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러한 말을 듣고 있으면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하기엔 쉽지 않죠.
심지어 당시 사회는 계급 사회였습니다. 계급 사회란 계급마다 윤리가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노예에게 "자비로운 노예가 되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죠. 노비에게 윤리적 덕목이란 복종, 오로지 주인의 말을 잘 듣는 것이었습니다. 용서는 통치자의 덕목이었죠. 예수께서 "하늘나라가 여기 왔고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날 먹을 것을 걱정하는 당시 민중들에게 통치자처럼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신이 조형한) 하나의 예술품으로 구현해 내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의 특성은 창조성이며, '예술처럼 빚어 나가는 삶'입니다. (따라서 돈이나 성적, 외모 등의 획일적 기준으로 가치를 정하고 우월해 하거나 자괴감에 빠질 것은 없습니다!)
ReCap: 천국에 대하여 - 반려견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영혼은 사람만? 관계 단절이 질문의 이유!
"의사로서 제가 진료를 볼 때 '사별 반응'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제는 반려동물과의 이별로 오는 사별 반응이 많아졌습니다. 예전엔 인간과의 이별이 주였다면, 요즘엔 반려동물과의 이별로 오시는 분도 많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편이 돌아가시고 두 달 후 반려견도 세상을 떠난 분이 계셨는데, 반려견의 죽음을 더 깊이 슬퍼하셨습니다. 이런 걸 보면 참 사람의 마음은 신기하죠." "목회자로서 상담을 하다 보면, 어떤 성도님이 집에 누가 아프다며 기도를 부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반려견인 경우가 종종 있죠."
dog를 거꾸로 읽으면 God이다. (유머? ^^)
"반려견도 천국에 갈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반려견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특별히 주신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런 질문은 인간의 공감 능력과 관계 단절에서 오는 현대적 질문입니다.
제 아내와 저는 대학원 때 만나서 결혼하고, 함께 박사 과정을 밟으며 고생했었습니다. 그래서 차 한 대에 온갖 추억이 담겨 있었죠. 폐차하러 갔던 날,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그 앞에서 저희 부부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그것이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이든 비동물적 사물이든 무엇이든, 자기와 함께한 존재에 대해 깊은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러니 "천국에서 반려견을 만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사실 성경에서는 인간만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이런 질문이 더 보편적이죠.
뉴욕의 한 성당에서는 반려동물을 위한 기도의 날을 두기도 합니다. 이는 인간의 관계 욕구와 관련이 있습니다.
페티시(fetish)라고 하는 것은 성적인 측면에서 주로 얘기되고 있지만, 원래는 어떤 물건에 대해 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던 데서 시작된 개념입니다. 이것이 현대에 들어서 사물에 대한 집착이라든가, 물건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 부족 사회에서도 페티시즘이 있었는데, 부족들은 특정 물건에 신령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물건이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로 인식된 것입니다. 부적도 그 일환입니다.
지금도 물건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현상들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특정 물건이 없으면 안 된다든지, 그 물건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는 원초적인 페티시즘이 현대적으로 변형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라는 말 자체는 성경에서 특별히 언급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곳이 히브리어로 '네페쉬(nephesh)'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는 '영혼'이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목숨'이나 인간 전체를 의미하기도 해요. 신약 성경에서는 헬라어 '푸시케'라는 단어가 사용되며, 이것 역시 목숨, 정신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는 인간이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다고 보기보다는, 신의 은혜와 능력을 통해 영원히 살게 된다고 여깁니다. 영혼 불멸의 사상은 사실 인도-아리안 계통의 종교에서 유래하여 그리스 철학을 통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는 영혼 불멸 사상을 수용한 이들도 있었지만, 초기 신약 성경과 유대교 본문에서는 이러한 영혼의 개념이 주도적이지 않습니다. 영혼 불멸을 전제하는 기독교 본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헬레니즘 사상이 들어오며 군데군데 나타나는 것이지, 주요 개념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동물들도 영혼이 있는가라는 질문이 자주 나오고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동물 신학이라는 개념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통해 반려동물과 천국에서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고, 미국 뉴욕의 한 성당에서는 반려동물을 기리는 날도 만들어졌습니다.
