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pport: 정동교회 공간이 주는 영적 감동
저는 이제 개척 10년, 47세에 개척을 하였으며, 15년밖에 되지 않은 아기 교회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지난번에 여기서 우리 복음과 도시 콜로퀴움(colloquium, 특정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발표나 토론을 통해 해당 주제를 공동으로 연구하는 모임 방식)을 할 때 너무 진심으로 감격스러워 그 공간 자체가 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 무엇이라 할까, 공간이 주는 메시지가 상당히 강하였고, 이미 너무 영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두터운 역사를 가진 정동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정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습니다. 물론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되지만, 이렇게 묵직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이 있어서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여러분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오늘 아까 목사님과 함께 읽으신 말씀(눅 8:22~25)은 대략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면서도 뻔한 내용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믿음의 본질, 믿음의 핵심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며 우리의 믿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실 때 큰 광풍을 만나셨고, 광풍 앞에서 제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셔서 먼저 바람과 폭락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러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다소 독특하게 느꼈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는 말씀은 “왜 너희는 믿음이 없느냐”라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의 위치에 대해 질문하신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억지로 해석할 필요는 없으나, 말씀하신 대로 믿음의 위치에 대해 질문하셨으므로, 우리가 믿음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두려움과 믿음의 관계
동일한 상황을 다룬 마가복음(막 4:35~41)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같은 뉘앙스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본질적 연약함으로 인해 "두려움은 불가피하다."
일단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왜 두려워하느냐”라고 하셨을 때, 사실 그것은 조금 억울해 보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풍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갈릴리 호수에서 일어난 풍랑입니다. 그리고 그 풍랑을 만나서 호들갑을 떠는 제자들 중 다수는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어릴 때부터 갈릴리 호숫가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라고 수영도 배웠으며, 어릴 때부터 고기를 잡는 일에 능숙했던, 어쩌면 전문가들입니다. 갈릴리 호수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그런 이들이 “이 풍랑은 죽음을 몰고 올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들의 경험과 지식으로 볼 때, 이번 풍랑은 결코 이겨낼 수 없다고 확신할 만한 수준이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뭐 이런 걸 갖고 두려워하냐”라고 말씀하신다면, 조금 부당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두려움은 그들이 가진 경험에도 불구하고 이겨낼 수 없는 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문제가 내 앞에 있을 때, 우리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모르실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존재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배당에 앉아 있을 때는 순교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선교사로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고,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품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차 안에서부터, 또는 일상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과 상황 속에서, 다시 두려움과 염려, 실망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움 없이 살기는 사실상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제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드리겠습니다”라고 고백했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너 자신을 과신하지 말라.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이미 다 아시는 거죠.
믿음의 본질은 '두려움 없음'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의 예수님 신뢰'입니다.
그렇다면 풍랑 앞에서 두려워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도님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으로 행할 때 두려움이 아예 사라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행해도 두려움은 여전히 우리 속에 섞여 있습니다. 결국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두려움이 있어도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말씀과 연결해서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를 함께 보니, 결국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너희가 두려움 앞에 믿음을 두고 있구나. 너희 믿음이 지금 두려움을 향해 가 있구나”라는 의미처럼 느껴집니다.
즉, 지금 자신들을 움직이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불안과 염려와 근심, 그리고 “우리는 절대 극복할 수 없어”라고 여겨지는 현실적인 상황이 제자들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너희 믿음이 여기에 있지 않고 두려움 앞에 가 있느냐. 너희 믿음을 이쪽으로 가져와야 하지 않겠느냐.” 이런 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믿음은 결국 예수님에 대한 각성이며, 하나님에 대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내가 어떻게 해서 믿어보려 애쓴다”라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기만 하면 믿어질 수밖에 없다”라는 점에서, 믿음은 선물이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억지로 믿어야지” 해서 믿는 분이 아니라, 제대로 알면 알수록, 믿을 수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어 루기서에 보면,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보아스가 알았으면 됐다. 기다리기만 해라”라고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보아스라는 인물이 얼마나 책임감 있고 성품이 훌륭한 인물인지를 아니까 “그가 알았으면 됐다”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믿을 만한 분”이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믿음이 흔들립니다. 믿음이란 결국 그 대상이신 하나님,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와 직결되지만, 우리 안에는 여러 가지 ‘항생제’ 같은 것들, 즉 나쁜 습관, 집착, 욕망, 불안이 쌓여 있어서, 주님이 함께 계시고 이미 많은 것을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현실이 험해지면 두려움 쪽으로 믿음이 옮겨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심으로써,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너희가 계속 흔들릴 것인데, 그때마다 믿음이 어디에 가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상수와 변수’라는 말로도 설명하곤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바뀌는 변수(상황, 환경, 문제)들이 있고, 절대 바뀌지 않는 상수(하나님, 복음 진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변수들에 의해 흔들리면서, 오히려 바뀌지 않아야 할 상수를 의심합니다. 하나님은 흔들리시면 안 되는데, 우리는 환경과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가? 나를 사랑하시는 게 맞나?” 하고 흔들립니다. 원래는 상수를 붙잡고 있어야 우리가 현재 처한 자리를 분별할 수 있는데, 반대로 하고 있는 것이죠.
