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마구간인가, 일반 농가의 방인가?
예수 탄생에 대해 우리가 품고 있는 이미지,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지만 여관에 방이 없었고, 누추한 곳에서 태어난 아기예수는 말구유에 눕혀졌다’는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흔한 시골집 구조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바닥보다 낮은 곳에 소와 나귀 등을 기르는 공간을 두고 그 위에 가족이 쓰는 방이 있었다. 특히 손님을 환대하는 문화가 있어 가족 방 뒤쪽이나 지붕 위에 별도로 손님방을 두기도 했다. 누가복음의 ‘여관’은 숙박업소가 아니라 당시 개인집마다 뒀던 바로 그 ‘손님방’을 의미한다.
결국 마리아와 요셉은 더러운 마구간이 아니라 어느 시골 농가에서, 손님방에 다른 손님이 머물고 있어 할 수 없이 집안에서 출산했다는 얘기다. 평범한 이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는 가운데 아기 예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낮고 천한 곳으로 오신 예수 탄생의 본질적 의미마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누가복음 2:6을 원어로 살펴보면 “거기 있을 그때에”는 “거기 있는 동안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들어간 바로 그날 마리아가 진통을 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며칠, 길게는 몇 주가 지난 후에 해산했을 것이며, 요셉은 마리아의 해산을 준비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그가 아무리 몰락했어도 여전히 다윗 왕가의 후손이었고, 베들레헴에는 친척들이 있었고 옆 마을에는 마리아의 사촌도 있었습니다. 베일리는 중동 지역이 그때나 지금이나 친족 중심의 대가족 공동체 망으로 되어 있던 것에 주목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그들을 찾아가지 않고 마을 광장의 공동 마구간으로 갔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베일리는 신약성경의 주 무대가 되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가옥 구조에서 다른 마구간의 단서를 찾아냈습니다. [1] 당시 평범한 농부들은 대부분 방이 하나 혹은 둘이 있는 소박한 가옥에서 살았습니다. 그런 집의 맨 왼쪽 낮은 곳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실내 마구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쪽 오른편에 작은 계단이 있어 올라가면 그곳이 방입니다. 여기에 아기 예수의 출생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농부였고 가난했습니다. 자기 집에 소, 나귀, 양을 몇 마리만 갖고 살았습니다. 이 짐승들은 귀한 재산이자 식구였습니다. 잃어버리면 큰일이 아닐 수 없지요. 그래서 집 안에 같이 데리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밤이 춥습니다. 난방 시설이 따로 없었습니다. 현관문 입구 쪽에 있던 마구간의 동물들과 벽도 없이 이어진 위쪽 방의 식구들이 함께 체온으로 추위를 덜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집 안에 방이 둘 있는데 낮은 방은 마구간이요 높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사이에 벽은 없었던 것입니다. 경사지게 되어 있어 안방을 물로 청소하면 곧장 마구간으로 흘러내려갑니다. 구유는 마구간 바닥이 아니라, 높은 쪽 가족 방 끝에다가 방바닥을 정성껏 파서 만들었습니다. 소나 나귀는 가족 방 쪽으로 목을 내밀어 구유에 놓인 여물을 먹었습니다. 키가 작은 양들은 마구간 바닥에 만든 작은 구유에서 먹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셨던 ‘등잔불을 안방에 켜 두면 그 불이 온 집을 환하게 비추었던’(마 5:15) 옛날식 가옥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베일리에 의하면, 들판의 목자들이 마구간 구유에 있는 아기를 보았다는 누가의 기록이나(눅 2:7, 12), 동방박사들이 어느 집 안에 들어가 아기를 보았다는 마태의 기록(마 2:11)이나, 하나의 같은 마구간에 대한 리포트인 것입니다. 목자들도 박사들도 마을 광장의 공용 마구간을 찾아간 게 아니라, 어느 소박한 농가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아기를 뉘었던 구유(파트네)는 그 농가의 단칸방과 실내 마구간이 만나는 부분에, 정확히 말하면 마구간이 아니라 단칸방 구석에, 더 정확히 말하면 안방의 가장 뜨듯한 구들장에 있었습니다. (새 창조의 새 언약은 인간만 아니라 동식물 피조세계 모두 공유할 축복이니 그 지점에 구유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차가운 광장의 길바닥이 아니라 어느 평범한 농가의 안방 따스한 구들장에서 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집의 문간 마구간에서 해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만삭의 여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인간 이하의 대접일 것입니다. 대신에 마리아는 서너 계단을 힘들게 오르며 들어간 안방에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당시 전통에 따라 남자들은 방을 비우고 나갔고, 여인들은 산파를 데리고 와서 해산을 도왔을 것입니다. 요셉은 옆집이나 이웃집에서 찾아온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나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며 밤새 이야기꽃을 피웠을지도 모릅니다.
