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천주교 신자였지만 교회에 다니는 남편을 만나 교회에서 결혼을 하고 권사님, 장로님이신 시부모님의 의견을 따라 개종도 하고 교회에서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교회라는 것이 정말 불편하였고, 교회의 언어나 분위기 모든 것이 싫었습니다. 사실 교회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이 아주 많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나 주위 지인들이 기도해준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뒤에서 '뒷담화'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고, 그 기도나 은혜라는 것은 그냥 그들의 입에 발린 말이라고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시부모님들의 교회에서도 전도, 통성기도니 은혜니 복음이니 하는 것도 모두 저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이었고, 사람을 모으려는 활동 같다는 느낌도 많이 들어 늘 교회의 예배 시간이 불편했고, 어떻게든 시부모님들 아니면 피해가고 싶은 순간들이었습니다. 교회 어른들이 목사님이나 서로를 정죄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 팔을 이루어 서로를 질책하다가도 만나면 울며 서로 중보기도해 주시는 것을 보고 참 교회라는 것이 이중적이고, 기도라는 주문으로 퉁칠 수 있는 곳은 아닌가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유산을 경험하여 울고 있는 저에게 한 교회 분이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 고난을 주시는 거예요. 기도하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말하는 순간 마음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니라고 물어주길 원했지만, 고난을 이기는 것은 기도라고 말해주는 것이 헛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늘 듣던 기도의 말이라고 생각하고 귀를 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이 점점 쌓여 가다가 이제 이분이 결정적으로 교회를 떠나게 되는 계기가 있었는데요.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다니던 교회 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제가 들어보니 그냥 조금 시달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상처와 충격을 받았던지 그 일 때문에 1년 가까이 심리 치료를 받을 정도로 아이가 힘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시부모님께도 결혼하고 처음으로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교회 안 다녀서 죄 받으면 할 수 없는 거라고, 그런 거 가지고 죄를 주시는 분이라면 믿어서 뭐 하겠냐고." 하며 모진 말도 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 회사에서도 "예수 믿으면 평강이 넘친다더니 평강은 무슨." 이런 말을 만나는 사람마다 했던 것 같습니다. 저희 아이가 매일 밤 고통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 제 마음속에는 정말 화가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3년간 나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가라고 하실까 봐 시댁에도 잘 나가지 않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교회에 상처받고 교회를 떠난 지가 3년이 되었는데 대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첫째 딸이 저에게 "엄마, 내가 기도하고 싶은데 교회에 나가면 안 될까? 내가 기도하고 싶고 교회에 가고 싶어."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라는 단어만 들어도 짜증이 나는데, 그 말이 며칠 동안 머리에 맴돌았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딸이 기도 한 번 한다는데 뭐." 하고 분당에서 제일 유명한 교회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분당우리교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가봤습니다.
아이 기다리는 동안 잠깐 기다리는 거지 뭐 하면서요. 저는 이찬수 목사님에 대한 사전 정보도 없고 관심도 없던 사람이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모든 단어가 불편했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예배 전에 찬양을 하나 듣고 또 다른 찬양을 듣는데 마치 막힌 하수구가 뚫리는 기분처럼 목에 걸린 불편한 가시가 나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눈물이 몇 십분 동안 펑펑 쏟아졌습니다. 남이 피할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내가 왜 울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그 찬양과 목사님의 말씀, 마지막 축도까지 몸에 쏟아져 부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날로부터 이제 1년이 되어 가네요. 전에는 기도해 준다고 했을 때 마음속으로 '지금 내가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아닌데'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은 화면에 비춰지는 울고 있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주님, 저 사람도 울고 있습니다. 저와 같이 우는 마음일까요? 저 눈물에 함께 계시기만 해주세요." 하고 그분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 듭니다. 설교에서 말씀하셨던 주변 사람들도 모두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저도 매주 받는답니다. 제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믿고 또 그 믿음이 저에게 힘을 줍니다. 1년 동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찬양대의 찬양을 듣고 울고 하면서 교회 분들이 은혜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예배는 사건이라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예배드리고 펑펑 울며 돌아나오는 길에, '내가 여기에 나와서 하나님을 만난 것일까? 정말 꼭 누군가 여기로 나를 불러준 기분이 든다.'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습니다.
