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질문을 드리며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밤 이 집회에 왜 오셨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내일이 휴일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토·일·월 사흘 연휴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겠습니까? 그런데도 여러분께서는 굳이 주일 밤에 이 집회에 왜 나오셨습니까? 교회에서 매년 개최하는 열흘간의 행사 때문입니까? 아니면 목사님께서 “집회가 있으니 다들 나오라”고 독려하셨습니까? 혹은 순장님이 “같이 가자”고 말씀하셔서입니까? 그런 이유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다면, 이 집회가 여러분의 삶에, 미래에, 일생에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두 번째 질문입니다. IT 기기의 발전으로 SNS를 통해 사람들은 문자와 글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도 여러분께서는 SNS로 얼마나 많은 글을 주고받으셨습니까? 그 글들 중 여러분의 인생을 깊이 사색하고 성찰하게 해주는 글이 단 한 줄이라도 있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보신 영상 중에서 영혼에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영상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그저 카카오톡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고 웃고, 같은 이야기를 다시 보내기만 했습니까? 인생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1초 1초가 쌓여서 되는 것입니다. 그 1초 1초가 모여 한 시간이 되고, 24시간이 되어 하루가 되고, 한 달이 되고, 1년이 되며, 그것이 곧 여러분의 평생이 됩니다. 그런데 매일 여러분에게 영적으로 유익이 되지 못하고, 미래의 삶을 더 견고하게 구축하는 발판이 되지 못하는 글들만 읽고, 영상을 본다면, 여러분은 지금 자기의 귀한 생명과 인생을 갉아먹고 사는 것 아닙니까?
세 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소명’ 혹은 ‘소명의 삶’은 무엇입니까? 일상의 삶을 살 사람이 목사로 부름받아 신학교에 가고, 선교사로 결심하여 선교지로 떠나는 것만이 소명이고, 그분들만 소명을 가진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가정 주부들은 모두 가사를 내려놓고 선교지로 가야 합니까?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분들은 일터와 가정을 다 내팽개치고 내일부터 신학교에 들어가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빛에 사로잡힌 바울에 대한 내용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교회를 짓밟던 바울에게 주님께서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바울과 함께 가던 일행 중에서 가장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체포하고 연행하는 일을 시키는 체포조 우두머리였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악’ 그 자체처럼 보이는 바로 그 사람에게 주님의 아가페적(아가펜 프로텐, 최고의 사랑) 은혜가 먼저 임하신 것입니다.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이 처음 사랑이 원문에 ‘아가펜 프로텐’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가펜’은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 사랑을 의미합니다. ‘프로텐’의 원형은 ‘프로토스’입니다. 이것은 ‘처음’, ‘먼저’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시간, 장소, 순서, 중요성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최상의 위치에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을 그대로 번역하면 처음 사랑이 아니라 최상의 사랑입니다. 성경의 콘텍스트에 더 맞게 번역을 하면 궁극의 사랑입니다. 에베소의 교인들이 그 궁극의 사랑을 얻음으로, 그 궁극의 사랑을 힘입어서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 이후 바울은 “왜 함께 가던 일행도 있는데 주님의 그 사랑이 나에게만 임하셨을까? 왜 나만 핀셋으로 집어내셨을까?”를 고민했지만, 인간의 논리로는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질문을 안고 오래 묵상한 결과, 에베소서 1장 4절을 통해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정해 주셨더라. 그 외에는 답이 없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신비스러운 ‘아가펜 프로텐’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의 그 구원의 빛이 임하자 바울이 시력을 상실했다는 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으로 태어났다면 세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새삼스럽게 “다시 맹인이 되었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세상을 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동시에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는 얼마나 비수 같은 메시지입니까? “네가 주님을 알기 전에 본 것은 다 무효다. 네가 주님을 알기 전에 그토록 심취했던 것들은 다시 볼 필요가 없다. 그런 것으로 인해 네 인생의 1분 1초를 허비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전까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바울은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고 체포해 연행하는 체포조, 그것도 ‘우두머리’였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그 인근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이던 중, “이제 다메섹에도 예수 믿는 이들이 퍼져 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대제사장에게서 영장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213km나 떨어진 그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번뜩이는 바울의 눈빛, “내 눈앞에 예수쟁이가 나타나기만 하면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무조건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겠다.”라는 카리스마와 함께 당당히 걸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력을 상실합니다. 이제 스스로 걸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가던 바울이, 다른 사람이 그의 손을 잡고 이끌어 주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지금 걷던 그 길, 다시는 걸으면 안 된다. 그 길로 또 가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로 가면 출세할 수 있고, 명성을 떨칠 수도 있으며, 더 큰 집에서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은 공동묘지,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 길로는 가지 마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바울의 손을 이끌어 다메섹으로 들어갔고, 바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식음을 전폐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풀이하느니, 차라리 먹지도 마시지도 않을 만큼 가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그때에.” 본문이 “그때에”라고 시작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때에”, “그러므로”, “그래서” 같은 접속부사가 나오면 긴장하고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이런 접속부사는 모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비로운 주님의 섭리를 나타낼 때 동원되는 표현입니다. “그때”라는 단어는 이전의 상황과 그 이후 상황이 동시에 일어났음을 강조하는 연결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때에” 이전에는 무슨 상황이 벌어졌습니까? 보무도 당당하게 카리스마에 가득 차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이 주님을 만나 시력을 상실하고, 남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바울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젊은 사람이 시력을 잃었고, 혼자 걷지도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데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볼 때 그는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바로 그때에, 그 순간에 하나님은 바울을 위해 치밀하게 섭리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10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지금 주님께서는, 주님의 빛으로 구원해 시력을 상실하게 되고 식음을 전폐하고 있는 바울을 위해, 주님의 도구가 되어줄 누군가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가 바로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제자 ‘아나니아’입니다. 바울은 아나니아와 면식조차 없던 사이입니다. “평소 바울이 아나니아를 잘 알았기에 그를 불러 도움을 받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께서 직접 “핀셋으로 집어낸” 바울을 바른 길로 세우시기 위해, 태어나 한 번도 얼굴조차 본 적 없는 아나니아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주님이 도와주셔야 한다.”라고 간구하면서도, 막상 그 주님의 도우심이 “사람을 통해” 올 것이라는 믿음보다는 “어떻게 하면 저 사람 주머니에서 내게 돈이 흘러올까, 저분이 나를 어떻게 도와줄까” 하며 사람에게 비굴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사람에게 비굴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 앞에서 지나치게 비굴해지면, 정작 바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울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울이 한 번도 신세진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아나니아를 부르셨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11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주님께서 지금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야, 다메섹의 직가라고 불리는 거리로 가서, 거기에 유다라는 사람의 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사울을 찾아라.” 사울은 바울의 옛 이름이지 않습니까?
