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 누가복음 24:13~17
13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박신일 목사
- 밴쿠버 그레이스한인교회 담임목사
- Come 미션 캐나다 대표
- B2B MINISTRY 대표
* Come 미션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전해지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마태복음 24장 14절)’는 말씀을 토대로 2000년 4월 미국 LA에서 설립된 단체다. 이후 한국, 호주, 프랑스, 캐나다 등 29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미전도 종족 선교 공동체로서 선교사가 없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땅을 향해 모든 민족을 품고 나아간다”고 비전을 밝히고 있다.
* 박 목사는 감리교신학대학교(B. Th.)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졸업하고 카나다광림교회를 거쳐 2003년 그레이스한인교회(Grace Community Church)를 개척해 현재까지 섬기고 있다.
- 기독교인의 믿음이 실제인지 의문을 던지며,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야 함을 강조함 📖
- 믿음의 여정은 고난과 감사 사이에서 영성을 갖추는 길로, 주님이 함께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함 🙏
- 부활의 주님이 항상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고 매일을 부활절처럼 살기를 권면함 ✨
Ice- breaking : 우리는 주님을 믿는가, 믿는 척하는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이 시대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전능하시고 선하신가?"
세상은 그러지 않다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부귀와 명예, 건강과 장수, 편안함 등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을 기독교인들도 원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진짜입니까? 진짜 믿음입니까?
믿음에 대한 세 가지 질문과 답
1.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 근거와 출처는 어디입니까? 느낌입니까? 기적입니까? 믿음이 추상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즉, 믿음의 정확한 출처는 ‘말씀’입니다. 느낌에 따라 믿으면 기복이 심해집니다. 예를 들어, 1000만 원짜리 수표를 아기에게 주면 아마 훼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은 그 수표를 소중하게 다룰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도 가치를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룰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그 가치를 모르면 세상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참 성도가 아닌 종교인, 종교 기술자가 되지 맙시다.
2. 예수를 믿는 것이 기쁩니까?
입으로만 아니라 진짜로 기쁩니까? 감정적인 신앙도 주의해야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영적 기쁨이 없는 상태입니다.
기쁨은 이유와 실체가 있어야 진정한 기쁨이 됩니다. 아무 이유 없이 기쁜 사람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데도 기쁘지 않은 것은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놀라워하는 마음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거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내 존재로 인해 놀라고 기뻐합시다. 진정 주님을 아십니까? 그러면 기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향한 감각이 살아있지 못한 것일까요? 10년을 교회에 다녀도 영적 감각이 죽어 있다면 비극입니다. 차라리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낫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더라도 1년 동안만 미친 듯이 기도해 보고 떠나십시오.
C. S. 루이스는 "이 세상은 그림자 땅(shadow land)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슬픔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예쁜 아기조차 세상을 떠날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C.S. 루이스의 책 'Shadow Lands'는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영화 <샤도우랜드>는 CS 루이스(영화에서는 '잭')가 조이라는 미국 여성을 50대 후반에 만나 결혼하고 사별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입니다.
"우리는, 그늘의 땅(Shadow Land)에 산다. 태양은 늘 다른 곳을 비춘다. 언덕배기 뒤 길을 꺾어 돌아간 곳을."
언덕배기 길을 돌아가면 태양이 비출 거로 생각하면서 하루하루의 고통을 견디며 그늘의 땅을 걸어가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릅니다. 잠시 잠깐 햇볕 속에서 충만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은 정말 잠시일 뿐, 다시 그늘의 땅이 내 눈앞에 펼쳐집니다.
3. 믿음으로 고난을 이기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와 "하나님, 섭섭합니다." 우리가 대개는 표현하지 않지만 마음속에는 대개 섭섭한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키가 작아서, 부잣집에 태어나지 않아서 등등 섭섭한 이유들이 각각 있습니다.
이렇게 감사와 섭섭함 사이에 자리 잡는 것이 ‘영성’입니다. 섭섭함에서 감사와 찬송의 자리로 이끌어내는 것이 ‘영성’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대박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1000명 중 한 명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고통의 짐을 지고 광야의 길을 걸어갑니다. 신앙의 길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광야의 순례길입니다.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함께 걸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은 날마다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뜻대로 움직이시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십자가의 길, 신앙입니다. 로마서 말씀처럼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자연사합시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대개 할 말들은 "주님, 죄송합니다."입니다.
신학자 맥거슨은 "죽음이란 우리와 하나님의 놀라운 마음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제거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더 멋지게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창조하신 이유는 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 그 토요일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않나요?
누가복음 24장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실제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믿습니다. 그로부터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까지의 시간을 '종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 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는 '토요일'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안 계신 것 같았던 날입니다. 종말은 그 토요일과도 같습니다.
