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의 3가지 정신
강사 : 안경선 선교사
- 부룬디(Burundi) 한센(Hansen)인(人) 선교사
- 손사랑 브리지 NGO 대표이사
-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 손자
- 1960년생
부룬디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프리카 중동부에 있는 적도성 기후의 내륙국입니다. 오늘 문화행사를 한 디사이플스 쇼콰이어팀의 나라인 탄자니아와 대부분의 국경을 접하고 있고 북으로는 르완다, 서쪽으로는 콩고 민주공화국이 있습니다. 탕가니카 호수의 북동부에 접해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인종 갈등이 심각했고, 내전으로 심각한 기아 수준이 계속되었습니다. 1천1백만 명 인구의 로마 가톨릭이 64%, 개신교가 25%이며, 북한과 60년대에 수교하였고 우리나라와도 91년에 동시 수교하였습니다.
애양원과 손양원 목사님에 대하여
- Hansen인들을 수용하고 치료하는 곳으로는 대개 고흥군의 소록도를 생각하지만, 애양원이 오히려 소록도보다 더 먼저 애양병원이라는 이름으로 1909년 미국 선교사 윌슨 등에 의해 광주에 설립된 최초의 민간 한센인 병원입니다. 1926년 경치 좋은 여수 신풍 바닷가로 옮겼고, 1935년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소록도는 1916년 소록도 자혜병원이 시작)
- 손양원(孫良源) 목사는 평양 신학교 졸업 후 애양원(愛養園)에 부임하여 한센인들을 사랑으로 섬기다가 (손 목사는 그 이전에도 일본 유학 후 부산의 나환자 수용시설에서 8년 정도 일했다.) 신사참배 거부로 8.15 해방까지 5년간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에는 좌우익 충돌 사태에서 두 아들을 잃었으나 살인자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으며, 한국전쟁 때는 한센인들을 두고 피난 갈 수 없어 그들과 함께 하다가 공산군에게 순교당했습니다.
- 손양원 목사의 호는 '산돌'입니다. 산 돌, living stone은 베드로전서 2장 4절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교회 부흥기에 애창곡이었던 '주님고대가(苦待哥)'의 작사자도 손양원 목사님으로 알려져 있으나 작사가가 다르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무튼 분명한 것은 손 목사님이 즐겨 부르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요양원 침대에 계신 어머님이 기도하실 때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우시며 부르던 모습이 선합니다. 일본 엔카풍의 5 음계 멜로디여서 더 구슬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맨 아래에 악보를 첨부합니다.
성경 본문 : 엡 4:32, 고전 15:31
- 엡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1968년에 손양원 목사의 신앙 일대기를 책으로 쓴 안용준 목사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손양원 목사의 생애를 정의했다.
"20세기에 대한민국이 낳은 사랑의 사도 손양원 목사님은 기독교계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부끄럽지 않은 인물이다."
"그 [손양원]는 하나님을, 이웃(나환자들)을, 나라와 겨레를,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믿음을 지키느라 자신의 목숨도 바친 위대한 사랑과 믿음의 용장이었다."
반면에 손양원 목사의 장녀 손동희 권사는 자신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를 '예수 중독자'로 정의하였는데, 나도 이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중독'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지만, '오직 예수'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무엇과도 예수님을 바꾸지 않겠다'는 측면에서 우리 성도들도 '예수 중독자'의 삶을 살아내기를 축복한다.
손양원 목사의 3가지 정신
손양원 목사의 삶을 통해서 크게는 '하나님 사랑' 안에서 다음의 3가지 정신이 유기적으로 나타났다.
1. 저항정신
2. 사랑과 용서의 정신
3. 일사각오의 정신
저항정신
첫째는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보여준 그의 저항정신이다.
1902년생인 손양원 목사는 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신사참배 강요가 극성을 부리던 1939년에 순천의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였다. 애양원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치료-수용 시설로 이곳에서 손 목사는 환자들에 대한 기독교 전도와 환자 구호를 위한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1940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수감되었다. 그때 조사받을 때 말씀하신 신사 참배 이유 3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방요배, 정오묵도, 신사참배는 하나님의 금하신 계명이니 할 수 없다
둘째. 우상에게 절하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법이다
셋째. 국민 된 의무로 못하겠다
그로 인해 광주 구치소, 경성 서대문 구치소, 청주 구치소 등을 옮겨 다니며 해방될 때까지 5년 동안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재판에서는 악질 정치범으로 판결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사형 집행 3일 전에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어 사형 집행을 면하고 출소하여 애양원으로 복귀했다.
