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첩자들
예수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을 맡고 있던 사제나 율법학자들에게 위험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일어난 불온한 움직임을 도외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위험한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사해 근처의 감옥에 가두는 데 성공한 그들은 갈릴래아의 민중이 그 후계자로 여기기 시작한 예수를 새로운 위험인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초막절 때 이 남자는 안식일을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예수의 움직임, 호숫가의 마을에서의 그의 인기, 주민들이 예수에게 걸고 있는 기대와 꿈, 그 모두가 하나하나 예루살렘에 전해졌다. 호숫가에서 가장 큰 도시인 티베리아에는 그들의 감시원이 파견되어 있어 그들로부터 정보가 전해졌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대표자는 대사제 가야파이다. 이전의 대사제인 안나스(히브리어로는 아나니아)의 사위인 그는 장인의 후원에 힘입어 유다 지사로부터 대사제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사제들은 우두머리격인 대사제의 지위는 원래 하스모네 왕가가 세습적으로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이 왕가가 쇠락(衰落)한 후에는 유력한 귀족 사제 가문에서 선출되었다. 대사제의 직무는 의식(儀式)과 성전 봉사를 담당하는 것이었고, 이러한 전례 이외에도 로마로부터 인정받은 종교 · 민사(民事)의 최고 기관인 유다 의회의 의장직을 맡고 있었다.
의회는 의장을 포함해 71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세 그룹으로 나뉜다. 제1그룹은 이전에 대사제였던 이들과 대사제를 선출한 적이 있는 가문으로 구성된 귀족 사제 그룹이다.
제2그룹은 제1그룹과 마찬가지로 사두가이파에 속한 일반 귀족의 장로나 부유한 가문의 출신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제3그룹은 율법학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다소 서민적이었다.
유다 법률과 관계되는 종교 · 민사상의 문제는 모두 이 의회에서 다뤄지고, 유다 지사 빌라도도 그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사형 집행권만은 로마가 의회에 허락하지 않았다.
자세히 말하면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나중에 상세히 다루겠지만 당시의 의회가 전혀 사형 집행권을 갖고 있지 않았는지, 아니면 정치범에 한해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떤 학자들은 당시의 의회에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다고 보는 반면, 또 다른 학자들은 사도행전 6장 8절 이하를 근거로 신성모독죄를 범한 범인에게는 투석형(投石刑)을 선고했지만 정치범을 사형시킬 권한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예수에 대한 재판도 의회의 사형 집행권 유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어쨌든 대사제 가야파와 그의 장인 안나스가 지배하는 예루살렘 의회는 갈릴래아의 예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의 주위에는 그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마을에서 마을로 그에 대한 소문이 전해지고,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배를 이용해서 다니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맞아들였다. 예수를 따라다니는 제자의 수도 급격히 늘어, 12 사도 외에도 많은 이들이 따라나섰다. 복음서에서 12 사도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12라는 숫자가 유다인에게 있어서 상징적인 숫자였기 때문인데, 사도들이 갑자기 늘어난 이 제자 그룹 가운데서 핵심 역할을 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다만, 각 복음서에 적혀 있는 사도들의 이름은 일치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제 세례자 요한의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 강에서 행했던 세례를 행하지 않았다. 선각자 요한에 대해 예수는 깊은 경애심을 가지고 “그런데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아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 11,7-11)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라고 제자들에게 명백하게 말했다. 세례자 요한이 지닌 어두운 금욕적인 이미지는 부정되고, 그들이 생각하는 심판하는 하느님, 분노하는 하느님, 벌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의 심중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사랑의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인간의 현실을 볼 때 분명히 사랑의 하느님보다도 벌하는 하느님을 떠올리기 쉽다. 오랜 구약의 전통 가운데서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해 온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현실과 사랑의 하느님 사이의 모순된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는가? 괴로워하는 이, 병든 이, 우는 이는 자신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사람들도 그들에게서 하느님의 벌과 분노를 감지할 뿐이다. 그것은 예수의 심중에 자리한 하느님 나라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이 과제를 푸는 데에 있음을 알고 있었다. 가혹한 인간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참다운 사랑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유다 광야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이 테마가 예수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하느님이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수많은 힘든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도 느끼고 있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가 군중이나 제자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고독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모습을 이 갈릴래아 호숫가를 배경으로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군중사이에 섞여 예수의 언행을 살피고 있었다. 예수를 잡기에는 군중의 인기가 너무 높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지만(마르 12,12). 체포할 근거는 마련해 두고자 했다. 그들을 파견한 의회는 예수를 고소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 성서에 나타나는 언뜻 보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예수와 바리사이파의 대화 이면에는 예루살렘 의회와 예수 사이의 눈에 띄지 않는 대립 관계가 숨어 있다. 예수에게 질문하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는 실은 감사원이자 첩자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 내용을 읽어야 할 것이다.
오랜 세기에 걸쳐 율법 해석에 관한 토론에 몰두했던 그들은 논쟁에 능숙했다. 어디에 복선을 깔고 어디에 올가미를 놓으면 좋을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더불어 그들은 예수가 이단자이며 로마에 대한 반역자라는 확증을 잡기 위해 군중 사이에 섞여 이야기를 건넸다.
성서 가운데서 특히 예수와 감시원들 사이의 토론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것은 마르코 복음서이다. 감시원들의 의혹은 예수가 유다인의 율법을 무시하는 이단자가 아닌가 하는 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예루살렘의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는 때로는 서로 비난하는 일이 있었지만, 성전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선조로부터 전해지는 율법을 준수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그들이 볼 때 초막절에 마땅히 지켜야 할 안식일을 무시하고 병자나 불구자를 베짜타 연못에서 도와주려고 했던 예수는 율법을 모독한 자로 비칠 뿐이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께 모여 왔다가 제자 몇 사람이 손을 씻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은 조상의 전통에 따라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깨끗이 씻었고, 또 시장에서 돌아왔을 때에는 반드시 몸을 씻고 나서야 음식을 먹는 관습이 있었다. 그 밖에도 지켜야 할 관습이 많았는데 가령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같은 것을 씻는 일들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1-5).
