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을까요?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야지, 결코 이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면 안 될 것입니다.
1. 세상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
람 다스 "줌바흐 이야기(The Story of the Jaundiced Tailor)"
줌바흐는 재단사로, 그의 옷은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가끔 고객들의 체형에 완벽하게 맞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한 고객이 줌바흐에게 옷을 맞추러 옵니다. 고객은 줌바흐의 옷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줌바흐는 옷을 고치는 대신, 고객의 몸을 고쳐서 옷에 맞추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고객에게 몸을 바꾸도록 설득하고, 다양한 방법을 시도합니다. 다이어트, 스트레칭, 특정 부위의 운동 등을 통해 고객의 체형을 변형시키려 합니다. 고객은 처음에는 불편해하지만, 줌바흐의 권유에 따라 변형을 시도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객의 몸은 점점 옷에 맞게 변형되지만, 고객은 점점 더 불편함과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고객의 몸은 옷에 맞게 되었지만, 건강이 악화되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옷이 몸에 맞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지 않은가? 자신이 둥근 구멍 속에 박힌 사각나사 같은 기분이 들 때가? 그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최선을 다해 옷과 구멍에 자신을 맞추는가? 하버드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인도로 떠나 구도의 길을 걸은 영적 교사 람 다스는 세상의 기대에 자신을 맞출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주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 남자가 새 양복을 맞추기 위해 이름난 재단사 줌바흐를 찾아갔다. 줌바흐는 남자의 치수를 재고 나서 최고의 옷감을 준비했다. 며칠 후 남자는 양복점에 들러 새 양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오른쪽 소매가 왼쪽 소매보다 2인치쯤 더 길었다. 남자가 말했다. "줌바흐 씨, 불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멋진 양복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쪽 소매가 반대쪽 소매보다 적어도 2인치가 길어요."
줌바흐는 모욕을 당한 것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양복에는 잘못된 것이 전혀 없소. 문제는 당신의 서있는 자세에 있소."
그렇게 말하면서 줌바흐는 양쪽 소매 길이가 똑같아질 때까지 남자의 한쪽 어깨를 억지로 밀어 올렸다.
그리고 말했다.
"보시오, 이렇게 서니까 옷이 완벽하게 맞지 않소."
남자가 다시 거울을 보았더니 이번에는 목 뒤로 불록한 주름이 잡힌 것이 보였다.
"줌바흐 씨, 나는 불평하는 게 싫지만 목 뒤로 불룩 튀어나온 저것은 뭔가요?"
줌바흐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양복에는 잘못된 부분이 없소. 당신의 서 있는 자세가 문제라니까!"
그러면서 옷 뒷덜미가 맞을 때까지 남자의 턱을 앞으로 잡아당겨 등이 구부러지게 했다.
"보시오, 완벽하지 않소."
하지만 등을 잔뜩 구부리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남자가 말했다.
"양복 뒤쪽 아래가 치켜 들리는데요."
줌바흐가 맞받아쳤다.
"당신 몸 뒤쪽을 위로 들어 올려 양복 상의 밑으로 들어가게 해 보시오."
재단사의 지시대로 하자 남자는 몸이 몹시 뒤틀린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말했다.
"이렇게 서니까 바지가 너무 짧아 보여요."
줌바흐가 분개하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양복은 전혀 잘못되지 않았소! 무릎을 약간 구부리면 바지가 딱 들어맞을 것 아니오."
그 말대로 하자 남자의 몸이 아주 볼 만했다! 무릎은 구부러지고, 엉덩이는 위로 치켜 들리고, 등은 꼽추처럼 굽었으며, 한쪽 어깨는 올라가고 반대쪽 어깨는 축 처져 있었다. 양복에 몸을 맞추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얼굴은 앞으로 쑥 내밀어져 있었다.
결국 남자는 비싼 돈을 지불하고 나서 어색한 걸음걸이로 양복점을 나섰다. 그가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 어떤 부인이 다가와 말했다.
"정말 멋진 양복이에요! 틀림없이 줌바흐 씨가 만든 옷이군요."
남자가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그걸 알았죠?"
"줌바흐 씨처럼 솜씨 좋은 사람만이 당신처럼 많은 신체적 문제를 가진 사람에게 완벽하게 맞는 옷을 재단할 수 있으니까요."
