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녀가 아무리 속을 썩여도 엄마는 결코 그 엄마의 자리를 놓아버릴 수 없다. 그렇게 자녀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은혜다.
- 우리의 삶이 우연으로 보일지라도 우리는 결코 우연에 버려져 있지 않다. 하나님이 우리를 주인공으로 멋진 드라마를 지금 찍고 계신데, 정작 우리는 자기가 주인공인 줄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 우리의 삶이 과연 천국 가는 것이 전부이고 착하게 사는 것이 전부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삶을 통해 무엇을 하려 하시는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겁을 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편한 것을 위해 결코 타협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에게 신적 명예와 영광으로 가자고 하신다.
- 우리의 자녀 문제는 결코 자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인생 문제이다. 내 인생을 어디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되느냐의 문제다. 하나님이 다 책임지신다고 하신다. '너 거기서 손해 보지 않는다.'
자녀 때문에 애가 타는 부모님들께
어렵게 사는 자식 때문에 매일 애가 탑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려고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습니다.
우리는 대개 삶에 대하여 '증상'에 대해서만 질문을 하고 그 증상의 해소를 궁리할 뿐, '우리가 무슨 병에 걸렸는가?'라는 '본질'은 묻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를 믿으면 사는 것이 좀 나아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증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질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복을 내리신다는 것은 초월적 세계나 영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실'이라는 문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증거가 예수의 성육신이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현실의 육체 곧 자연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다. 성육신 즉 육체를 입고 오신 것이다.
우리는 그저 막연하게, 종교나 신앙이라는 것은 자연을 벗어나 '초월(超越)'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뜻밖에도 초월을 내용으로 삼되 그 초월은 육신 안에서, 역사 안에서, 눈에 보이는 형식과 형태 안에서 구체화(具體化)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예수님을 믿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기쁜 마음과 충일한 마음을 갖고 누가 보더라도 쓸모 있는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막연한 기대와는 다르게, 오히려 믿고 난 다음에 진짜 어려운 과정이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성장과 성화의 과정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자라나야 하는 것처럼, 부부가 결혼을 하면 동화 속 이야기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새로운 힘든 과정이 시작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둘이 서로 사랑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둘이서 이 어려운 현실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결혼한 두 사람은 서로 선호하는 것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박자가 달라서 부부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 어려움이 없으면 행복하리라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다 감수하고 포용하고 넘어서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부부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이유이다.
(엡 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 '부부의 연합'과 그 의미와 형편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서 매우 동일하다는 것이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받고 천국 간다'라는 것은 그저 간단한 각오와 확신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여러 ‘이건 아닌데…?’, ‘왜 이런 일이 있지?’라는 상황들이 오랜 기간 요구된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이후에도 삶의 어려움이 계속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자라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자라게 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현실의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겪는 기독교 신앙의 혼란과 어려움은, 현실 속에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신앙적으로 이해’ 하지 않고, '구원론 위주'로 신앙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급격한 부흥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수의 새 신자들을 양산해 내면서, '구원의 감동'이 우리 신앙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건네는 질문들이 ‘당신은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등이 주종을 이룬다.
실존적 신앙관
'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 나는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것이다.' 이런 식의 문답들을 ‘실존적 신앙관’이라고 한다. 즉, 내가 예수를 만났고 내가 죄인임을 알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알게 된 것, 또 구원의 은혜와 예수가 누군지를 알게 된 것을 ‘실존적 신앙관’이라 한다. ‘실존적’이라 함은 내가 이해하고 내가 알게 됐고 내가 항복했다는 내 경험, 내 확신이 그 고백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보면, 성경은 뜻밖으로 긴 역사 얘기를 한다. 구약을 읽으면서 늘 당황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은 그토록 간단하고 분명한 순종을 못하고 늘 반역을 하며 우상을 섬겨서 험한 꼴을 당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문을 가지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을 비난하고 '난 그렇게 안 할 거야'라고 결론을 맺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다 일까? 하나님이 구약의 역사를 펼쳐내시는 것은 '역사가 하나님 손 밖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역사는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 손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조작을 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일하고 있다'라는 뜻이다.
역사적 신앙관
구약은 창조로 시작되는데 곧바로 인간의 타락이 나온다. 그리고 약속이 나오고, 율법이 주어지고, 그다음에 예수님이 오신다. 실존적 신앙관은 '예수로부터 출발'하는데, 성경은 창조와 타락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스라엘의 긴 역사에 걸친 실패를 얘기한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실패의 이야기를 길게 하시는가, 왜 역사적 신앙관이 왜 필요한가?
