은 늙은이로 끝나버릴 제 인생에 의미가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를 사용해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그것이 제 행복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주님의 온전함으로 채워주시고, 나의 허물을 주님의 사랑으로 가려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새해가 올 때마다 주님께 더 충성하게 하소서. 주님을 위해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라면 피하지 말게 하시고, 그로 인한 세상의 비난이나 모함을 비켜가지 않게 하소서. 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께서 마음껏 사용해 주소서. 아멘!"
앞으로도 주님께서 저를 사용해 주시는 것만이, 어느 날 내 앞으로 죽음이 뚜벅뚜벅 걸어올 때 그 죽음을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내게 예비해 두신 의의 면류관을 바울처럼 행복하게 고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일이 잘 풀리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은 일평생 불행의 덫에 갇혀 살아야 합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그 경우에도 여러분은 불행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공기 좋은 숲속을 트래킹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황혼 시절에 여러분들은 가장 비참하고 불행하게 인생을 끝내야 할 것입니다. 행복은 오늘 있다 내일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가변적인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물질적인 것 속에서 생성되지도 않습니다. 행복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절대적인 삶의 의미 속에 둥지를 틀고, 삶의 절대적인 의미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멘!
바울을 창세 전에 선택하시고 사랑하시고 세워 주시고 그를 사용해 주신 하나님께서 오늘 이 밤에 이 자리에 계십니다. 아멘!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아멘! 여러분들이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여러분을 위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삶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며, 여러분이 누릴 행복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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