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자렛 생활을 떠나서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본 적도, 그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예수의 얼굴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제까지의 무수한 종교화에 묘사된 예수의 얼굴에는 일정한 형태-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 곱슬곱슬한 수염, 광대뼈가 약간 튀어나오고 야윈 모습-가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토대로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비애나 기원, 그 시대의 고뇌나 염원을 담아 예수의 얼굴을 그렸다.
하지만 초대교회 시절, 예수의 얼굴은 이런 형태로 묘사되지 않았다. 성스러운 사람의 얼굴은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외경심과 겸허함에서 예수의 용모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를 피하고 물고기라든가 어린양, 밀 이삭, 포도 덩굴과 같은 상징을 사용하여 ‘그들의 왕’을 표현했던 것이다. 카타콤(Catacomb) 시대가 되어 예수는 현재의 많은 예수 상(像)과는 달리 그리스 풍(風)의 젊은이의 모습으로, 수염이 없는 청년의 얼굴로 묘사되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5세기 이후 비잔틴 미술의 영향으로 현재 우리가 대하는 예수 얼굴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그 그림들을 통해 인류 문화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순수하고, 가장 성스러운 인간의 면모를 어떻게 표현해 왔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예수의 실제 모습이나 얼굴은 그와 함께 살았던 사람, 예수와 마주친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 예수의 생애를 전하는 성서조차 전혀라고 해도 될 만큼 그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를 읽을 때 우리가 예수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그를 알던 사람들이 평생 그를 잊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가 예수의 외모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그것을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유다교에서는 신(神)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은 ‘키가 크고 신체가 강건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어, 이 규정에서 벗어난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냉대받고 비판받는 관례가 있었다고 스타우퍼(E. Stauffer)는 기록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가 외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내용이 성서에 쓰여 있지 않은 이상, 예수는 그 당시의 유다인으로서는 보통의 신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대의 팔레스티나 유다인과 마찬가지로, 그 또한 검은 머리는 한가운데에 가르마를 타서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극히 평범한 용모, 극히 평범한 수염과 머리카락, 그리고 자기 제자들에게 ‘평범한 신발과 속옷 한 벌’밖에 몸에 지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마르코 복음서의 내용으로 보아, 약간 초라한 차림, 이것이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예수의 외모인 것이다.
예수, 전에 가톨릭에서는 ‘예즈스’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 발음으로는 ‘예수스’, 히브리어로는 ‘예호수아’나 ‘여호수아’라는 이 이름 또한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었다. 로마 시대에『유다 고대사』를 쓴 유다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에 의하면, 당시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예수는 그 짧은 생애 동안 외모에 있어서나 결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인물이었고, 삶을 영위하는 보통의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한복음서 8장57절을 보면, 사람들은 30대의 예수를 보고 “쉰 살도 못 되었는데”라고 말한다.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아마도 예수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던 듯하다. 이는 그가 고뇌의 빛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 고뇌의 빛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머지않아 예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짊어질 터인데, 그것이 나자렛의 목수 생활 가운데 이미 시작된 것일까?
예수가 성장한 갈릴래아의 나자렛 마을. 오늘날 이곳은 관광객이나 장사꾼들로 인해 소란스러운데, 올리브 밭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소나무가 자라는 언덕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 곳곳에서는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구걸하는 맨발의 어린아이들, 관광객에게 손을 내미는 맹인이나 절름발이, 구정물로 더렵혀진 비탈길 양쪽에는 어둡고 작은 집들과 가게가 늘어서 있다. 요한복음서에는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46)라고 한 당시 사람들의 말이 쓰여 있다. 예수 당시 이곳은 유다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고, 사람들의 생활은 지금보다도 훨씬 궁핍했다. 서민들의 집은 창도 하나 없는 흰 벽의 움막 같은 것으로, 오늘날 나자렛에는 당시의 그러한 집이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예수가 어떤 집에 살았는지 상상할 수 있다.
양부(養父) 요셉은 목수였기 때문에 예수 또한 그 일을 익혔다. 당시 유다인들은 자신의 직업을 알리는 물건-가령 염색 기술자는 색이 있는 천, 공증인은 깃털 펜-을 몸에 지니는 습관이 있었다. 때문에 그 당시의 예수도 목수임을 알리는 나뭇조각을 몸 어딘가에 지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수라고 하지만 그가 한 일은 건물이나 집을 짓는 일이 아니라 가구 등을 만드는 일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고, 더욱이 갈릴래아의 많은 목수가 떠돌이 노동자였기 때문에 그 또한 일정한 작업실을 기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자렛이나 그 주변을 떠돌아다니며 일을 했을 것이다. 가난이라든가 생활고, 노동의 땀내를 예수가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는 것은 성서에 나오는 그의 비유를 읽어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을 찾기 위해 온 집 안을 뒤지는 여자의 이야기가 어쩌면 그의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었는지도 모르고 밀가루 서 말 속에 누룩을 넣는 여자의 이야기는 어머니 마리아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양부 요셉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해서 오랜 전승에는 예수가 19세였을 때라고 되어 있지만, 성서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다. 예수가 나자렛에서 생활하던 중에 양부 요셉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면 그 후에는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를 부양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형제가 몇 명이었는지도 불분명하다. 프로테스탄트 학자들 가운데는 마태복음서 13장 55절이나 마르코복음서 6장 3절의 내용을 근거로 그에게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 네 형제와 여러 자매가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예수에게는 형제가 없고 마태오나 마르코가 진술하는 형제(아츠하)나 자매(아호츠트)라는 말은 중근동(中近東)의 습관으로 볼 때 사촌들은 가리키는 것이라고 가톨릭 측에서는 생각하고 있다. 이는 히브리어에는 ‘사촌’을 가리키는 정확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예수는 30세까지는 이러한 많은 친지들과 거의 공동생활에 가까운 일상생활을 하면서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해 노동을 했다.
떠돌이 노동자로서 그가 본 것은 생활고와 빈곤만은 아니었다. 성서에는 비참한 불구자나 병자가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은 나자렛이나 그 주변 곳곳에 살고 있었다. 이 지역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기 때문에 옛날부터 동풍이 부는 계절에는 폐렴으로 죽는 이가 많았다. 때때로 이질도 발생하고, 특히 갈릴래아 호수와 요르단 강 근처에는 말라리아가 유행한다. 성서에 나오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나 ‘열병 환자’란 이 말라리아 환자를 말하는 것이리라.
여름에는 먼지와 강렬한 자외선 때문에 눈병을 앓는 환자도 많았다. 성서에는 ‘나환자’도 등장하는데, 이 나환자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무리 지어 살아야 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신(神)의 벌을 받는 부정(不淨)한 자라고 해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나중에 예수는 갈릴래아의 산에서 사람들에게 이 말을 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생생하게 진술한 이 말과 나자렛의 비참한 현실과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가난한 이에게 하느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다. 병으로 우는 이에게 하느님은 위로를 베풀지 않고 계시다. 하느님은 이러한 버려진 이들의 비참함에 침묵을 지키고 계시는 것인가? 아니면 겉으로는 비참하게 보이는 그 이면에 헤아릴 수 없는 수수께끼가 감추어져 있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의문이 나자렛 시절 예수의 마음속에 생겼으리라 확신한다. 불행한 이들의 슬픔에 동참하려는 그의 모습을 성서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하혈병(下血病)으로 고생하던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그를 만졌을 때, 예수는 그녀의 삶을 지배하고 있던 불행을 느꼈다. 슬퍼하는 이는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가르침에는 그가 하느님께 구하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 나자렛 목수 시절에 예수는 이미 이 기도와 현실과의 격차를 누구보다도 잘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용모는 사촌들보다 늙어 보였고 때때로 고뇌의 빛을 띠었을 것이다. 떠돌이 노동자로서 나자렛이나 그 근방을 다니면서 예수는 내적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자렛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갈릴래아 호숫가의 겨울 휴양지인 티베리아에는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별장이 있었고, 부유한 계층이 생활하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예수 일행의 생활과는 거리가 먼 로마식의 생활 습관이 배어 있었다.
로마제국이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있었을 때, 갈릴래아와 요르단강 동부 지역은 로마 황제로부터 그 지위를 인정받은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지배하에 있었다. 로마는 시리아에는 총독, 유다 지역에는 지사(知事)를 파견하여 이 식민지를 나누어 다스리고 있는 분봉왕(分封王)들을 감시하게 하고, 분봉왕들이 로마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한 영지(領地) 내의 경제권과 통치권, 그리고 사병(私兵) 소유권을 인정했던 것이다.
갈릴래아의 지배자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아버지인 헤로데 대왕은 한편으로는 로마 황제를 추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의 종교 감정이나 자존심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약삭빠르게 처신했는데, 그의 아들 안티파스도 헤로데 대왕 이상으로 로마 황제에게 아첨하며 그 지위를 지켜 갔다. 그가 베레아를 개조하여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의 이름을 본 따 율리아라고 명명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후임으로 티베리우스 황제가 즉위하자 갈릴래아 서안(西岸)에 로마 풍(風)의 도시를 세우고 티베리아라고 부른 것도 그 때문이다.
