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성 목사의 '예수 동행 일기' Q&A
“일기를 쓰려고 할 때 도대체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가”
저는 예수동행일기를 쓸 때,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문을 쓴다’는 마음으로 작성합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오늘 하루 동안 은혜 베푸신 주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록하는 것이지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가 주님을 의식했는지 못했는지, 또 하루 중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았는지 돌아보고, 주님께 기도문처럼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제게 주셨다고 생각되는 은혜에 감사를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지 못했던 부분이 있다면 회개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예수동행일기에 반드시 “이런 내용을 써라”라는 정해진 규칙은 없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일기 쓰는 방식이나 내용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핵심은 ‘꾸준히 쓰는 것’입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쓰고는 있는데, 솔직히 어떤 변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예수동행일기를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님을 의식하고 살 수 있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는 차원에 머뭅니다. 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에 일기를 쓸 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예수님이 항상 생각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만큼 자주 예수님을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다음 단계에서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이 믿어집니다. 주님을 더욱 분명히 의식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놀라운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변화될까?’ 했을 때, 사실 변화의 출발점은 예수님을 의식하게 되는 데서 시작됩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이 믿어지니, 말과 행동도 자연히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가정이나 일터 등 주변에서 눈으로 보이는 변화가 생기기 전에, 먼저 “나는 예수님을 훨씬 더 자주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변화를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당신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조금씩 변화된 삶이 시작되고, 계속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눔방에서 예수동행일기를 공개하는 일이 어렵다”
이것은 ‘혼자서 여행하기’와 ‘함께 동행하며 여행하기’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혼자 여행하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 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지면 혼자만의 여행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아주 긴 여정입니다. 그 여정 중에는 반드시 좋은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동반자가 있으면 서로 신경도 써야 하지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됩니다. 어려울 때는 도움도 되며, 무엇보다 함께할 때 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따라서 “동행일기를 나누는 게 어렵다”라는 생각을 조금만 바꿔 보시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기 이전에, 먼저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더 깊이 의식하고, 서로에게 힘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꾸준히 연습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신앙의 동반자를 만나게 되고, 그 관계가야말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이 됩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불편하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눔방을 소홀히 하다 보면 결국 인생의 여정을 혼자서 헤쳐 나가는 것 같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바로 이 지점에서 실족하곤 합니다.
“예수동행일기를 작성하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일기를 어떻게 써야 하나”
저 역시 일기를 쓰는 시간이 제 하루 일과에서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합니다. 때로는 부담이 될 때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루를 살면서 밥을 먹는 시간을 꼭 챙기듯이, 저는 일기를 쓰는 시간을 항상 확보해 둡니다.
물론 아주 급해서 식사 시간을 줄이거나 빨리 먹을 때가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끼니를 아예 거르면서까지 일하진 않습니다. 식사 시간을 지키고, 운동하는 시간도 적절히 배분해야 삶이 균형 있고, 지치지 않으며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동행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중 반드시 일기 쓸 시간을 확보해 두고, 그 나머지 시간을 사용하십시오. 혹은 짬짬이 기록하셔도 좋습니다.
또 하루를 지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때가 있으니, 휴대전화 메모 기능 등을 사용해 “누구를 만났다”, “어떤 일이 있었다”처럼 짧게 메모해 두면 좋습니다. 그런 내용을 토대로 “오늘 내가 주님과 동행했는지 돌아보고, 주님께 기도하는 기도문 형태”로 일기를 작성할 수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의식되어 솔직히 쓰기 어렵다. 혹시 내가 쓴 것 때문에 누군가 시험들면 어떡하나”
예수동행일기는 미주알고주알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을 낱낱이 적어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일기입니다. ‘하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아니라, ‘그때 내가 주님을 의식했는지, 주님을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쓰면 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주변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될 만한 일이 있었다면, 굳이 구체적인 내용을 모두 밝힐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정말 힘든 일이 있었다”, “유혹이 찾아와 흔들렸다” 정도로 표현해도 좋습니다. 주님은 이미 여러분의 상황을 아시고, 여러분과 함께 아시는 내용이니까요.
나눔방이 어느 정도 성숙해져서 서로 신뢰하고 지탱해 줄 수 있는 분위기라고 판단되면, 그때 더 깊은 고백도 가능해질 것입니다. 저는 “어떤 문제가 있어도 서로 믿어 주고 지켜 줄 수 있는 공동체”로 나눔방이 성장하길 부탁드립니다. 그런 공동체가 결국 여러분의 삶을 지켜 주기 때문입니다.
