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는 어쩌면 분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분열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세포가 분열을 통해 성장하듯이, 교회 또한 분열을 통해 성장해 왔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교회 역사는 분열의 역사입니다.
로마 교회의 분열 - 가톨릭과 정교회
첫 번째 분열은 로마 교회의 분열이었습니다.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정식 종교로 인정받았고,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395년에 로마는 동로마와 서로마로 정치적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330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오늘날 터키의 콘스탄티노플, 즉 이스탄불로 옮겼기 때문에 이미 분열의 씨앗이 뿌려져 있었습니다. 동로마와 서로마가 갈라지면서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교회와 서로마의 로마 교회가 서로 싸우며 분열하게 된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자신들이 제국의 수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통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정교회라고 불렀습니다. 로마 교회는 제1대 교황을 베드로로 삼았고,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모든 교회 위에 있는 교회, 으뜸가는 교회, 우두머리가 되는 교회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보편적이라는 뜻의 가톨릭 교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정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교회가 스스로 으뜸이라고 주장하자, 정교회는 로마 교회의 성상 숭배가 우상 숭배라며 문제 삼고 서로 파문하며 싸웠습니다.
문제는 4차 십자군 전쟁 때 발생하게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역사적으로도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 전쟁입니다. 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정말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 벌어집니다. 십자군이 성지로 가지 않고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약탈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갈라졌어도 같은 교회였는데, 서로 최후의 선은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1204년에 이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교회와 로마 교회는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그렇게 교회가 서로 반목하는 동안, 이슬람 세력은 점점 세력을 확장해 가면서 결국 1453년에 오스만 튀르크가 당시 최고의 기술로 만든 청동 대포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부수고 함락시킵니다. 이로 인해 동로마가 멸망하게 되었고, 이후 동방 지역의 정교회는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 후로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정교회라고 하면 그리스 정교회를 대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정교회에서 온 순례자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종교 개혁
그렇다면 로마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정교회가 멸망할 그 시절, 로마 교회는 이미 자멸의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부패해서 종교 개혁의 물결이 넘칠 것만 같았던 시기였습니다. 이제는 누가 방아쇠를 당기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역할을 1517년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하게 됩니다. 성당을 건축하기 위해 돈이 많이 들잖아요? 그래서 면죄부를 판매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 분연히 일어나서 본인이 시무하던 위텐베르그 교회 문에 95개 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루터가 종교 개혁의 불을 붙입니다.
루터가 주장했던 것은 사실 단순했습니다. 면죄부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진리는 전통이 아니라 성경으로 입증되어야 하며, 만인이 제사장이라는 것 등을 주장했습니다. 사실 루터는 교회를 개혁하자고 했던 것이지, 새로운 종파를 만들고자 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개혁되기를 바랐던 것이죠. 그러나 1521년에 출교 당하고, 1529년에 슈파이어 회의에서 루터에 대한 관용은 철폐된다고 하니,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저항하게 되는 것입니다. 프로테스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항 운동이 루터를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루터교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내듯이, 결국 로마 교회는 루터 교회를 역사적 대세이므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당시는 봉건사회였기 때문에 영주들이 시민들의 종교를 결정했습니다. 많은 영주들이 루터를 따르게 되면서, 결국 1555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에서 루터파 교회를 정식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루터가 트리거 역할을 했지만, 종교 개혁은 어느 한 사람이 주도하고 움직일 수 있을 만큼 작은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큰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루터와 함께 스위스의 즈빙글리와 칼뱅 두 사람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사람을 가리켜 종교 개혁의 3대 거두라고 합니다.
즈빙글리를 살펴보면, 즈빙글리는 루터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 또한 1519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가톨릭 교회의 개혁에 대해 설교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522년에는 67개 신조를 발표하며, 스위스 취리히에서 종교 개혁을 주도하기 시작합니다.