갈릴래아 주민들은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로마 영합주의를 결코 반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적의와 불만의 눈으로 로마에 대한 타협과 추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갈릴래아에는 여러 주민이 섞여 살고 있었는데, 독실한 유다교 신봉자이며 배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던 그들은 유다교를 타락시키는 로마의 풍습이나 종교를 업신여겼고, 때때로 그 감정은 반로마 행동으로 나타났다. 갈릴래아가 열심당(熱心黨, Zealot)이라고 불린 반로마 무장 세력의 온상지가 된 것도 이러한 감정의 결과이다. 따라서 유다에 파견된 로마 지사는 매년 과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갈릴래아 순례자들의 폭동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나자렛에서 자라난 예수가 갈릴래아인의 전통적인 감정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는지에 대해 성서는 명백하게 기술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심문 장면을 통해 안티파스 왕과 예수 사이에서 그리스 로마 풍습에 물든 자와 정통 갈릴래아인의 대립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예수가 안티파스 왕이 세운 도시를 늘 피해 다녔다는 것을, 희미하지만 성서의 기술(記述)로부터 느낄 수 있다.
나자렛의 목수에 지나지 않은 예수에게 티베리아의 부유층들의 생활은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헤로데 안티파스 왕을 포함하여 이들 계층에 스며든 그리스 로마적인 풍습이나 사고방식과도 거리가 멀었다. “예수의 사상 속에는 그리스적인 생활양식에 영향을 받은 흔적은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라는 보른캄(G. Bornkamm)의 주장은 이런 점에서 옳은 것이다.
헤로데 안티파스 왕과 부유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갈릴래아인 가운데는 로마제국과 타협하여 그 권위를 유지하던 예루살렘의 사제 계층에 대해 불만을 지닌 자도 많았다. 예루살렘의 사제 계층이 유다교의 순수함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마음속에 이러한 갈릴래아인의 감정이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었는지는 나중에 언급할 것이다.
갈릴래아의 서민들은 다른 유다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그들의 생활과 정신의 규범인 율법(토라)을 들으며 자라, 소년이 되면 유다교 회당(Synagogue)에서 어른들과 목소리를 맞추어 예언서나 시편을 읽는다. 이 나자렛 생활 중에 예수는 서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삶에 배어 있는 생활고, 비참함, 가난을 경험하는 한편, 다른 이들과 함께 회당에서 구약의 여러 가지 글을 읽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는 나자렛에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젊은 목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름도 흔한 이름이고, 그 생활도 다른 이들과 다름없는 드러나지 않는 생활을 했다. 단지 그의 용모는 나이보다 늙어 보였으며, 그의 눈에는 때때로 고뇌의 빛이 떠오르는 일이 있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잠재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던 듯하다.…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15년, 성도 예루살렘 남쪽의 황량하게 펼쳐진 유다 광야에 털옷을 걸치고 가죽 띠를 두른 격정적인 예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세례자 요한이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그는 예루살렘의 남서쪽 7㎞에 위치한 아인 카림 출생으로 사제 계급인 레위족에 속했는데, 청년이 되자 유다 광야로 나가 은둔 생활을 하였다.
오랜 세월 동안 유다인들은 예언자가 나타날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 예언자란 글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자라는 의미로 미래를 예언하는 자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시의 유다인의 종교 감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방인 치하의 오랜 세월 동안 굴욕과 실의와 좌절 속에서 끈질기게 매달린 하느님 야훼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라든가, 그 야훼가 언젠가 자신들에게 보내줄 구세주 메시아에 대한 갈망은 모든 성서 해설서에 쓰여 있지만, 오늘날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들의 국토는 작았다. 그 작은 국토는 페르시아에 의한 지배를 시작으로 그리스, 이집트, 시리아, 파르티아, 그리고 로마로 이어져 거의 5백년 이상 외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 지배하의 구속과 제약 속에서 유다인들은 두 가지만은 끝까지 지켰다. 하나는 그들의 종교인 하느님 야훼에 대한 신앙이고, 또 하나는 야훼가 언젠가는 옛날의 다윗 왕과 같은 민족적인 구세주를 보내 유다 국토와 영예를 회복시켜 주리라는 절대에 가까운 희망이다. 그들의 야훼에 대한 일신적(一神的)인 신앙은 이방인과 정복자들의 범신론적(汎神論的)인 종교로 인해 이따금 위협당해 왔지만, 그때마다 이에 항거하는 예언자와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 의해 지켜졌다. 예언자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위탁받은 자라는 의미로, 그들은 이방인들의 종교나 풍습에 물들기 시작한 유다인들을 경고하고 하느님의 분노와 벌을 전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그 때문에 그들은 권력자들에게 박해를 받아야 했다. 또한 예언자들은 유다의 영광과 영예가 회복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설파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하느님 나라는 출현하지 않았고, 유다인들은 이방인의 치하에서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간절한 희망과 기대는 예수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주여! 당신의 종들이 받은 모욕을 잊지 마소서. 그 이방인들의 모욕들이 마음속에 사무칩니다. 야훼여, 이토록 당신의 원수들이 모욕하였습니다. 기름 부으신 자를 따라다니며 모욕하였습니다.”(시편 89,50-51)라는 애절한 비탄에는 이방인 치하의 그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티베리우스 황제 15년, 사해와 요르단 강 하류 사이에 낀 황량한 유다 광야에 고대하던 예언자 요한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유다인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갔음에 틀림없다. 소문을 들은 그들은 자신들이 익히 들어온 이사야서의 다음 구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그 말 그대로 요한은 광야에 모습을 드러내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날이 가까우니 회개하라고 외치는 요한의 목소리는 예루살렘은 물론, 갈릴래아의 시골 마을인 나자렛에도 전해졌다. 이 외침은 독실한 유다교 신자이며 배타적인 성향을 지닌 갈릴래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로마의 풍습이나 종교가 매일같이 자신들의 세계에 스며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티베리아나 율리아 같은 도시에는 로마풍의 신전과 건물이 세워지고,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는 로마에 아부하며 추종하고 있었다.-그리고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성전을 맡고 있는 사제 계급들도 로마인들과 타협하고 있었다. 그들의 긍지는 내부로부터 위협받고, 그들의 종교는 내부로부터 썩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갈릴래아 서민들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의 경고는 그들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의 어부들 가운데서도 이 예언자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유다 광야까지 찾아가는 이가 생겨났다. 그들은 요르단 강에서 요한이 모여 오는 이들에게 세례라고 부르는 특이한 의식을 행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자렛의 예수가 일과 가정을 떠나 이 요한 공동체에 들어가려고 생각했던 것은 서기 28년 1월쯤일 것이다. 예수가 이때 몇 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루가복음서 3장 23절에는 “서른 살가량이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구약의 “다윗이 왕이 된 것은 30세였다”라든가 “에제키엘이 예언자로서 소명을 받은 것은 30세였다”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대 유다인에게 있어 이 나이는 이상적(理想的)인 나이로 생각되었으므로, 루가도 이런 의미로 예수의 나이를 서른 살이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이때 예수의 나이가 30세에서 40세 사이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성서에는 예수가 나자렛을 떠나고자 결심했을 때 자신의 사명을 어느 정도 자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그러나 그가 나자렛 생활을 떠날 결심을 한 것은 예언자 요한의 설교에서 마음이 끌리는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예루살렘의 사제 계급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신봉하는 유다교를 못마땅해 했고, 또한 뭔가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적 갈등 때문에 그는 어머니와 사촌들을 뿌리치고 떠날 결심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결심이 가족들, 특히 사촌들의 동의를 얻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한창 일할 예수가 빠진다는 것은 매정한 일이었다. 어머니 마리아는 물론 사촌인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도 예수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친지들이 예수의 눈에 이따금 떠오르는 고뇌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없었던 것도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마르코복음서 3장 21절이나 요한복음서 7장 5절에는 사촌들이 오랫동안 예수를 경멸했다고 명백하게 쓰여 있다. 변변치는 못하지만 갑자기 견실한 나자렛 생활을 떠나 황량한 유다 광야로 가려고 하는 예수가 그들의 눈에는 무책임한 현실 도피자로 비쳤는지도 모른다.
▒ 사해근처
기원 후 28년 1월, 나자렛의 목수 예수가 예언자 요한을 찾아가기 위해 지나간 요르단 강 지역은 현재 키부츠의 경작지와 과수원으로 가꾸어져 있는데, 그 경작지가 끝나면 잿빛의 황량한 땅이 나타난다. 강한 햇살을 받으며 차를 몰고 가다 보면, 굽이굽이 이어지는 둥근 모양의 언덕들과 바닥이 쩍쩍 갈라진 땅이 널려 있을 뿐이다. 요르단의 불모의 계곡을 따라가면 이윽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의 하나인 예리고에 다다른다. 그리고 샘과 종려나무가 풍부한 예리고를 지나면 거기서부터는 갈색의 광야와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없는 산성화(酸性化)된 산이 펼쳐지면서 유다 광야가 시작된다.