또 너무 ‘마음 맞는 사람들’만 모여 있는 나눔방을 만들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상처가 깊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지체라 하더라도, 주 안에서 교제하며 함께 자라 가는 동안에 매우 훌륭한 신앙의 동반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서로를 귀히 섬기도록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사람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언젠가 여러분도 그로 인해 큰 유익을 얻을 때가 꼭 오게 됩니다.
지금부터라도, 주님과 동행하기를 함께 사모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열어 나누십시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예수동행일기 나눔방을 잘 가꿔 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이 함께 동행하는 형제자매로 인해 큰 보호와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원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드립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덮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김진수 기자님이 쓰신 책이 하나 있습니다. 암으로 투병 중이신 이어령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엮은 것인데, 제목이 「마지막 수업」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계신 그 교수님의 심정을 책 속에 이렇게 표현해 두셨더군요. 예전에는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그 내용들은 다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막상 자신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보니, 예전에 했던 이야기는 마치 동물원 철창 속의 호랑이를 구경하듯 한 것이었고, 지금은 철창 밖으로 튀어나온 호랑이가 자신의 목덜미를 무는 것 같은 심정이라고요.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 속으로 직접 파고드는 느낌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정말 실감 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위기나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이 겪을 때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과, 실제로 내가 겪을 때는 전혀 다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중병에 걸리셨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셨거나, 실직 또는 개인적인 실패를 경험해 보신 분들은, “호랑이가 철창 밖으로 뛰쳐나와 내 목덜미를 무는 것 같다”라는 심정을 절감하셨을 것입니다. (체감의 정도가 다른 타인과 나의 위기)
현재 우리 사회나, 한국 교회의 형편이 꼭 그런 심정 같습니다. 어려움이 마치 “철창 밖으로 나온 호랑이”처럼 우리를 덮쳐 오는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우리가 진짜 명심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현실’ 자체보다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 훨씬 더 크시다는 사실을 실제로 경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삶에서 만나는 어려움이 아무리 커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그 어떤 어려움보다 훨씬 크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이 사실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각오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초대교회 안에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AD 100년경, 그리스도인은 약 1만 5천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라는 극심한 핍박이 있던 때에, AD 310년이 되었을 때는 그리스도인이 2천만 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정말 절대적인 것인가, 아니면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에 대해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이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 실천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엄청난 명령입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만든 약속이 바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였습니다. 이 약속으로 인해, 복음이 2천 년 동안 온 세상에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부딪히는 현실의 어려움이 아무리 커도, “온 세상보다 크신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계신다”라는 약속이 있으니, 우리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려움을 없애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세상보다 크신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을 가지는 일입니다.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 - 크신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음
우리 어려움을 없애달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 속에는 하나님의 더 놀라운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주님과의 동행'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나 사회적·교회적 어려움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물론 가능하지만,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그 어려움 속에 깃들어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바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응답은 이 세상보다 크신 주님과 실제로 동행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은, 성도들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 예배드리고 교제할 때마다 예수님이 실제로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약속은 지금도 그대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머리로만 이 사실을 알 뿐, 실제로 마음으로도 믿고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래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면, 저는 이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이 내게도 실제로 이루어지게 하는 훈련부터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고등학교 시절에 처음 접했을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제 안에는 “정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내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간절한 갈급함이 생겼고, 그 갈급함이 50년 가까운 제 삶을 이끌어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올 한 해 동안,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이 약속을 실제로 경험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해 보시길 권합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있는가?