재세례파
당시 종교 개혁자들은 서로 주장하는 바가 조금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성찬에 있어, 가톨릭이 화체설을 주장했다면, 루터 같은 경우에는 공재설을, 즈빙글리는 기념설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유아 세례에 있어서도 가톨릭은 유아 세례를 구원과 연결시킵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봤습니다. 하지만 루터 같은 종교 개혁자들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유아 세례 자체를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유아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개혁파가 생겼는데, 그게 바로 재세례파입니다.
당시 스위스 또한 시의 자치를 인정했는데, 즈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종교 개혁을 주도하면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즈빙글리가 시의 모든 부모들은 유아 세례를 무조건 받게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거부하는 운동이 1525년에 벌어지게 되는데, 그게 바로 재세례파 운동입니다. 재세례파들은 종교와 정치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하면서 함께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즈빙글리는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47세의 나이로 가톨릭 교회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쟁 중에 전사하게 됩니다. 그의 못다 한 스위스에서의 개혁을 칼뱅이 이어받게 됩니다. 장 칼뱅은 그 시대를 비롯해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위대한 종교 개혁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칼뱅은 스위스 사람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입니다.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고, 루터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아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다가 교황청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위기에 처해지자 1532년에 스위스 제네바로 건너갑니다. 거기에서 자리를 잡고 종교 개혁을 주도합니다. 칼뱅은 대단한 신학자였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매우 분명하고 선명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근거로 한 구원 예정론입니다. 구원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는 직업 소명을 강조하면서 모든 직업이 다 귀중하며, 모든 직업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상공업이나 금융업에 종사하던 사람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역사적으로 평가받습니다.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큰 개혁 운동을 일으키자, 유럽 여러 국가,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 등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 제네바로 찾아와 칼뱅의 가르침을 배우고 본국으로 돌아가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성공회
이제 마지막으로 영국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의 시작은 존 위클리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독일의 루터보다도 훨씬 일찍 로마 교회를 비판하며 영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그가 죽은 이후에 위클리프의 영어 성경을 필사하고 영국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도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개혁을 위한 토양이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개혁의 트리거는 누가 당겼을까요? 바로 영국 왕 헨리 8세입니다. 그는 왕비와 이혼하고 새 장가를 가고 싶었지만, 교황청이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가톨릭 교회와 갈라서게 되었고, 영국의 왕은 나라의 왕일뿐만 아니라 교회의 수장도 된다며 수장령을 선포합니다. 1534년에 영국의 왕이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서는 성공회라고 불리는 국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 개혁이 정치적인 개혁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일부 종교 개혁자들의 사상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미신적인 가톨릭 요소들을 벗어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민중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사람들을 청교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얼마나 더 철저히 개혁할 것인가에 따라 국교회를 인정하면서 그 안에 남아 개혁하자는 ‘비블리파’와, 국교회는 사탄의 세력이며 참된 교회가 아니니 완전히 분리하자고 주장하는 ‘분리파’로 나눠졌습니다.
침례교
분리파는 국교회를 인정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이로 인해 침례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국교회가 이를 참지 못하고 박해하기 시작하자, 분리파들 중 일부는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가 미국의 청교도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미국에서 침례교도가 크게 부흥하게 됩니다.
장로교
한편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는 스위스로 건너가 칼뱅의 영향을 받고 다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설립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가 장로교를 국교로 채택하게 되면서, 장로교는 영국과 미국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장로교는 대의 민주주의 형식을 채택한 교파로, 오늘날의 서구 민주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 국교회를 제외하고, 영국에서는 장로교 운동과 회중 중심의 침례교 운동이 있었습니다.
감리교와 성결교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살펴보면, 18세기에 요한 웨슬리가 등장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 신부의 15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 재학 시절에 크게 회심을 경험하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열정적으로 전도 활동을 펼쳤습니다. 웨슬리가 죽을 무렵에는 그의 추종자가 영국에서만 7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웨슬리는 감리교를 설립하게 되었고, 감리교는 성령 체험과 완전 성화를 강조하는 교파입니다. 이 감리교는 미국으로 건너가 크게 부흥했고, 미국에서는 침례교 다음으로 감리교가 많습니다. 이 감리교가 1907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성결교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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