‘직가(直街)’라는 것은 직선으로 난 길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Straight street, 즉 곧은 길입니다. 여러분, 2천 년 전 고대 근동이나 로마 제국 시대를 통틀어 길은 대부분 구불구불했습니다. 만약 직선 도로가 있다고 해도 그 길이가 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는 1.6km에 걸쳐서 길이 곧게 뻗어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굉장한 길이입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1.6km에 이르는 완전한 직선 도로는 유일무이한, 최고의 ‘인공 도로’였습니다. 그래서 고대 세계의 명물이었고, 지금도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서는 그 직가를 ‘스트레이트 스트리트’로 부르며 중요한 간선도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바울(사울)이 있다. 거기 가서 그를 방문하라.”라고 하십니다. 사실 바울이라는 유대인이 다메섹 길을 걷다가, 바로 직전에 눈이 멀어 남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세상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어제 첫날 요한계시록 2장 2~4절에서도 주님께서 “내가 본다.”라고 하셨듯이, 주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더구나 빛으로 바울을 구원하신 분이 곧 주님이십니다. 바울이 시력을 상실하자, 사람의 손에 이끌려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하신 것도 주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몰라도 주님은 다 아십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시력을 상실한 바울을 고대 근동의 불가사의라 할 만한 1.6km의 직선도로 ‘직가’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하셨을까?” 주님께서는 바울에게 “지금부터 너에게 ‘은혜의 직가’가 열리고, 새로운 인생의 직가가 열린다.”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바울은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새로운 인생의 직가’로 이끄셨지만, 바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매 순간 우리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믿으려 하면, 우리는 결국 믿지 못하게 됩니다. 젊은 바울은 시력을 상실했습니다. 눈앞에 1.6km에 이르는 직선도로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만약 그때 바울이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고생시키십니까? 예루살렘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나를 이곳에 끌고 와 눈이 멀게 하십니까?”라고 원망했다면, 우리가 아는 ‘바울’이 탄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사야서 45장 9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 네가 비참하게 되리라. 자기를 빚어낸 이와 다투는 자여!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와 어찌 말다툼하겠느냐. 옹기그릇이 옹기장이에게 ‘당신이 무엇을 만드는 거요?’ 할 수 있겠느냐. 작품이 어떻게 작자에게 ‘형편없는 솜씨로군’ 하고 불평할 수 있겠느냐.” 우리도 늘 이렇게 불평하며 살아갈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은혜의 직가 옆에 있어도, 그 길을 걷지 못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믿음으로 잠잠히 기다렸습니다.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기다린 것입니다.
11절을 다시 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 지금 바울이 유다의 집에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아십니다. 그런데 한글 번역본에 따르면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고만 되어 있어, 헬라어 원문에 있는 중요한 단어 두 개가 빠져 있습니다. 즉, “보라(이두)”와 “왜냐하면(가르)”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원문에 따르면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직가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왜냐하면, 아나니아야, 저것 좀 보아라! 바울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고 감탄사까지 터뜨리신 것입니다.
바울이 어떤 기도를 드렸길래, 주님께서 이렇게 감탄하실까요? 첫날 말씀드린 것처럼, “부모의 새벽기도가 자녀의 평생 대책이 된다”라는 식의 현수막이 걸려 있는 대형교회를 예로 들었는데, 만약 바울이 “주님, 제 눈을 빨리 뜨게 해 주십시오” 같은 기도만 하고 있었다면 주님께서 이렇게 감탄하셨을까요?
우리가 아이를 키울 때, 언제 가장 감탄합니까? 걷지 못하던 아이가 스스로 일어서고, 서 있던 아이가 걷고, 걷던 아이가 뛰기 시작할 때 감탄합니다. “오, 우리 아이가 또 한 단계 자랐구나!”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아가펜 프로텐, 곧 주님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신분의 변화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모든 신분은 그 신분에 걸맞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면, 신분이 중학생으로 바뀌는 순간 초등학교 수준을 버리고 중학생 수준을 갖추어야 합니다.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신분은 대학생이면서 말하고 생각하는 수준이 중학생이라면 문제가 되듯 말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 신념에 사로잡혀 살던 죽음의 구렁에서, 주님의 아가펜 프로텐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비록 시력을 상실했다 할지라도, “주여, 왜 제 눈이 멀어야 합니까? 눈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주님, 이제부터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가 박해하던 그리스도가 참 메시아이심을 보았나이다, 들었나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라는 ‘존재적인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곧 “주어진 새로운 신분에 걸맞는 수준의 삶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을 것입니다. 그 기도에 주님께서 감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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