이 삭막한 요르단 계곡을 따라 목수 예수는 혼자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고독하게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지낼 유다 광야가 어떤 곳이진 알고 있었다. 그곳은 땅의 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으로, 산성화 된 살벌한 풍경의 민둥산이 지평선에 늘어서 있고 관목과 가시나무가 여기저기 자라 있을 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갈색의 광야가 사해(死海)까지 펼쳐져 있다.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사해는 모압 산의 모습을 수면에 비춘 채 영원히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민둥산과 민둥산 사이에는 깎아지른 듯한 단애(斷崖)가 있고, 물이 말라 버린 ‘와디’라는 강의 흔적이 뻗어 있다.
여름이 되면 그곳에는 끔찍한 더위가 찾아온다. 밤이 되면 모든 것은 침묵에 싸이고, 산도 계곡도 살아 움직이는 것 하나 없이 시커먼 모습을 하고 웅크리고 있다.
유다 광야는 유다인들에게 불안과 공포의 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곳은 그들이 하느님을 생각하고, 고독에 잠기고, 명상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광야는 또한 로마에 대해 저항운동을 하는 자들의 피난처이기도 했으며, 혁명가들의 요새로도 쓰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맡은 유다교 주류파(主流派)로부터 압박을 받던 에세네파 Essenes 사람들은 여기에 수도원을 세워 엄격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고, 예수 사후에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유다인들은 이 광야를 최후의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예언서에 따르면, 언젠가 이 광야에 한 예언자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한다.
아마도 나자렛을 떠난 예수는 약 3일간의 여정 끝에 예리고에 도착했을 것이다. 예리고는 해발-840피트(약-256m)라는, 지구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지금으로부터 3천2백 년 전에 이집트를 탈출한 유다인들이 가나안 땅을 찾아 헤매다가 도착한 곳이다. 여호수아서에 의하면, 그들은 이 도시를 습격하여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살육했으며, 도시를 재건하고 정착했다. 황량한 유다 사막을 배후에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샘과 종려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예리고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르단 강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 가운데 섞여 예언자 요한의 엄격한 모습을 대하며 그의 가르침을 들었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세례라는 특이한 의식은 당시 유다교의 주류파이자 귀족 사제 계급으로 이루어진 사두가이파나 그들보다 약간 대중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던 바리사이파에게는 없는 의식이었다. 이 세례를 특별히 자신들의 입회 의식으로 행했던 것은 이들 유다교 주류파로부터 쫓겨나 유다 광야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던 에세네파 사람들이었다.
에세네파란 무엇인가?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신약성서에 언급되지 않은 이 유다교 분파는 예루살렘 성전과 의회를 따르는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와 대립하여 거기에서 쫓겨나 땅 끝과 같은 사해 근처에서 엄격한 금욕과 기도 생활을 하며, 오로지 자신들의 구세주의 도래를 기다리던 고독한 집단이었다.
신약성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에세네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데, 로마제국 시대의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를 통해 세상에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사해의 서쪽에… 에세네파가 살고 있다. 고립 생활을 하는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별난 사람들이다. 여자는 없고, 돈을 소유하지 않으며, 끼니로 대추야자를 먹는다.”
에세네파는 1947년 극적으로 발견된 사해문서(死海文書)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그해 이 지방에 사는 베두윈족 양치기 소년이 무리를 떠난 양을 찾기 위해 헤매다가 유다 광야의 사해 부근에 있는 험한 산의 동굴에서 항아리를 발견했는데, 그 속에 에세네파가 쓴 사본(寫本)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부근에서 수도원의 흔적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쿰란 수도원이다. 이렇게 해서 에세네파 가운데 쿰란 공동체의 생활이나, 조직, 교의가 점차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학자들은 먼저 예수가 세례 받은 요한의 공동체와 이 에세네파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즉, 세례자 요한과 에세네파인 쿰란 공동체가 지리적인 활동 범위, 광야에서의 신비주의와 금욕 생활, 그리고 하느님의 심판 예고라는 점에서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 특히 쿰란 공동체가 입회 의식으로 세례를 베풀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세례자 요한이 이 의식을 그들로부터 계승한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도 나오게 되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이 에세네파의 한 사람이었다고 비약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요한에게 에세네파의 색채가 강하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자들은 예수와 쿰란 공동체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사해문서 가운데는 ‘의로움의 교사(敎師)’라고 불린 쿰란 공동체의 통솔자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의로움의 교사는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이자 율법학자였는데, 예루살렘의 유다교 주류파로부터 박해를 받아 처형되었다. 박해자의 우두머리는 ‘분노의 사자’라고 불렸으며 ‘의로움의 교사’는 ‘분노의 사자’라고 불리는 사제로부터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는데, 공동체의 신자들은 죽은 그가 예수처럼 부활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 처형· 부활설에 대해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 이러한 유사성(類似性)을 근거로 듀퐁 소멜 같은 학자는 ‘의로움의 교사’와 ‘그리스도’는 같은 인물이라고 대담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공동체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 사이에는 몇몇 유사점도 있다. ▶첫째, 쿰란 공동체는 자신들을 ‘가난한 자’, ‘새로운 계약’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명칭과 동일한 것이다. ▶둘째, 두 공동체 모두 공동 생산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재산을 공동체에 바치는 점에서도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단지 쿰란 공동체에서는 재산의 공유가 의무적이었던 것에 반해,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는 자발적 행위였다는 점이 다르다. ▶셋째로는, 두 공동체 모두 세례를 자신들의 표지(標識)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면, 쿰란 공동체의 세례는 단순히 몸을 씻는 의식으로 그리스도교에서 가지고 있는 생명의 재생이라는 중요한 의미는 내포되어 있지 않았다. 더욱이 이 의식은 매년 반복해서 스스로 행한다는 점에서 일생에 한 번인 그리스도교의 의식과는 차이점이 있다.(예수나 그 제자들이 쿰란 공동체의 달력에 따라서 과월절이나 그 밖의 축제를 지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물론 우리는 오늘날 쿰란 공동체의 지도자인 ‘의로운 교사’가 예수이고, 예수의 공동체와 쿰란 공동체가 같은 것이라고 하는 비약적인 사고방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해문서를 모국어로도 읽을 수 있는 오늘날,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⑴ 예수는 당시, 이미 유다 광야에서 생활하던 쿰란 공동체와 접촉을 했을까? 그리고 이 공동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⑵ 만일 예수가 에세네파와 접촉했다고 한다면, 성서는 왜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나자렛에서의 예수의 내적 갈증, 정신적인 갈증은 이 광야에서의 생활로 채워졌을까? 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대략 28년 2월경,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요한 공동체의 세례는 쿰란 공동체의 입회 의식인 세례와는 달리 세례자 요한이 베푸는 회개 의식이었다. 구약성서 에제키엘서의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주리라”라는 말대로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영혼의 정화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세례를 받은 후에 예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잠시 이 공동체에 머물렀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사람들이 생각하는 구세주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라며 그는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 하며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오”(요한 1,23)라고 대답하고는, “이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만한 자격조차 없는 몸”(요한 1,27)이라고 했다. 구약시대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메시아의 출현에 앞서 그의 사자(使者)가 출현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요한은 자신을 일컬어 이 사자라고 했던 것이다.
