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의미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믿다’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피스튜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피스튜오라는 동사는 우리말 ‘믿다’와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 '피스튜오' - 신실하다
첫째는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신실하다’로 바꾸어서 읽으면 이해가 더 쉬울 것입니다.
믿음 pistis헬. faith 영어.
1) 신뢰, 확신, 확실성 2) 계약이나 약정을 존중하는 행동, 신들의 주권이나 능력 그리고 사람의 순종, 증거/보증
믿는 대로 기도하면 다 받으리라는 말씀을 자주 듣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믿는 대로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나요? 아닙니다. 믿는다는 말 대신 ‘신실하다’를 넣어 보세요. ‘네가 신실해서 기도하면 다 받으리라.’ 신실한 사람은 헛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자기 욕망을 구하지 않습니다.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기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가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결국 헬라어로 “믿는다”는 말은 우리말의 단순한 “믿는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신실하다”라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에, 행함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고백이나 머릿속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단순한 고백이 아닙니다.
믿음 '피스튜오' - 입증하다
둘째로, '피스튜오'라는 단어는 ‘입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믿는다면, 내가 믿는 것을 내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구원자이자 주인이라고 내가 믿는다면, 내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그 믿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행(行)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입술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고백한 대로,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라면 오늘날처럼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행하는 곳’이 된다면, 비록 규모가 크든 작든, 하나님께서 생명을 비처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란?
누가복음 10장 25절부터 37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오는데, 율법교사는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신학박사나, 율법을 강론하고 가르치는 성직자 같은 존재였습니다.
율법교사와의 대화
성경을 보면,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시험하는 마음으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이 말은 예수님께 “내가 더 의롭게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질문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은 이미 의롭다고 여기며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신명기 6장 5절 말씀과 레위기 19장 18절 말씀을 인용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단순히 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행해야”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런데 율법교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는 “저는 지금도 충분히 의롭게 살고 있는데, 대체 누가 내 이웃입니까? 저는 이미 이웃을 잘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뉘앙스로, 여전히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대답하십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지나가던 세 사람의 반응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심한 구타를 당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 길은 유대 광야를 지나가야 하는데, 거기에는 동굴이나 민둥산이 많아서 강도들이 숨어 있기 쉬웠습니다. 그 피해자를 본 첫 번째 사람은 제사장이었는데, 피투성이가 된 피해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레위인이었습니다. 그 역시 그 피해자를 보고도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이들이었지만, 입으로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이 돕는다고 해서 되돌아올 이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니, 그 사람을 외면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세 번째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당시에 유대인들로부터 “혼혈된 이방인”이라 여겨져 천대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마리아인은 그 피해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고 다가가서, 값비싼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에 붓고 싸매 주었습니다. 옷이 없는 그를 자기 나귀에 태우고 주막으로 데려가 돌보았으며, 다음 날에는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근로자 하루 품삯 두 배)이라는 큰돈을 내어 주며 “이 사람을 잘 돌봐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인의 행함 중에서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처음에 불쌍히 여겨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룻밤을 자고 난 뒤에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낭비’라고 하는데, 이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시간과 돈과 정성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인심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뒤, 율법교사에게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율법교사는 목소리가 작아졌을 것입니다. 결국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던 그 율법교사에게, “너부터 이처럼 행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믿는다”라는 말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언어적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신실함”과 “행함”이며, 실제 삶에서 증명되는 “입증”을 의미합니다.
이웃이 누구인지 따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이웃이 되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요 주인이심을 삶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도 하시는 주님의 음성으로 듣고, 오늘부터 “신실하고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은 인심과 다릅니다. 인심은 일회성이지만, 사랑은 지속적입니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우리의 행동으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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