“어느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때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 먹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몇몇이 ‘당신들은 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것입니까?’하고 말하였다”(루가 6,1-2).
이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는 별일이 아닌 듯이 보이지만, 실은 예루살렘에서 파견된 감시원의 예수에 대한 심문으로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유다인이 지니고 있던 안식일이나 율법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전제로 하여야 한다. 오늘날에도 안식일에는 외국인 여행자라도 호텔에서 술을 먹지 못하게 되어 있으며 차로 예루살렘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투석당한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안식일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를 격렬히 비난한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들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라는 그의 답변에 대해 얼마나 놀라고 분노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서로 의논”(루가 6,11)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의 견해를 듣고 신성모독이라고 느낀 감시원들은 민중의 예수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그가 ‘사생아(맘제하)’, ‘대식가에 술주정뱅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분명히 유다 율법에는 ⑴ 만일 누군가에게 배교의 의혹이 있다면 그의 출생 내용을 조사한다. 왜냐하면 사생아(부당한 결혼 혹은 불법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반역적인 경향이나 하느님을 모독할 경향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생아가 하느님의 뜻에 맞는 생활을 하는 한, 그 출생을 경멸하지는 않지만, 배교자가 되면 그 불법적이 출생에 대하여 가차 없이 밝혀야 한다.(레위 24,10 이하). ⑵ 대식가이고 술주정뱅이라는 욕설도 불법적인 출생을 비꼬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신명 21,20)라고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중은 아직 그들의 선동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예수를 열광하며 에워쌌기 때문에 감시원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마르 12,12).
그리하여 감시원들은 작전을 바꿨다. 민중이 예수를 율법 모독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반로마 감정을 선동할 위험한 인물로 지사 빌라도나 헤로데 안티파스 왕에게 고발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이미 세례자 요한은 그 술책에 걸려들어 처형되었다. 감시원들은 같은 올가미를 예수에게 씌우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때 일부러 군중들 앞에서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예수에게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은 진실하시며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시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 압니다.”
그리고 귀를 기울인 군중들 사이에 정적이 흐르자 갑자기 이렇게 묻는다.
“그런데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답하면 군중 가운데의 민족주의자들은 예수에게 실망을 할 것이고, 세금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 답하면 이 발언은 민중을 선동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이 교묘한 질문에 예수가 어떻게 대답할지 군중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이때 예수는 은전 하나를 보여 달라며, 거기에 누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지 물었다. 로마 황제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는 답변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돌려라.” 감시원들은 할 말이 없었다. 반로마 선동자로 몰 결정적인 단서를 얻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민중들에게 이단자로서의 이미지도 주지 못한 채 그들은 다시 물러가야 했다
예수는 고독했다. 예수의 고뇌는 감시원들의 이러한 집요한 심문 때문에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슬퍼한 것은 이 호숫가의 마을들- 그것은 당시 그에게 있어서는 유일무이한 인간 세계였는데- 그 속에 너무나도 많은 고통과 눈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서의 갈릴래아 선교의 내용 가운데 많은 병자와 불구자가 등장하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를 잃은 어머니나 아버지, 사람들에게 멸시당하는 세리나 창녀에 대한 이야기, 그뿐만 아니라 성서 저자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애처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배후에 꿈틀거리고 있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예수는 도보로 마을에서 마을로 옮겨 다니거나, 혹은 배로 호숫가의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오면 햇살을 받은 호수는 평온하고, 호수 주위에는 빨간 코크리크 꽃이 만발한다. 멀리 헤르몬 산은 눈으로 뒤덮여 하얀 모습을 하고 솟아 있다. 갈릴래아의 봄! 자연은 이렇듯 아름답다. 그것은 그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하느님의 사랑, 사랑이신 하느님의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마을과 부락에서 그가 목격해야 하는 인간의 현실은 너무나도 애처롭다. 사랑의 하느님과 이러한 인간의 현실을 어떻게 결부시켜야 하는가?
예수가 그 제자들을 데리고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을 얼마나 돕고자 했는지는 ‘기적 이야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마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도 찾아갔을 것이다. 또한 ‘악령에 사로잡혔다’고 해서 사람들의 공포의 대상이 된 채 마을에서 동떨어진 오두막에서 외롭게 지내야 하는 말라리아 환자가 있는 곳에도 찾아갔을 것이다. 그는 사랑의 하느님이 이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을 믿고 있었다. 이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호수 건너편으로 티베리아가 보인다. 하지만 예수는 그 티베리아를 방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곳에 살고 있는 부족함이 없는 사람,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유한 사람들에게 그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비참한 현실 속에 울고 있는 이들, 가난한 마을과 부락의 낡은 오두막에 사는 병자와 불구자들이었다.
그들을 보며 예수는 마음 아파했고, 연민과 사랑의 정을 느꼈다. 인간은 대개 아름다운 것과 매력적인 것에 마음이 끌리지만, 추하고 더러운 것은 외면한다. 그러나 예수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멸시받는 창녀나 나환자들에게 사랑을 느꼈던 것이다.
