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의 대표적인 저서에 <순전한 기독교>가 있다. 이 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깔끔하게 풀어간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
<순전한 기독교>의 "고집 센 장난감 병정들"부분에서 루이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인류 전체에 끼친 효력이란 '창조된 존재'에서 '태어난 존재'로 변화되는 일, 일시적인 생물학적 생명에서 시간을 초월한 영적 생명으로 바뀌는 일이다. 인류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마치 고집 센 장난감 양철 병정이 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기적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생물학적인 생명에서 영적인 생명으로 옮겨가는-을 이미 이루셨으므로 우리가 애쓸 필요가 없으며, 우리가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신다. (거룩한 전염) 그러나 문제는 그 일이 우리 인간의 자유의지와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 자아(自我)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자아(自我)로 새롭게 옷 입는 것인데 인간은 대개 자신의 자아를 그리스도에게 전부 내어 맡기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을 맞아들이면 주님은 그때부터 그의 전부를 원하신다. 그의 시간이나 돈, 그밖에 그의 어느 일정 부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를 원하신다. 사람이 그분에게 자신을 맡기는 순간, 그분의 목적은 그를 온전한 사람(작은 그리스도)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그것을 거부하고 물러서지 않는 이상, 주님은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떤 고통의 대가를 치르든지 상관없이 그 일을 밀어붙이신다. 우리가 온전하여질 때까지 주님은 결코 쉬지 않으신다. 주님은 적당한 선에서 멈추시거나 미봉책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을 기뻐하셨듯이 우리를 기뻐하실 때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친절하게 일으켜 주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온전함" 근처에도 못 간다는 사실을 잘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는 "절대적인 온전함"이다.
주님과 같이 온전해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목적이다. 우리는 보통 골칫거리였던 몇 가지 죄를 주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시고 나면 이제 자기가 꽤 선량해졌으며 영적으로 성숙한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자신이 원했던 수준에 도달했으니 이제 주님의 더 이상의 간섭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마치 "저는 성인(聖人)까지 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양심적인 보통사람으로 만족합니다." 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치명적인 오해다.
그리스도인은 새사람이지 단순히 호감을 주는 괜찮은 사람이 아니다.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이유는 우리를 완전히 새사람(하나님의 아들)으로 만드시기 위함이지 단순히 옛사람을 좀 더 낫게 개선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말(馬)에게 좀 더 빨리 달리기를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하늘로 날아오르게 날개를 달아 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그분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야 하며 그분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조지 맥도널드」의 비유
여러분 자신이 살아있는 집이라고 상상하십시오. 주님이 오셔서 그 집을 다시 지으려 하십니다. 처음에는 그분이 하는 일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분은 냄새나는 하수구를 고치고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치십니다. 그런 것들은 당장 필요한 것이므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그분은 집을 사정없이 때려 부수기 시작합니다. 엄청나게 아플 뿐만 아니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그분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집을 짓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보기 좋은 오두막을 상상했는데 그분은 놀랍게도 궁전을 짓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친히 그 궁전에 살 작정이십니다!
그 일을 주님께서 완성하신다. 우리가 그 일을 주님께 맡기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아무리 연약하고 더러운 인간이라도,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능력과 기쁨과 지혜와 사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불멸의 존재로 만드실 것이다. 그 과정은 매우 길며 부분적으로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겠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수준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말씀을 '네가 온전해지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겠다'로 오해하면 안 된다.
'내가 유일하게 도울 일은 너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는 그 이하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하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절대적인 온전함에 못 미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의무를 위해 우리가 시도하는 미미하고 서투른 노력을 아주 기뻐하신다. '어린 아들이 첫걸음을 떼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아버지는 없다.' 즉,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는 쉽지만,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온전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이다.
