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가족이 한데 모여야 구성되는 가족 공동체입니다. 가족은 아무나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은 부부처럼 결혼을 통해서 일심동체가 되거나, 부모와 자식과 같이 핏줄을 통해 혈연관계로 맺어지는 특수 관계의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가족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특수 관계의 사람들끼리 구성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핏줄을 이어받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산다면, 가정의 결핍으로 인해 한 사회와 한 국가가 바로 세워지지 않을 리가 만무합니다.
한 사회 혹은 한 국가의 기본 단위가 바로 가정입니다. 한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은 그 사회를 이루고 있는 가정들이 병들었다는 말이고, 한 국가의 건강은 그 가정들이 건강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한 사회나 한 국가를 만드시기 이전에 가정을 먼저 만드셨고, 가정을 통해서 역사하셨습니다.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는 구약성경 각 책에는 책마다 고유한 제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그 책 내용 중에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를 그 책의 제목으로 삼았습니다. 이를테면 구약성경 첫 번째 책의 제목을 히브리 사람들은 ‘브레시트’라고 했는데, 그것이 제일 첫 번째로 나오는 단어이며, 그 뜻은 ‘태초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에도 “태초에”라는 말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사람들이 그 첫 번째 책의 제목을 ‘내력’ 혹은 ‘기원’을 의미하는 헬라어 ‘게네시스’로 붙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은 그 헬라어 ‘게네시스’를 ‘창세기’로 번역함으로써, 창세기 하면 창세기 50장의 전 내용이 하나님의 천지 창조와 관련된 것처럼 그릇 오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창세기 2장이면 끝이 납니다. 그 이후 창세기 50장에 이르기까지의 전 내용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세우시고, 가정을 불러내시고, 가정을 통해서 역사하신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일 먼저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만드시고 인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였고, 그 후손들 또한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로 모든 인간을 심판하신 뒤에 노아의 가정을 불러내시고, 그 여덟 식구로 하여금 인류 역사를 새로이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경과하자 노아의 후손들 역시 교만에 빠졌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지으려 했고, 그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부르신 가정이 아브라함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거쳐 손자 야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가정을 세우시고 그 가정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창세기는 소상히 일러 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게네시스’를 ‘창세기’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창가정기(創家庭記)’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 태초에 가정을 먼저 만드시는 일부터 하셨겠습니까. 인간에 관한 한, 인간의 모든 문제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고, 가정에 의해 결정되며, 가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1년의 한 주일을 ‘가정 주일’로 지키는 것은, 바로 이처럼 중요한 가정의 의미를 하나님 앞에서 되새기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 위에 각자의 가정을 더욱 바르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마침 이 뜻깊은 가정 주일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래전에 예비해 두신 말씀은 우리가 3주째 묵상하고 있는 본문의 말씀입니다. 먼저 11절과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일컫는 행각으로 모이거늘, 이 일을 보고 베드로가 이르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왜 이 일을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선천성 안진병이가 온전하게 되어 걷고 뛰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매서운 겨울 한파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만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전하시던 바로 그 ‘솔로몬 행각’ 위에서 이번에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이 우리 개인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나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치유해 주셨다”라고 밝히면서 설교합니다. 본문 13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 부활의 구주로 살리시고 세우셨음을 설교하면서,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삭은 유대 민족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그 이삭의 아들이 야곱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아들 이삭을 거쳐 손자 야곱에 이르기까지 삼대(三代)에 걸친 그 가정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하면서, 자기보다 2천 년 전에 이 땅을 살았던 아브라함의 가정을 언급하며 하나님을 그렇게 불렀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대단히 간단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의 그 가정으로부터 유대 민족이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국권을 상실하고 망국의 백성이 되었어도, 이스라엘의 근원이 바로 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그들 자신의 믿음이 바로 그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할 때, 그것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자기 가정의 가족 관계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미래의 후손들에게 조상으로 불릴 것이고, 현재 자신의 삶이 후손들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지나간 역사 속 조상들의 하나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조상이 될 자기 자신들의 하나님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할아버지·할머니에게는 손자·손녀이고, 부모님에게는 자식입니다. 동시에 우리 자식들에게는 부모요, 손자·손녀에게는 조부모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조부로서의 우리 자신, 부모로서의 우리 자신, 자식으로서의 우리 자신, 손자·손녀로서의 우리 자신을 바로 세워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 가정들의 집합체인 우리 민족과 국가의 건강성이 지켜질 것이고, 우리 신앙의 연장선 위에서 이 민족의 미래가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후손들을 위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심오한 뜻을 담고 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본문에서 베드로가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무려 40년 동안 양을 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80세 노인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엄청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이집트로 가서 그곳에서 노예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모세는 태어난 뒤 40세가 될 때까지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당대 세계 최강의 제국이었던 이집트 군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단 한 명의 군사도 없이 홀로 이집트로 들어가, 수많은 노예를 해방시킨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이집트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설명할 때, 하나님을 도대체 어떻게 소개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이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시고,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여호와, 곧 너희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하셨습니다.”