손양원 목사는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불의한 권력에 저항했을 뿐 아니라, 편안함과 안일한 일상에도 저항하는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손양원 목사는 매일 그날을 자기 삶의 마지막 날로 여기며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섬기고 교인들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냈다.
1949년 5월 8일 서울 신수동 성결교회 부흥회 기간 중에 쓴 일기는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 오늘이 내 날이다 오늘만 내 날이다
어제는 지나갔으니 나와는 관계가 없어졌고
내일은 아직 오직 않았으니 오늘 밤 어찌 될지 믿을 수 없으니
오늘만 내 날이다"
치열했던 손양원 목사의 일상에 비하면 오늘날 우리 성도들은 너무 편안함의 추구에 빠져 있다. 우리의 예배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우리는 편의적인 신앙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 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우리 어머니는 매주 토요일이면 주일 예배를 위한 의복을 잘 준비하시고 헌금도 다려서 주일을 준비하셨었다. 그리고 주일이 되면 새벽종을 치기 위해 새벽 일찍 교회당에 가셨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주일 성수에 있어 너무 편안함에 익숙해져 버렸다. 주일에 예배드리고 은혜와 감동을 받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있을까? 구약 때는 하나님께 받는 것보다 바치는 것이 먼저였다. 예배드림의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심정으로 매 주일마다 치열하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 대충 시간 때우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코로나19로 온라인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성의 없는 태도로 예배드렸었는지 각자 돌아보자. 21세기 오늘날의 교회는 예배의 모습을 다시 정립해야 한다. 내 인생의 마지막 예배처럼 드려야 한다.
예배가 무엇인가? 나의 무력함을 주 앞에서 고백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을 간절히 바라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예배 전에 그런 몸부림치는 기도가 있어야만 한다.
사랑과 용서의 정신
성 프란시스코를 '평화의 사도'라고 부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그의 기도를 생각해 보라.)
나는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의 원자탄'에서도 그렇게 표현함)
'삼위의 사랑은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도 시행되는 중이다. 또한 미래에도 반드시 있을 것이나,
나는 이 삼위의 사랑을 깨닫는 자로서 합당한 사랑의 종이 되겠노라_손양원'
삼위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영원하겠으나, 나는 '이미 받은' 사랑의 종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미래에 받을 복에 소망을 두고 복 받기를 간구하기보다는 이미 구원 받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의 종이 되고자 한다는 것이다.
특히, 원수를 사랑한 것에서 손 목사님의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1948년 10월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한 여수 순천 사건이 일어났고,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23세), 동신(18세)이 우익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둘 모두 좌익들에게 연행되어 순천 경찰서 뒷마당에서 총살되어 사망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오히려 양자로 삼았다.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그의 딸 손동희 권사가 ""아버지 용서했으면 용서했지, 아들을 삼겠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아버지 아들로 삼으면 그 원수가 내게는 오빠가 될 텐데, 그 원수를 오빠라고 부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안될 일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어도 너무 유별나게 믿습니다" 라며 불만을 토로했는데, 손 목사는 "동희야 성경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아라. 분명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 용서만으로는 안된다 그 학생을 살려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아들로 삼아야 하지 않겠니?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로 삼은 이삭을 재단에서 칼로 찌르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더냐? 그 시험이 이 시험보다 덜 힘들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며 달랬다고 한다.
이렇게 손양원 목사는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강사의 아버지)을 양아들로 삶고 극진히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를 고려보통성경학교에 입학시켜서 전도사로 키워내셨다.
그의 아들인 안경선 목사의 증언으로는 그가 신학교에 입학도 하고 그곳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며 생활했으나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그런 사람의 설교를 누가 들으려 하겠냐는 자격지심에 목사가 되길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군복무 중인 내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밖에서 맞고 들어오자, 내 아내와 가족들은 곧바로 그 아이가 태권도를 배우게 했다. 그것이 일반적인 부모의 심정이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는 인간의 힘이나 의지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랑의 실천을 한 것이다.
