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왜 머뭇거리고 있는지, 우리를 머뭇거리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우리는 계속 머뭇거리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 머무르는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긴 하지만 실제 삶을 보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처럼 보이고, 또 믿음으로 행하는 것 같다가도 곧 넘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사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제까지 머뭇거리겠느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왜 백성들이 그렇게 머뭇거렸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더 나아가 엘리야는 큰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 된 뒤에도 너무 쉽게 무너져 버립니다. 그는 하나님께 “하나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더 이상 하나님과 같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포기해주십시오”라고까지 말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결국 “왜 우리는 그렇게 머뭇거리는가?”, “머뭇거린다고 지적했던 엘리야는 왜 넘어지는가?”, “넘어진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떻게 다시 일으키시는가?” 이 세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왜 머뭇거리고 있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이 엘리야 사건의 배경은 아합 왕이 거의 나라 전체를 바알 종교화하는 데 상당히 성공했던 시기입니다. 왕비 이세벨은 바알 종교의 수장 같은 사람의 딸이었고, 이스라엘로 파송된 ‘바알 종교 선교사’처럼 행동했습니다. 왕비의 자리에서 나라 전체를 바알 종교로 바꾸는 데 커다란 능력을 발휘했으며,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많이 잡아 죽이거나 도망치게 만들어 백성들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볼 때, 한 사람만 잡으면 이스라엘의 ‘바알화’가 완성된다고 여겼는데, 그 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였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죽이려고 사방팔방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다른 나라에까지 사람을 풀어 “이런 생김새를 한 사람을 보면 신고하라”라며 엘리야를 찾을 정도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피해 다녔고, 아합은 쫓아다니는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 엘리야가 아합 앞에 나타납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특별한 계시나 감동을 주셨을 것이고, 엘리야 스스로도 죽을 각오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거는 한이 있어도 한 가지 큰일을 하라고 하시는가 보다”라고 결심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영적 대결을 제안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모이게 하여 “누가 참된 하나님인가”를 분명히 보여주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엘리야는 “아, 이제 죽으라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목숨을 걸고 아합에게 갑니다. 그리고 제안하기를, “당신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 알고 있습니다. 죽이시려거든, 그 전에 이런 일을 먼저 해보고 죽이십시오”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쟁, 즉 엘리야가 혼자 나가고, 아합 왕은 그의 나라에서 월급을 받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전부 데리고 오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신에게,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겠으니, 누구의 신이 응답하는지를 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합의 소원은 원래 엘리야를 죽이는 것이었으니, 엘리야가 나타난 이상 죽이면 되지만, 그는 그 자리에서 엘리야의 말을 받아들여 “그래, 그렇게 해보자”라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가뭄이었습니다. 야고보서에서 언급하듯이, 이때 비가 내리지 않는 기간이 길었습니다. 가뭄이라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는 잘 체감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도시에서 살면 물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들어도, 막상 샤워할 때 물을 아껴 써야겠다는 실감을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가뭄이 길어지면 정말로 땅이 갈라지고 농작물이 타들어가며, 가축들이 죽어가는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도 원래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 아닌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으니 완전히 죽음의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이 왕에게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아합 왕도 물을 찾아 직접 돌아다녀야 할 정도였고, 백성들의 원망이 모두 왕에게 쏟아지자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릴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마침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모든 백성을 모아 바알과 여호와의 대결을 벌이자고 제안하니, 이것이 아주 좋은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불려 나왔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다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은 물인데, 엘리야는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신이 참된 신이라고 증명하자고 제안합니다. 목마른 백성 입장에서는 ‘비를 내려주는 신’을 구하는 시합을 제안했다면 훨씬 더 열광했을 텐데, 왜 불이었을까요?
물론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은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객관적인 응답의 표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응답을 보여줄 수 있는데, 엘리야는 왜 ‘불’을 내리는지에 초점을 맞췄을까요? 저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모두 물을 갈망했습니다. 왕마저도 물을 찾아다녀야 할 정도이니, 물이 곧 생존 문제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종종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나에게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기는데, 그 시기의 사람들에게 물은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사람들에게 “필요를 채워주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물(필요)을 주지 않으면 ‘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식으로 생각해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의도적으로 “먼저 불을 통해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관계 회복의 증거’를 보이고, 그 뒤에 물(비)이 오는 순서를 보여주자”라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라는 진리를 갈멜산에서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불이 내려오면 “하나님과 우리의 소통”이 먼저 회복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 후에 우리의 절실한 필요인 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순서입니다.