털옷을 걸친 이 격정적인 예언자에 대해 예수는 평생 경애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르낭 Renan의 『예수전傳』은 이미 오래된 책이지만 “예수는 그 깊은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몇 주간 동안은 요한에게서 배웠다”라는 내용은 옳다고 생각된다. 예수는 요한 공동체에 머물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태오 복음서 3장 7절을 12장 34절이나 23장 33절과 비교해 보면, 요한이 사용한 말을 예수가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그 후 예수가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을 때 요한 공동체의 제자들은 그것을 분파 행동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들은 예수를 스승 요한의 애제자로, 동시에 자신들의 동료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들이 예수의 공동체와 어떤 알력을 갖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의 공동체 가운데서 예수는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다고 해서 요한 공동체의 모든 것을 긍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의 눈에 떠오르는 고뇌의 빛은 이 공동체의 생활에 따라 지내는 동안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는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과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유다교 주류파인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를 규탄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의 귀족 사제들로 구성된 사두가이파는 성전을 관리한다는 특권에 매달려, 선조로부터 계승한 제의적인 일만을 완고하게 고집할 뿐 민중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되어 있었다. 그들은 유다 지사와 타협함으로써 근근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리사이파는 사두가이파보다는 민중과 밀착되어 있긴 했지만, 율법 해석에 지나치게 매달렸다. 이러한 유다교 주류파의 자세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갈릴래아에서 성장한 예수 또한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하지만 요한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부친(父親)의 이미지로, 분노와 심판과 벌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구약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는 존엄하고 무자비한 하느님,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 도시를 멸하고, 사람들의 부정(不正)에 대해 분노를 터트리며, 사람들의 배반을 사정없이 벌하는 엄한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 이것이 요한이 지니고 있던 하느님의 이미지였다.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른 세례자 요한은 이 엄한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의 분노를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라고…. 세례자 요한이 전하는 하느님은 세계의 종말과 심판을 배경으로 하여 분노하고 벌하는 구약의 하느님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참다운 하느님의 모습일까? 세례자 요한의 공동체에서 생활하면서 예수는 아마 이러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 것이다. 그는 작은 나자렛 마을의 가난하고 비참한 서민의 생활을 알고 있었다. 나날의 양식을 구하기 위해 흘리는 땀 냄새도 알고 있었다. 또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도리가 없는 사람들의 나약함도, 병자나 불구자들의 한탄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는 이러한 서민들이 추구하는 하느님이 분노하고, 심판하고, 벌하는 존재만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당시 예수의 심중에는 아직 이러한 하느님의 이미지가 뚜렷이 자리 잡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다 광야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신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요한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이미지와는 다른 것이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머지않아 그가 갈릴래아 호수 근처의 산에서 사람들에게 들려줄, 온화하고 어머니와 같은 신(神)의 모태(母胎)가 된다. …
그런데 예수는 잠자코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마음속 깊이 간직한 예수는 요한 공동체의 규약을 따르는 생활을 하며, 요르단 강 근처의 산에서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 생활에 임했다. 예수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성서의 이야기는 이때의 일이다.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께서는 사십일 동안 그곳에 계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마르 1, 12-13)
사순산(四旬山)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곳은 석회질의 땅으로, 다니엘 롭스 Daniel Rops 신부의 표현을 빌리면 “독수리가 날아다니고 들개가 울부짖는, 유다 사막에서도 가장 황량한 곳 중의 하나이다. 인적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경치다운 경치는 전혀 없는 땅”이다.
그런데 현지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이곳이 어떤 곳인지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이곳은 에세네파의 쿰란 수도원이 발굴된 지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데, 이에 대한 다니엘 신부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귀 기울일 만하다.
“마태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거기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 주변에서 광야라고 하면 그것은 에세네파가 숨어 지내던 장소를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게다가 옛날부터 유혹의 장소라고 일컬어지는 곳은 쿰란 수도원에서 약간 북쪽의 단애(斷崖) 위쪽, 바로 사해사본이 발견된 부근이다.”
만일 다니엘 신부의 이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예수가 홀로 광야에서 수행했던 장소를 다름 아닌 에세네파의 쿰란 수도원이 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예수에 대한 악마의 유혹은 이 쿰란 수도원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을 근거로 해서 쓰였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물론 성서 저자들은 에세네파의 존재뿐 아니라 쿰란 수도원에 관해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 이유의 하나로, 예수의 사후에 일어난 유다 전쟁에서 쿰란 수도원이 반로마 저항 세력인 열심당의 은신처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성서 저자들이 신중한 태도를 취했을 것이다.
이미 진술했듯이, 에세네파의 쿰란 수도원은 성도(聖都) 예루살렘에서 유다교 주류파에 의해 추방당한 비밀결사 세력의 근거지이다. 이 수도원에서 생활하던 에세네파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예루살렘의 주류파들은 유다교의 본질을 잃고 로마와 타협한 세력이다. 따라서 인고(忍苦)의 생활을 하고 있던 그들은 이윽고 하느님의 가호 아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유다교를 쇄신하게 되리라는 꿈을 지니고 있었고, 이 꿈이 메시아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7년에 발견된 사해문서에는 ‘싸움의 두루마리’와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 간의 싸움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마침내 그들은 싸움에 이겨 그들의 지도권을 되찾고 모든 세계가 자신들에게 굴복할 것을 고대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쿰란 공동체는 생활면으로는 평화주의자였지만, 그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하느님 나라’를 지상에 구현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 공동체의 사해문서에 쓰여 있는 내용으로 볼 때 ▶첫째, 쿰란 공동체의 메시아는 지상의 지배자이고 ▶둘째, 그들에게는 예수가 생각했듯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관념이 없으며 ▶셋째, 그들은 공동체의 구성원끼리의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자신들 이외의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것이야말로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 중의 하나였는데-은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예수의 사고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있다.
쿰란 수도원의 신자들의 사고방식과 훗날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고방식 사이에는 몇몇 외형적인 유사점이 있다. 그러나 그 근본에 있어서 이처럼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나의 생각은 이러하다. 쿰란 수도원 근처에서 혼자 수행하면서 예수는 이러한 문제들로 인한 내적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어쩌면 쿰란 수도원의 신도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일원으로 영입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고뇌의 빛을 띤 청년 예수는 쿰란의 간부들의 주목을 끌었을지도 모른다.
성서에 의하면, 광야에서의 예수에 대한 악마의 유혹은 현실 세계에서 구원을 찾으라는 것이고 그 대신에 모든 지상의 권력을 주겠다는 약속이다. 그것은 곧 쿰란 수도원의 에세네파가 추구했던 것이었다.
예수와 쿰란 공동체 사이의 정신적인 대립과 갈등은 이때 시작되었다. 쿰란 공동체의 제안을 거부하는 예수의 모습이 성서의 악마의 시험 대목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라고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강요한다. 바꿔 말하면, 그것은 지상의 왕국/빵은 어떤 구원의 말/돌보다도 유효하지 않은가 하는 그들의 진의를 나타내고 있다. “모든 권위와 영광을 너에게 주겠다.”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본심을 털어놓는다. 즉,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그 권위와 영광을 차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는 이 제안을 거부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동화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은 예수에게는 최초의 힘든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것, 자신의 독자성을 서서히 발견하였다. 그들의 제안을 거부했을 때 예수는 비로소 자신이 갈 길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단식과 기도의 40일이 끝났다. 그가 쿰란 수도원을 떠나 다시 요르단 강 근처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돌아갔을 때, 예수의 외모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은 변해 있었다.
예수는 이 유다 광야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무엇을 갈구하고 있는 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유다 광야! 몇 그루의 관목과 가시나무가 군데군데 자랐을 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갈색의 광야. 그 지평선에는 산성화 된 살벌한 모습의 민둥산이 늘어서 있다. 죽은 듯이 잠잠한 사해의 표면, 거기에 결여된 것은 ‘사랑’이었다. 쿰란 공동체도 요한 공동체도 사람들에게 회개와 하느님의 분노를 전할 뿐, 사랑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은 듯이 잠잠한 사해와 유다 광야를 보며 예수는 아마도 갈릴래아의 온화한 봄을 떠올렸음에 틀림없다. 하느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단지 분노하고 벌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일까? 하느님은 애처로운 삶을 영위하는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황량한 사해와 민둥산은 쿰란 공동체나 요한 공동체에게 가공할 분노의 하느님의 이미지밖에 부여하지 않았지만, 예수는 그것과 반대로 인간의 비애를 아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이미지를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생각을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서는 공관(共觀) 복음서보다도 명백히 기술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요한 공동체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요한 2:24).
▒ 위험한 초기 시대
한편 예루살렘의 유다교 주류파는 유다 광야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에 눈을 감고 있지는 않았다.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이 유다인들의 마음을 끌고 그 세력을 무시하기 힘들게 되었음을 깨달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의 사제나 율법학자들은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유다에서 로마에 대한 불온한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 만일 로마에 대한 반란이나 봉기가 일어나면 유다 지사 빌라도는 즉시 탄압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 책임을 추궁하여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가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유다 의회의 권리를 박탈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들로서는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세례자 요한의 주위에 모여드는 군중은 반로마 감정과 유다 독립의 염원을 품고 있으며, 거기에는 종교적인 감정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갈릴래아 지역을 모태로 한 반로마 과격주의자인 열심당원들도 요한 공동체에 가담하고 있어 자칫하면 이 세례 운동은 로마에 대한 민중의 반란으로 발전할 우려가 있었다. (그 때문에 요한 공동체를 반로마 무장 집단으로 보는 성서학자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주류파는 즉시 공동위원회를 구성하고, 세례자 요한이 있는 곳으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당시 요한은 요르단 강 건너편 베다니아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사단과 요한은 여기서 마주쳤다. 조사단은 세례자 요한이 메시아를 사칭하고 있는지를 심문하였다. 만일 요한이 자신을 메시아라고 한다면 즉시 긴급회의를 열어 재판에 넘길 생각이었다.
그들의 심문에 대해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했다. 이 심문의 현태는 요한복음서에 기재되어 있는데, 그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어떤 권리와 자격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의 사자(使者) 임을 주장하고 간신히 곤경을 면했다.