2010.8.15 조선일보에 "내 아버지는 聖者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라는 제하의 기사가 났다. 그 기사를 보고 애양원 교회의 목사께서 연락을 해서 설교 요청을 했다.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는 오랜 갈등 끝에 애양원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그곳 강단에서 설교 순서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고, 또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의 시신을 앞에 놓고 울며 몸부림치는 모습이 환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가 환청으로 들려왔다.
나는 설교를 하기 위해 강단에 섰으나 5분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냥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울음이 전파되어서 온 교우들이 함께 울었고, 그날 나는 설교는 한 마디도 못하고 강단에서 내려왔다.
왜 온 교회가 함께 울었을까? 그때는 손 목사님의 두 아들의 순교 후 60여 년이 지난 때였다. 그 양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후손들은 예수를 믿고 사는지 아닌지 조차 알지 못하다가, 그 양아들의 아들인 내가 목사가 되어 성도들 앞에 선 것이다. 손양원 목사님의 10가지 감사 중에서 8번째 감사 제목이 있는데, 내가 그곳에 목사로서 선 것이 그 감사기도의 응답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에 어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 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애양원 교회의 이름으로 100개 교회가 개척되었고 수많은 목회자들이 손양원 목사님의 선한 영향으로 목회자가 되었다.
- 시 121:1~2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손양원 목사님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셨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던 한 살인자의 영혼을 위해 십자가 밑에서 몸부림치신 것이다. 세상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십자가 아래 무릎을 꿇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절망이 찾아올 때 십자가 아래로 찾아가신 것이다.
그런데, 하필 십자가 밑에서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이 '원수를 사랑하라'였다.
용서는 이 땅의 성품이 아니다. 하늘의 성품이다. 우리는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 힘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처럼 주께 매달려 기도할 때 하늘의 성품을 힘입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절망이 다가올 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십자가 밑으로 가서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주님이 하늘의 보좌를 열어 위로해 주실 것이다.
주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쳐야 한다. "위로받을 길이 없어 십자가 앞에 나아왔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여 주소서."
1인칭 용서 - 나를 용서하다
나는 태어나보니 빨갱이 아들이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목사님들 중의 한 분인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을 죽인 그 살인자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이 내게 올무가 되고 평생 걸림돌이 되었다. 손 목사님이 48세에 순교하셨는데 우리 아버지도 48세에 소천하셨다.(1979년) 그때 내게 신학을 하라고 유언하셔서 신학교를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더욱 내 아버지의 실상을 보게 되었다.
손양원 목사님이 살아 계셨을 때 아버지도 신앙생활을 해오셨어요. 부산에서 전도사 생활도 하셨었는데, 손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자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고, 세상에서 핍박을 많이 받게 되면서 평범하게 살아왔어요. 손양원 목사님이 48세에 순교를 하셨고, 아버지도 48세에 부르심을 받았어요. 아버지 생전에 손 목사님과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들어본 바가 없어요.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에 뜬금없이 저에게 신학교에 가라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아버지 장례식에 손 목사님 가족들이 찾아오셔서 안용준 목사님이 쓴 '사랑의 원자탄' 책을 주고 가셨어요. 장례를 다 치르고 정신이 나서 책을 보니까 여수 사건이 나오고 아버지가 가해자로 나오더라고요.
1982년의 일이다.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살기 싫었다. '죽여주시옵소서'하고 1년 동안 기도했는데, 어느 날 피를 토하며 쓰러졌지만 치료를 거부하고 2년간 고생했다. 그리고 을지로 국립의료원에서 폐 오른쪽을 모두 절제하게 되었다.
중환자실 침대에서 누워있을 때 예수님 십자가를 보았다. 아버지는 동인, 동신 두 분을 죽였으나, 나는 예수님을 죽인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마침내 내 아버지를 용서하고, 나아가 나 자신도 용서할 수 있었다.
용서는 내가 십자가 아래에서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져 용서받고, 주님을 죽인 죄인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가 시작된다.
10시간이 넘는 폐 절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어떤 사람이 십자가에서 피를 뚝뚝 흘리면서, '네 아버지는 동인, 동선을 죽였지만, 너는 나를 죽였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깊은 상처에서 치유를 얻고 아버지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2인칭 용서 - 가해자 vs. 피해자
가해자는 피해자를 찾아가 용서를 빌어야 한다. 또한 피해자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가해자를 용서해야 한다.