마구간과 구유에 대한 의문은 이렇게 풀리게 되는데, 여전히 여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 2:7에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관’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나오는 ‘판도케이온’ 여관은 여행객을 위한 숙소입니다(눅 10:34). 베들레헴 광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여관’도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있을 곳이 없었다”(눅 2:7)라고 한 여관은 ‘카탈뤼마’로 불리는 다락방이었습니다. 옛날 사랑방이나 요즘 게스트룸같이, 일반 가정집 안에 있는 손님방을 말합니다. 당시 베들레헴의 촌락 가옥은 대부분 단칸방 가옥이었지만, 약간 여유가 있는 집은 약간 더 높은 위치에 다락방이 하나 더 붙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말 성경에 여관으로 번역된 사랑방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한 서민의 집이 아니라 넉넉한 중산층 집에서 해산했으면 더 편했겠지만, 인구조사로 판도케이온(여관)은 물론이고 카탈뤼마(사랑방)까지 죄다 만원이었던 것입니다.
베일리의 마구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먼저 상류사회 저택도 아니고, 중산층 높은 아파트도 아니라, 도시 서민의 평범한 주거지를 찾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시골 초가집 안방도 얼마든지 해당되겠지요. 그러니 크리스마스 하면 떠올려야 하는 이미지는, 화려한 백화점의 샹들리에가 아니라, 안방 구들장은 따듯하고 부엌에선 미역국이 모락모락 끓고 마구간에서는 소들이 음매 소리를 내는 시골집의 정겨운 풍경이 아닐까요? 평범한 가정의 보통 아이(common child)로 오신 아기 예수의 말구유 탄생은 차가운 거절이 아니라 구수한 환대의 이야기입니다. 가난했지만 자기들 형편에서 정성을 다해 아기 예수를 영접한 베들레헴 서민들의 이야기입니다. 지극한 최고의 선(the supreme good)이신 그리스도께서 보통 사람들(common people)의 집에 오신 까닭은, 그 집은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주인이나 종이나, 심지어 동물들까지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편안히 다가갈 수 있는 평범한 공간(commonplace)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아기 예수는 시작부터 모두를 위한 공동의 선(common good)이 되어줍니다. 누구라도 아기 예수를 영접하러 갈 수 있어서 다들 좋았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자들은 자기가 사는 집과 분리된 별도의 창고와 마구간을 가지고 있었지만(눅 12:18), 아기 예수는 그런 부자의 창고에 딸린 마구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만약 어느 부자가 창고의 마구간을 내주었다면, 산모와 아기를 그런 환경에서 며칠 혹은 몇 주를 지내게 한 것은 베들레헴이 비정한 마을이라고 온 이스라엘에 광고하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요셉도 무능한 가장이란 오명을 씻을 수 없고, 마구간 구유에 놓인 아기를 구경만 하고 그대로 돌아간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은 정말 한심한 부류가 되고 맙니다.
요셉은 왜 산달이 가까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했을까?
로마의 호적 신고 명령이 여인들도 모두 데리고 가야만 하는 것이었을까? 여자와 아이는 숫자에 포함도 시키지 않던 그때를 생각하면 수긍이 가지 않는다.
요셉이 결혼 전에 임신한 상태였으므로, 마리아만 두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이 불안했던 것은 아닐까? 마리아를 방치하기보다는 험한 길에 동행을 하면서라도 지켜주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 무리한 여행에 출산을 앞둔 마리아를 동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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