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예수님을 굳이 끌어내리거나 올리려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오늘 본문 말씀에는 가장 감사하고 은혜로운 약속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1절에 보듯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고, 또 13절에 보듯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합니다. “누구든지”입니다. 이런 말씀이 왜 로마서 10장에 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것이 마치 전도지를 나누어 주듯 복음을 증언하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중에, 우리가 자주 전도용으로 사용하는 복된 말씀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 깊은 내용을 오늘 풀어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바로 앞장에서 본 대로(로마서 9장 33절)에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앞뒤가 모순처럼 보입니다. ‘거치는 돌, 부딪치는 바위’인데,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라고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보통이라면 ‘거치는 돌, 부딪히는 바위’라는 부정적 표현이 아니라, 좀 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이 먼저 나오고 나서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이어져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거치는 돌, 부딪히는 바위’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이 연결되는가가 오늘 본문 설명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5절 이하에 모세의 말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 표현과 달라 이해가 어렵지만, 요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하늘에서 모셔 내려올 필요도 없고, 예수님을 부활시키려고 무저갱(지옥)에 내려가 끌어올 필요도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요청하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오셨고, 우리가 무능할 때 예수님께서 이미 일하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말씀이 이미 주어졌다. 이루어졌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그대로 신명기 30장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신명기 30장 11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내려와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율법, 즉 “하나님을 순종하라”라는 명령은 아주 멀리 있어서 누가 특별히 깨우침을 얻어야만 간신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까이에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나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나 율법은 조건처럼 들립니다.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식의 조건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순서를 보십시오. 율법을 고이 지켜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애굽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시고, 바로와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으며,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의 길로 인도하시면서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반석에서 나오는 물로 그들을 먹이시고 시내산까지 데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내 말을 따르라”라고 하십니다. 즉, “조건을 줄 테니 이렇게 하면 복을 주겠다”는 식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언약과 구원의 자리에서 명예롭게 살아가라는 초청인 것입니다.
한 예로, 예전 어려운 시절에는 형제들 중 한 사람은 진학을 포기하고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희생으로 한 동생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면, 부모님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너는 공부나 해라. 너는 훌륭해져라.” 이때 자녀가 “내가 공부를 못하면 자식 자격이 없는 건가? 공부를 잘해야만 진짜 자식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부모의 자녀이고, 부모는 그 자녀가 훌륭해지길 바라며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하는 말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위대한 일이고, 그 자체가 자랑이 됩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할 때는 자유가 없었고 명예로운 삶을 살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키셨기에 명예로운 존재, 명예로운 윤리를 이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30장의 말씀이 하고 싶은 말은 “이 율법이 네게 이미 주어졌으니, 어려운 일로 여기지 말고 지켜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여 넘어지고 맙니다. 그런 면에서, 율법도 우리에게는 ‘거치는 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거치는 돌’이라고 불립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없이 말하는 모든 가치와 덕목, 이를테면 정의·평화·진리·사랑 등이 예수님을 통과하지 않으면, 죽음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죽음 앞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든, 진리든, 애국이든 모든 것이 결국은 두려움을 달래기 위한 말이 되고 맙니다.
장례식에 가보십시오. 고인이 생전에 얼마나 훌륭했는지 말해도, 죽음 앞에서 그것은 결국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자들의 슬픔과 공포를 달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라고 믿으며, “그때 부끄럽지 않게 살다 가야 한다”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없이 말하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사랑이나 정의를 말해도 그것은 우리 자신을 달래는 비명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순종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영광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율법의 마침이 되신 예수님”이 어떻게 영광을 이루셨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순종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내어주시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용서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그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손해 봐야 한다, 양보해야 한다, 힘들고 괴롭다’라는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옛날 영화 중에 <콰이강의 다리>가 있습니다. 고전을 모르면 대화가 어려운 시대이니, 이 영화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 영화에서 포로 수용소의 일본군 사령관이 영국군 포로들에게 콰이강에 다리를 놓으라고 시키면서, 장교들도 직접 노동하라고 명령합니다. 장교들은 군인의 자존심과 인격적 우월감을 지키려는 의지로 ‘일하지 않겠다’라고 버팁니다. 사령관은 그 대령(알렉 기네스가 연기한 인물)을 독방에 가둬두지만, 결국 굴복시키지 못하고 꺼내 줍니다. 대령은 기진했음에도 부하들에게 “날 부축하지 말라. 내가 혼자 걸어나가겠다”라고 말하고, 당당히 걸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자존심이 무엇인지, 명예가 무엇인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와 동행하며 일하심을 믿고 당당히 걸어나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자세를 갖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우리를 둘러싼 현실이 우리를 위협하고 흔들어도, 우리는 죽음을 이길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부끄러움과 모든 억울함, 모든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심, 용서하심과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자로서 당당히 걸어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참된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현실의 위협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찬수 목사님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그 사람에게 악한 영향을 미치는 귀신의 역사를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이것은 영(靈)의 문제이고, 영향력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바로 앞 절을 보시면, 그 귀신 들린 사람의 참 가슴 아픈 모습이 나옵니다.