세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불행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결핍되고, 부족하다고 믿게 한다. 일단 불행하다는 인식을 심어 놓은 다음 종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믿어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설득하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을 따라야만 행복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선전한다. 사업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신상품을 소유해야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광고한다. 이들 모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행복해지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조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이 줄 것처럼 선전하는 행복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스스로 불구가 되는 일이다. 옷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아야 한다. 세상이 재단해 주는 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재단하는 옷을 입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오렌지 과수원에 서 있는 사과나무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 나를 보라. 나는 내비게이션이 고장 나 엉뚱한 행성에 불시착한 존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세상에 맞지 않는'점에 있어서는 전문가이다. 심지어 세상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도 잘 맞지 않는다.
상자 안에 맞지 않으면 상자 밖으로 나와야 한다. 어떤 강물도 강폭이 좁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그저 넘쳐 자신의 길을 만들 뿐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자신의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한다면 그때가 바로 자신의 삶을 만들기 시작해야 할 때이다.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이 되어 미움받는 것이 덜 위험하다. 현실 적응자가 되지 말고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외부의 기준(옷)에 자신을 맞추려 할 때, 스스로를 해치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사람들이 외부의 기준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려 할 때 겪는 부조리와 자기 파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람 다스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들에게 외부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기보다는, 자신만의 기준과 가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이는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강조하는 람다스의 철학적 관점을 잘 보여줍니다.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은 스스로 불구가 되는 것입니다.
능동적 수동성
능동적 수동성은 하나님께 수동적으로 이끌림을 받는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을 열심히 따라가는 삶을 뜻합니다.
성경은 세상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자기 주도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 주도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열정 없이 종교적 의무감이나 두려움 속에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내에서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2. 안디옥 교회의 능동적 수동성
지금까지는 예루살렘 교회(리더: 12 사도) 중심이었으나, 오늘 본문 이후에는 안디옥 교회(리더: 바울과 바나바)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크게 쓰임을 받았던 안디옥 교회의 특징인 '능동적 수동성'을 세 가지로 나누어 보겠습니다.
첫째, 말씀에 대한 능동적 수동성
행 13: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안디옥 교회는 "열정적인 사람들"이었는데, 그 열정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그 말씀에 따르는 '수동성'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교회의 특성은 리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처럼 사도나 집사가 그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리더들의 다양성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바나바: 위로의 아들, 구브로 출신. 이방인과 유대인의 교량 역할을 했습니다.
- 니게르 시몬: 아프리카 출신 흑인으로, 자유인이 된 로마인이었습니다.
- 구레네 루기오: 북아프리카 출신의 무명인이었습니다.
- 마나엔: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이었습니다. (여기서 헤롯은 '헤롯 안디바'인데, 그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심문한 사람이었습니다.)
- 사울
이 다섯 명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졌지만, 모두가 말씀 안에서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요 교사였습니다. 말씀에 헌신된 사람들이었으며, '교사'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안디옥교회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와 가정도 다양하고 다르지만, 모두가 말씀 안에 하나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능동적 수동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흥왕하고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세상이 말로 소란스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 하여 더해질 것입니다. 말씀 안에 우리 인생을 가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날마다 새롭습니다.
제가 지난주에 겪은 일 하나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매주 월요일에 설교 뼈대를 구성하고, 화요일에 개요를 작성한 후 수요일부터 원고 작성을 시작하여 목요일 오전까지 마치고, 목요일 오후부터 기도원에 올라가 기도를 하고 금요일에는 수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유달리 설교 작성이 너무 잘 진행되어 불과 수요일에 모두 마쳤는데, 목요일에 기도원에 올라가는 길에 예전 설교를 듣다가 이번에 준비한 설교가 바로 작년 9/17에 '계승 발전해야 할 교회'라는 제목으로 이미 한 설교 내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은 동일했지만 적용은 전혀 달랐기에 오히려 은혜가 되었지만,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은 늘 새롭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
둘째, 예배와 기도에 대한 능동적 수동성
행 13: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주를 '섬겨' (worship, NIV. While they were worshipping)"라는 구절에 먼저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섬겼다는 것은 예배드렸다는 말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선교보다 예배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예배에 집중하다 보니 선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선교를 위해 해외에 나가는 것만을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다국어 예배가 다양한 우리 오륜교회 안에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이는 국적 선교가 아니라 '중심적 선교'로, 각자가 있는 곳에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안디옥 교회는 '자신들의 소리를 내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예배와 금식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것을 다 태워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이며, 금식도 자신의 것을 태우고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금식은 육체를 비우고 영혼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파이퍼 목사님도 "A Hunger for God: Desiring God Through Fasting and Prayer"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금식은 굶주림의 제사다. Fasting is the hunger of a feast."