기독교의 본래 신앙에 따르면 인간은 불멸하는 영혼을 소유하기보다는, 신의 은혜를 통해 영생하는 존재로 이해됩니다. 인간에게 불멸의 영혼이 있다는 개념보다는 신이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입니다.
그러면 죽은 후에는 지옥은 없고 신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냥 사라지나요?
유대-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 "불멸"하는 개체라기보다는 신의 은혜에 의해 영생하거나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는 존재로 간주됩니다.
고대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는 불멸의 영혼과 지옥의 개념을 명확히 포함하지 않았으며, 대신 신의 은혜로 인간이 다시 일어서는 구원과 부활이 강조되었습니다. 즉, 고대 유대-기독교 관점에서 죽음 후 지옥이라는 공간은 반드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지옥과 관련된 언급들이 있지만, 이들도 상징적 의미로 해석될 때가 많으며, 각 전통마다 사후 세계를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사랑하라, 심지어 원수까지도: 예수님의 도전적 가르침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셨는데, 이 말도 당시 사회에서는 '통치자처럼 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서로 구분을 짓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품는 방식으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시한 것입니다.
인간의 기본 욕망은 생존과 번영입니다. 그래서 '원수'란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방해하는 존재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반면 '사랑'이란 상대의 생존과 번영을 도와주는 것(정서적 마음이 포함될 수도 있고 그저 호의일 수도 있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의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지만, 이를 듣고 일반인이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통해 통치자처럼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통치자는 지혜(Sophia헬, Sapentia라)와 용기(Andreia헬, Fortitudo라), 경건(Eusebeia헬, Pietas라, Piety영), 자비(Eleos헬, Clementia라) 등이 덕목(Arete헬. 탁월함, Virtus라-원래는 용기를 의미)으로서 필요했습니다. 이상의 4가지가 '덕목 방패'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역사비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비평적 관점은 예수의 말씀을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적 상황과 청중들의 반응을 통해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세네카라는 인물은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이자 철학자로,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네로와 사이가 틀어져 네로가 세네카에게 칼을 보내 결국 그를 자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네카는 여러 책을 썼는데, 그중 그의 형제에게 쓴 글들이 유명합니다. 예를 들어, 'De Ira(드 에이라)'라는 제목으로 '분노'에 대한 책이 있고, 또 'De Clementia(드 클레멘티아)'라는 '자비'에 대한 책이 있습니다. 세네카는 이 책에서 통치자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 자비를 강조합니다. 그는 통치자는 단순히 아랫사람이 반항적으로 대답하거나 쳐다본다고 해서 처벌을 내릴 자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원수를 용서한 사람들이 많으니, 통치자 역시 게으르거나 부주의한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지 않겠냐고 제안합니다. 세네카는 용서와 자비가 통치자가 지녀야 할 주요 덕목 중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통해 예수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도 현대인들에게처럼 단순히 도덕적인 요구가 아니라, 당시 청중에게는 통치자처럼 사는 법을 배우라는 깊은 의미로 전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예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말씀은 당시 사람들에게 "통치자처럼, 철학자처럼 살아라"는 의미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하나님 나라는 "표를 끊고 들어가면 모든 즐거움이 제공되는" 장소, 예를 들어 "놀이공원"이나 "엔터테인먼트 장소"처럼 단순히 즐거움과 안락함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위한 편리한 서비스만으로 구성된 곳도 아니며, "수동적으로 앉아서 즐기기만 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통치자나 철학자처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감격을 느끼며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는 각자의 삶 속에서 신의 뜻을 실현하며, 존엄과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어떤 자격(예수를 믿는다고 단순히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통치자나 철학자처럼 '살아감으로써 만들어지는 곳'입니다. 예수께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통치자처럼, 철학자처럼 살아가라는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삶’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 그저 주어진 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 세상에서 통치자와 같은 가치와 책임을 실천하라는 요구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통치자처럼, 철학자처럼 살아가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무리하게 들렸을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적이었을 겁니다. 예수는 우리가 존엄성을 가지고, 자기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창조적인 예술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삶을 사랑과 헌신, 희생의 예술품, 신의 예술품'으로 빚어나가라고 하신 겁니다.