물론 이집트로 간 모세는 하나님을 이 이름으로 자기 백성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들 중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400년이 지난 뒤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그 뜻을 밝혀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 마태복음 22장 31절에서 3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지만, 만약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결국 죽음으로 끝난다면, 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곧 그들의 육체가 죽었을지라도 영은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으로, 즉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영원한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를 영원히 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영원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영원한 관점으로 살지 않으면 자녀들과 손자·손녀 앞에서 참된 믿음의 부모, 믿음의 조부모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영원의 관점을 상실하면, 병들고 늙은 조부모와 부모의 자식으로서, 혹은 손자·손녀로서 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는 불가능합니다. 오직 영원의 관점을 가질 때만, 오늘 가족의 일원으로서 내가 눈물을 흘리더라도 뿌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무리 크고 달콤해 보여도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인 아므람과 요게벳, 그리고 누나인 미리암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태어나는 아기가 있으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하고 모세를 살린 이유, 그리고 그 모세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집트로 떠난 이유 역시, 그들 모두 영원한 관점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관점으로 현실 세계의 허상과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분명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온 가족의 영원한 관점이 모세의 가정에 깃들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어 영원한 관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성경에 따르면, 이삭은 60세 때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14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들 이삭을 거쳐 손자 야곱이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대략 30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영원한 관점을 지니고 살아간다는 것은, 최소한 300년 후를 내다보며 300년 후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참수형을 당할 때까지 감옥에서 했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같은 감방의 죄수와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뿐이었습니다. 만약 그것이 그의 인생 전체의 결과라면, 사도 바울은 실패자라고 불려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작 그 정도 업적을 위해 목숨을 건 셈이니까요. 그런데 그가 죽은 뒤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도 바울이 참수형을 당하고 정확히 300년이 지나서, 그가 뿌렸던 진리의 씨앗으로 인해 로마 제국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감옥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리에서 진리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300년 후에 하나님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을 그는 믿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죽음 이후 로마의 역사는 그가 믿었던 대로 전개되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살아 있는 자의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어 영원한 관점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길 원한다면, 우리 역시 최소 300년 후를 내다보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 삶이 300년 후 내 후손들의 삶에 어떤 열매로 나타날 것인지, 지금 나의 행동이 300년 후 내 후손들에게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울더라도 진리의 씨를 뿌리기만 하면, 300년 후 민족과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진리의 꽃이 얼마나 아름답게 만개할 수 있을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 말이 아브라함이 흠 없이 완전무결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수많은 허물을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그의 삶을 통해 무엇을 취해야 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를 통해 반드시 아들을 주겠다”라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은 자신이 생각한 때까지 아들이 주어지지 않자 아내의 권유로 첩을 들여 서자를 먼저 낳았습니다. 뒤늦게 적자를 낳았지만, 적자와 서자의 싸움은 4대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려 4천 년이라는 역사와 시간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중동의 아랍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은 오늘날까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가장 큰 불안 요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첩을 들이는 그 순간, 300년 후를 내다보았다면, “내가 지금 하는 이 행동이 300년 후 내 후손들의 삶에 어떤 열매로 나타날 것인가?”를 생각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 가정의 평화는 곧 세계 평화와 직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300년 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 세계 속에서 참된 조부모, 참된 부모가 될 수 있고, 후손들을 위한 진리의 이정표로서 참 믿음의 조상으로 기림 받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우리의 믿음이 자식과 손자를 거쳐 대대손손 이어져 가면서, 이 민족과 인류의 역사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이 진흙탕인데, 이 현실 속에서 나 혼자 진리의 씨를 뿌린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진흙탕 한가운데 내 가족만 한 방울의 깨끗한 물로 산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요. 참으로 일리 있는 반문입니다. 나 혼자, 혹은 우리 가정만이 진리의 씨를 뿌린다고 해서 지금 당장 칠흑 같은 세상이 미동조차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즉각적인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현실에 매달린 우리의 시선을 300년 후로 들어 올려야 합니다. 나 혼자, 우리 가정만이라도 진리의 씨를 뿌리면 300년 후에는 이 세상의 역사가 반드시 새로워질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진흙탕 속에 떨어진 한 방울의 물은 곧 진흙탕에 동화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방울의 생명수는 진흙탕 전체를 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법칙이요, 오병이어의 법칙입니다. 제 개인적인 고백을 드리자면, 저는 하나님을 믿기에 이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진리의 씨앗을 뿌리며 300년 후를 내다보는 삶을 살고자 애를 써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양화진과 용인 순교자 기념관을, 300년 후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와 어떤 형태로 전해 주어야 할지 늘 고민하며, 300년 후를 내다보며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신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300년 후를 내다보는 믿음의 조부모가 됩시다. 300년 후를 내다보는 믿음의 부모가 됩시다. 300년 후를 내다보는 믿음의 자식들이 됩시다. 300년 후를 내다보는 믿음의 손자·손녀들이 됩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통해, 삼대와 사대를 통해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진정한 믿음의 조상으로 기림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심을 감사드립니다. 나의 하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찬양합니다. 이제부터 300년 후를 내다보며 살게 도와주옵소서. 오늘의 삶이 300년 후 내 후손들의 삶에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나의 존재가 후손들의 미래를 밝히게 할 것인지, 아니면 더 어둡게 할 것인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분별하게 해 주옵소서. 한 가정의 평화는 온 세상의 평화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늘 기억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바른 믿음의 조부모, 참된 믿음의 부모, 진정한 믿음의 자식, 진실한 믿음의 손자·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로 인해 인류의 미래가 밝아지도록 인도해 주시고,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 역시 지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자기 조상의 하나님으로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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