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내용은 '김학철 교수'의 유튜브 내용을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입니다.
📘 문자 그대로의 해석이 아닌, 의도의 이해 필요성: 예수님의 가르침은 문자적 해석이 아닌, 시대/공간적 배경에서 그 의도와 근본 사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해야 합니다.
💡 비굴함이 아닌 효율적인 현실 적용: 예수님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라'는 말씀은 현실에서 높은 효과를 낼 수 있는 지혜를 담고 있으며 비굴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 동해 보복법의 목적과 한계: 복수를 제한하려는 원칙에서 시작한 동해 보복법은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으며, 폭력의 악순환을 단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 팃포탯 전략과 관대한 용서: 게임 이론을 활용해 ‘관대한 팃포탯’ 전략을 살펴볼 때, 한 번의 배신은 용서하여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을 고려할 만합니다.
🔄 존엄성의 유지와 비폭력 대응: 예수님은 비굴한 삶이 아닌,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폭력에 대응하는 방법을 가르쳤으며, 이를 통해 폭력의 내면화를 거부해야 합니다.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내밀어라
오늘날 누가 오른쪽 뺨을 때리는데 왼쪽 뺨을 내밀겠습니까? 누군가가 오른쪽 배를 칼로 찔렀을 때 왼쪽 배를 내놓는 일도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 지킨다고 하는 것은 그 원래 뜻을 오히려 해치는 것이죠. 예수님의 근본 의도와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돌려대라”라는 말씀은 결코 낭만적이거나 이상적인 얘기가 아니라, 현실에 적용할 때 가장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 말씀이 비굴하게 살거나 무조건 용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손등은 지위가 높고 낮은 관계에서 때리는 방식입니다. 주인과 종, 왕과 신하, 장군과 부하의 관계에서, 오른쪽 뺨을 맞은 사람은 대개 고개를 숙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신분을 잊었습니다.”라고 물러나게 되는데, 예수님은 뺨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은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입니다”라며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엄을 지키며 “나는 그저 굴종적인 사람이 아닙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구절에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가 따라가기 어려운 존재로 보게 되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 같은 경우에는 산상수훈의 말씀은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죄인임을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떠올릴 때, 히브리서 5장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구원해 줄 능력 있는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고, 그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고난을 겪으면서 순종을 배웠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게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다는 구절을 읽으면,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순종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겪으시면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태어나실 때부터 난민 가족으로 이집트로 피난을 가셨습니다. 마태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 땅에 머물지 못하고 갈릴리로 가셨고, 그곳에서도 이주민으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아마도 일용직 노동자처럼 생계를 꾸려 나가셨을 것이고, 예수님의 삶도 그와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사셨으며, 심지어 공생애 기간에도 "나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시며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당하셔서 고문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결코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이 아니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폭력을 목격하고 체험하며 당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이상적이거나 낭만적인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마태복음서 5장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구절을 보며, 우리는 폭력에 맞서지 않되 존엄을 지키라는 예수님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가 단순히 용서만 해야 한다거나 굴종적인 태도로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을 지키며, 창조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라
동해보복법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동해 보복법"은 원래 복수를 제한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알려진 이 법은 인간이 가진 복수 본능을 절제하고, 공정하게 복수를 제한하려는 목적이 있었죠. 그러나 이러한 복수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한 집안이 멸망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폭력의 연쇄 반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며, 협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진화생물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주장도 있습니다. 갈등과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더욱 많은 이익과 풍요가 창출된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습니다.
팃포탯 전략
로버트 악셀로드의 실험이 대표적입니다. 1979년에 진행된 이 실험에서는 각 참여자가 미래에 다시 만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상호 협력의 이익이 배신의 이익보다 더 크다는 조건을 주고 게임을 진행했습니다. 이 실험에서 "팃포탯 전략"이 최적의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전략은 먼저 협력한 뒤, 상대가 배신하면 자신도 배신하고, 협력하면 다시 협력하는 방식입니다.
이 팃포탯 전략은 ‘동해 보복법’을 뒤집은 개념입니다. 상대가 배신하지 않는 한 협력을 유지하고, 배신하더라도 한 번은 용서하여 협력의 관계를 이어가는 방식입니다. 심지어 동물 세계에서도 이런 방식이 활용된다고 합니다. 코스타리카에 서식하는 흡혈박쥐들은 피를 나누어 먹는 상황에서 배신한 개체는 기억하여 다음에 나누어 주지 않는 방식으로 협력과 신뢰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의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가르침도 단순히 폭력을 감내하라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존엄을 지키며 대응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굴함이 아닌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것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비굴하게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폭력의 악순환을 끊기 위한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자신의 존엄과 위엄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악한 사람에게 맞대응하지 말고, 비폭력적으로 자기 자신을 지키는 전략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철학자처럼 우리의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응 방식을 선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마태복음서 5장에서 예수님은 "악한 자에게 맞서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을 통해 단순히 복수를 참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사슬을 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대응하는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폭력의 내면화를 거부하고,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위엄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의 오른쪽 뺨을 때린다면, 그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존엄성을 지키며 그에게 용서를 보여주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근본 뜻을 오늘날의 사회와 상황에 맞게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사한 방식으로, 노예 신분에서도 자신의 존엄과 품위를 잃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구체적인 삶의 예로 구현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비굴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위엄을 지키며 폭력에 맞서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맞서지 말고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는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폭력에 맞서 똑같이 대응하면 속은 시원할 수 있지만, 결국 그 폭력의 사슬은 계속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끊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20세기의 인도 독립운동에 적용했습니다. 그는 폭력적인 영국의 식민 통치에 비폭력으로 저항하며, 소금 행진과 같은 방법으로 인도인들이 독립을 얻는 데 기여했습니다. 간디는 예수님의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폭력적으로 맞서지 말라"는 가르침을 그의 삶 속에서 실천한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히 힘으로 대항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엄과 품위를 지키고 불의를 거부하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우리 또한 직장이나 가정에서 폭력적인 상황에 처할 때, 단순히 복수나 대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며 지혜롭게 대응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폭력에 맞서지 말되, 우리의 상황에 맞는 전략을 통해 존엄을 지키고, 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비폭력으로 우리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폭력의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킬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철학자처럼 사고하고, 우리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폭력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피해자가 폭력을 당하며 그 폭력을 내면화하게 되면 스스로 존엄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폭력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폭력에 맞서지 말고 존엄을 지키며 대응하는 것은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비굴하게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위엄과 존엄을 선언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가해자는 폭력을 통해 비인간화되고, 피해자는 그 폭력을 내면화하여 비인간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존엄과 위험을 잃지 않고, 그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비폭력적인 대응을 통해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단순한 철학적 사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비굴하게 용서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존엄과 위험을 지키며, 폭력의 악순환을 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존엄과 위엄을 지키기 위해 창조적인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용기를 가지고 폭력에 맞서지 않되 그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맞대응하면 결국 그 폭력의 순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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