우리가 익숙해서 하는 한마디, 익숙해서 '사람이 다 그러지 뭐' 하며 뒷담화하는 그 말 한마디로도 한 영혼이 실족해 교회를 떠날 수도 있다는 걸 무겁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기도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지만, 그 말 한마디가 유산한 자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 "하나님이 고난도 주신다"고 쉽게 말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마음의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저에게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교회는 결국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회복합시다.
교회는 하나님이 일하셔야 상처도 치유받고 회복도 일어납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린 딸이 교회에서 왕따를 당해 심리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상처를 받은 이 성도의 마음을 어떤 사람이 회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단번에 목에 걸렸던 가시가 나오는 것 같은, 막힌 하수구가 뚫리는 것 같은 몇십 분간의 눈물이 흘러 그 진한 상처가 치유되는 일을 어떤 인간이 할 수 있겠냐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시는 거죠. 하나님이 한 번 그 자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니까 3년 동안 마음에 쌓여 있던 것이 뻥 뚫리며 치유가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여야 한다는 겁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장애인을 상상해 보셨습니까?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본인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그 가련한 한 인생을 누가 그토록 기쁨이 넘치는 인생으로 바꾸어 줄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3장 8절에 보면, 그가 뛰면서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토록 가련한 한 인생이 기뻐 춤추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임을 알아보고 놀랍니다. 이런 기쁨의 장면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교회를 이끌며 점점 중요한 인물로 되어가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 역할을 줄여야 합니다. 담임 목사가 너무 중요한 인물이 되지 않도록 제 역할을 줄이고, 순장님들, 장로님들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줄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인간들이 행사하는 영향력을 조금씩 줄이고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시고 영향력을 행사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 되는 겁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 것은 교회가 이름만 자비의 집인 무자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베데스다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회복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능력이 회복됩니다. 본문에서 38년 동안 고침받지 못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치유를 받았습니다. 만약 38년 된 장애인이 예수님의 위로도 듣고 격려도 받았지만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로 적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38년 된 병자가 회복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38년 동안 절망과 우울, 답답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치유를 경험하게 하고, 세상 속에서 상처받고 실패한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이 치유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의 마음, 즉 긍휼의 마음이 회복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그 오래된 병을 아시며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긍휼의 눈길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눈길을 주신 그곳에 우리 교회의 눈길도 머물러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 자리에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긍휼의 마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교회로서의 역할을 잃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계시면 예수님이 주시는 꿈과 의욕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세상은 사람의 기능만 회복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 내면의 아픔과 상처까지도 치유하길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이 상실했던 내면의 의욕과 꿈까지도 회복하시길 원하셨습니다. 38년 동안 병으로 인해 삶의 희망이 사라지고, 꿈조차 잃어버린 병자에게 예수님은 "내가 낫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그 마음을 일깨워주신 겁니다.
오늘날 우리의 아이들은 꿈을 짓밟히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이들의 등수로 평가하며 그 꿈을 무너뜨리고,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비교와 압박을 받는 현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진정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직접 편지를 써주도록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한 아이 한 아이에게 정성스러운 마음을 담아 사랑을 전하는 편지를 써서, 그 마음이 아이들에게 전해지길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능력, 긍휼, 그리고 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받고, 긍휼의 마음을 품으며, 예수님이 주시는 꿈과 의욕을 되찾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오늘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능력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모든 고통받는 이들이 치유를 경험해야 하며,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상처들을 하나님이 어루만지시고 회복시켜 주셔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긍휼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긍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누구도 소외되거나 상처받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그 마음과 내면의 고통까지 헤아리셨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만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이 주시는 꿈과 의욕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동안 절망 속에 있던 병자에게 꿈을 회복시켜 주셨고, 그가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청년들이 꿈을 잃지 않고 주님 안에서 바르게 자라도록 교회가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중심이 인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고, 모든 회복의 출발점이 그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교회는 그분의 능력과 긍휼, 그리고 그분이 주시는 꿈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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