주일에 토요일을 살아가던 두 제자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었을 뿐,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토요일을 살고 있었습니다.
(15절) 예수님이 동행하시지만, (16절)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일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두운 토요일을 살았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는데도 우리는 종종 토요일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믿음의 눈이 가리어져서 주님이 안 보일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발휘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가 자주 묻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가?"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구원하지 않으시는 이유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전능하시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하실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시는 것도 전능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의 전능을 온전히 절제하셨습니다. 사랑으로 이 세상을 구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능’ 개념은 내가 주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주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저는 “인생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한 적이 있습니다. 콩나물과 두부를 사러 심부름을 갈 때 시험에 빠질 뻔한 적이 있었지만, 유혹을 이기고 심부름을 완수한 기억이 있습니다. "인생은 내가 네게 부탁한 심부름을 잘하고 내게 돌아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게 이런 결론을 주셨습니다.
슬픈 동행
오늘 본문의 두 제자는 주님과 동행하고 있었지만,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슬픈 동행"이 아니겠습니까?
(17절) 예수님께서 은근히 말씀을 거십니다. 두 제자 중의 하나인 '글로바'가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을 왜 당신만 모르는가?" 혹시 우리도 주님이 동행하고 계신데 주님께 "왜 주님만 내 아픔을 모르세요?"라고 늘 서운해하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고난만 바라보며 슬픈 토요일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나요?
(19절~21절)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그날이 토요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서 주님에 대한 넋두리를 합니다. 우리도 삶의 여러 문제로 우리가 실망하고 낙심할 때, 그날 그 앞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시고 찾아오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봅시다.
이들은 실망과 좌절 속에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실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던 그 위치를 예수님은 정확히 아시고 다가오셨습니다. 우리도 좌절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의 낙심을 아시고 그 자리에 정확히 오셔서 우리와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증거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내가 주님의 부재를 느끼든 말든,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심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합니다.
시편 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놀라야 합니다. 놀라우신 주님이 여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5절) 이제 주님이 자신을 그들에게 알려주시기 시작하십니다. 믿지 않으면 발휘할 수 없습니다.
(27절) 말씀을 풀어 설명해 주시니 말씀이 그들에게 들어갑니다.
(28절) 목적지 근처에 갔으나 예수님은 그냥 지나쳐 가려하십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십니다.
(29절) 그러자 그들이 간청하며 주님을 붙듭니다. 우리도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여!"라고 주님을 부르면 주님이 옆에 오실 것입니다.
(30~31절)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는데, 그러자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떡을 뗄 때 주님을 알아보았을까요? 손바닥의 못 자국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여기의 모든 동사는 ‘수동태’입니다. 우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그저 참여할 뿐입니다.
왜 예수님은 떠나셨을까요?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주님이 안 보이더라도, 떨어져 계시더라도 주님의 동행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주님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임재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함께하심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32절) 주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죽음마저 이기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말씀이 불입니다. 말씀 안에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합니다. 그때 다시 주님이 다시 등장하십니다.
(35절) 간증하던 그들에게 예수께서 친히 오십니다. 우리 주님은 부활의 선포를 할 때 그들 중에 임재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살아 계심을 선포할 때 주님이 임재하십니다.
Mudhouse Sabbath, 즉 '진흙 집 안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
Mudhouse Sabbath'는 로렌 F. 위너(Lauren F. Winner)가 저술한 책으로, 그녀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의 개종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이 책에서 위너는 유대교의 11가지 영적 실천을 소개하며, 이러한 전통이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탐구합니다. 주요 주제로는 안식일 준수, 애도, 환대, 기도, 금식 등이 있으며, 이러한 실천을 통해 신앙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녀가 유대교 전통에서 그리운 것이 있었는데 첫째가 ‘안식’이었습니다. 그녀는 분주한 일상의 모든 것을 멈추고 주님을 기억하는 날로서의 안식일을 그리워했습니다. 그 누림을 누리고 싶어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장례 문화를 그리워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녀가 죽으면 1주일간 매일 심방하여 주님을 찬양하는 시편을 노래합니다. 상주는 처음에는 슬픔에 빠져 그들과 함께 노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비극 속에 있던 그 사람이 어느 날 찬양을 하기 위해 일어난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토요일을 살던 사람들이 부활절을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로렌 F. 위너는 'Mudhouse Sabbath'에서 유대교의 안식일이 기독교에서 주일로 대체되었지만, 그 의미와 실천에서 차이가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녀는 유대교 안식일의 중요성과 그 깊이를 탐구하며,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규율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특별한 날이라는 점을 설명합니다.
안식일의 유대교 전통에서는 모든 노동을 멈추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위너는 이 날을 통해 평소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신체적, 정신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말합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휴식하는 날을 넘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행위를 기억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여겨집니다. 유대인들은 금요일 저녁, 가족이 함께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며 안식일을 시작하는데, 이는 안식일을 경건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상징적인 의식입니다.