결국 풍랑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는, 두려워도 믿음이 예수님을 향해 있으면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도, 믿음이 조금만 더 무거워지면 두려움보다 우선하게 된다는 것이죠.
상수를 의심하지 말고 붙들어, 변수를 이겨내라
믿음의 세 가지 핵심 질문
저는 이 말씀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첫째, “선장이 누구냐”라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항해를 이끄는 분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저편까지 가십니다. 그분이 목적지를 향해 키를 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실에 부딪혀서, 두려움이 선장 노릇을 하도록 맡겨 버립니다.
둘째, “나는 그 선장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입니다. 같은 예수님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이분은 전능하신 창조주다”라고 믿고, 또 어떤 사람은 “그냥 훌륭한 선생님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고, 그분에 대한 이해가 확장될수록, 현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셋째, “그 선장께서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를 내가 기억하고 있느냐”입니다. 예수님이 “건너가자”고 하셨으면, 풍랑이 와도 결국 건너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곧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실천 사례 - 교회 개척 시 재정 위기와 하나님의 초자연적 공급 (선장이 누구냐?)
제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나누겠습니다. 저는 교회를 개척할 때부터 재정 문제로 여러 번 어려움을 겪었고, 그때마다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개척교회로 시작했지만, 몇 년이 흐르고 학교도 만들고, 큰 건물을 짓고, 그러다 보니 빚이 상당히 많아졌습니다. 매달 감당해야 하는 금액이 너무 커서, 밤낮없이 고민하다가 우울증이 재발할 정도였습니다. 교회가 문 닫으면 어떡하나, 그 모든 책임을 제가 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새벽기도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는데, 마음속에 계속해서 이런 질문이 들렸습니다. “이 교회를 누가 세웠느냐. 지금까지 누가 이끌었느냐. 그리고 앞으로도 누가 이끌겠느냐.” 저는 머리로는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평안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평안이 ‘수명’이 있었습니다. 며칠 지나면 다시 불안이 엄습했습니다. 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같은 질문을 하셨고, 저는 또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답하고, 또 잠시 평안을 누리다가, 다시 얼마 뒤에는 불안감이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반복되던 중, 어느 날 깜짝 놀랍게도 다른 경로를 통해 재정 문제가 해결될 길이 열렸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보다, 눈에 보이는 금융기관의 확실한 제안이 훨씬 더 ‘안정감’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제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새마을금고가 주는 평화는 수명이 무한하구나. 나는 이렇게 쉽게 하나님의 평안을 놓아버리는구나” 하고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다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번에 제 믿음을 테스트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조건이 훨씬 나은 대출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 앞에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문제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시험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못 하실 일이 없다면, 우리의 방식으로 해결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당시 저희 교회는 젊은 성도들이 많았고, 다들 “아멘!”으로 반응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 재정 장로님이 오셔서 말하기를 “놀랍게도 헌금이 6억 원이 더 들어왔습니다”라고 보고해 주셨습니다. 매달 1억씩 빚 상환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개척 초기에 했던 믿음의 고백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시는구나’라는 확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도 계속해서 두려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 나에게 주셨던 말씀”을 소환해 보면, 다시 믿음으로 한 발씩 걸어갈 힘이 생깁니다.