어떤 종교든지 종교가 성립하려면 신(神)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신을 믿고 숭배하는 신자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들이 가지는 종교성은 '신을 항복시켜서 보상을 받겠다'가 최우선이 되는 종교 형태가 많다. 무속신앙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지성이면 감천!' 즉 신이 누구든 간에 내가 바치는 정성과 헌신에 감동을 해서 내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이 무속신앙이다. 이에서 더 나아가 이른바 고등종교로 가면,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고등 종교들에서 신은 최소한 '도덕성과 권력'을 가진다. 힘이 없으면 누가 신으로 받들겠는가? 도덕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지는 최상의 가치이다.
필요론적 신관 vs. 목적론적 신관
그런데, 이런 신들(성경에서는 대개 '우상'이라고 부르는데) 신이 계획을 갖거나 목적을 가지거나 방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그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그 요구를 들어주면 보상을 하겠다는 거래로서 신앙의 결과물이 이루어진다. 즉, 신이 목적과 내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신에게 온 신자가 목적을 갖고 오니까 그 신의 수준은 인간이 상상하는 최대치에 제약을 받는다. 그리고 신에게 보상을 받을 자격은 도덕성, 열심, 또는 (유치하지만) 주문 등이 된다. 주문을 외우면 신이 꼼짝 못 하고 들어줘야 되며 그 신은 인간이 가지지 않은 능력을 갖고 있을 뿐, 신 자신이 목적을 가지지 못한다.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반면에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겠다는 것보다는 '신이 계획을 갖고 있다', '신이 목적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다. 우리 신자들을 어디로 인지 데려가시겠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라'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꽃이 된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따라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는 '왜 내가 하나님을 믿어 드렸는데 내게 고작 고달픈 인생밖에 안 주세요?'라는 원망이 모든 시비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왜 내 자식이 말을 안 들어요?'
'이스라엘도 늘 내 말을 안 들었단다.'
'확 죽여버리시지... 어떻게 하셨어요?'
'어떻게 죽이냐? 내가 참았지.'
'그럼 그냥 버려두셨어요?'
'아니, 나는 이스라엘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단다. 정신 차리게 했단다. 나는 포기하지 않는단다.'
이것이 구약에서 일관되게 나오는 스토리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려고 이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려는 것일까? 사랑과 믿음의 상대란 무엇일까?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신, 하나님은 권력과 폭력으로 우리를 강요하거나 굴복시키는 신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의 상대가 되기를 요구하신다. 사랑과 믿음의 상대란 무엇일까? 거기에는 공포가 없다. 강요도 있을 수 없다. 사랑과 믿음은 언제나 서로가 대등해야 된다. 대등하려면 서로 지위의 차이가 없어야 된다. 말이 안 정도의 자유가 있어야 하며, 사랑과 믿음은 온전히 자발적이어야 된다. 상대를 내가 힘으로 굴복시키면, 강제로 굴복을 지키면 사랑과 믿음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다. 그 자유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선악과 얘기만 나오면 모두 다 '그런 건 왜 만들었어요?' '왜 안 말렸어요?'라며 불평을 한다.
또 '지금 우리 아이가 말을 전혀 안 들어요. 어떡하면 좋아요?'라며 한탄을 하는데, 왜 자녀들이 말을 듣지 않을까?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유를 주셨기 때문이다. 선택권을 주셨다. 자녀들에게 '난 싫어. 난 이해가 안 돼.'라고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창세기 서두에 나오는 선악과와 아담의 범죄 이야기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과실은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는 먹으면 안 된다, '먹으면 너 죽는다'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조작하거나 강제력으로 못 먹게 하지 않고, 그것은 오롯이 아담의 '선택'이었다.
우리와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맺기 위해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즉, 크는 것이다. 성장해 가는 것이다.
자발성과 판단과 선택을 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실력이라 함은 지혜, 안목, 분별 등인데 이런 것들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실패한 경험들이다. 제대로 하면 완성이 되는 것이니까.
신자의 인생이, 현실이 왜 고달픈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동참하여, 하나님과 믿음과 사랑의 연합체로서, 하나님이 지금 일하시는 모든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이 가지신 목적, '인류를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의 꽃이 되게 하겠다'는 일을 역사 속에서 하고 있는데,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로서, 여기로 보냄을 받은 셈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보내신 선지자이고, 내가 이곳에 예수님과 같은 임마누엘인 것이다. 세상이 예수를 핍박했듯이, 우리가 누군지를 못 알아보는 대접을 받으면서라도 '현실'에 있어야 한다.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것이니까.