우리가 그분에게 자신을 양도하는-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만큼 온전하여질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온전함이 결코 완성되지 못할 것이다.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과정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 어디까지 변하느냐는 그리스도인들마다 각기 다르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개선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을 만들기 위해 오신 것이다.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늘 그렇듯이 타락하고 불경스러운 상황에 만족하면서 다음날 있을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이나 오늘 나의 허영심을 채워 준 소소한 일, 휴일이나 새로운 책에 빠져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심각한 병일지도 모르는 복부의 갑작스러운 통증이나 우리가 전부 전멸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는 신문기사가 등장하여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 버립니다. 저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저의 작은 행복들은 마치 부서진 장난감처럼 흩어집니다. 저는 서서히 이런 장난감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되며 나의 행복은 다른 세상에 있고 내 유일한 진짜 보배는 그리스도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나 이틀 정도는 그분을 의식적으로 의지하며 올바른 원천에서 힘을 끌어오는 피조물로 삽니다. 그러나 위협이 물러나는 순간, 저는 대번에 그 장난감들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하나님은 고작 48시간 동안만 저를 소유하신 것이며 그나마 그것도 다른 모든 좋은 것들을 제게서 빼앗으심으로써 겨우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금세 싫어하는 목욕을 끝낸 강아지 꼴이 되어버립니다. 몸을 마구 흔들어 털을 말린 다음, 예전처럼 지저분해지고 싶어 가까운 거름더미로 내빼거나 그게 안되면 가까운 꽃밭으로라도 내빼 버리지요.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이 그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스펄젼」은 '아무리 위대해 보이는 그리스도인도 사실은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얘기했다. 루이스는 시편을 강해에서, '선생에게 배우기보다 또래 친구들과의 공부에서 학습효과가 월등하다'라고 했다.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가 필요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모든 것이 시간 낭비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비추어 주는 거울, 또는 그리스도를 전해 주는 '운반인'입니다. 때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역할을 할 때도 있지요. 자신은 '좋은 전염'을 경험하지 못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옮겨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비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개는 그리스도를 아는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그분을 전해 주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교회, 즉 서로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인 전체가 그토록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 두 명이 함께 그리스도를 따를 때, 기독교는 그들이 각자 따로 있을 때보다 두 배로 커지는 것이 아니라 열여섯 배로 커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아기가 처음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는 젖 주는 사람이 어머니인 줄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도 처음 사람의 도움을 받을 때에는 그 뒤에 계신 그리스도를 못 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아기로 머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도움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수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안된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을 의지하게 될 테니까요. 사람을 의지하면 곧 실망하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실수를 합니다. 그리고 다 죽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도와준 이들에게 감사해야 하며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에게도 절대로, 절대로 믿음 전체를 걸진 마십시오. 설령 그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게는 하지 마십시오. 모래를 가지고 할 수 있는 멋진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집을 짓는 일만큼은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어떻게 고를까?
여러 이유로 교회를 옮겨야 할 때가 있다. 이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하는가?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이곳의 예배 스타일을 내가 좋아하는가?'가 아니라 '이 교리들은 참된가? 여기에 거룩이 있는가? 내 양심이 이쪽으로 나를 움직이고 있는가? 이 문을 두드리기를 꺼리는 것은 내 교만이나 단순한 취향 때문이거나, 특정 문지기를 개인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은 아닌가?' 등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방을 찾게 되었다면, 다른 방을 택한 사람이나 여전히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어라.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신학은 왜 필요한가?
신학은 지도이다.
어느 신앙 강연에서 한 나이 든 장교가 일어나서 얘기했다. '나는 신앙인이고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있어요. 그분을 느끼기도 했지요. 어느 날 밤, 혼자 사막에 있을 때 정말 신비한 채임을 했어요. 따라서 그 교리와 공식들을 믿지 않아요. 진짜를 경험하고 나니, 그런 것들은 모두 사소하고 현학적이며 실제적이지 못한 말들로 들릴 뿐입니다." (순모임에서 만났던 어떤 분도 이런 주장을 한 후, 순모임에 나오지 않았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한 루이스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저도 어떤 점에서는 그 장교의 말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가 사막에서 정말 하나님을 경험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이 기독교의 신조들을 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실제 세계가 덜 실제적인 세계로 바뀌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해변에서 진짜 대서양을 본 사람이 집에 돌아와 대서양 지도를 볼 때 실제 세계가 덜 실제적인 세계로 바뀌듯이, 눈앞에서 넘실대던 파도가 한낱 색칠한 종이 조각으로 바뀌듯이 말이지요. (이 내용도 공감이 된다. 해외 출장을 다녀온 후 구글 맵에서 그 장소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거리 뷰로 살펴보기도 하는데, 그 생생함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지도가 색칠한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여러분이 지도에 관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도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진짜 대서양을 향해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지도의 이면에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 당신의 경험 못지않게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경험은 바다를 고작 한 번 흘낏 본 것이 전부지만, 지도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어딘가 가고자 할 때는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을 거니는 데 만족한다면 지도를 보느니 해변에서 직접 바다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고 싶다면 해변을 거니는 것보다는 지도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데서만 멈춘다면, 그 장교의 사막 경험보다 생생하지도 않고 흥미롭지도 못할 것입니다. 교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일종의 지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지도는 정말 하나님을 만났던 수백 명의 경험-여기에 비하면 여러분과 제가 혼자 경험하는 흥분이나 경건한 감정들은 아주 초보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더 먼 곳에 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도를 써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막에서 그 장교에게 일어난 일은 분명 흥미진진한 실제 경험이긴 하지만 열매는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야 말로 막연한 종교-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는 식의 것들-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이유입니다. 그런 종교에는 흥분만 있을 뿐 결과가 없습니다. 해변에서 파도를 구경할 때처럼 말이지요.
그런 식으로 대서양을 연구한다고 해서 뉴펀들랜드에 갈 수 없는 것처럼, 꽃이나 음악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만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 가 보지 않고 지도만 들여다본다고 해서 어디에 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 없이 무조건 바다에 나가는 것 또한 그리 안전한 일은 못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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