믿음의 실천 사례 - 달란트 비유에서 달라진 결실의 이유는 주인의 성품에 대한 종의 선택의 차이 때문이다. (나는 그 선장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던 제자들도 “이분이 어떤 분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두려워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는 만큼 우리의 대응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 해석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하느냐”로 빚어지는데, 그 기준은 결국 “내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인색한 주인이라고 오해합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을 그렇게 인식했죠. 그래서 두려워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반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주인을 ‘너그러우신 분’으로 여기니, 열심히 장사하고 시도해 봅니다. 결국 그 주인의 성품에 대한 이해 차이가 다른 삶을 만들어냅니다. “망해도 괜찮다, 주인이 책임지신다”라는 마음을 품으면, 훨씬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달란트 비유에서 갈린 것입니다.
저 역시 제 삶에서 그런 ‘망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사역을 시작해 보니, 조금씩 눈이 열리고,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천국과 영광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이 땅에서 당하는 어떤 고난도 사실 영원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 땅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고난 속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실천 사례 - 예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신다 (선장의 말씀을 기억하느냐?)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제게 “돈 걱정하지 않고 살 것이다”라고 하신 때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2000년도였는데, 제가 로렌 커닝햄(예수전도단 YWAM 설립자)이 쓴 책들을 읽다가, 그분이 기적 같은 일들을 간증해 놓은 내용을 보고 너무 믿기 힘들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하와이에서 전도하던 청년들이 배고픈데 돈이 없으니, 바다에서 물고기 떼가 방파제로 뛰어올라와 그걸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는 제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직접 하와이를 가서,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실제로 바닷속 물고기가 떼로 뛰어오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한 번은 하나님 음성에 순종해 보고 싶어서, 청년 집회 사례비를 모아 두고, “하나님,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쓰겠습니다” 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2월이 되도록 아무 감동이 없더니, 어느 날 새벽에 제 신대원 동기인 김병범 선교사님(우크라이나) 이름이 기도 중에 자꾸 떠올랐습니다. 친하지도 않았는데 자꾸 생각나길래, 그분에게 사례비를 보내 드렸습니다. 그러자 얼마 뒤, 새벽기도 중에 “너는 이제부터 돈 걱정하지 않고 살 거다”라는 음성이 제 마음에 강하게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제 자신한테 스스로 한 말인가 생각했는데, 그날 오전에 교회 성도님이 갑자기 저를 찾아와 봉투를 놓고 가셨습니다. 열어 보니 1,500만 원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부목사였고, 이 돈을 주시는 뜻이 뭔지 몰라 담임목사님께 가져갔더니, 목사님께서도 “하나님이 교회 재정을 도우시려나 보다” 하고 눈물을 글썽이셨습니다. 그분도 교회 헌금을 위해 기도하고 계셨는데, 응답처럼 느껴진 거지요. 그리고 목사님께서 그중 500만 원을 제게 쓰라고 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아, 하나님은 정말 흘려보내시는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계속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구나. 그러니 내게 돈 걱정할 이유가 없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돈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의 실제 의미였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분을 내 선장으로 알고, 그분이 얼마나 크고 좋으신 분인지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그분이 “가자”고 하셨으면 반드시 가게 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한다”고 하셨으면 정말 함께하시는 분임을 알 때, 우리는 풍랑 앞에서도 다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마무리 : 삶의 방향을 재정립 합시다 -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첫째로 내 항해의 선장이 누구인지, 둘째로 나는 그 선장을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지, 셋째로 그분이 내게 무어라 말씀하셨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 함께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첫째, 우리의 선장이 예수님이심을 다시 확인하며 기도합시다. 둘째, 내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혹시 작고 초라한 분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셋째,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그 말씀을 붙들고 있는지 되새기며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선장이 누구이신지 다시금 생각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작은 분으로 여기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죽음도 이기시는 분이심을 믿고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내게 하신 말씀을 잊지 않고, 그 말씀을 붙들고 두려움 앞에서도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현실, 어떤 변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날마다 주님을 붙들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풍랑 속에서도, 우리의 믿음이 ‘현실’이라는 변수 앞에만 놓이지 않게 하시고,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이라는 상수를 붙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고, 그 말씀 위에 믿음의 걸음을 계속 내딛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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