아마 이때 조사단에 의해 예수의 이름도 예루살렘의 주류파인 대사제에게 보고되었을 것이다. 예수는 이미 요한 공동체 가운데서 모두로부터 요한의 애제자로 주목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사두가이파나 의회가 예수의 동향에 경계와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한편, 세례자 요한에게 모여든 군중 가운데는 예수와 고향이 같은 갈릴래아인들도 섞여 있었다. 완고하다고 할 정도로 비타협적이며 민족적인 감정이 강한 그들은 반로마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열심당에 속한 이도 섞여 있었다. 앞에서도 썼듯이, 열심당은 로마에 대한 과격 저항 그룹이다. 원래 갈릴래아는 반로마 봉기의 온상지로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에는 당시의 유다 지사 사비누스 Sabinus에 대한 반란을 기도하였고, 기원 후 6년에도 유다에 자원 조사차 파견된 시리아 총독에 대해 유다라고 하는 갈릴래아인이 도당(徒黨)을 만들어 봉기하였다. 열심당이란 이러한 갈릴래아인들, 즉 유다의 반항 운동으로부터 생겨났던 것이다.
열심당원을 포함한 갈릴래아인들은 요한 공동체에 참여하며 자신들과 동향(同鄕) 출신의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그들이 단식을 마치고 광야에서 돌아온 예수에게 주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다 광야 근처의 요르단 강에서 갈릴래아인 두 사람이 예수에게 다가와 그를 스승으로 모신 이야기는 요한복음서 1장 35-41절이 감명 깊게 묘사하고 있다.
“다음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 하고 말하였다. 그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뒤돌아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따라가서 예수께서 계시는 곳을 보고 그날은 거기에서 예수와 함께 지냈다. …시몬을 찾아가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감명 깊게 묘사된 예수와 최초의 제자들의 이 만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거기에는 하나의 비극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비극이란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오해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최초의 제자들은 예수를 반로마 운동의 지도자 혹은 로마와의 타협으로 타락한 유다교를 개혁시킬 인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우리가 찾던 메시아를 만났소”라고 외친 것은 예수의 진면목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러한 자신들의 꿈을 예수가 이루어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뿐만 아니라 그 후에 예수 주변에 모여든 제자들의 공통된 오해로, 예수를 배반한 유다의 비극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오해하고 있는 그들을 제자로 받아들인 예수의 심정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예수는 그들의 뜻을 일단 받아들이고 머지않아 자신의 뜻에 일치시킬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예수는 제자들의 오해를 존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예수의 주변에는 동향 갈릴래아인 그룹이 결성되기 시작했고, 예수의 존재는 요한 공동체 속에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파견된 조사단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다.
예수는 이때 동향인 그룹을 데리고 유다 광야를 떠났다. 예수는 이미 요한 공동체나 에세네파와 같은 광야의 사람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과는 다른 하느님의 이미지가 지금 그의 마음속에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유다교 주류파들이 자신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상태에서 거기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예수는 최초의 제자들과 함께 유다 광야를 떠나 다시 요르단 강을 따라 북쪽으로 90㎞정도 올라가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고향 갈릴래아로 돌아갔다.
공관복음서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될 때까지의 초기 시대 예수의 활동에 대해서 별로 언급하지 않는다. 게다가 성전에서 장사꾼을 내쫓은 사건의 경우, 요한복음서는 초기 시대의 사건으로 다루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서보다 오래된 마르코 복음서는 그의 죽음 직전의 행동으로 기술하는 등 시간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점도 있다.
갈릴래아로 되돌아온 그는 곧바로 고향 나자렛으로 가지 않고, 호수 주변에서 재차 제자들을 모은 후에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전에 그가 유다 광야로 떠날 때 불만스럽게 여겼던 친척들이 어떻게 예수를 맞이했는지 성서에는 쓰여 있지 않다. 그렇지만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탕자의 이야기에는 이때의 정황이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사촌들은 탕자의 형처럼 돌아온 예수에게 노여움을 지니고 있었겠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루가 15:20)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후에 그가 어머니와 함께 가나의 아는 사람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또한 그녀와 더불어 나자렛을 떠나 호숫가에 위치한 가파르나움으로 옮겨 지내기 때문이다(요한 2:12; 마태 4:13).
요한복음서가 언급한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는 자칫하면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이기 쉬운 성서의 사건 가운데 봄이 찾아온 듯한 밝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공동체에서 얻은 제자 중 한 사람인 나타나엘은 가나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마 이 결혼식은 나타나엘의 친척의 결혼식이었으리라.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가나는 나자렛으로부터 10㎞ 정도 떨어진 작고 소박한 마을로 지금도 엷은 다갈색의 완만한 언덕과 포도밭에 둘러싸여 있다. 나무들이 우거진 좁은 마을 길을 걷고 있노라면 길 양쪽에 늘어선 집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예수가 혼인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 마을을 방문한 것은 아마도 봄으로, 들에도 숲에도 꽃들이 만발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활짝 웃음을 지으며 술을 마시고, 예수 또한 소리 높여 웃으며 술을 마셨을 것이다. 루가복음서 7장 34절에 반대파들의 예수에 대한 험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더라도(스타우퍼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유다인은 이단자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썼다고 한다.) 예수가 사람들과의 교제에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나의 이야기는 전해주고 있다.
인간적이고, 더욱이 화창한 봄날의 느낌을 주는 이 결혼 이야기를 요한복음서가 예수의 초기 시대에 삽입하여 이야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황량한 유다 광야의 고행 시기와 대비시키기 위해서이다. 유다 광야에 결여되어 있는 것과 그 광야의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의 어두운 이미지를 극복한 예수를 여기서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이들의 사랑의 혼인을 기뻐하는 예수! 웃으며 술을 마시는 그 용모와, 모피와 가죽 띠를 두르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분노만을 외치는 세례자 요한의 용모를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에는 광야와 요한 공동체를 초월한 예수의 밝고 기쁨에 찬 모습이 있다. “예수의 메시지와 요한의 그것은 어떻게 다른가? 요한의 메시지는 구약적이고 위협적인 의미의 무거운 짐, 혹은 멸망이 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기쁜 소식이다”라는 헌터 A. Hunter의 말은 옳다. 마르코 복음서 2장 18절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 반해 예수의 제자들은 혼례에 참석하고 있는 이들과 같았던 것이다.
요한복음서가 가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예수 활동의 초기 사건으로 기술하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혼인 잔치에서 예수가 행한, ‘물을 술로 변화시켰다’라는 상징적인 사건에서 드러나는데, 성서 속에서 예수의 기적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이 사건은 실은 예수와 제자들과의 관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공동체 가운데서 선택된 제자들이 부패한 유다교를 쇄신시킬 반로마적인 지도자로 예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이윽고 예수가 이들의 인간적인 꿈-물-을 서서히 자신의 세계-술- 속에 승화시키려 한다는 것을 이 장면은 암시하는 것이다.
가나에서 머문 후에 예수는 거처를 나자렛에서 가파르나움으로 옮긴다. 다른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서만은 그 후에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유다와 예루살렘 사이를 왕래했다고 쓰고 있다. 이에 따르면 예수는 세례자 요한 공동체의 방식에 따라 사람들에게 세례 의식을 베푼 듯하다. 하지만 그 세례는 예수 자신의 뜻이라기보다는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 공동체의 방식에 따라 행했던 것이리라. 예수는 아직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세례자 요한을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갑자기 헤로데 안티파스 왕이 세례자 요한을 체포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성서에 의하면 요한의 체포는 그가 안티파스 왕과 배다른 형제인 헤로데 필립보 2세(기원전 4년-기원후34년)의 아내 헤로디아의 비합법적 결혼을 공공연하게 비난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루가 3,19 이하). 이 두 사람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로마에 머물고 있을 때 아는 사이였는데, 법률적으로는 숙부와 조카의 관계로, 안티파스는 아라비아 출신의 본처인 나바테아족의 왕 아레타스 4세의 딸을 내쫓고 헤로디아와 결혼했던 것이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헤로데 안티파스 왕에 대한 비난 속에는 한층 뿌리 깊은 것이 숨겨져 있다. 헤로데 왕에게 그의 비난은 단순한 체포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자세한 사정은 당시의 유다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프스가 명백히 기술하고 있다.
“헤로데는 민중에 대한 요한의 영향력이 반란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것은 민중이 그가 말하는 것은 어떤 일이라도 따를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왕은 요한이 일으킬지도 모르는 반란을 좌시하다가 곤경에 휘말려 후회하기보다는 사전에 요한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한은 이러한 헤로데의 의심 때문에 마케론테의 성채(城砦)에 투옥되어 거기서 살해되었다” (『유다 고대사』).