이제 우리가 알듯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하루 종일 난리를 쳐도 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녁 무렵, 엘리야가 제단을 열두 개의 돌로 쌓고(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송아지를 잡아 올려놓은 뒤에 귀한 물을 열두 통이나 부어버립니다.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은 상황이니 물은 생명처럼 귀한 것인데,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께 ‘허비’합니다. “너희가 그토록 원하는 물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의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과 물을 모두 태워버립니다. 불이 내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제 우리와 함께하시기로 시작하셨다”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하늘에서 불이 내린 다음에 큰비가 쏟아졌습니다. 물이 ‘넘치도록’ 내린 것입니다. 이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그 밖의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더해주신다”라는 말씀을 극적으로 드러낸 장면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큰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현대 사회는 매우 각박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면 사막 같은 곳이라도 반드시 큰비가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갈팡질팡 머뭇거리며 하나님을 ‘사용’하려 하기에 힘을 잃는 것은 아닐까 돌아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는 쪽을 택하기 쉽습니다. 엘리야는 그 점을 아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고, 바알 선지자들도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형세가 완전히 뒤바뀌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에 벌어집니다. 아합이 이 모든 일을 자기 아내 이세벨에게 전하자,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협박합니다. “내일 이맘때까지 네 목숨을 취하지 못하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리길 바란다”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이 말을 듣고 도망칩니다. 이것이 매우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갈멜산에서 목숨을 걸 정도로 담대했던 그가, 이세벨의 협박 한 마디에 갑자기 두려워 도망쳐버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엘리야 내부에 어떤 ‘전제’가 깨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갈멜산 승리를 통해 이제 왕실과 백성들도 바뀔 것이라고, 그래서 자신처럼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이 더 활발히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듯합니다. 그런데 이세벨이 그대로 적대감을 드러내니 “이게 뭐지?” 하고 스스로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가 받은 충격은 이세벨의 협박보다는 “갈멜산 승리 이후 상황에 대한 자기 확신이 깨졌다”는 데서 온 충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스스로 도망갈 만큼 큰 실망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만의 전제, “나는 이렇게 하면 당연히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줄 것이다.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이다”라는 생각이 깨지면 쉽게 무너집니다. 저도 예전에 그랬습니다. 전임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이 정도 열심히 하면 모두가 나를 좋아해야 해”라는 전제를 스스로 만든 뒤, 그렇지 않은 현실을 견디지 못해 크게 무너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것은 교만이며, 거짓 선지자들이 가던 길이다”라는 성경 말씀(눅 6:26)을 통해 제 전제를 산산이 깨뜨리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사람들의 반응에 좌우되지 않는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세운 전제가 무너질 것 같자 이세벨의 협박에 도망쳐 버렸습니다. “하나님, 저 더 이상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실은 이세벨이 엘리야를 정말 죽이려 했다면 군사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세벨은 군대를 보낸 게 아니라 신하들을 보내서 24시간 말미를 주며 협박만 했습니다. 이는 이세벨도 두려워하고 있었던 증거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이미 삐쳐서 하나님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왜 이럽니까? 이 나라는 이제 다 끝난 것 아닙니까?”라고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며 결국 광야로 도망칩니다.
광야 끝으로 가서 로뎀나무 아래 앉습니다. 로뎀나무는 햇빛을 완전히 가려주지도 못하는 작고 듬성듬성한 나무라, 그늘로 쉴 만한 곳도 못 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자기 전제대로 도망치면, 그 끝은 결국 쉴 곳도 변변치 않은 ‘로뎀나무 아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찾아와 주십니다. 먹을 것을 주시고 그를 위로하시며 “호렙산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 가서 굴 속에 들어가 다시 자기 세계에 갇혀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굴까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굴 밖에서 강력한 바람, 지진, 불을 보여주시지만,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임했을 때,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진, 바람, 불처럼 세상을 뒤엎는 방식이 아니라, 작고 조용한 방식으로 너를 이끌고 싶다”라고 보여주신 듯합니다.
‘세미한 소리’는 목자들에게는 멀리서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극도로 고요해져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곧 하나님의 음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지만, 우리의 내면이 시끄러우면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염려, 두려움,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지진이나 불처럼 대단한 사건으로만 세상을 뒤집으려고 했던 엘리야의 기대가 깨져야, 비로소 그 고요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필요가 아무리 절실해도, 먼저 하나님의 불(소통, 관계 회복)을 구하고,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일 때 그다음에야 필요한 ‘큰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머뭇거리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사용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세상의 사건들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청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예로, 교회 권사님 중에 40년째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지만 응답이 없다고 낙심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더는 남편 구원을 달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정말로 남편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면 제가 오늘 무엇을 순종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라”고 권해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하셨지만,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 목사님을 집으로 모시고 남편을 만나게 하라 하시는 듯하다”라는 강한 감동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함께 찾아갔고, 여러 번 만난 후 그분이 교회에 나오기까지 되었습니다. 모든 경우가 똑같지는 않겠지만, 세미한 소리에 귀 기울여 우리가 순종하는 일은 분명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입니다.
결론적으로, 엘리야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교훈은 매우 분명합니다. 목숨을 걸 만큼 열정적이었던 엘리야도, 자신이 만든 전제에 갇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넘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조차 “세미한 소리”로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전제와 자존심을 내려놓고, 고요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며, 그 음성을 따를 때 비로소 참된 회복과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내가 그동안 어떻게 했는데 이것도 안 들어주십니까?”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요구만 하는 태도를 버리고, “주님,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떤 순종을 원하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인가 물인가를 곰곰이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물처럼 간절한 필요 이전에,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집중하며 그분의 세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늘 말씀하시며, 우리가 고요해질 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불이 임하고, 뒤이어 큰비가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 마음에 품고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불보다 물을 더 구했던 저희를 용서해 주시고,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갈망하게 하소서. 제 전제가 깨뜨려져도 주님을 붙드는 믿음을 주소서. 저를 넘어뜨리는 내 안의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게 하시고, 고요히 세미한 음성을 듣게 하소서.” 이런 간구를 드리며, 우리 모두가 마치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보고 호렙산에서 들은 하나님을 똑같이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 각자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가정을 위해서, 자녀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나아가 봅시다.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로 일하실 것이며, 그 뒤에 부어주실 큰비를 기대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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