폭력과 악순환을 끊는 원수 사랑의 원칙 - 우리 삶에 스며드는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의 법을 넘어서서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를 들어 누가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상대방에게 양심을 일깨워주는 방식으로 대응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복수하지 말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은 오늘날과 달랐을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통해 사람들이 통치자처럼, 철학자처럼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상대방의 양심을 일깨우고,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행동을 통해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는 상대방에게 복수하는 대신, 인간에 대한 존엄성과 연민을 바탕으로 행동하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들었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들었지. 그런데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들에게 맞서지 말아라.’ 여기서 '맞서지 말라'는 것은 그 사람들과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은 함무라비 법전에서부터 나온 동해보복법으로, 복수를 제한하기 위한 법입니다. 이는 인간의 본성이 보복할 때 자기에게 입힌 피해보다 더 큰 보복을 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동해보복법, 라틴어로 렉스 탈리오니스(Lex Talionis)라고도 불리는 이 법은 피해를 입힌 만큼만 되갚게 함으로써, 복수의 악순환을 멈추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법은 당시 사회에서 중요한 법률로 작용했고, 이는 ‘더 이상 복수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법을 넘어 ‘악한 사람들에게 맞서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보복이나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을 넘어서 용서와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3가지 예제 (월터 윙크의 해석을 기반으로)
예수님께서 "누가 너의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는 단순히 참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당시 오른쪽 뺨을 맞는 것은 상대가 손등으로 때렸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손등으로 때리는 것은 상대방을 자신의 아래 계급으로 취급하는 모욕적인 행동이었죠. 당시 라삐 문헌에 따르면, 동일 계급의 사람을 주먹으로 치는 벌금보다 손등으로 치는 벌금이 400배 차이가 나게 많았습니다. 손등으로 치는 것은 상대방을 낮은 계급으로 보고 모욕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에서 ‘왼쪽 뺨을 내밀라’고 하심으로써, 모욕을 당하는 자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폭력의 구조 속에서 상대에게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이는 수치심과 모욕에 대한 직접적인 반격이 아닌, 그 구조를 초월하는 방식의 대응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시 청중들은 오른손잡이 문화에서 손등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것이 상대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는 행동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른쪽 뺨을 맞고서도 왼쪽 뺨을 내미는 것은 자신이 낮은 위치에 있지 않으며 존엄을 지키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이는 우리가 겪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면서도, 존엄과 자존감을 잃지 않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너의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속옷과 당시의 속옷은 다릅니다. 고대 중동 지역, 특히 성경 시대의 속옷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속옷과는 그 기능과 형태에서 차이가 큽니다. 당시 속옷은 몸에 밀착하는 형태의 단순한 헐렁한 속옷으로, 로마의 Tunica나 히브리어로 Ketonet라고 불리며, 길이가 길어 무릎이나 발목까지 내려오는 옷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속옷과 달리 외투와 같이 몸을 감싸는 용도로 착용되었으며,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고대 사람들은 옷이 많지 않았기에 이 속옷은 기본 의복의 일부이자 중요한 재산이었습니다. 특히, 겉옷과 함께 거의 유일한 옷에 속했으며, 겉옷을 빼앗기면 속옷 한 벌만 남는 경우가 흔했습니다.현재의 속옷은 바깥옷 안에 입는 개인적인 의류지만, 당시 속옷은 오늘날의 일상복에 더 가까운 의복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대 속옷은 일종의 기본 의복으로, 현대 속옷처럼 은밀하게 입는 옷이 아닌 재산이자 생활 필수품이었습니다.