‘기적 이야기’에 등장하는 불행한 사람들, 그들의 고통이 무겁게 예수의 야윈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그는 이때 이렇게 기도했을 것이다.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머지 않아 십자가 위에서 외칠 시편의 이 구절을 바치며 그는 갈릴래아의 비참한 사람들을 위하여 수없이 간구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온 감시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그들은 민중이 변덕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윽고 민중의 열광은 사그라지게 되고, 예수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의 열광은 어디까지나 그가 자신들의 꿈을 이루어주리라는 기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꿈이 헛되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감시원들은 그때를 끈기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 갈릴래아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자 요한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케루스 요새에서 불운의 죽음을 맞이한 이 예언자에게 가졌던 존경심과 동정심이 그 제자인 예수에게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세례자 요한처럼 세례를 베풀지 않는 것을 보자 그들의 기대는 다른 쪽으로 바뀌어 갔다. 어쩌면 이 예수야말로 민중의 지지를 얻어 큰일을 할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는 30년 전에 갈릴래아의 가말라에서 일어난 발란 사건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가말라 출신인 유다가 빼앗긴 유다 왕국의 영광을 되찾고자 사람들을 모아 나자렛 북방 2마일 거리에 있는 세포리스에 있는 로마 병기고를 점령했던 것이다. 그들의 봉기는 로마 장군 바루스에 의해 바로 진압되었지만, 그 뜻은 열심당이라고 불리는 비밀결사에게 계승되어 갈릴래아는 열심당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휘스지크가 『나자렛 사람』에서 “애국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신들이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 예수가 그 지도자가 되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한 말은 옳은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열심당이나 갈릴래아 반란을 지지하던 이들은 예수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에워싼 군중 가운데 그러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군중뿐 아니라 제자들 가운데도 그러한 이들이 있었다. 열심당원이었던 시몬, 베드로, 유다. 그들이 스승인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예수는 알고 있었다.
그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정해져 있었다. 동향 갈릴래아인으로서 예수는 민족주의자들의 순수함을 잘 알고 있었다. 오랜 기간 정복자에게 학대받아 온 유다인들의 비원(悲願)과 고뇌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서 예수와 그들은 서로 달랐다. 후에 그는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라고 말했다(마태 26,52). 더불어 “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고, 이 시기의 예수는 그들에게 단지 조심스럽게 충고를 했을 뿐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서나 선한 사람에게서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어라.”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나타나지만 속에는 사나운 이리가 들어 있다.”
이러한 가르침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들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으리라. 제자들조차 예수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했다.
29년의 과월절이 다가왔다. 전통적으로 유다인들은 과월절에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재림할 것이라는 믿음을 간직해 왔다. 당시 로마는 1년 전부터 유다인들을 엄하게 규제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로마의 처신은 과월절이 다가옴에 따라 유다인들의 애국 감정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었다. 때마침 예루살렘에서는 지사 빌라도가 갈릴래아인들을 여러 명 처형하는 사건이 일어나고(루가 13,1), 실로암 탑이 무너져 18명이 희생되었다. 이 불길하고 불온한 공기 속에서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는 점차로 갈릴래아 호숫가의 사람들로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그를 메시아라고 하는 이마저 생겨났다.
예수의 여정으로 보아, 갈릴래아 선교의 절정은 ‘과월절을 며칠 앞두고’(요한 6,4) 수많은 군중이 산에 모였던 사건이다. 이날 오후에 예수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는데,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데도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몫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준비하지 않았다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는 군중을 무리 지어 풀밭에 앉게 하고, 몇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를 늘려서 그들을 먹이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을 행했다고 한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행한 기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이 기적뿐이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예언자 엘리사가 스무 개의 빵을 늘려서 백 명을 먹였다는 구약의 열왕기 하권 4장 42-44절의 내용과 비교하여, 예수의 빵의 기적 이야기는 구약의 이 내용을 원형(原型)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기적 이야기가 과월절을 며칠 앞두고 일어난 사건이라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에 주목한다. 과월절은 유다인의 민족 감정이 고조되는 축제인데, 사건은 이 과월절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기, 즉 정복자를 몰아내고 유다를 재건할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예수의 인기(人氣)가 결부되어 있던 때에 일어난 것이다. 오천이라고 하는 숫자는 성서 저자들의 과장이겠지만, 엄청난 군중이 예수를 에워쌌을 것이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서는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의 일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피해 가셨다.”
결국 이 기적 이야기의 배후에는 예수를 민족 지도자로 추대하려는 군중과 이를 거절한 예수의 관계가 암시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오천 명의 군중은 정복당한 유다인을 의미하며, 이에 대해 예수는 사랑이라는 양식을 나누어주었다는 것이 이 기적 이야기 주제이다. 그것은 유명한 최후의 만찬 내용과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면서 동시에 예수가 자신을 ‘지상의 메시아’로 떠받드는 군중의 기대를 거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배후에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또 다른 사건, 즉 유명한 산상설교를 읽어 보면 이 두 개의 이야기는 묘하게도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먼저 빵을 늘려서 군중들을 배불리 먹였다는 기적 이야기와 산상설교의 상황이 각 복음서에서 같은 형식의 서두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오에 의하면 산상설교는 문자 그대로 ‘산’에서, 빵의 기적 이야기는 ‘외딴 곳’에서 행해졌는데, 두 장면 모두 ‘마을에서 떨어진 곳’으로 해석할 수 있다. 더욱이 두 장면 모두 군중과 제자 앞에서 행해진다.
따라서 이 두개의 이야기는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 두 개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보면 상황은 이러하다. 과월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후, 산에서 모인 수많은 군중은 예수에게 지금이야말로 유다를 위해서 일어설 때이며 당신이 중심이 되어준다면 따르겠노라고 외친다. 과월절이라는 민족적인 감정이 고조되는 축제를 며칠 앞두고 군중은 흥분하고 있었다. 성서는 이 열광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서 18장 36절의 예수의 말에 강하게 암시되어 있다.