물론 세례자 요한 자신은 무력에 의한 반란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도자의 경우, 자신의 이념과 상관없이 민중에게 끌려가는 경우가 있다. 예수가 그 제자들로부터 반로마 민족운동 지도자로 오해받았듯이, 세례자 요한 역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침 이해는 로마의 티베리우스 황제가 총애하던 신하 세야누스Sejanus가 유다인 문제의 전면 해결을 단행한 해였으며, 유다의 지사인 빌라도는 세야누스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헤로데 안티파스 왕이 이러한 사정에 민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로마를 추종하면서도 빌라도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던 그는 쓸데없는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세례자 요한과 그를 지지하는 갈릴래아 민중들의 민족 감정에 대해 불안을 느낀 것은 당연할 것이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명백하게 쓰지는 않았지만, 헤로데 왕의 입장과 심리를 이용한 것이 예루살렘의 유다교 주류파이다. 이전에 세례자 요한을 심문하기 위해 파견된 조사단의 보고 내용만으로는 이 예언자를 재판에 회부할 수 없었던 그들은 이때 비로소 헤로데 안티파스를 움직여 자신들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과 헤로데 안티파스 왕은 각각 자기 보호라는 점에서 이해(利害)가 일치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처한 이런 위험한 정황이 그 애제자인 예수의 신변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아마 복음서가 이 초기 시대의 예수의 신변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예수가 어머니와 함께 나자렛으로부터 갈릴래아 호수 근처의 가파르나움으로 옮겨 지내고, 거기에서 다시 유다 북부로 여기저기 거처를 옮겼던 것은 이 불온한 배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예수는 어디서 들었을까? 스타우퍼에 의하면 예수는 그해 가을에 열린 유다교의 초막절에-8일간 계속되는 이 축제는 유다인들이 광야를 떠돌았던 선조를 기억하고, 더불어 가을의 수확을 기다리는 축제이다-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있었다.
스타우퍼의 의견은 늘 지나치게 비약적이지만 이 경우에 한해서는 성도 예루살렘에 체재 중에 예수가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 사제들로부터 심문받고 살해될 뻔했던 사실(요한 5,18)을 보더라도 결코 부정할 수 없다. 주류파의 사제들은 이미 조사단의 보고를 통하여 예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즈음의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도성의 양(羊)의 문 옆에 있는 베짜타 연못에서 거기에 모이는 병자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연못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그 연못에 들어간 병자는 치유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연못가에는 맹인, 중풍병자, 절름발이가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안식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율법(토라) 규정을 무시하고 병자들을 도와준 일은 사제들, 특히 바리사이파의 사제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생각될 뿐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해서 예수를 재판에 넘길 준비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은 세례자 요한을 체포할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고, 그의 애제자인 예수도 체포하는 것이었다. 이때 그들의 심문과 예수의 답변 내용이 요한복음서 5장 16-47절에 투영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결과, 결정적인 근거를 찾아내지 못한 주류파의 사제들은 예수를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던 듯하다.
세례자 요한은 살림 부근의 애논에 있을 때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계략에 걸려들어 체포되었으며, 왕의 영지(領地)인 국경 근처 마케론테에 유폐(幽閉)되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여러 번에 걸친 현지 여행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마케론테는 가 보지 못했는데, 롭스의 묘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곳이다.
“동쪽으로는 끝없이 아라비아 사막이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아찔한 절벽 아래로 사해가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사막의 대상(隊商) 덕에 번창했던 그 옛날의 도시에는 현재 길이 망가져 나뒹구는 바닥 돌, 주택 파편, 태양신에게 바쳐진 신전의 초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가까이 보이는 원추형의 험준한 작은 산에는 요새가 있었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은 최후의 날을 맞았으리라. … 성 내부에는 상당히 깊은 우물과 빗물 저장소와 두 개의 탑이 남아있다. 한쪽 탑의 돌벽에는 작은 구멍이 있는데, 그 옛날 여기에 교수형에 쓰는 쇠사슬을 걸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운명은 분명히 예수에게 깊은 슬픔을 자아낸 동시에, 장래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시사하고 있었다. 지도자가 민중을 이끄는 시기가 지나면 다음에는 지도자가 민중에게 말려들게 되어 그의 의지와는 다르게 일이 진행된다는 것을 예수는 이 사건을 통해 배웠다. 그 후에 예수와 제자와의 관계에서 신중함이 엿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예언자 요한의 운명과 같은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초막절의 위험한 예루살렘 체재 후에 예수는 자주 다니던 예루살렘, 예리고, 요르단 강을 잇는 길을 피하여 사마리아를 지나 갈릴래아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하나는 사마리아인은 반유다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유다인들 또한 사마리아인들을 이교도처럼 혹은 이교도보다 못한 자로 경멸했기 때문이다. “사마리아의 물은 돼지보다 더 더럽다”라고 유다인들이 일컫던 땅이지만 예수 일행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한패로 여기는 자들로부터 추적당하는 것보다는 안전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땅을 지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늦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예수는 평생 자신이 일관되게 지켜온 것, 즉 사람들이 혐오하는 이, 경멸하는 이, 증오하는 이에게 기꺼이 다가가려고 하는 자신의 사랑의 마음을 이 여행에서 제자들에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식일 운운하며 율법에 집착하여 사랑을 잊고 있는 예루살렘 주류파에 대한 예수 특유의 저항의 자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마리아를 지나는 길, 베델에서 세겜을 지나 엔간님으로 향하는 길은 당시의 유다인이라면 피하는 길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 또한 유다인을 증오했으므로 그들에게 보복당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가 복음서에 기술된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루가 10,30 이하), 혹은 나환자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루가 17,11 이하)는 예수에게 그 전통적인 유다인 감정이 전혀 없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50㎞의 여정 끝에 그와 제자들이 세겜이라는 마을에 도착한 때는 마침 정오였다. 오늘날에도 세겜은 황량한 그리짐 산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을 뿐인 적막한 마을이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사이에 갈증을 느낀 예수는 한 여자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요한 4,21).
이 말은 분명히 예루살렘 성전을 소중하게 여기는 주류파들에게는 모독으로 생각될 발언이었다. 예루살렘의 성전보다도 한층 숭고하고 한층 심오한 것, 즉 사랑의 하느님이 있다는 예수의 첫 번째 선언이기도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없는 사이에 유다인이 경멸하는, 가난하고 부끄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야기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지 못했다. 예수는 그들과 자신 사이에 아직 극복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본심을 제자들이 아니라 유다인이 꺼리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했을 것이다.
예수는 이 사마리아 땅에서 이틀간 머문다. 하지만 그는 당시 이렇게 사랑하고자 했던 사마리아인이 자신을 버리고 숙박마저 마다할 날이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까?
초기 시대의 예수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서가 약간 언급하고 있을 뿐 다른 복음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 그 이유는-나의 상상으로는-성서 저자들이 당시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로마의 관계를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 가운데서 가장 오래된 마르코 복음서는 65년-75년에 쓰였다고 하는데, 당시 로마는 4년간 걸쳐 간신히 유다 반란을 진압한 후였기 때문에 유다인에 대한 증오심이 컸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에 대한 로마의 탄압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르코는 유다 반란의 모태가 된 열심당이나 민족주의 운동에 관련된 사건을 가능한 한 예수의 생애 가운데서 지우려고 했는지 모른다. 성서 저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나 에세네파의 움직임을 축소시키거나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초기 시대의 예수의 활동 배경에 세례자 요한과 민족운동이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성서 저자들이 그것을 애매하게 다루고 있는 만큼 이 배경의 중요성이 오늘날 성서를 읽는 이들에게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비극적인 죽음은 예수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제 제자들은 그를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대를 걸려고 했다. 세례자 요한의 비극적인 죽음은 일단 예루살렘의 주류파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갈릴래아인을 비롯한 민중들의 일관된 감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 갈릴래아의 봄
여기서 잠깐 이 전기(傳記)를 쓰는 나의 관점에 대해서 언급해 두고 싶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대하는 성서는 결코 예수의 생애를 사실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이 점을 인정한다. 예를 들어 공관복음서인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서와 요한복음서를 비교해서 읽어 보면 같은 예수의 행동이라도 그 시간적 배열이 일치하지 않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의 경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초기 시대의 일로 언급하고 있는 데 반해 공관복음서는 이것을 죽음 직전의 사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차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한데,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따라서 이런 엇갈리는 부분을 예수의 생애 가운데 어디에 배치하느냐 하는 것은 성서를 읽는 사람이 갖고 있는 예수상(像)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독일의 성서학자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연구가 나온 이후, 우리는 성서 가운데는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케리그마)으로부터 생겨난 부분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예수 사후에 성서 저자들이 그를 목격한 제자들의 기억이나 지방에 전해지고 있던 예수에 대한 민화(民話)나 전승(傳承)을 모으고, 당시 입수할 수 있었던 사료(그리스도 어록집)를 사용하여 예수의 생애를 그들 나름대로 짜 맞추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따라서 성서에 쓰인 예수의 생애는 분명히 일관된 진실을 지니고 있지만,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쓰인 것은 아니다. 성서 속에 예수의 말씀이라고 쓰여 있는 것도 실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인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고, 또한 어떤 도시나 마을에서의 예수의 행위도 실은 그 도시나 마을에 전해지고 있는 예수의 민화(民話)를 마치 사실처럼 쓴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자도 있다. 불트만은 이러한 성서의 내용을 사실(事實)과 창작(創作)으로 분류하면서, 결국은 “성서 속의 사적(史的) 예수의 모습은 점점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라는 절망적인 말을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정확한 예수의 생애를 알 수 없는 것인가? 예수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쓴다는 것은 현재의 자료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공통된 심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상이 예수이든 다른 사람이든 정확한 전기라는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일까? 전기 작가는 결국 타인이라는 안경을 통해서 그 인물의 모습에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에 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우리는 예수의 생애를 정확하게 더듬을 수도 없고, 예수의 행동을 사실 그대로 기록할 수도 없다. 그런데 성서를 읽을 때 우리가 생생하게 예수나 주위 사람들의 모습을 느끼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는 성서에 쓰인 예수에 대한 기록이 사실 그대로는 아니지만, 예수의 진실된 모습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예수의 입장은 크게 바뀌어 있었다. 이전의 나자렛 마을에서 생활할 때는 알려지지 않았던 목수가 세례자 요한의 체포 사건을 계기로 주위의 유다인들로부터 기대와 경계의 대상이 된 것이다.