손양원 목사님의 아픔과 용서는 그 가족들에게 일생의 무거운 짐이었다. 어느 순간에 끝날 수 있는 아픔이 아니었다.
손양원 목사의 부인 정양순 사모님이 밀양의 한센인 교회를 설립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부산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우리 아버지를 찾으셨다. 연락을 받고 급히 부산에 내려가 만나 뵈었는데, '나도 너를 용서하니, 이제 무거운 짐을 벗고 주님 앞에서 편히 살아가기를 원한다.' 라며 용서의 말씀을 전하셨고, 두 모자가 서로 부여잡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또한 손 목사님의 장녀 손동희 권사는 실어증으로 말을 잊고 살아야 했고 총소리를 환청으로 들으며 살았는데, 1978년 우리 아버지의 소천 보름 전에 아버지를 만났고, '천국에 가서 너네 두 오빠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겠다'며 용서를 비는 아버지를 용서해 주며 아버지와 함께 두세 시간을 함께 통곡하셨다고 한다.
용서는 하루아침에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십자가 밑에서 그 사랑을 충만히 경험할 때, 그 처절한 사랑을 깨달을 때 가해자/피해자 모두가 진정 용서할 수 있다.
3인칭의 용서가 가장 어렵다.
사회에서 잘못한 사람은 쉽게 사회적으로 매장되는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며 용서해 주셨다.
우리 사회는 계층 간, 좌우 진영 간 갈등이 매우 심하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그렇다. 그러나 해방 후 신사참배 참여 경력으로 인해 한국 교회가 분열될 때 손양원 목사님은 통합을 외쳤다.
자신을 죽이려는 공산군을 향해서도 예수 믿고 천국 가기를 기도해 주었다. 총 맞는 순간에도 전도를 하셔서, 총 맞아 쓰러진 후에도 개머리판으로 입이 다 짓이겨졌다. 장례식 때도 솜으로 입을 가려 놓았다.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 목사님은 통합과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시며 순교했다.
나는 용서할 수 없어도 우리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내 이웃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서로를 용서할 수 있음을 믿는다.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나는 어떤 결정을 할 때마다 사무실에 늘 있는 손양원 목사님 흉상과 배 모형 앞에서 묻는 습관이 생겼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전라도 지역에도 밀고 들어올 때, 애양원의 나환자들은 '인민군도 나환자인 우리들은 해꼬지 하지 않을 것'이라며 손 목사님께 피난 갈 것을 강권했지만, 손 목사님은 나환자들만 버려두고 피할 수 없다며 성경책 하나만 들고 피난배에서 뛰어내려 애양원으로 복귀했고, 기독교 목사였기에 인민군에게 끝내 처형당해 순교하셨다. 오직 일사각오로 예수만을 따른 본을 보여주신 것이다.
부룬디 한센인 선교 소명
-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010년 조선일보 기사 이후, 손양원 목사님 3 부자 묘소에 갔을 때 내게 임했던 말씀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듯이, 나도 손 목사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위로하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010년 손 목사님 순교 60주년 때 애양원을 처음 찾았어요. 당시 손 목사님과 두 아들의 묘소 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 백성을 위로하리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죠. 10년이 지난 후에야 그 말씀이 할아버지께서 평생 섬긴 한센인을 돌보라는 제2의 소명으로 다가왔어요.”
그 후 KBS 성탄 특집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 제작 방영되고, 2014년에는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 영화가 개봉되었다. 2016년에는 고향인 경남 함안군 칠원읍에 기념관이 생겼고 나는 초대 관장을 맡게 되었다.
애양원 14호실은 임종을 앞둔 극심한 한센인들이 기거하던 곳인데, 손양원 목사님은 보호 장구를 갖추지 않고 그냥 들어가셔서 예배하고 피고름을 빨아내는 등 한센인들을 사랑으로 돌보셨다고 한다.
어느 날 기념관에서 사무실로 들어가려다가 '저 성경책이 누구의 것이냐?'라고 묻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것은 손양원 목사님이 보셨던 성경책이었다. 내가 읽는 성경책과 같은 내용이고, 내가 믿는 예수님도 같은 분이지만, 내 삶은 손 목사님과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삶이었음을 깨닫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시 도전을 받았다.