그러면서 우리가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하나님이 무엇을 만드시려고 하는가를 배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자녀를 길러보면 내가 과거에 했던 그대로 하지 않는가? 우리가 '했던 말'을 하고, 우리가 '반항'했던 것을 한다. 왜? 아직 철이 없어서,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공부를 왜 해야 되는지, 왜 부모 말을 들어야 하는지, 자녀는 그렇게 못 알아듣는 과정을 겪어야 되고 그 겪는 과정을 부모가 견뎌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커보면 알게 돼.' '너, 나중에 장가가서 너 닮은 아들 하나 꼭 낳아라.' 그렇게 커 나갑니다. 내 과거가 어떻게 철이 없었고 인간이라는 게 어떤 수준, 내용, 존재로 만드시는 일을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하신다. '경우 속'에서 하신다. 이것이 기독교의 놀라운 점이다. 육체와 세상은 죄악된 것이고 '초월'이 거룩하고 완성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창조 세계는 내 작품이다. 너희도 내 작품이다. 너희의 존재는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하시며, 신(神)이 초월의 내용을 육체에 넣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담았고 우리에게 담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가지거나 지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 즉, 로마서 8장의 표현대로 하면 (롬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게 된다. 고난은 우리를 키우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멋대로 우리의 상상으로 타협하는 것, 만족하는 것을 깨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참으셨고 그래서 어디까지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가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자식이 말을 안 듣는가? 부모 노릇 톡톡히 해야 한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한 사람을 성인으로 만들려면 이런 과정을 겪어야 하고 자신의 한계와 우리가 만드는 못난 것과 대비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 만들려고 하는가)에 대한 감탄이 나오게 된다.
어디까지 자라야 하는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서 '예수를 봐라!'라고 하는 것은, 예수로 우리를 '구원'했다는 의미를 넘어, '너희를 다 이렇게 만들겠다.'이다. '여기까지 만들겠다. 그러니까 여기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자녀에게도 예수님처럼 이렇게 해야 한다. '적당히 하고 오늘은 이만 자자.' 그렇게 하고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버지여, 저 자식을 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하며,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것은 부모에게도 훈련이고 자식에게도 훈련이며, 자식이 성장해 나갈 것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 (엡 1:3~6)에서 말씀하셨듯이 다 하나님의 의지, 열심, 하나님의 고집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내가 하나님인 걸 증명하겠다, 너희들의 행복을 받아내겠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가 치성을 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보상을 해줘야 해요.'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도덕'이 된다. '저는 열심히 기도했어요. 저는 착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이게 뭐예요?' 라고 원망한다. 그러나 착하고 열심인 것은 초등학생 때까지 유효한 것이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열심이 있고... 그 다음은 무엇인가? 자기의 소원과 진심이 다 되는 세상에 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가 커야 한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이 나라는 존재를 작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는 것이 세상이라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다. 내가 작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제한이 있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두고, '주님, 사탄의 가시를 빼 주세요.'하고 기도하지만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즉, 하나님은 '이 일로 내게 더 이상 기도하지 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응답하셨지만,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다 각자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위인도 아니고 중요하지도 않은 자리에서 예수님이 겪은 것과 동일한 것을 겪는다. '너같은 것은 왜 있어?' 그리고 다 나한테 덤터기 씌우고 거짓말하고 밀어버리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우리는 점점 악(惡)해진다. '생존경쟁에서 이겨야 된다. 승자 독식이다.' 등 언제나 winner가 되어야 한다고 배우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얘기한다. '너 그렇게 까지 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너 지고 살아라. 괜찮다. 내가 여기서 '부활과 영생'을 증언하겠다.' 그렇게 성경은 말씀하시고, 그를 위해서 우리는 평생 실패를 하는 것이다. (롬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왜 이런 약속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이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다 형통했으면 이런 말이 왜 나왔겠는가? 자녀에게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그 말은 하지 말고, 그냥 웃어라. '얘야, 오늘은 그만 고집부려라. 오늘은 타협하자. 그리고 내일은 또 내일 보자.' 그렇게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한 번에 자녀가 완전히 뒤집어져서 변하지 않는다.
점차 누적이 되어 나이 들어보면 다 잊었던 옛날이 다 생각이 난다. 참 신기하게도 그런 일들이 자신을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때 못났다고 생각했고 실패라고 생각했고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서 인정받고 웃어 줄 수 있고 한 수 접어줄 수 있고 반가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자식 문제가 아니라 인생 문제인 것이다. 인생을 어디까지 내가 책임을 져야 되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다 책임 진다고 하신다. '너 거기서 손해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식이 그러는데도 불구하고 엄마의 자리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녀를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이 은혜다. 포기하면 망하는 것이다. 영화 찍다 말고 그만두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하나 그만 두었는데 드라마 하나가 모두 망치게 된다. 하나님이 멋진 드라마를 지금 찍고 있으며 본인과 자기 아들이 주인공인 것을 모르고 힘들어서 둘 다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 영화는 망치고 상영할 수 없게 된다.