군중은 예수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의 주위에는 제자들도 있었고, 또한 감시원도 사람들 가운데 잠입해 있었을 것이다. 제자들도 감시원도 예수가 어떻게 답할지 잔뜩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는 말했다. 이때 그는 이사야서 61장 1-3절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열심한 유다교도인 군중들에게 이 이사야서의 내용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야훼의) 종의 사명은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이사 61.1-3)
이어서 예수의 음성이 바람결에 실려 들려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유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차지 할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그의 음성은 양 떼가 풀을 뜯는 완만한 언덕, 그리고 호수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숲으로 퍼져 갔다. 숲은 바람결에 살랑거리고, 호숫가에는 새빨간 코크리크 꽃이 활짝 피어 있다. 햇살이 내리쬐는 호수는 잔잔하고, 멀리 작은 배가 떠 있다.
군중들은 술렁거렸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기대에 찬 외침에 대해 예수가 이와 같은 의외의 말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그들에게 영향을 미쳐 온 랍비 전통의 유다교의 경우, 사랑이라는 관념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최고의 가치로 하여 신앙을 고무(鼓舞) 하지는 않았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우는 사람’, ‘착한 사람’을 이렇게 높이 여긴 적도 없었다. 예수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때문에 나는 너희 모두에게 이렇게 말한다”라며 예수는 이어서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라. 너를 미워하는 이에게 은혜를 베풀라. 너를 저주하는 이도 축복하라. 너를 모함하는 이를 위해서도 기도하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밀라. 겉옷을 빼앗는 이에게 속옷마저 내주어라.”
이와 같은 사랑의 가르침은 이전에 어떠한 율법학자나 사제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세례자 요한을 포함해서 어떠한 예언자도 이러한 사랑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이 사랑의 원리는 율법의 조문을 중요시하는 태도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전적(全的)인 성실, 순수성, 진실성, 자기부정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원수를 사랑하고,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푸는 것… 그것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로서 할 일이 아닌가! 용서하는 것… 베푸는 것….”
그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들어온 지혜서의 삶의 처세술이나 바리사이파의 계율과는 전적으로 다른, 인간으로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의 호소였던 것이다.
군중은 동요했다. 그들은 비로소 예수의 분명한 대답을 들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민족족인 절규에 대해 이와 같은 답변을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군중은 환멸을 느꼈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예수의 이미지와 사랑을 호소하는 실제의 예수는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들의 요구를 이 유명한 가르침으로 물리쳤던 것이다. 그들은 일어나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환멸을 느낀 나머지 욕을 해댔고, 분노의 절규를 하는 이도 있었다. 예루살렘의 감시원들만이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던 예수에 대한 민중의 환멸과 이반(離反)이 이날부터 시작되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
이때 예수에 대해 환멸을 느낀 것은 산에 모였던 군중만은 아니었다.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도 적지 않은 동요가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반년에 걸친 선교 기간 동안 예수를 따르는 제자의 숫자는 제법 늘어나 있었다. 흔히 제자라고 하면 12사도를 떠올리게 된다. 이 ‘12’라는 숫자는 유다인들이 신성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부나 세리 출신인 그들은 처음에는 일상적인 직업을 가지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갈릴래아를 떠나 스승을 따라다니게 된다.
갈릴래아인이자 순수한 유다교도였던 그들 가운데는 열심당원이었던 이도 있었는데, 열심당에 속하지 않은 이도 민족적인 감정이나 국가 의식은 투철했다. 그들이 예수를 따르게 된 동기 역시 각각 달랐겠지만, 군중과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예수를 민족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루가 24,21)라는 고백에 의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의 인기가 점차로 높아짐에 따라 더욱 구체화되었고, 그들의 그 구체적인 기대가 산상설교에 의해서 거부되자 제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군중의 환멸과 제자들의 동요, 이것을 감시원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그들은 예수가 산에 모인 군중의 요구에 응하면, 즉시 유다 지사 빌라도나 헤로데 안티파스 왕에게 보고하여 그를 선동자로 몰아 체포할 생각이었는데, 예수는 군중의 기대와 반대되는 선언을 했던 것이다. 성서를 보면 잘 알 수 있지만, 예수는 이때뿐만 아니라 갈릴래아 선교 동안 결코 자신을 메시아(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스타우퍼는 “근본적이고 확실한 첫 번째 사실은, 메시아라는 개념이 어록 사료(語錄史料: 성서가 쓰이기 이전 예수의 말씀을 모은 사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유다인의 왕이라는 칭호도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어록 사료는 예수의 어떠한 메시아적인 자기 증언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어록 사료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자칭(自稱)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라고 썼다.
이날 감시원들은 예수를 선동자로 몰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에 환멸을 느낀 군중과 동요하기 시작한 제자들은 볼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날의 상황을 즉시 예루살렘 의회에 보고했을 것이고, 예루살렘 의회는 장래의 대책에 대해 상의했을 것이다. 오랫동안의 경험으로 군중의 심리를 잘 알고 있던 그들에게 예수가 산상설교를 하던 날은 경사스러운 하루였다. 왜냐하면 군중은 자신들의 열광적인 기대가 거부된 만큼 상대에게 환멸과 함께 증오를 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감시원들은 변덕스러운 민중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 또한 민중의 이러한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갈릴래아에서의 반년 동안 사람들에게 에워싸이고,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사람들이 환성을 올리며 맞이했을 때부터 그는 언젠가는 이들이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하느님, 하느님의 사랑, 이는 말하기는 쉬워도 현실에서 증거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사랑’은 많은 경우에 무력하고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하느님의 부재(不在)나 하느님의 침묵, 혹은 하느님의 분노를 암시할 뿐으로 그 어디에 ‘사랑’이 숨겨져 있는지, 우리를 난처하게 할 뿐이다.
