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거듭남 rebirth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 하면 우리가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는데, 니고데모와 예수님이 만났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와서 자기 삶의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라고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거듭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라고 하시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속에 담긴 의미를 설명해 주십니다.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사람이 물속에 들어가면 오래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는 옛사람의 죽음과 관련되는 것이며,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이 늘 불로 이미지화되기 때문입니다. 불은 언제나 수직의 중심을 향하여 중심을 잡아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옛 삶에 대해서는 죽고, 새로운 내면의 불꽃을 통해 우리의 삶이 위로 지향하는 삶이 되는 것이 곧 거듭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살던 욕망에 찬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그 마음을 삶으로 구현해 가는 것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나의 삶의 방식, 삶의 태도, 그리고 세상을 대하는 나의 시선이 완전히 새로워졌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간(間)... 사이, 관계
우리가 흔히 '시간', '공간', '인간'이라고 이야기할 때, 인간의 삶은 시간 속에서 태어나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살며,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인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말속에는 '간'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습니다. 이 '간'은 '사이'를 의미하며, 이는 곧 관계를 뜻합니다. 내가 시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내가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내가 다른 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가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관계가 좋을 때 우리는 '사이가 좋다'라고 말하고,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사이가 나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살펴보면, 보통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3분법으로 시간을 이해하게 됩니다. 과거는 언제나 기억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현존하는 것으로, 자랑스럽고 행복한 기억도 있지만, 부끄럽고 남들에게 숨기고 싶은, 그리고 상처가 되었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삶의 경험이 오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으로, 불확실성과 불확정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불안을 안겨줍니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와 미래가 우리의 현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산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그 과거의 인력을 버텨내거나 미래의 불안감을 이겨내면서 오늘을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흔히 과거는 기억을 통해 우리에게 현전(現傳)하는 시간이고, 미래는 기대를 통해 우리에게 현전 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이 현재에 집중된다고 할 때, 현재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있는 시간'으로 주어졌다고 기독교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러므로 불안을 견디고 과거의 인력을 견뎌내면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깊이 고민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오늘 주어진 시간은 어제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인간의 과제는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존재의 질적 비약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루를 여는 기도
존 웨슬리 목사님의 전통을 이어받는 영국 감리교회의 기도서에는 '하루를 여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문을 읽으며 깊이 감명받았고, 이를 거칠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마음을 당신의 거처로 삼아 주십시오.
우리 안에 머물러 주시고,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오늘 하루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하시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주님과 더불어,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깊은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물게 하소서.
우리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하소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이 세상의 희망의 징표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제가 이 기도문을 처음 읽었을 때 두 가지 대목이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첫 번째는 "오늘 내 마음을 당신이 머무시는 거처로 삼아 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이 기도를 보는 순간 "주님이 참 외롭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머물 곳을 찾고 계시는데,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기 때문에 주님이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셔도 열어드리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언제나 문 밖에 계신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의 뒷부분에 나오는 또 다른 대목도 제 가슴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그것은 "오늘 누군가가 당신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되어 살게 하소서."라는 고백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간에 모두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무신론자라도 삶의 위기가 닥쳐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손을 모으고, 알지 못하는 대상을 향해 "도와달라"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누군가가 자기의 외로움을 이해해 주고받아주며, 친구가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고통을 함께 짊어져 주기를 소망합니다. 냉혹한 세상은 그렇게 외롭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주변화시키고 그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오늘 나의 삶이 누군가가 당신께 드리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 달라"는 말로, 내가 이제 적극적으로 주변화된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처지를 헤아리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삶을 선물로 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기도 응답이 되는 삶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내 마음속에 모시고, 하나님의 거처로 삼아야 하며, 누군가의 기도의 응답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삶의 원리가 우리 속에 구현되어야 함을 이 기도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오늘 내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나 개인으로 살면서 특별히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아주 소극적으로, 내가 마음속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 나는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누군가에게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내가 몸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을 압박할 수 있다면, 이는 의도한 것이 아니고 내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나로 인해 누군가가 불편해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 나는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상당히 고가의 옷을 입고 교회에 갔는데, 교회에 속해 있는 이들 중에 매우 빈곤한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인생이 재미없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배려하며 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기도를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존재가, 나의 태도가, 나의 말씨가, 나의 표정이 누군가의 마음속에 상처를 주지 않게 해 주소서."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무심코 한 말 때문에 누군가의 마음속에 해소되기 어려운 그림자가 생기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내가 선을 행하게 해주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윤리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삶의 결과로 맺는 것이 선이라고 한다면, 내가 선을 행하며 산다는 것은 내 삶이 하나님과 깊이 연관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선을 행하되, 모든 사람에게, 모든 상황 속에서, 끝까지 선을 행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선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내가 입장을 바꾼다면,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의 선행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 할지라도, 나의 선행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할지라도 그에게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게 해주소서."라는 말속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능력이 고갈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가 이어지는 것이죠. "나의 이웃들과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물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원지에 삶을 연결해 놓을 때, 마음이 메마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있을 때 우리의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끝까지 선을 행할 수 있는 내적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세상의 사랑의 징표가 되고, 그런 삶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삶이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고, 과거의 인력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들이 현재라는 시간을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은혜의 수단
우리가 흔히 은혜 수단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복잡해진 내 마음을 고요하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하겠죠. 아프가니스탄의 시인이었던 루미(잘랄레딘 모하마드 루미 1207~1273)라는 분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일렁이는 버릇이 있는 물은 바다에 이르러야 잔잔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안이라는 태풍이 우리를 막 몰아갈 때, 내 속에서 사랑의 물이 고갈됩니다. 이러한 불안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 것은 바다에 이를 때 물이 고요해지는 것처럼, 하나님 앞으로 내 마음을 가져갈 때 해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마음이 스산하고 고갈된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해결책을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불안을 달래기 위해 불안의 대용물을 찾는데, 철학적으로 말하면 존재자들(beings)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오히려 내게 불안만 더할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갈증은 존재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고갈된다고 느낄 때마다 내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일이고, 말씀을 묵상하는 일이며, 찬양하는 일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선물로 주는 연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하나님 사랑에 깊이 잇대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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