우선 그를 기대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제자들과 세례자 요한을 동정하며 호의를 보이던 갈릴래아의 서민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예수를 세례자 요한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이도 있고, 또한 유다교를 개혁할 뿐 아니라 유다 땅을 점령하고 있는 이방인을 쫓아낼 지도자가 될지도 모른다며 잔뜩 기대를 걸고 있는 이도 있었다. 예수 사후에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라고 한 제자의 말이 이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의회를 관리하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였다. 그들은 점차 예수를 자신들에게 반항할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군중을 선동할 인물로, 또한 유다교로서는 방심할 수 없는 자칭 개혁자로 비쳤던 것이다.
이 두 가지, 즉 기대의 눈빛과 경계의 눈빛을 예수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주류파의 적의(敵意)에 찬 시선과 더불어 자신을 에워싸는 제자들이나 갈릴래아 사람들의 오해의 시선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아무도 예수의 진의를 알지 못했다. 그의 본심이 단 하나, 즉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아무도 간파하지 못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이 말의 배후에는 사랑의 하느님의 이미지가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하지만 나자렛 마을에서 그가 목격하는 것은 빈곤과 불행이고, 우는 이가 위로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가 유다 광야에서 바라본 별들도 얼음처럼 차가웠으며 생명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사해와 사해 뒤에 위치한 산들이 암시하는 것은 분노의 하느님, 벌하는 하느님, 심판하는 하느님일 뿐이었다. 구약의 세계가 간직해 온 이 극히 엄격한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이미지, 이를 계승한 세례자 요한과 그의 공동체, 예수는 그들의 결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이라든가 ‘사랑의 하느님’을 말하기는 쉽다. 가혹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이 느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보다도 하느님의 차가운 침묵이다. 가혹한 현실에서는 사랑의 하느님보다는 분노의 하느님, 벌하는 하느님을 생각하는 편이 쉽다. 따라서 구약에 때때로 하느님의 사랑이 언급되어 있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에는 공포의 대상으로서의 하느님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나 우는 사람에게 아무런 보답도 주어지지 않는 듯이 보일 때,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가?
물론 예수는 이 모순을 알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 불타고 있었지만, 이 모순을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의 생애를 일관하는 가장 큰 테마는 사랑의 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리는 가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앞으로 이야기할 예수의 생애는 이 테마에 의해 진행될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믿기 어려운 하느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예수가 얼마나 애를 썼는가, 이것이 예수의 생애를 일관하는 요소이다.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래아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마르코 1장 14,15절은 갈릴래아에서의 예수의 최초의 활동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예수의 생활을 교회는 공생활(公生活)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예수의 선포와 세례자 요한의 선포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은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라고 세례자 요한은 말한다.
같은 메시지이지만 세례자 요한의 외침은 위협에 가득 차 있다. 광야의 외침이다. 이 위협 속에는 좋은 결실을 맺지 않는 자에 대하여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는 하느님의 심판, 분노, 벌이 암시되어 있다.
반면 예수의 메시지는 복음(福音)이다. 복음이란 문자 그대로 기쁜 소식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세례자 요한의 메시지처럼 듣는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위협적인 말은 없으며, 하느님의 분노나 벌 따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다. 요한이 그랬듯이 예수도 회개하라고 선포했지만, 예수의 ‘회개하고’라는 메시지는 오히려 ‘망설이지 말고’라고 해석해도 될 정도이다.
예수의 메시지와 요한의 메시지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어두운 숙명을 짊어진 구약의 세계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긴 밤이 밝아, 여명의 빛이 비쳐 오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한 번이라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유다 광야의 풍경과 전혀 다른 갈릴래아 호수 주위의 모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예수가 이 선언을 한 (사랑의 하느님에 대해 말한 이) 갈릴래아 호반, 그곳은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없는 사해 근처 불모의 유다 광야와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 사람들의 생활은 가난하고 비참하지만 이곳의 풍경은 온화하고 아름답다. 양 떼가 풀을 뜯는 완만한 언덕, 호수에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있는 키 큰 유칼리 숲, 그 숲에 바람이 스쳐 간다. 들판에는 노란 국화나 빨간 코크리크(개양귀비) 꽃이 만발해 있고 호수 저쪽의 수면에는 고기잡이 배가 떠 있다. 삶은 이렇듯 애처로운데 자연은 아름답기만 하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 28).
마태오 복음서에 쓰인 예수의 이 말을 대할 때, 우리는 양손을 벌리고 호숫가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의 외침은 호수를 스치는 바람결에 실려 가난에 쪼들리는 호숫가의 마을이나 부락에 전해진다. 그 소리를 들은 노인이나 여자, 절름발이, 소경이 어두운 집 안에서 나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호숫가에는 막달라나 가파르나움, 베싸이다와 같은 어촌이 있었다. 호숫가는 아니지만, 호수에 가까운 산중(山中)에는 코라진과 같은 마을이 있었다. 이들 마을은 도시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았고, 주민들은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면서 생활하는 이가 많았다. 오늘날, 이 마을들은 땅에 파묻혀 별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막달라는 유칼리 숲과 들꽃을 피우는 수풀에 파묻혀 있고, 가파르나움이라고 불리는 유적은 (가파르나움의 위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예수 이후의 회당의 유적과 주민이 살던 낡은 집의 흔적이 발굴되고 있을 뿐이다. 예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코라진도 지금은 단지 부서진 검은 돌조각이 여기저기 흩어진 상태로 산중에 잠들어 있다.
예수는 이 어촌들을 들렀는데, 성서에 의하면 그는 이상하게도 이 호숫가에서 제일 큰 도시인 헤로데 안티파스 왕이 세운 티베리아만은 피했던 듯하다.
마을에는 작지만 유다교 회당(會堂)이 있었다. 회당은 유다교도에게는 예루살렘 성전에 버금가는 없어서는 안 될 기도소였다. 장방형의 방은 기둥이 늘어선 복도와 구분되어 있고, 입구에 정화수가 담긴 통이 놓여 있으며, 내부의 벽은 모자이크로 꾸며져 있었다. 회당 입구는 언제나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도록 되어 있어서 예수 당시의 갈릴래아 회당은 모두 남향이었다. 회당은 토요일 아침과 오후, 그리고 축제일에 개방되었다. 열 명 이상이 모이면 먼저 ‘들으라(쉐마)’라는 첫머리로 시작되는 기도가 행해지고, 이어서 모세오경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사제의 ‘아멘’이라는 맺음말로 예식은 끝났다.
예수는 이러한 마을의 회당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회당이 닫혀 있을 때에는 호숫가의 언덕이나 들판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들은 사제들이나 율법학자가 아니라 호숫가에서 생활하는 어부들이나 그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노동을 했던 예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알기 쉬운 생활의 예화(例話)로 시작되었고 듣는 이로 하여금 실감을 느끼게 하였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일상의 땀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때 예수가 혼자서 활동했는지, 제자들을 데리고 활동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제자들은 제각기 생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틈이 날 때 예수를 따라다니고, 때로는 호수를 건너는 배를 젓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예수 혼자서 꽃이 핀 호숫가의 들길을 걸어 이웃 마을을 방문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분노나 벌을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음을, 그리고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이야기했다. 사제나 율법학자처럼 율법에 대한 골치 아픈 논쟁은 벌이지 않았다. 그 자신은 유다교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지만 사랑을 외면한 율법은 감연히 무시했다.
아름다운 자연과는 달리 처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 이 호숫가의 마을에는 이웃 사람이나 가족으로부터 버려진 병자나 불구자가 많이 있었다. 사제들로부터 멸시받던 세리(稅吏)나 창녀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성서를 보면 예수는 편애라고 할 만큼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받는 이들 옆에 다가선다. 호숫가 마을들에는 말라리아 환자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악령에 사로잡혔다 하여 그들을 피했지만 예수는 그 환자들을 간병하기도 했다. 마을에 접근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나환자들은 율법에 의해 하느님의 벌을 받은 자.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지만(레위기 13-14장) 예수는 그런 율법마저 무시하고 그들을 도우려고 했으며,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던 세리나 창녀들도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성서 속에는 예수와 버려진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형식은 두 가지로, 하나는 예수가 그들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기적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기적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참함, 고통을 함께하는 ‘위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 ‘위로 이야기’가 ‘기적 이야기’ 보다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상황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인가?