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는 장면입니다. 지금 여기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 교역자 몇 분이 계신데, 제가 지금 이렇게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느 젊은 목사가 막 소리를 지르면서 무언가를 저에게 말한다면, 아무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고 계시는데, 어떤 사람이 막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사람도 통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가 바로 귀신의 영향력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비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의 강력한 특징 중 하나가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이듯이, 현대에도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떠올려 보십시오. 미성년자들을 성적인 노예로 삼고, 그 영상을 퍼뜨려 돈을 벌었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이 붙잡혀 가면서 한 말 가운데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추게 되어 감사하다”라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두고 많은 사람이 분노했습니다. “그게 무슨 변명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신앙적으로 이 말을 들으며, 그가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이라고 표현한 그 절망감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체포되지 않았으면 끝내 멈추지 못했을 것이라는 고백이니까요. 저를 비롯해 많은 분들이 거기서 “아, 저렇게까지 가야만 멈출 수 있었나” 하고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악마의 삶”을 멈추게 해 주시는 능력을 경험한다는 의미입니다. 누가 저에게 “이 목사님,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숨도 쉬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게 예수 그리스도는 제 삶의 억제력이 되십니다. 탐심이 찾아올 때 그것을 억제하게 하시고, 누군가에 대한 분노와 울분, 미움이 솟아오를 때 그것을 억제하게 하시며, 제 안에 욕망이 찾아올 때도 제어할 수 있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잘못을 저질러 붙잡혀 감옥에 갇힌 뒤에야 비로소 “이제야 억제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감사하다”라고 말하는 식으로는 안 됩니다. 죄와 악의 길에 계속 빠져 있다가 강제로 끌려가서야 겨우 멈추는 것은 너무도 비참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진정한 은혜는, 그 악의 수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때라도, 주님을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통제하고 멈출 수 있게 해 주시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잘잘법에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는데, 그 “믿는다”라는 말이 정말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는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믿는다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라는 궁금증이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신뢰이거나, 그 대상이 한 말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굉장히 심오한 단어입니다. 또한 여러 단계의 믿음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단계에서 공통적인 부분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신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핵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셨는지, 또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을 믿는 것이 구원받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며 자라나는, 즉 ‘자라나는 믿음’이라는 차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받는 믿음, 또 성숙하는 믿음, 그리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약속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이 땅에서 어떤 고난이 와도 이겨내는, 승리하는 믿음의 차원이 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믿음은,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지요. 그 선물을 감사히 받아들이는 그 믿음, 바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며, 우리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I want to know what it is to believe. 나는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어야 한다고 요구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 세상에는 믿음에 대한 온갖 이상한 생각들이 가득해요. 단순히 교리를 믿는 것? 단순히 "그분이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Believing is what happens in the New Birth. 믿음은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예수님께 나아가고, 그분을 보물로, 물로, 양식으로, 주님으로, 구원자로,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존재하시는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에요. "내가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다른 곳을 바라보지 않겠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성경에서는 "영접(receive)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해요. 여기서 "영접하다"와 "믿다"는 서로 연결되는 개념이에요. 즉, 믿는 것은 다가가는 것이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먹고 마시는 것이고, 안식하는 것이고, 즐기는 것이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이에요. 이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에요. 만약 지금 제가 말한 이 내용을 믿는다면, 당신은 성경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읽게 될 거예요. 믿음의 순종을 바라보는 방식도, 순결과 거룩함을 위해 싸우는 방식도 달라질 거예요.
구원하는 믿음이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 바울이 디모데전서 6장 12절에서 말한 "믿음의 선한 싸움(the good fight of faith)"이 기쁨을 위한 싸움(fight for joy)이라는 것을 알게 될 거예요. 기쁨을 위한 싸움이란, 텔레비전이나 성적 욕망, 돈, 명성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기쁨을 찾는 싸움이에요.
이 싸움은 매일 싸워야 해요. 우리 안에 있는 세속적인 것들(what is earthly)을 죽이고, 세상의 유혹을 향한 갈망(cravings)을 끊임없이 제거해야 해요. 이 갈망들은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지만, 이 진리로 그것들을 죽여야 해요. "땅에 속한 것들을 죽이라." 당신의 기쁨을 파괴할 것들에 대해 매일 죽으세요.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꾸는 거예요. 성경을 읽는 방식,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방식까지도요. 믿음의 싸움은 곧 기쁨을 위한 싸움이에요. 기쁨을 위한 싸움이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see Jesus for who he is), 그분을 다른 모든 것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above all other things)이에요.
혹시 제가 사용하는 표현들이 단순히 효과를 위해 선택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예수님을 보고, 맛본다(Seeing and savoring Jesus)"는 표현 말이에요. 저는 지금 필사적으로 언어를 찾고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이 기존의 고정관념 속에서 재해석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기존의 고정관념이란, 많은 사람들이 감정과 기쁨, 평안을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단순한 결단이 아니에요. 결정을 내리고 나서 오랫동안 마치 악마처럼 살다가, 죽기 직전에야 바르게 사는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예수님과 동행하며 구원의 기쁨을 지금 누리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삶을 당당히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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