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주경훈 목사님 @ 2025.1.2 주일 설교
성경 본문 - 창 12:4~9
가지고 있던 기대가 물거품이 된 경험이 있습니까?
연기를 연기가 아닌 인기로 평가하면 안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믿음의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물질, 명예, 사람의 인기나 성공으로 믿음의 사람인 우리의 가치를 매기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느냐”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1. 아브라함, 하나님의 ‘대안’이 되다
창세기 1부(1~11장)에는 인류의 대표적인 죄악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12장부터는 2부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사건
- 가인의 살인
- 노아 시대 사람들의 타락
- 바벨탑 사건
사람들의 죄악은 점점 강도가 높아졌고, 영역 또한 개인(아담 자신)에서 타인(가인과 아벨), 온 땅(노아 시대 사람들),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도달하려는 시도(바벨탑)로 확대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범죄 강도가 높아져갔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은 놀라운 은혜의 방편들을 제공하셨습니다.
- 아담에게는 가죽옷으로 수치를 덮어주셨고,
- 가인에게는 보호의 표를 주셨으며,
- 노아 시대에는 방주라는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은혜의 방편’이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더 놀랍고 확실한 방법을 준비해 두셨는데,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사람을 부르심으로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열어가시고, 그를 통하여 ‘복’이 흘러가도록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부르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우리를 이 땅의 아브라함으로 부르셨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이 땅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여전히 이 땅을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2.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떠한 모습으로 순종했고, 어떻게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었을까요? 오늘은 세 가지 측면에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말씀을 따라' 이동한다
창세기 12:4에 보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기록됩니다.
- “이에”라는 말은 곧바로, 지체 없이, 즉각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 아브라함은 75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익숙한 곳(하란)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했습니다.
로마서 4:18에도 아브라함의 순종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에, 그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종종 말씀에 대한 의문과 질문이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왜 저기를 떠나야 하죠? 왜 이렇게 해야 하죠?”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떠나야 할 때 떠나는 순종”, “가라 하실 때 가는 순종”이 믿음입니다. 내 이성으로 다 이해가 될 때만 따라간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시각장애인 알파인 스키 선수 ‘최사라’ 선수의 예를 들어봅시다. 그분은 가이드 러너의 소리에만 집중하며 질주합니다. 다른 소리는 차단하고 오직 가이드의 지시에 순종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모습과 같습니다. 다른 세상의 소리는 잠시 내려놓고, 오직 말씀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일 때, 우리의 삶이 방향을 잡고 전진할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침묵
말씀을 따라 걸을 때, 왜 의문과 질문이 없었겠는가? 고향을 떠나는데 왜 할 말이 없었겠는가? 갈 바를 알려주지 않고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떠나갔다. 그는 심지어 아들을 번제로 드리러 갈 때도 그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의 의미는 무엇일까? 모르지만 행동하면서 입은 닫았다. 이것이 순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편하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따라가는 것이 순종이다. 내가 이해될 때만 따른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경험할 수 있겠는가? 삶이 밋밋하면 ‘말씀의 영역’ 안으로,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와라. 하나님의 역사를 볼 것이다. 신앙의 추상적 모호성은 ‘말씀 안에서’ 분명해질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주목할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12:4 “롯도(LOTTO? ^^) 그와 함께 갔으며.”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가서 큰 복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롯이 그 길을 간 것은 하나님 말씀을 직접 따라간 것이 아니라, 그저 ‘아브라함을 따라간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진정한 순종은 하나님 말씀에 직접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롯이 아브라함과 헤어졌을 때 그는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가 인생의 위기를 맞습니다.
둘째, 약속의 땅이 마음에 안 들어도 그 땅을 지킨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700km나 되는 길을 걸어 ‘가나안 땅’에 마침내 이르렀습니다(창 12:5)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직선거리 정도)
- 하란은 굉장히 풍요롭고 살기 좋은 땅이었기에, 거기를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은 새로운 약속의 땅에 대한 기대가 훨씬 컸을 것입니다.
- 그러나 막상 가나안에 도착해 보니, 현실은 너무 달랐습니다. 척박하고 정착하기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그나마 살만한 곳은 이미 터를 잡고 있는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들은 새로운 이방인의 유입을 반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리저리 이동해야 했고, 어느 곳에도 마음 놓고 정착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가난과 기근을 피해 남방 네게브(‘메마르다’, '황무지'라는 뜻)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사실은, 그가 절대 가나안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거친 땅, 기대 이하의 땅으로 아브라함을 이끄셨을까요?
-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다”가 아니라 “복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거친 땅, 복 없는 땅이라 여겨지는 바로 그곳에 ‘믿음의 사람’이 들어감으로 그 땅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시는 이유는, 우리가 복의 최종 수혜자만 되지 않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이 흘러가게 하려 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복(일하는 복)’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복이 될지라.” 나 한 사람이 복 받고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웃과 열방이 변화되고 복을 누리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꿈이자 계획입니다.
이번에 선교사 세미나에서 만났던 선교사님들의 사역을 보면, 모두가 자신의 계획대로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추방을 당하기도 하고, 전혀 예상 못했던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그 땅의 복이 되기로 결단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길이기도 합니다.
셋째,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는다’
아브라함은 이동할 때마다 두 가지를 했습니다.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 창세기 12:7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 창세기 12:8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브라함은 머무는 모든 자리에 ‘먼저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아무리 인생의 자리가 거칠고 메마르다 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결국 그 환경을 바꾸는 통로가 됩니다. 예배자로 서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기념비’를 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 사울 왕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고(삼상 15:12),
- 압살롬도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다 하여 자기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하 18:18).
하지만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기념비는 “나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이고, 제단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높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느 곳을 가든지, wherever we go, ‘첫 예배자’가 되길 힘쓰시기 바랍니다.
3. 결론: 우리도 이 땅의 ‘아브라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은 범죄와 어둠이 깊어지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대안’, ‘복의 통로’로 부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 그는 즉각적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떠났고,
- 약속의 땅이 마음에 들지 않고 거칠어도 끝까지 그 땅을 지켰으며,
- 어디를 가든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이 땅에 하나님의 복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이 동일한 부르심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의 아브라함”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은 이 땅에 복을 주시길 원하십니다.
- 우리의 가정이,
- 우리의 직장이,
- 우리의 도시와 나라가,
우리 때문에 복을 얻을 것입니다.
“복을 받는 사람”에서 머무르지 않고, “복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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