“6·25 전쟁 당시 저런 배를 타고 피난 가시려던 할아버지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한센병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중환자를 차마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없단 생각에 전남 여수 애양원으로 다시 들어가셨다고 합니다. 손 목사님이 순교하지 않고 살아계셨다면 ‘어디서 목회하실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 여전히 한센인 곁에 있을 것 같았어요.”
그때 나는 부룬디의 한센인들을 후원하는 단기 선교를 다녀온 후였다. 애양원을 설립 운영했던 미국 남장로회 파견 선교 의사 부부인 윌슨과 토플, 또 손목사님은 한센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았으니 나도 남은 삶을 그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는 하나님의 도전을 받았다. 그렇게 내가 섬겨야 할 '이웃'은 한센인임을 일깨워 주셨다.
한국에서는 한센병이 사라진 오늘도 지구상에는 4천만 명 이상의 한센인이 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주로 거주한다.
부룬디에서 안 선교사는 숙소에서 4시간 동안 산을 올라야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외딴곳에 모여 사는 한센인을 찾아다녔다. 한센병은 이른바 ‘나병’ ‘문둥병’으로 성경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는 한국을 한센병 완치국가로 분류했지만 전 세계 한센인은 4000만 명에 달한다. 이 중 아프리카에만 약 63%인 2500만 명이 있다고 한다.
손양원 목사님이라면 '땅끝'까지 가셨을 것 같았다. 부룬디가 세계 최빈국이었다. 부룬디가 내 '땅끝'이었다. 그래서 2020년에 '손사랑 브리지'로 외교부의 NGO 승인을 받고 애양원과 중동고(손양원 목사는 1919년 중동학교 입학 후 부친의 독립운동 주도로 학업을 중단하였으나, 2014년에 명예 졸업장이 수여됨) 신우회로부터 부룬디 한센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런데 현지에 도착하니 정작 부룬디 정부에서 한센인을 섬기는 활동을 금지했다. 먼저 30만 불(3억 원)을 부룬디 정부에 예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룬디 보사부 장관을 만나게 되어 손사랑 브리지의 비전을 이야기했다. 미국 선교사들에게 받았던 사랑의 빚을 한국 교회의 도움을 받아 부룬디 사람들을 도움으로 갚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그 진정성이 통하여 한센인 선교 독점 권한을 우리에게 주었다.
'낡은 천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애양원이 설립될 때 미국 선교사들이 압박 붕대를 요청하는 편지를 본국에 보내자, 기독교인들이 침대포를 가지고 압박붕대를 만들어 보내주며 애양원을 후원했었던 내용을 다룬 기사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한센인들을 미국 선교사들이 사랑으로 돌봐주었다. 우리도 이제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
유엔이나 대형 NGO들도 부룬디에서는 한센인들을 찾아가지 않는다. 그들이 듣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땅끝은 부룬디 같은 곳이다. 잊히고 버려진 사람들이다. 그곳은 의료의 땅끝, 교육의 땅끝이다. 교과서라는 것이 없다.
부룬디라는 나라를 보면 최빈국으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교과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가르치면 학생들은 노트에 적어서 공부를 하고 있어요. 안타깝죠. 미국에 뜻있는 분들이나 교회가 영어 책을 보내서 교육사업을 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들과 1:1로 제자 양육을 해도 되고 성경을 가르칠 수 있는 여러 사업이 있습니다.
부룬디는 내륙이어서 산 정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산을 올라가다가 폐차가 되기도 했다. 감사하게도 김영수/장인하 선교사 부부가 함께 협력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했을 때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만나를 받아먹었듯이 21세기의 부룬디에도 만나가 필요하다. 그들을 위해 21세기 만나 사역을 하고 있다. 한 가정에 한 달 5만 원씩 후원하면 된다.
한센인 가정과 한국 교회를 일대일로 자매결연 맺고 섬기는 사역을 시작했다. 현지 400여 가정에 매주 한 차례씩 쌀 5㎏과 콩, 팜유 등이 든 ‘만나키트’를 전달하려 한다. 가정당 한 달에 40달러(약 5만 원) 정도 드는 비용 마련이 시급하다.
“출애굽의 하나님 백성들이 만나의 기적으로 매일을 살아갔듯이 아직도 낙인과 차별 속에 일용할 양식을 고민하는 한센인 가족에게도 동일한 기적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땅끝에 있는 그들도 모두 하나님의 귀한 영혼입니다. 지구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이 아직 우리 주위에 있다는 걸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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