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도행전 17:22-31
ReCap - 베뢰아와 데살로니가
바울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두 도시에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들은 후 상고하며 진리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을 반대하는 폭력적인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들이 바울을 베뢰아까지 쫓아가게 되어 결국 바울은 급히 아덴(아테네)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의 설교
아테네: 우상으로 가득한 도시
아크로폴리스[Acropolis]
헬라어 ‘아크로폴리스’는 ‘아크로’(높은 곳)와 ‘폴리스’(도시)가 결합된 단어로, ‘성읍의 높은 곳’, ‘높은 도시’라는 뜻이며, 도시 국가를 가리킨다.
아크로폴리스는 원래 외적의 침입에 적절히 방어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세워진 요새, 곧 일반 거주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대에 위치했던 자치 도시의 성채나 성(城)을 가리켰다. 그런데 점차 도시가 발전하고 도시 주변을 든든한 방어벽으로 견고히 함으로써 언덕 위의 요새는 군사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대신 그곳에 신전(神殿)이나 거대한 신상(神像)이 세워져 그 도시의 종교와 활동의 중심지가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덴에 세워진 신전이다.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 중에 방문했던 고린도나, 빌립보 등에도 각기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혼자 도시를 둘러보며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했습니다. 아테네는 모든 철학과 문화의 중심지였지만, 인구보다 더 많은 3만 개 이상의 우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의 화려한 문화와 신전이 아닌,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느끼며 이들의 영적 상태에 대한 탄식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에피쿠로스 학파 및 스토아학파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바위 언덕으로 끌려간 바울은 당대의 철학자들과 논리적인 설교를 펼칩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철학적이고 논리적이며,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전략을 먼저 적용하였습니다.
아레오바고[Areopagus]
‘아레스(Ares)의 언덕’이란 뜻. 아덴의 유명한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있는 높이 115m의 석회암 언덕(행 17:19).
헬라의 개혁자 솔론이 세운 대법원이 있었다. ‘아레스의 언덕’이란 헬라의 전쟁신(훗날 로마의 전쟁신 마르스(Mars)와 동일시됨) 아레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 하리로티오스를 살해하여 처음으로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고사에 근거하여 명명되었다.
재판이 진행된 언덕 정상에는 두 개의 돌단이 있는데, 그 하나는 ‘악행의 돌’, 다른 하나는 ‘비정의 돌’이라고 붙여진 원고와 피고석이 있었다. 아레오바고 회의는 아덴에서 가장 역사 깊고 또 최고 권위를 인정받은 회의로서 초기에는 소송을 다루는 ‘법원’ 역할을 했었다.
하지만 로마 시대에 이르러 아덴의 풍습과 도덕과 교육을 관장하고 또 새로운 종교나 철학이 유입되는 것을 통제하는(새로운 사상을 유포하는 자를 소환해 신분을 조사하는 등) 일종의 감독 기관 역할까지 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청중들은 그 말을 거부했으나 소수의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행 17:22-34).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 아레오바고의 관리 곧 아레오바고 회의의 의원(혹은 법정의 판사)인 디오누시오가 있었다(행 17:34).
그리고 그는 다음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설교를 전개합니다.
첫째,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에피쿠로스 학파는 인간이 우연히 존재하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세상을 설계한 신적 이성, 즉 로고스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지으셨고,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습니다(행 17:24-25).
우리의 핏줄이 지구를 두 바퀴 돌 수 있을 만큼 길며, 1년에 175만 리터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우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과학회 김명현 교수가 발견한 눈 결정체와 모기의 눈의 대칭성처럼,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의 분명한 계획 속에 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에피쿠로스 학파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은 쾌락과 내적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이성에 따라 운명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모든 순간을 주관하시고, 거주할 경계를 정하셨습니다(행 17:26). 우리는 버려진 고아가 아닙니다. 성도로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행 17:28). 우리의 인생에서 방황을 끝내게 하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셋째,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음은 의식의 소멸이며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스토아학파는 존재의 끝으로 운명에 순응하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행 17:31).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지며 영원한 삶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최종 심판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는가입니다. 우리의 진짜 삶은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허송하지 말고,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우리가 가야 할 길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고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삶의 시작입니다.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이동하며, ‘이 땅의 모든 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주신 사명을 위해 살아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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