예수는 민중이 결국은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만을 추구한다는 것을 이 반년이란 세월을 통해 절실히 느껴야 했다. 그는 사랑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전했는데, 이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제자들마저 그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도 민중도 ‘사랑’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만을 그에게 요구했다. 맹인들은 눈을 뜨게 되는 것만을, 절름발이는 걸을 수 있게 되기를, 나환자는 농이 흘러나오는 상처가 치유되기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공관복음서나 요한복음에서 기록된 수많은 예수의 기적 이야기는 그가 기적을 정말로 행했는가 하는 통속적인 의문보다는 군중이 요구한 것은 기적뿐이었다고 하는 슬픈 사실, 그리고 현실적인 기적만을 요구하는 군중에 둘러싸여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는 이러한 병자나 불구자를 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과 함께 사람들이 기피하는 나환자들이 사는 계곡도 찾아갔으며, 말라리아에 걸려 괴로워하는 이의 오두막도 찾아갔다고 성서는 분명히 전한다. 당시 나환자들은 머리를 삭발하고, 특별한 옷을 입고,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들이 사는 곳에 접근하면 소리를 질러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그들을 찾아 그늘진 산구석이나 계곡을 다녔다. 그는 그들을 고쳐주고 싶어 했으며, 맹인도 절름발이도 고쳐주고 싶어 했고, 또 아이를 잃은 어머니에게 아이를 되돌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자 그의 눈에는 슬픈 빛이 떠올랐다. 그는 나환자나 불구자의 손을 잡으며, 자신이 그들의 고통을 떠맡게 되기를 바랐다. 그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 이것이 예수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나환자도 불구자도 단지 치유되기만을 바라며, 고쳐달라고 예수에게 매달린다.
“너희는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다”(요한 4,48).
많은 기적 이야기 가운데 복음서가 남기고 있는 예수의 다음과 같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지만 예언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마태 12,39).
“어찌하여 이 세대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마르 8,12).
복음서가 남기고 있는 예수의 이 말들이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사랑’이 아니라 징표와 기적을 바랐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쓰였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감시원들의 배후 공작은 서서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불안과 동요를 느꼈지만 아직 스승을 저버릴 이유는 없었다. 한편, 그렇게도 예수를 에워쌌던 갈릴래아 군중들의 열띤 분위기는 급속히 식어 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그들의 눈에 예수는 ‘기대를 저버린 예언자’로 비치기 시작했다. ‘무력한 남자’,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라는 예수의 새로운 이미지가 감시원들의 공작으로서 서서히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은 이윽고 가을로 바뀌어, 호숫가의 밀밭이 누렇게 물드는 계절이 되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예수는 혼자서 기도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아직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분명히 유다 광야에서 그랬듯이 심한 갈등과 대립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있었다. 그는 갈릴래아의 비참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자 할 정도로 사랑에 불탔으며,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이 이들을 내버려 두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랑의 신비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갈릴래아 호숫가의 사람들은 사랑보다 현실적인 효과를 요구하며, 결국은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이때 예수는 어찌하면 좋을지 필사적으로 하느님에게 물었을 것이다. 예수는 이때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고통에 가득 찬 시편의 기도를 몇 번이고 되뇌었을 것이다. 그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독의 순간순간이었겠지만, 제자들은 아직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머지않아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가 피땀을 흘릴 때도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이때도 그들은 스승의 마음속에 있는 비애(悲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그렇게도 열렬히 예수를 맞이하던 가파르나움이나 코라진, 베싸이다 같은 호숫가 마을에는 냉랭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 ‘무력한 남자’라며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사람들의 이러한 변질에 대해 예수는 매우 슬퍼했다(마태 11,21).
예수가 갈릴래아에서 나자렛으로 돌아온 것은 필시 이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1년 전에 그는 나자렛을 떠나 어머니 일행과 함께 갈릴래아로 옮겨 살았는데, 악화된 사태는 그를 다시 나자렛으로 되돌아가게 했던 것이다.
감시원들은 이 사실을 이미 나자렛에 알린 듯하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의 일행을 의혹의 눈으로 맞이했다. 예수의 사촌들조차 돌아온 그를 반갑게 맞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에 자신들을 버리고 유다 광야로 떠나 버린 그가 쫓기듯 다시 되돌아온 것을 보고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자로 여겨 붙잡으려 했다(마르 3,21).
감시원들은 나자렛에서도 예수에게 논쟁을 걸었다. 그들은 예수가 이야기하는 것이 하느님의 메시지가 아니라 악령의 이야기라고 단언했다. 주민들 가운데는 호숫가 여러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기적을 요구하는 이도 있었는데, 그들의 요구는 기대감이 아니라 단지 호기심과 경멸의 빛을 띠고 있을 뿐이었다. 기적을 행하지 않는 예수를 보고 분노에 사로잡힌 그들은 그를 마을 남쪽에 있는 바위산 절벽으로 데리고 가, 밀어 떨어뜨리려고 했다(루가 4,29).
성서 곳곳에 묘사되어 있는 이 나자렛에서의 불길한 사건을 하나로 묶어 보면, 갈릴래아 호숫가를 떠난 예수가 얼마나 험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친지와 친구들마저 반감과 적의로 대하자, 예수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가 9,58)라는 비애에 찬 말을 하는데, 이 말은 오늘날에도 음미해 볼 만하다. 이어서 그는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라고 탄식하며 다시 고향을 떠났던 것이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
요한복음서 6장 66절만이 언급한 이 제자단(弟子團)의 붕괴는 아마 이 시기 전후에 일어난 일로서, 이후에는 소수의 제자만이 예수를 따랐을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너희도 떠나가겠느냐?”라고 슬픈 듯이 물었다고 요한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떠나간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에게 기대를 걸 수 없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당시 그들 대부분은 아직 예수가 민중을 이끌 가능성이 있는 스승이고, 세례자 요한을 대신할 지도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갈릴래아 호숫가에서도 나자렛에서도 점차 민중이 등을 돌려 떠나는 것을 보자 따를 마음이 없어졌던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도 ‘무력한 남자’,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로 비쳤던 것이다.
