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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1-28 “기도하고 왜 근심합니까?”
18 한나가 말했습니다.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총받기를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한나는 가서 음식을 먹고 그 이후로 얼굴에 근심을 띠지 않았습니다.
1. 위대한 인물은 어머니로부터 시작됩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헌신 없이 한 아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한 시대를 짊어졌던 선지자 사무엘도 그렇습니다.
2. 어머니 한나의 슬픔이 컸습니다. 남편 엘가나가 아내를 구박했던 것도 아니고 가난했던 것도 아닙니다. 남편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없었습니다.
3. 남편이 다시 얻은 둘째 아내 브닌나의 조롱과 멸시 때문에 한나의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져도 갖지 못한 한가지가 주는 고통은 끔찍합니다.
4. 이상한 일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진 것을 생각하기보다 남에게 있으나 내게 없는 것을 생각하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져도 불행합니다.
5. 물론 자녀가 없는 것은 다른 일과 다릅니다. 남편의 위로가 아무리 커도 브닌나의 냉소 하나가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이때가 진정한 신앙의 갈림길입니다.
6. 한나는 남편과 끝없이 실랑이를 벌이지 않았습니다. 브닌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미웠겠지만 그녀와 날마다 다투거나 일마다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7. 한나는 문제를 하나님께 갖고 갔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았습니다. 솔직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브닌나를 원망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8. 하나님께 서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구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나 형식에 아무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본질이 다릅니다.
9. 내 원과 한을 풀어달라는 기도가 바뀐 것입니다. 처음에야 그렇게 기도했겠지요. 울고 불고 서러워서 기도했습니다. 고통 속에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10. 점점 기도는 침묵으로 변해갑니다. “이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를 평생 나실인으로 키워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오래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11. 한나가 술 취한 것으로 오해했던 제사장 엘리가 한나를 축복합니다. 한나는 그 축복기도를 기도의 응답으로 받습니다. 기도는 응답의 믿음으로 이뤄집니다.
12. 기도는 이미 응답되었습니다. 아직 내 품의 아들은 아니지만 더 이상 이 문제로 씨름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안이 밀려왔습니다. 식욕이 돌아왔습니다. 더 이상 불면증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얼굴에 근심의 빛이 사라졌습니다. 바른 기도의 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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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0-17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진짭니다.”
16 그리고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1. 인간의 어떤 선행도 구원의 조건이 아닙니다. 인간의 어떤 성품도 구원의 전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은 삶은 선하고 아름다운 성품입니다.
2. 선하기 위해 애쓰는 것도 아니고,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기로 결정하신 분이 그렇게 우리를 빚어갑니다.
3. 그분의 선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선이 아닙니다. 나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한 선행이 아닙니다. 이해득실을 따져보고 베푸는 관대함도 아닙니다.
4. 그 선은 육신의 욕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벗어난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 선은 자신의 피로 백성을 구원해낸 거룩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5. 그래서 내 이름과 내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착함이나 웃는 얼굴과는 본질이 다릅니다. 그런 착함과 웃는 얼굴은 인간 내면의 깊은 악의 다른 얼굴입니다.
6.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이 고쳐질 수 없는 것을 아십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가 지니는 한계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7. 예수님은 그 심원한 작업을 다 이루었습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았고 수치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오르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8. 우리의 선행은 십자가 이후의 삶입니다. 우리의 나눔은 부활하신 주님의 나눔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비로소 선행과 나눔으로 드리는 일상의 예배가 되었습니다.
9.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짭니까? 아니면 이곳 사마리아 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진짭니까?”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이 진짜 예뱁니다.
10. 그 삶은 선행과 나눔을 덕행과 구제의 차원으로 격하하지 않습니다. 그 삶의 경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 삶은 드러나거나 알려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11. 이제 크리스천이나 교회의 선행과 나눔이 제발 가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이 몰랐으면 합니다. 정작 본인도 잊었으면 합니다.
12.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일로 헤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시간입니다. 제발 신앙 문제로 격하게 부딪치거나 성품 때문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드리는 일상 속 삶의 예배를 훨씬 더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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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1-9 “음란은 가장 지저분한 일입니다.”
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하게 여기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음란한 사람들과 간음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1. 결혼은 아름다운 연합입니다. 아담의 프로포즈는 진실이고 진심입니다. “당신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랍니다.” 결혼은 부족한 인간이 온전해지는 일입니다.
2. 물론 독신도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분의 신부로 일생을 보내는 일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예나 지금이나 고귀한 선물입니다.
3. 결혼의 제일 원칙은 잠자리를 더럽히지 않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택함으로써 모든 여자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에 그래야 합니다.
4. 그 반대도 마찬가집니다. 한 여자도 결혼으로 모든 남자의 관심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서 결혼은 궁극적으로 사람으로부터 자유하는 첫 걸음입니다.
5. 그런데 결혼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제도 자체를 뒤흔들고 있고, 가정 전체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주범은 음란입니다. 이제 나이도 없고 성역도 없습니다
6. 사랑 안에 성이 포함되지만 성 자체는 사랑이 아닙니다. 성적으로 지나친 욕망은 오히려 사랑의 결핍입니다. 부모의 사랑 받는 아이들은 성적이지 않습니다.
7. 시대가 음란한 까닭은 사랑이 흘러 넘쳐서가 아니라 사랑이 부족한 때문입니다. 더구나 음란의 배후에는 영적인 손길이 뻗쳐 있습니다. 세상은 무지합니다.
8. 언제나 영적인 타락이 성적인 타락에 앞서고, 영적인 간음이 육체적인 간음에 선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몸의 일을 동일한 한가지로 다루십니다.
9. 누구도 간음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다양한 미디어는 간음을 확산하는 일등공신입니다. 예술로 위장한 외설도 꾸준히 음란을 부채질해 왔습니다.
10. 음란이 마지막 시대를 앞당길 것입니다. 음란이 돈과 권력 사이를 제집 드나들 듯 할 것입니다. 종교조차 음란의 공격을 제대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11. 세상 것들로 음란을 이기지 못합니다. 모든 음란을 쥐고 흔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배후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음란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12.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젊은이들이 무엇으로 유혹을 견딜 수 있습니까. 답은 외길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면 눈길이 그리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수록 가정과 이웃을 더 사랑합니다. 음란은 정말 지저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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