위너는 기독교인으로서 유대인의 안식일 전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점으로 "멈춤"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항상 바쁜 일상에 쫓기지만,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께 다시 집중하고 영적으로 충만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위너는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유대교의 안식일처럼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쁜 일상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그녀는 안식일을 그저 휴식하는 날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적 충전의 시간을 갖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Mudhouse Sabbath'에서 로렌 F. 위너는 유대교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애도의 과정을 단계적으로 진행하는 방법을 설명합니다. 유대교 전통에 따르면, 애도는 일련의 고정된 기간에 따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각 단계는 애도자가 슬픔을 점차 받아들이고 치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주요 애도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니누트 (Aninut)
이 단계는 죽음이 발생한 직후부터 장례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을 말합니다.
애도자는 이때 가장 깊은 슬픔에 빠지며, 애도의 규칙을 완전히 따르기보다는 슬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됩니다.
애도자에게 일상적인 종교적 의무는 면제되고, 오직 장례식 준비와 고인의 떠남을 기리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합니다.
2. 시바 (Shiva)
장례 후 일주일 동안의 애도 기간입니다. '시바'는 히브리어로 "일곱"을 의미하며, 이 단계는 애도의 핵심적인 시간입니다.
애도자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주로 앉아 있으며,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이 애도자의 집을 방문해 슬픔을 나눕니다. 이러한 방문은 애도자가 슬픔을 고립감 없이 경험하도록 돕습니다.
애도자는 낮은 의자에 앉아 지내며, 거울을 덮어 외모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하고, 평상시의 일상 활동과 외모 단장을 피합니다.
애도 중에 식사를 준비하거나 일상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하여 애도자가 슬픔과 고인에 집중할 수 있게 돕습니다.
3. 쉴로쉼 (Sheloshim)
장례 후 30일까지의 기간으로, ‘시바’가 끝난 뒤의 3주 동안을 포함합니다.
이 단계에서는 애도자가 천천히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여전히 고인을 위한 애도 규칙을 일부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특별한 축제나 오락에 참여하지 않고, 일부 종교적 의무와 의식을 수행하면서도 슬픔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집니다.
시바에 비해 규제가 완화되지만, 애도자가 고인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4. 일 년 애도 (Avelut)
부모의 경우, 1년 동안 애도를 지속합니다. 형제, 자녀 또는 배우자에 대해서는 쉴로쉼까지 애도를 마칩니다.
이 기간 동안 애도자는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기도와 회당에서의 특별한 의식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고인을 기억합니다.
애도자가 고인을 추모하며 슬픔을 점차 극복해 가는 과정을 지원하며, 특히 부모를 위한 긴 애도 기간을 통해 유대교는 부모에 대한 특별한 존경을 드러냅니다.
위너는 이 단계적인 애도 과정을 통해 애도자가 슬픔을 억제하거나 급히 잊으려 하지 않고, 충분히 경험하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의 도움을 받는 것이 유대교에서 애도의 중요한 부분임을 설명합니다.
왜 Mudhouse인가?
"Mudhouse"라는 이름은 저자 Lauren Winner가 버지니아 주 샬롯츠빌에 있는 특정 커피숍을 지칭합니다. 이 커피숍은 저자가 주일(일요일)에 자주 방문하는 장소로, 그녀는 이곳에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유대교의 안식일(Shabbat) 전통과는 대조됩니다. Winner는 자신이 커피숍에서 돈을 쓰고 책에 낙서를 하는 모습이 진정한 안식일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성찰합니다. 그녀는 "이것은 평범한 일상이며, 내 마음을 특별한 방식으로 열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Mudhouse"라는 제목은 저자의 영적 여정과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화적, 영적 차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개인적인 공간을 의미합니다.
늘 찬송하니라
오늘 성경 본문이 있는 누가복음의 맨 마지막은 어떻습니까?
누가복음 24:50~51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물리적으로는 이 땅에 ‘부재’하게 되셨지만, (52절) 그들이 기도하고, (53절)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늘 찬송하니라."
어떻게 이러한 찬송이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이 육체적으로는 그들과 부재하시지만 믿음으로 늘 임재하신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우리가 찬송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주님의 임재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낙심한 사람은 믿음으로 찬송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축복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1년 365일 매일을 부활절로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신앙이란 주님과의 영원한 동행입니다.
사람들마다 체질이 다릅니다. 여러분의 체질은 무엇입니까? 나는 ‘부활 체질’입니다. 사탄이 나를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주님은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신실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고난을 제거해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끝까지 신실하게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 5:12~13
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https://youtu.be/kgK03Q4ftXw?si=4nhpRVXAzGomrT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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