당시 겉옷은 단순한 의복이 아니라 재산이자 이불이었습니다.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흔히 담보로 겉옷을 맡기고 돈을 빌렸는데, 밤이 되면 다시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겉옷은 그들에게 중요한 재산이자 이불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웃기고도 슬픈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철수 아버지가 영희 아버지와 평생 같이 지내며 우정을 나눴는데, 어떤 일이 생겨 법정으로 가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법정까지는 둘 다 옷을 제대로 입고 갔습니다. 철수 아버지가 변제 수단으로 속옷을 내어달라고 하자, 영희 아버지가 속옷 뿐만 아니라 겉옷까지 내어줍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상대방인 영희 아버지는 자신의 마지막 재산인 속옷과 겉옷까지 내주고, 알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이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은 묻습니다. ‘누가 더 수치스러운가?’ 발가벗은 영희 아버지가 아니라 겉옷을 가져간 철수 아버지입니다. 철수 아버지는 겉옷을 가져갔지만, 알몸으로 남게 된 사람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겉옷까지 내어주라'는 말씀은 이렇게 가장 소중한 것을 상대방에게도 주어 버림으로써, 오히려 상대방이 더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이는 우리가 상대의 불의와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방식이며, 상대의 양심을 일깨우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너를 강제로 오(5)리를 가게 하거든 십(10)리를 가라"고 하셨을 때, 이는 로마 군인들이 길 가는 사람들을 강제로 짐꾼으로 부려 1마일(5리) 정도까지 짐을 지게 했던 당시의 제도(현장 징발권)를 염두에 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 군법은 매우 엄격하게 운영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투 중 패배한 경우, 병사들이 후퇴하면 도망간 병사 중에서 제비를 뽑아 처벌하는 시스템이 있었습니다. 이 방식은 군사 규율을 엄격히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특히, 로마 군대는 이동 중에 민간인을 징발하여 짐을 들게 했는데, 이는 로마 법에 따라 짐을 지고 갈 수 있는 거리가 제한되었습니다. 만약 군인이 그 거리를 초과하여 짐을 지게 할 경우, 그 군인은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리를 억지로 간다음에 욕을 하며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10)리를 더 가줌으로써 로마 군인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고, 그를 인간으로서 존중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존엄과 자존을 지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해학적 예제이지, 정색하고 내린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자신을 존엄하게 여기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을 지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양심에 호소하고, 폭력을 넘어서는 행동을 통해 평화와 정의를 이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피해자로서 괴로워하지만 말고 상대방에게 돌이킬 기회를 제공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 나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귀하다: 기독교적 인간 존엄성
기독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독특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인간이 모두 신의 이미지를 지녔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고대 바빌론 신화와는 대조적입니다. 고대 바빌론에서는 왕만이 신의 현현으로 여겨졌으며, 다른 인간은 그를 경배하는 존재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창세기는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는 혁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는 오늘날로 치면 인권 선언과 같은 혁명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이러한 안티 내러티브는 유대 기독교 전통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신성한 존재로, 신상(우상)이 아닌 각자의 모습으로 신의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이 안티 내러티브를 통해 강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신상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당시 사회적 계층과 신분 구조를 넘어서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기독교 사상의 본질을 반영합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신의 사랑에 기초합니다. 사람의 가치는 외적 성취가 아니라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는 인간의 가치를 능력이나 조건이 아닌 존재 자체에서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통치자처럼 살라는 말씀 역시, 인간이 존엄성을 지닌 존재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라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여기서의 사람은 '노예'는 제외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에는 인종이나 계급으로 나누지 않고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인간에 대해 계급을 나누지는 않았습니다. '하늘을 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며 '보편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자존을 지키는 법
자존감이 떨어져서 힘들어하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자존감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중요한 존재로서 갖는 기본적인 존엄에서 나옵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자존감이 개인의 성취나 능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는 관점에서 가치를 찾습니다. 이 가치관은 “신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의 가치가 있다”는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은 자신의 능력이나 외모, 재산과 상관없이 존엄한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며, 이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존감을 유지하는 기반이 됩니다.
저는 친구로부터 고가의 리미티드 에디션 포인터를 선물로 받았지만, 여전히 오래된 중국산 저가 포인터를 사용합니다. 제가 낡은 포인터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순히 물건의 성능 때문이 아닌, 그 포인터가 딸이 어렸을 때 생일 선물로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딸이 준 선물에는 특별한 정서적 가치를 두고 있어, 리미티드 에디션 제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의미가 있는 것이죠. 이 예시처럼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가치는 그 자체로 내재적일 수 있지만, 기독교인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큰 의미와 존엄성을 부여받는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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