예배와 금식을 통해 나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행 13:2하) 성령께서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때도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중에서 무엇인가를 고르려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성령이 불러 시키는 일, 곧 '사명'을 하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한 방향입니다. 하고 싶지 않고 능력도 없어도, 따르고 순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루어집니다.
금식과 관련해 더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
프란시스코가 제자들과 함께 경건 훈련으로 40일 금식기도를 하며 말씀을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고 하루만 더 견디면 금식기도와 경건 훈련이 성공하는 39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밖이 소란스러워 문을 열고 나가보니 제자들이 젊은 제자 하나를 무릎 꿀려 놓고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젊은 제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잘못을 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함께 금식하던 그를 정죄하는 제자들은 그 제자를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려는 눈빛이 아니라
‘너 때문에 이번 경건 훈련을 망쳤다.’는 원망으로 눈을 부릅뜨고 내려 보며 살기등등하여 책망하고 있었습니다.
프란시스코가 나가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이냐?”
제자 중 하나가 선생님이 그 제자를 엄중히 처벌해 주기를 바라는 목소리로 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이 자식이 음식에 손을 대서 39일 동안이나 죽을 고생을 하며 참아온 우리들의 금식기와 경건 훈련을 망쳤습니다.”
이번에는 그 젊은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무릎을 꿇고 죽을죄를 지였다는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던 그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예, 선생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잠깐 화장실을 가려고 주방 앞을 지나는데 수프 냄새가 얼마나 구수한지 제가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 그만 수프를 입에 대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
그러자 프란체스코는 제자들에게 그 수프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한 제자가 수프를 그릇에 담아 가져왔습니다.
수프를 담은 그릇을 받아 든 프란시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수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경악했습니다. 그렇게 존경하는 스승인 프란시스코가 금식기도 중에 음식에 손을 대다니, ‘이 노인네가 정신이 나갔는가?’ 하며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프란시스코는 죽 그릇을 한쪽에 내려놓더니 제자들의 표정들을 쭉 둘러본 뒤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왜 고통을 참으면서 금식기도를 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경건 훈련을 합니까?”
“.....................”. 제자들은 스승인 프란시스코만 바라볼 뿐 묵묵부답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우리가 사십일 동안이나 금식기도를 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경건 훈련을 했다고 자랑거리로 삼거나 남에게 나타내려 한 것은 아닙니까?”
“.....................”. 그 물음에도 제자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훈련하는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려는데 그 뜻이 있었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죽을 먹은 제자와 모여 있는 여러 제자들을 한 번 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전부 다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 젊은이가 육신이 약하여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먹은 것은 결코 잘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 여러분에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심판의 권세를 주었습니까? 원수까지 사랑해야 할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이 원수는커녕 같은 형제 하나도 사랑으로 용서하고 품어주지 못하고 마치 심판자처럼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고 심판하는 것보다 차라리 실컷 배불리 먹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
셋째, 순종에 대한 능동적 수동성
행 13: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순종해야 하나님 나라 가운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 명령이 어렵더라도 다시 기도하여 힘을 얻어 순종해야 합니다.
안디옥 교회에게 리더였던 두 사람을 선교를 위해 보내는 것은 따르기 매우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교회의 리더를 잃을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그 어려움에 대해 다시 '금식하며 기도하여' 힘을 얻어 순종했습니다.
순종하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 구체적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연할 때는 '아는 것까지만' 순종하면 됩니다. 그것이 능동적 수동성입니다. 전부를 알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순종할 것을 먼저 순종하는 것입니다.
"잘" 순종하려 하지 말고 "그냥" 순종하십시오. 여리고성을 '잘' 공략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도는 것밖에 없습니다. 계산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그냥 순종하십시오. 선(先) 순종 후(後) 이해! 순종을 위한 몸부림이 능동적 수동성입니다.
말씀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말씀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을 책임지려 하지 마십시오. 그저 순종하십시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행 6:8~7:1, 7:51~60) (0) | 2024.08.11 |
---|---|
고난 중에도 계속 전진하라 (행 8:1~25) 주경훈 목사님 (0) | 2024.08.11 |
축적(蓄積)의 영성(靈性) (단 6:10) - 주성하 목사님 (0) | 2024.08.11 |
두려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다 (딤전 1:7) 김은호 목사님 (0) | 2024.07.15 |
신앙생활의 여러 측면에 대하여 - 이재철 목사 (0) | 2024.07.08 |
'기도'에 대한 이재철 목사님 유튜브 내용에서의 take-aways (3) (0) | 2024.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