남아 있던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너희도 떠나가겠느냐?”라고 슬픈 표정으로 묻는 예수에게 베드로는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라고 답했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은 훗날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케리그마)을 반영한 것으로 아마 남은 제자들 역시 불안에 사로잡히고 망설였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게 걸었던 기대의 절반은 포기한 상태였고 다른 제자들처럼 가능하다면 떠나고자 했겠지만,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홀로 된 예수를 버려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예수가 무력하게 보일수록,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저버릴 때 겪게 될 후회와 초라함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자렛을 떠난 예수와 남은 소수의 제자들은 황량한 구릉지대를 지나 근처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녔다. 제자들은 매우 지쳤고, 희망을 잃어가고 있었다. 예수는 하느님을 찾았다. 몇 번이고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비탄에 찬 절규를 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건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아직 스승의 내면적인 투쟁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하였다.
남은 제자들이 몇 명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12명보다는 다소 많았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윽고 예루살렘에서는 유다 이스가리옷이 제자 그룹에서 떨어져 나가는데, 이탈자는 유다 이외에도 더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제자들의 이름도 전부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마태오(레위)와 토마,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시몬과 유다 이스가리옷인데, 이들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의 명단이고 루가 복음서의 명단에는 타대오 대신 ‘야고보의 아들 유다’(예수를 배반한 유다 이스가리옷과는 별개 인물)가 들어 있다. 아마도 이들은 동일 인물일 것이다.
나자렛을 떠나 북쪽의 삭막한 구릉지대를 향해 지친 발걸음을 옮기며 묵묵히 예수를 뒤따르는 이들 10여명의 제자들의 모습을 떠올릴 때, 우리는 일종의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언급했듯이 제자들은 유다의 사제 계급에 속하지도 않았거니와 율법학자들처럼 학식 있는 이들도 아니었고 또한 티베리아의 부유계층에도 속하지 않았다. 예수를 알기 전까지의 그들은 유다 이스가리옷을 제외하고는 갈릴래아 호숫가의 이 마을 저 마을에 사는 중하위 계층의 세리나 어부로, 그로부터 20여 년 후에 바오로가 고린토의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대해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라고 한 것은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들이 예수의 사랑의 이상(理想)을 이해하여 제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거듭 언급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갈릴래아 호숫가의 군중이 예수를 찾았던 것과 같은 동기로 제자 그룹에 참가했을 뿐이다. 성서 저자들은 소박한 그들 역시 순수한 유다교도로서의 정의감이나 개인적인 야심, 그리고 허영심을 품고 있었던 점, 그리고 그들에게 용기나 강한 의지가 결여된 사실을 끝내 숨길 수 없었다. 후에 그들은 체포된 예수를 버렸을 뿐 아니라, 의회에 목숨을 구걸하여 신변의 안전을 꾀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제13장 참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속물이고 겁쟁이였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다. 예수를 오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한 그들이 많은 제자들이 떠나간 후에도 이 비참한 스승의 뒤를 마지못해 따라다닌 것은 아마 예수의 눈에서 말할 수 없는 순수함과 슬픔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그 사람의 순수함을 생각하면 자신의 초라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이따금 있다. 그즈음의 제자들에게 예수는 그러한 스승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지닌 그들도 이윽고 스승을 배반하게 된다.(유다 이스가리옷뿐만 아니라 남은 제자 모두가 배반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뒷장에서 상세히 다루고 싶다.) 소위 그들은 결국 우리와 마찬가지로 겁쟁이, 비겁자, 몹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이 예수가 죽은 후 갑자기 깨닫게 된다. 겁쟁이, 비겁자였던 그들은 이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예수를 위해 힘든 여행과 박해를 견디어 낸다. 베드로는 64년경에 로마에서 순교하고, 안드레아는 그리스의 파트라스 시에서 아사형(餓死刑)을 받는다. 열심당원이었던 시몬도 스아닐 시에서 예수를 전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바르톨로메오도 알바나 시에서 산 채로 가죽이 벗겨져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한다.
불가사의한 이 변화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까? ‘무력한 남자’인 예수가 그들에게 남긴 흔적이 그렇게 그들을 만든 것일까? 만일 우리가 성서를 예수 중심이라는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라 제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읽으면 그 테마는 단 하나, 겁쟁이, 비겁자, 몹쓸 인간이 어떻게 해서 강한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으로 귀착된다. 더불어 그 불가사의한 제자들의 변화를 원인이야말로 성서가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테마이자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 가을에 예수와 그들은 말 그대로, ‘머리 둘 곳’도 없이 남부 갈릴래아(루가 7,11)와 띠로와 시돈 지방(마르 7,24-31)으로 유랑의 여정을 계속했던 듯하다. 그들이 다닌 곳이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것은 아마 이 시기의 기억이 성서 저자들에게 예수의 전승을 전해준 당시의 제자들에게 있어 쓰라린 추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의 내면의 싸움은 제자들도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인데, 이는 예수 자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마르 7,36; 8,26). 더불어 얼마 남지 않은 제자들마저 한 사람씩 떠나갔다고 추측할 수 있는데, 이는 결국 제자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 무력한 예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예수 일행의 이 방랑의 여정이 얼마나 계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남부 갈릴래아나 띠로나 시돈을 거쳐 호숫가로 되돌아왔다가 다시 북쪽의 트란스 요르단 지역을 다녔다는 것은 마르코 복음서에 희미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들은 마치 도망치고 있는 듯했다”라고 스타우퍼가 진술했듯이 이 여정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군중은 이전처럼 예수 일행을 에워싸지도 않았고, 열광적으로 맞이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때로는 가을비를 맞아가며, 때로는 묵을 집도 없는 여행을 계속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예수의 내면에서는 유다 광야에서 겪었던 것 이상으로 내적 투쟁이 계속되었을 것인데,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예수의 마음은 우리 인간들로서는 간파하기 힘든 심오한 신비에 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점, 즉 이 방랑의 여정 중에서도 예수의 ‘사랑의 하느님’에 대한 신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는 이때 자신의 고통스러운 심정을 하느님께 털어놓으며 사랑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거해야 할지를 하느님께 물었을 것이다.