영화 벤허의 메시지
영화 벤허가 있다. 친구 메살라의 배신으로 유대인 최고 귀족에서 노예 신세가 된 벤허의 복수와 용서,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벤허 영화에서 잘 알려진 최고의 장면은 압도적인 '전차 경주'하는 것이다. 대개 그 부분을 보기 위해 벤허 영화를 보러 간다. 친구 메살라의 배신으로 주인공 벤허가 억울해지면서 관객들은 모두 메살라를 미워하게 되고, '메살라가 언제 응징을 받을까, 언제 죽을까? 벤허가 어떻게 돌아와서 메살라에게 복수하나?'를 기대하며 영화를 보는데, 마침내 메살라가 죽고 벤허가 복수에 성공했는데도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메살라를 죽이는 것으로 벤허 영화를 보면, 메살라는 나쁜 인물이고 벤허는 좋은 인물로 둘이 나뉜다. 그러나 영화의 나중을 보면, 벤허가 복수를 했는데도 마음의 평화가 오지 않고 보상이 되지 않아서 절절매게 된다. 어쩔 줄을 모르니까 부인이 이제 그만 잊으라고 그랬는데도 벤허가 잊지 못하니까, 아주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당신이 메살라 같아요.' 굉장한 발언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을 구하러 나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그 굴에 가서, 어머니와 누이를 데리고 나왔다가,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렇게 얘기한다. '그 말씀이 내 가슴의 칼을 놓게 했어.(I felt His voice take the sword out of my hand.)'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 영화는 이 메시지를 위해 보는 것이다. '복수로는 얻을 것이 없다. 폭력은 가치가 없다. 예수 안에만 가치 있는 것이 있고 인간의 존엄함이 있다.'가 본론이다. 이 본론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나면 메살라가 '나쁜 인물이야'가 아니고 '연기 잘했어!'가 된다. 우리는 계속 '저 사람은 착한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이렇게 보고 있을 뿐, 각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보지 않는다. 우리의 지금 눈으로는 내가 속해 있는 영화가 안 보이는 것이다.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려 하지 말고,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해하라.
(롬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20~21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는 자꾸 '선으로 악을 이기라'를 '선한 행동을 해서 악을 감동시키라'로 이해를 하지만 그것을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악당이 악당 노릇 하듯이, 너는 예수 믿는 사람이 됐으니 너는 선한 내 자리를 지키라'는 뜻이다. 악당이 하는 일에 대해 굳이 다가가서 나무라지 말라는 것이다. 영화 찍다 말고 벤허 역의 찰턴 헤스턴이 메살라한테 가서 '너는 왜 이렇게 맘낮 미운 소리만 하냐?'라고 할 필요가 없다. 메살라는 자기 대사를 하고, 벤허도 자기 대사를 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는 '악당들을 다 없애 주시옵소서'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악을 제거하면 천국이 오는 것이 아니라, 역사라는 드라마가 인류를 하나님의 목적으로 이렇게 데려오는 것이다. 그것을 나중에 승리와 찬송과 영광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것을 종말이라고 한다. 그 속에서 나는 '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렇게 기승전결이 있는 드라마 속에, 하나님이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클 고힌은 '성경은 드라마다(The Drama of Scripture)'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성경은 명분과 결론들을 나열한 책이 아니다. 사전 같은 책이 아니라 문학 작품이다. 스토리가 있는 것이다. 그 스토리를 못 읽으니까 사람들이 몇몇 단어를 빼내어 '너 정직해야 돼. 너 신실해야 돼.' 등의 말만 한다. 이것은 기독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천국 가는 것이 전부이고 착하게 사는 것이 전부라고 말할 뿐, 하나님이 무엇을 하자고 하시는지를 알고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다.
자녀들이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어떻게 기도했는가?
그때는 기도도 안 나온다. 그때는 그냥 분을 삭이고 잔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겁을 낸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편한 것으로는 하나님이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신적 명예와 영광에 가자시는 것이다. 그냥 여기서 놀자는 것이 아니다. 여럿이 등산을 가면 꼭 '굳이 꼭대기까지 가야 하나? 여기서 그냥 밥 먹고 내려가자.'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등산은 그렇게 가도 되겠으나,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유독 더 성숙할 분량이 많아서 이렇게 고통의 분량도, 어려움의 분량도 많은 것일까?
그렇다.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다. 즉, 교육이 부족해서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고급 과정의 공부를 시키는 것이다. 초등학교 마치고 끝인 분도 있고, 대학까지 가야 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다 명예로 아는데, 신앙에서는 그것을 다 고통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 고통을 많이 당하는 것을 명예로 생각해야 하는가?
필수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다. 우리는 결코 우연이라는 데 버려져 있지 않다. 그러니까 잘 해야 한다. 늠름해야 된다. 실력보다 더 늠름하게 자식을 대해야 한다. '엄마가 있잖아? 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두 몫해. 애 볼 때 울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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