예를 들어, 루가 복음서 7장 36-38절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으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하나 살고 있었는데 그 여자는 예수께서 그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신다는 것을 알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거기에 묘사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아마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창녀는 막달라나 부근에 사는 가난한 여자였을 것이다. 그녀는 살아가기 위해서 여러 남자에게 몸을 맡겼고, 남자들은 그녀를 경멸하면서 돈을 건넸을 것이다. 남자와의 잠자리에서 그녀는 어둠 속에 공허한 눈길을 던진 채 꼼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서 들었을까? 어째서 그녀는 그를 찾아보려고 생각했을까? 어느 날 밤에 자신을 산 남자에게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화함’을 느꼈으리라. 자신의 비참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멸시에 익숙해져 있던 그녀는 어떤 사람이 온화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예수가 식사를 하는 집이 바리사이파인의 집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아마도 집 안에 들어갈 때 하인들로부터 제지당했을 것이다. 바리사이파인들에게 창녀 같은 사람은 말을 거는 것조차 피해야 하는 천하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구약의 세계에서 그녀들은 종종 예언자들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그녀는 하인들의 제지를 뿌리치고 들어간 자신을 놀라 돌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예수 앞까지 곧장 걸어갔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예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눈물로써 자신의 애처로운 처지를 호소했다.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다’라는 간결한 표현 속에서 그녀의 비참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 눈물에서 예수는 모든 것을 알았다. 그녀가 이제까지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혼자서 자신의 비참함을 되씹었는지도 이해했다. 그 눈물로 충분했다. 하느님이 그녀를 기쁘게 받아들이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그것으로 됐다. 나는 … 너의 슬픔을 알고 있다”라고 예수는 그녀에게 온화하게 말했다.
그가 이때 한 말은 성서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말 중의 하나이다. “이 여자는 많은 사랑을 베풀었다.” 이어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랑을 베푼 사람은
많이 용서받는다. …
이 ‘위로 이야기’에는 예수의 수많은 기적 이야기보다도 한층 감동적인 요소가 있다.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라는 그녀의 애처로움에 대한 표현과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라며 그녀를 용서하는 예수의 조용한 음성은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또 다른 ‘위로 이야기’로 마르코나 루가, 마태오가 기술한 하혈병을 앓는 여자의 이야기를 보자.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군종 속에 끼어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이 대목도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하혈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여자가 고통스러운 나머지, 예수를 보기 위해 모여든 군중 뒤에 숨어 그의 옷에 조심스럽게 손을 댄다. 그녀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조심스러운 그녀의 행동에서 예수는 그녀의 이제까지의 모든 고통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그녀의 심정을 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며 그는 제자를 돌아본다. 제자들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라며 예수는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가 나의 옷을 만졌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얼굴들 가운데서 그는 겁먹은 여자의 얼굴을 발견한다.
이 이야기에는 예수가 어떤 여자의 병을 고쳤다는 기적 이야기가 섞여 있는데,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병이 예수의 기적으로 나았다는 결과보다도 조심스럽게 옷을 만진 행동에서 그녀의 모든 괴로움을 알아채는 예수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녀의 손이 살짝 닿았을 뿐인데, 예수는 돌아본다. 그녀의 모든 괴로움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는 당시 여자의 겁먹은 표정과 예수의 고통스러운 듯한 표정을 이 조심스럽게 내민 그녀의 손가락을 통해서 상상할 수 있다.
‘위로 이야기’가 ‘기적 이야기’보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적 이야기’가 갈릴래아 지방에 남아 있던 예수의 전승을 모아 쓴 것인데 반해, ‘위로 이야기’는 아마도 목격자인 제자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던 것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제자들은 갈릴래아 마을에서 예수와 불행한 사람들이 마주칠 때의 광경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오랫동안 하혈병으로 고생하는 여자라든가, 나환자 혹은 창녀들이 어떤 표정과 어떤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는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들을 대하는 예수의 고통스러운 표정 또한 잊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강한 인상이 성서 저자에게 그대로 전해져 성서 저자들도 그것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위로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을 끄는 것은 예수가 위대한 예언자들과 달리,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이들의 애환을 못 본 체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사막의 예언자들은 고고(孤高)한 자세로 훌륭한 이야기를 했지만, 예수는 갈릴래아의 빈곤한 마을의 불구자나 병자와 함께하며 창녀나 세리처럼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이들도 위로했다. 호숫가의 마을들은 보잘것없고 비참했지만 예수에게 그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의 모든 사람의 애환(哀歡)이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머지않아 그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처럼 사람들의 애환은 그를 무겁게 짓눌렀다. ‘위로 이야기’가 지닌 사실성(事實性)은 이러한 예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때 그는 또 하나의 사실도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의 사랑의 무력함이 그것이다. 그는 불행한 이들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그들이 사랑의 무력함을 깨달았을 때 자신을 배반할 것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에서 인간은 결국 효과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병자들은 치유되기를, 절름발이는 걷게 되기를, 맹인을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현실 세계에서의 효과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행위이다. 여기에 예수의 고뇌가 있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라고 그때 그는 말했던 것이다(요한 4,48).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기적 이야기’의 배후에는 이러한 예수의 고뇌가 숨어있다. ‘기적 이야기’는 우리에게 예수가 실제로 기적을 행했는가 하는 통속적인 의문보다도 사람들이 예수에게 결국은 사랑이 아니라 징표(徵表)와 기적밖에 구하지 않았다는 슬픈 결말을 상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대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분노하였는지를 루가 복음서 4장 28절은 암시한다. 하지만 성서에는 단 한 줄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 구절이야말로 우리가 ‘기적 이야기’를 어떤 자세로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힌트가 된다.
하지만 처음에 예수는 이 호숫가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들은 아직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사건으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목소리는 그들의 마음을 끌었고 그가 로마에 유린된 이스라엘을 구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했지만, 그 희망도 갑작스러운 그의 체포로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하느님은 침묵의 세계로 잠적한 것인가? 하느님은 왜 침묵하고 계시는가? 열정적이며 순수한 유다교도인 갈릴래아 사람들은 분명히 암울한 생각과 분한 심정으로 세례자 요한의 체포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마침 그때 로마의 권력자 세야누스의 유다인 탄압 정책이 실시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해 봄에 지사 빌라도는 화폐에 로마 황제를 상징하는 지팡이를 새겨 넣게 하고 의회로부터 사형 집행권을 박탈했는데, 예루살렘의 사제나 율법학자들은 이 탄압 정책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갈릴래아에는 불온한 공기가 떠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뜻을 이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 예수가 호숫가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아마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그룹이 예수의 주변에 형성되어 조금씩 커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예수의 가르침을 듣는 이들이 적었겠지만, 이윽고 그 수는 급속하게 늘어났을 것이다.
그들은 크게 구분하면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나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민중, 그리고 호숫가에 사는 가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여자나 노인, 어린이, 병자들이었다.
호숫가에는 어느 정도의 주민이 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여기에는 240개의 마을이 있었고, 인구는 가장 적은 곳도 15,000을 헤아렸다”라고 전하고 있지만, 이 숫자가 과장이라는 것은 실제로 갈릴래아를 방문해 본 사람이라면 즉시 알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체포 사건으로 인해 심한 좌절감에 빠져 있던 주민들 사이에 이윽고 예수가 요한 공동체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였다는 소식이 급속하게 퍼져 갔다. 사람들은 그를 세례자 요한의 후계자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루가 9,18; 마태 16,13).
날이 갈수록 군중은 야위고 연약했을 예수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성서의 표현을 빌리면,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펴졌“(마르 1,28)고, 가파르나움에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 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마르 2,2)으며, 예수가 식사할 틈조차 없었다고 한다(마르 6,31).
그들에게 예수는 점차 기대되는 인물로 바뀌어 갔다. 이런저런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를 예수에게 걸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예수를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와 같은 인물 혹은 자신들의 지도자가 될 인물로 생각하였고, 민족주의자들은 예수를 머지않아 팔레스티나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유다인의 영예를 회복시킬 인물로 생각하였다. 열심당원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무력 행위를 옹호할 지도자로 생각했으며, 여자나 노인, 병자들은 ‘능력’을 보여 병을 고쳐줄 성자(聖者)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오해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수의 선교 활동은 시작되었다. 이렇듯 많은 군중이 그를 에워쌌지만, 예수는 그들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슬퍼했다. 왜냐하면 예수는 단 한 가지-사랑의 하느님을 이 현실 속에서 증명하는 일-밖에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때 그가 대항해야 했던 것은 자신을 에워싸고 애원과 기대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무수한 이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예수는 제자들 가운데서조차 고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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