호숫가의 여러 마을에서 그가 마주친 수많은 불행한 사람들, 그런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느님의 사랑’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들을 고독과 체념의 세계로부터 이끌어 내야 한다. 예수는 인간에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가난이나 병이 아니라 가난과 병으로 인한 고독과 절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군중이 요구하는 기적을 행할 수 없었다. 호숫가의 여러 마을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버려진 열병 환자 옆에 다가가 그 땀을 닦아주고, 아이를 잃고 슬퍼하는 어머니의 손을 쥐고 밤새 함께했지만 기적 같은 것은 행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군중은 그들 ‘무력한 남자’라고 부르고 호숫가에서 떠나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최대의 불행은 그들을 사랑하는 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고독감과 절망감, 이것이 그들이 겪는 불행의 내용이었다. 따라서 그가 볼 때 필요한 것은 ‘사랑’이지 병을 고치는 ‘기적’은 아니었다. 인간은 영원한 동반자를, 자신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나눌, 함께 눈물을 흘려줄 어머니와 같은 동반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점을 예수는 알고 있었다. 하느님이 아버지와 같은 엄격한 존재가 아니라, 어머니처럼 고통을 함께 나누는 분이라고 믿고 있던 예수는 그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위해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불행한 사람들을 만날 때,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다음과 같이 될 것을 바랐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 방랑의 여정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예수는 가슴속에 이런 질문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사랑의 하느님’이 자신에게 답하시는 음성을 조금씩 들었는지도 모른다.
힘든 이 여정에는 또한 예기치 못한 위험이 따랐다. 마르코복음서에 의하면 감시원들이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지지자와 상의하여 예수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예수와 제자들은 헤로데 안티파스 왕의 영지에서 피해야 했다. 그때 예수는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루가 13, 33)라고 말했다.
아마 그즈음 예수 일행은 헤로데 필립보 왕이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위해서 만든 도시, 가이사리아 필립보 근처의 구릉지대에 도착한 듯하다. 산에 둘러싸인 이 도시는 요르단 강의 수원(水源)에 해당되며, 옛날에는 바알갓(여호 11, 17), 혹은 바알헤르몬(판관 3, 3)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근처의 구릉지대에서는 멀리 헤르몬 산의 하얀 봉우리가 보인다.
희망을 잃어가는 피로에 지친 제자들과 함께 구릉지대에 도착한 예수는 비로소 그들에게 자신의 앞으로의 운명과 그들을 후계자로서 선택할 결심을 털어놓았다. 마르코복음서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 (마르 3, 13-4).
많은 성서학자들은 예수가 갈릴래아 선교 초기에 12사도를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갈릴래아와 고향 나자렛을 떠나 힘든 방랑의 여정 끝에 가이사리아 필립보에 도착해서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가 끝까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비로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고, 결속을 촉구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이 방랑의 여정은 제자들과 예수와의 결속을 시험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예수는 남은 제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생각으로는 마르코 복음서 3장 13-19절의 내용은 8장 27절에 연결시켜야 하고, 마찬가지로 마태오 복음서 10장 4절은 16장 13절에, 그리고 루가 복음서 6장 16절은 9장 18절에 연결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구릉지대에서는 계곡 아래에 위치한 가이사리아 필립보가 내려다보인다. 도시 근처에는 작은 폭포와 샘이 있고 물이 흐르고 있다. 그것이 요르단 강의 근원으로 거기서부터 강은 굴곡을 이루며 그들이 떠나 온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들어 가고, 다시 그 호수에서 유다 광야로 흘러가는 것이다. 이전에 예수가 이 강의 물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던 일은 제자들도 기억하고 있었다.
예수는 그 일을 떠올리면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제자들로서는 스승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수수께끼 같은 ‘받아야 할 세례’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들은 단지 예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다. 자신들 이상으로 지치고 슬픔에 찬 그 눈을….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이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제자들은 스승이 자신이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알아채지 못한다. 이 현실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사랑의 불을 이 세상에 놓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하는 이 말의 요지를 제자들은 아직 깨닫지 못한다.
왜 예수는 그런 애매한 표현으로 자신의 죽음과 수난을 제자들에게 털어놓았는가? 그것은 불치의 병에 걸린 어머니가 어린아이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각오를 에둘러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비슷한 것일까?
하지만 이윽고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나는 자신에 대해 (예언서에) 쓰여 있는 그대로 떠나간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제서야 스승이 말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린다. 하지만 이 예언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자들은 틀림없이 이때 이 예언자가 누구인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사야라고 하며,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를 떠올려 보라고 말한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
(이사53장)
제자들은 예수의 진의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이사야서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서 뭔가 불길함과 두려움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들은 스승의 앞길에 그 불길한 운명이 자리하고 있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예수는 마치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예언하고 있는 듯하다. 왜 그는 그러한 수난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하느님은 왜 내버려 두고 계시는가?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제자들은 필사적으로 물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가 가만히 있었는지, 뭐라고 말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단, 확실한 것은 제자들의 의문과 혼란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만일 그들이 예수의 진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얼마 후 닥쳐올 비참한 스승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 경악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난과 죽음에 대한 이 말에 대해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밖에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성서 가운데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신앙으로부터 창작된 내용 중에는 제자들이 정말로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는지를 다룬 부분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만은 제자들의 겁먹고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마태 16, 22).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마르 8, 32).
