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금하셨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간은 하나님 없이 독립적인 지혜를 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과의 단절이라는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개념을 확장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자율적 도덕과 지식을 추구하려 할 때, 오히려 진정한 생명과 진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는 종교적으로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인간의 한계와 교만,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고민하게 합니다.
오늘 창세기 3장 전반부에는 인간의 타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묘사 속에는 간단한 설명 안에 그 타락한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범죄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는지, 또 구원을 얻어 신자가 된 자들이 어떻게 이 타락의 결과를 치유하고 회복하는지에 대한 귀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 타락의 성경 기록을 볼 때, 아담과 하와가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전면적으로 대항하고 거역하려고 범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르자”고 하며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지식’과 ‘선’을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너희가 정녕 죽으리라”라고 이미 그 비참한 결과를 경고하셨는데도, 그들은 선을 추구하고 지식을 추구한다는 명목 아래 이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 유익도, 복도, 결실도 얻지 못한 채 참담한 파멸만 초래하고 말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가장 먼저 ‘수치심’이었고, 이어 ‘두려움’이었습니다.
수치심에는 여러 가지 양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서 3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성경은 2장 25절에서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3장 7절에서는 그들이 범죄한 뒤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다고 기록합니다. 또 범죄 후에 하나님이 동산 가운데서 부르실 때, 아담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즉, 범죄의 결과로 적어도 두 가지 참담한 결과가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수치’와 ‘두려움’이라는 비극과 고통이었습니다.
그들이 벌거벗었다는 사실로 인해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진다는 것은 신명기 28장에 언급된 바와 연결됩니다(구약성경 306페이지). 신명기 28장 47절 이하를 보면,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핍절한 중에서 대적에게 부침이 될 것이니, 그가 네 목에 멍에를 메워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라고 경고합니다.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더라도 하나님을 외면하면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벌거벗음’이 등장하는데, 이는 오늘 살펴보는 창세기 3장의 ‘벗음’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범죄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과 하나 따먹었다고 이렇게 노발대발하셔서 심하게 벌을 내리시는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것과는 다릅니다. 범죄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들이 범죄한 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있을 때 찾아오시고, 그제야 범죄 사실을 묻고 벌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벌을 받기도 전에 범죄의 결과인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이미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즉, 여기서의 벌은 하나님께서 ‘추가로’ 내려주시는 심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범죄 자체가 스스로 초래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요한복음 15장을 봅시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포도나무의 비유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생명과 진리, 참된 복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진리, 복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낼 수도, 다른 어디에서 구할 수도 없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분리된 가지가 말라서 결국 불에 태워지는 것처럼,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없이 선과 지식, 복을 추구함으로써 생명의 공급원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그들은 지식을 얻었으나, 그 지식은 아무 유익도 복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죄와 파멸만 가져왔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이 말하는 인류 타락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우리는 범죄한 인류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성을 지닌 인생이기에, 지금도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니, 그제야 모든 답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우리가 스스로 의를 구하거나 선을 구해 봐야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심판과 재앙을 초래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류의 역사와 우리의 개인적 경험이 증명합니다. 예컨대, 여러분이 가진 지식이나 실력을 가지고 무엇을 이루려 해도, 참된 의와 사랑, 희생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지식이 많다고 해서 희생정신이 생기지 않고, 실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사랑이 자연히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는 것입니다.
세상은 차치하고, 교회 안만 보더라도 모든 성도들이 “사랑이 없어”라고 말합니다. 사실 어느 교회에서든지 이 말이 들립니다. 모두가 사랑에 굶주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그램을 세우거나 구호를 내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이 없다”고 느낄 때, 그것을 사람에게서만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원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들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보여 주신 대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던 원래의 영광스러운 상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답은 교회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신앙 고백 안에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교회에다 요구하며, 사랑이 없다고 시비를 걸곤 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없어. 목사님은 생긴 것부터 무표정하고 차가워 보여” 같은 말들을 합니다. 사실 이런 태도가 바로 인류가 범한 범죄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되어도, 하나님을 떠난 채로는 아무런 유익과 복을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그리고 역사를 통틀어 모든 죄인들은 그 심각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성경은 이런 상태를 분명히 지적합니다.
로마서 1장28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이는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될 때 드러나는 온갖 죄악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상실하여, 즉 썩어 가득 찬 상태에서 의나 선을 외치더라도 결국 남을 정죄하고 스스로를 자랑하는 데 그칠 뿐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도 이를 분명히 말합니다. 17절 이하에서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의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고, 이상을 추구한다 한들 그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와 굳어짐이 더해져 결국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그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는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만큼 영광스럽고 복된 상태였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우리는 그 원형으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5장 31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라고 말합니다. 원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둘이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완전한 연합을 이룬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범죄 후에는 서로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순전한 마음과 아름다움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하나 됨’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가 하나 되는 연합을 가리킵니다. 에베소서 1장 표현대로라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으시고, 우리와 연합하심으로써 당신의 충만을 이루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이 곧 아담과 하와에게 허락되었던 완전한 연합, 즉 부부의 하나 됨이 상징하는 바입니다. 범죄하기 전, 그들은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하나 됨을 누리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범죄로 인해 그 연합이 깨지고 수치와 두려움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와 성도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셨던 그 완전함이 다시 회복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 없이 선과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생명과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분리된 데서 비롯된 비극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 연결되고, 잃었던 영광과 생명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창세기 3장을 통해 밝히 드러나는 인류의 범죄와 그 해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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