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 사도행전 18:1~11
슬픔은 끝이 없고,
'월터 랭글리 (Walter Langley)'라는 화가가 그린 '슬픔은 끝이 없고, '라는 그림입니다.
원제는 "Never Morning Wore To Evening But Some Heart Did Break, "인데요, 쉬운 서술형으로 바꾼다면 아마도 A morning never passed into evening without some heart breaking. 어느 하루도 누군가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지 않고 지나간 날은 없다… 의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지치고 슬픔 가운데 있게 되어 주저앉게 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의 바울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바울의 제2차 선교 여행은 안디옥에서 출발하여 루스드라(디모데를 만남, 바나바와 헤어진 후 그 빈자리를 디모데가 채움), 드로아, 빌립보(귀신 들려 점치는 여인을 구한 후 감옥에 갇힘), 데살로니가(매수된 폭력배들이 몰려옴), 베뢰아(쫓아온 조폭들을 피해 일행을 두고 홀로 황망히 도피함), 아덴(우상의 도시,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철학적 설교를 했으나 거의 믿는 사람이 없었음) 등을 거쳐 고린도에 이르렀습니다. 고린도는 지나온 도시 중에서도 가장 영적으로도 악했고 성(性)적으로도 문란한 도시로서, 당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해발 575미터 정상에 위치한 아프로디테 신전에서는 1,000명의 여사제가 성관계를 맺는 종교의식을 행했고, 밤에는 매춘 행위에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고린도식으로 놀다’라는 뜻의 '코린티아조마이(Korinthiazomai)'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바울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지쳐 있었습니다. 아무리 복음을 위해 애를 써도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선교팀은 흩어졌으며, 선교 일정은 꼬이기만 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이러한 ‘영적 탈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왜 내 인생에는 출구가 보이지 않을까? 왜 나는 짙은 그림자 속에 머물러야 할까?
그러나 우리는 그때에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어야 합니다. 성경의 신앙의 인물들 역시 지치고 넘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방식 1 : '만남'을 통해 위로하신다
바울은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천막 짓는 기술을 활용하여 '취업 면접'을 보러 갑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로마에서 살다가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해 고린도로 왔으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만남은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이었습니다. 로마서 16장 3~4절에서 바울은 이 부부를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라고 표현하며, 그들을 ‘영적 동료’라고 불렀습니다. 이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이 부부는 로마까지 동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만남’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또한 바울은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를 고린도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조폭들을 피해 떠난 후에도 그곳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보내준 후원금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을 넘어서, '보내는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고후 11:9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보내는 선교사’는 뒤에서 ‘밧줄을 붙잡아 주는 사람들’이라고들 말합니다. 선교사는 밧줄을 매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낭떠러지를 내려간 사람들이고요. 우리는 이러한 격려와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의 방식 2 : 하나님의 때에 선한 일을 통해 위로하신다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말씀을 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당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디도 유스도의 집을 선택해 들어갔습니다. 디도 유스도는 경건한 헬라인으로, 그의 집은 회당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가정 교회를 세웠고, 하필 유대인 회당 옆집을 고른 것은 회당을 오가는 유대인들에게 계속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회당장이었던 그리스보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유대인 사회가 뒤집어질 일이었습니다. 가정이지만, 우리 오륜교회당 바로 옆에 있는 타 종교시설이 있잖아요? 그곳의 대표 목회자가 오륜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번 물꼬가 터지자 봇물처럼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전도의 결과를 책임지려 하지 말고 ‘과정’을 충성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사역의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리스보에 이어 후임 회당장이 된 소스데네 역시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에 화가 난 유대인들이 소스데네를 법정에서 구타하기에 이릅니다.(행 18:17) 이런 일들은 고린도의 영적 지형을 바꾼 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소스데네는 훗날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선교사가 되어 바울의 팀에 합류해서 함께 떠나게 됩니다. (고전 1:1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그는 이후에 고린도로 복귀하여 고린도 교회 담임 목사가 됩니다. 소스데네가 바울-아볼로-실라에 이어 고린도 교회의 제4대 담임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매 순간을 은혜의 시간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가 깊어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끝이 없고,
바울은 지친 상태로 고린도에 들어왔지만, 그곳에서 최장 기간인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와 같은 중요한 목회서신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월터 랭글리의 그림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슬픔은 끝이 없고... 가 제목이었죠?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도 끝이 없습니다.
바다에 비친 햇살이 노파의 손등을 비추듯, 또 아침인데도 등대가 밝게 빛나고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지금도 그분의 때에 알려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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