베드로뿐만이 아니었다. 예수의 이 말을 들은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성서에 나타난 제자들의 이름은 반드시 그 본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 전체, 혹은 그룹의 여러 사람의 심리를 표현할 때 쓰이는데 (예를 들어 베드로의 배반 이야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특히 베드로와 유다의 경우에는 이 점이 명료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이 경우도 제자들 전원의 심리가 그러했다고 하는 편이 옳은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라는 마태오 복음서 17장 23절의 내용은 제자들 모두가 겁먹고 당혹스러워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때 예수는 제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르 10, 45).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 13).
이러한 구절들은 예수가 당시 자신의 결의를 설명하기 위해 말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많은 사람’, ‘벗’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예수는 티베리아에 살고 있는 사제나 율법학자들처럼 부족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들이 아니라,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는 가난한 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가 만났던 많은 병자들, 아이를 잃은 어머니,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 발을 못 쓰는 남자, 죽음에 처한 소녀…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 함께 짊어지는 것,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는 것… 따라서 예수는 과월절에 희생되는 어린양처럼 자신도 그들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기를 바랐다. ‘벗을 위해서’, 아니 ‘인간을 위해서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무력하게 보이더라도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최상의 방법인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가 이 말을 한 후에 제자들에게 선교 여행을 떠나도록 명했다고 쓰고 있다.
“예수께서 산에 올라 가…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마르 3, 13-14).
루가는 이 장면 앞에 예수가 하루 종일 기도하고 있었다는 내용을 첨부하고 있다. 아마 그 기도는 피땀을 흘리며 바친 게쎄마니 동산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고통과의 싸움이었으리라. 그는 인간의 모든 고통을 짊어짐으로써 그들의 영원한 동반자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의지와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는 이 가이사리아 필립보의 구릉지대에서 잠시 제자들과 헤어질 생각을 했다. 그것은 선교 훈련일 뿐 아니라, 자신이 죽은 후 그들에게 닥쳐올 고생을 이겨 낼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극기 훈련이기도 했던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여행 수칙을 이야기했다.
(1)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다닐 것(전도 4, 9-12).
(2) 먹을 것도, 지갑도, 돈도 지니지 말고 지팡이와 신발 한 켤레, 그리고 속옷 한 벌만 준비할 것. (마태오 복음서는 신발과 지팡이마저 지니지 말라고 되어 있다. 루가 복음서는 지팡이를 지니지 말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내용을 따른다.)
(3)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사람들에게 알릴 것.
(4) 호의를 보이는 이의 집에는 머물되, 그렇지 않은 집에는 그 이상 성가시게 하지 말 것,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미워하는 이에게 베풀고, 저주하는 이를 축복하고,
욕설하는 이를 위해서 기도하라.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내밀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마저 주어라.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
남을 심판하지 말고, 벌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제자들이 이 구체적인 여행 수칙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수는 또한 이때 “이렇게 기도하라”하며 다음 이 기도를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며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슈바이처 같은 이는 예수의 갈릴래아 선교 중에 제자들이 선교 여행을 떠났다고 보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이 이 선교 여행에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오리라고는 결코 기대하지 않았으리라. 왜냐하면 제자들의 마음 자세가 ‘예수에게 자비를 청하는 맹인’을 업신여기며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마르 10, 48)을 때나 “어린애가 예수에게 다가오는 것을 막았을”(마르 10, 13) 때와 마찬가지로, 별로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파견한 그의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의 죽음 후의 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또 하나는 자신의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 인간의 동반자인 존재에 의한 사랑의 세계-의 도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갈릴래아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제자들을 선교 여행에 내보냈던 것은 예수가 자신이 죽음을 예감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슈바이처(역주: Schweitzer, Albert. 독일계의 프랑스 의사·사상가·신학자·음악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에는 목사와 대학 강사를 지낸 바 있다.)의 이름이 언급된 김에 이야기해 두지만, 이 유명한 성서 학자는 가이사리아 필립보에서 예수가 처음으로 자신을 ‘메시아’로 밝힌 성서의 내용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마태 16, 13-20).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그때까지 예수는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와 동의어(同義語)로서, 갈릴래아의 민중이 그를 민족운동의 ‘메시아’로 삼으려고 했던 때도 예수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이사리아 필립보에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답을 그가 긍정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어찌 된 일일까?
현대 성서학자들 가운데는 이 대목을 원시 그리스도 공동체의 신앙에서 생겨난 창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어, 보른캄(G. Bornkamm)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이야기에는 후대 교회의 신앙 고백이나 사상이 담겨 있다. 그것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예수의 생애를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쓴 고도(高度)의 역사적 증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보른캄도 이를 뒷받침할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 확실한 것은 예수가 이때 “선생님은 그리스도(메시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았더라도 베드로가 말하는 메시아와 예수가 생각한 메시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전자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나 유다에서 정복자를 몰아낼 지상적인 메시아를 이야기한 것인 데 반해, 후자는 사랑의 메시아,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로서의 메시아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짜른트(H. Zahrnt)가『사적(史的) 예수의 탐구』에서 언급한 다음의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결코 자신의 영예를 그 선교의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예수는 자신에 대한 영예로운 칭호를 요구하지 않고, 자신의 인격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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