제 마음 깊은 곳에는 영적 두려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을, 그 시대에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몰라봤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듯,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제가 전도사가 되고 처음으로 참석한 교단 지방회(감리교에서 목사·장로·교회 대표들이 모이는 중요한 회의)에서 큰 다툼이 일어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서로 마이크를 뺏고, 언성을 높이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심하게 싸우셨습니다. 그러다가도 예배 시간이 되면 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보는 광경이 너무도 어색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해되지 못한 채 싸우던 분들이 어떻게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지?” 하는 마음에 눈물이 났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고 다들 말은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함께 계신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모습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동행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믿지 못하니 “사람이 보지 않을 때 은밀히 죄를 짓는” 일이 벌어집니다. 에베소서 5장 11~12절에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그것을 책망하라.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 눈에만 안 띄면 된다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이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하는 예수님을 실제로 믿지 않는 크리스천들...) 이것이 크리스천들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람이 없을 때 짓는 은밀한 죄를 짓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함께하신다'고 고백은 하지만 다른 삶을 살는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경외함
존 비비어 목사님이 「무엇이 善인가, Good or God?」라는 책에서 겪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TV 예배가 한창 유행하던 1980년대,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어떤 유명한 텔레비전 설교자 목사님이 사기와 간음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미국 교회가 전도에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를 싸늘하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이 그분을 교도소에서 면회했을 때, “목사님, 언제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셨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그분은 “저는 한 번도 예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존 비비어 목사님은 황당해하며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죄를 지을 수 있었느냐”고 되묻자, 그 목사님은 “예수님의 사랑은 늘 뜨겁게 간직했지만, 한 번도 예수님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문제는, “예수님의 사랑을 진심으로 느끼고 안다고 해도, 예수님의 ‘실제적인 임재’가 두렵지 않으면, 결국 죄를 거리낌 없이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지금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진짜로 믿어지면,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혼자 있을 때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 믿어도 삶이 잘 안 바뀐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믿으면, 삶이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 안에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다는 것은, “예수님과의 실제 동행”이 안 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삶 속에서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크리스천들. 예수님을 믿고 달라지는 삶의 모습은 바로 '경외함'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경외함을 회복하는 방법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선교사님께서, 자신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간증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때가 중국이 아직 개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지금도 상황이 여의치는 않지만, 당시에는 특히나 단기선교팀이 들어갈 때 전혀 “자신들이 크리스천”이라고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그분이 속해 있던 팀이 중국의 아주 오지 마을로 선교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주일이 되니 예배를 드려야겠다는 이야기가 팀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때 리더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끝에 이렇게 생각해 냈다고 합니다. “내일, 이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인 이른 새벽에, 우리가 한 방에 모이자. 그리고 거기서 함께 예배를 드리자.”
그리하여 주일 아침, 사람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이른 시각, 새벽 네 시쯤에 모두를 깨워서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문제는 찬송이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금방 알아차릴 테니,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지요. 예배를 인도하시는 목사님이 “이번에는 소리를 내지 말고, 입술만 움직여서 찬송합시다”라고 제안하셨습니다.
그때 부른 찬송이 “만 입이 내게 있으면”이라는 찬송이었는데, 모두 “입술로만” 부르기로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럼 우리 다 같이 찬송합시다” 하고, 소리는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였는데, 그러자 갑자기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고 합니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데도, 그 시간에 성령의 가장 강력한 감동을 체험했답니다.
자신은 이전에도 얼마든지 예배를 드려 봤습니다. 일어나서 힘차게 찬양도 하고, 손을 들고 뜨겁게 찬양한 적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큰 소리로 찬양하고, 악기도 울려 퍼지고, 그런 예배 환경도 여러 번 경험했지요. 그러나 이 중국 오지 마을에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술만 움직여 부르던 그 찬송 시간에 느꼈던 ‘주님의 임재’만큼 강력한 체험은 없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사실이 분명한데, 우리는 그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지 않아서, 종종 그 임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주님이 정말로 계시는데, 내가 그분을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을 의식하지 못해서, 그분의 강력한 임재를 놓치고 살 뿐입니다.
예수 동행 운동
예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동행 운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매일 일기를 쓰면서 주님과의 동행을 점검해 보자”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실제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분과 동행하며 사는 것을 훈련하고 습관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곳곳을 다니면서 성도님들께 “주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니 주님의 책망이나 위로나 인도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동행 운동을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전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에도 주님은 분명히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혹시 잘 못 믿겠다고 느끼신다면, 눈을 감고 조용히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만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 보세요. 그러면 어느새 전과 다른 느낌이 마음에 밀려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를 찾아와 목회와 관련된 여러 질문을 하시다가, “목사님, 저는 예수님이 제 안에 계심을 믿는데, 주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께 “진짜로 예수님이 목사님 마음에 계신 걸 믿으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정말 믿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의 음성은 못 듣겠습니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다시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여기까지 오시면서 차로 한 시간쯤 운전해 오셨을 텐데, 그 한 시간 동안 주님은 목사님께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고요. 그 목사님은 “그건 모르겠습니다. 못 들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렇다면 목사님은 정말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고 믿으시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했더니, 목사님이 어리둥절해 하셨어요.
제가 이렇게 설명드렸습니다. “목사님, 만약 목사님이 사모님을 태우고 한 시간쯤 운전을 했다면, 또는 교인 한 분을 태우고 오셨다면, 아예 말씀 한 마디도 안 하고 가시진 않았을 겁니다. 전혀 대화가 없었다면, 무언가 심각한 갈등이나 문제가 있는 상황일 테지요. 그런데 목사님은 한 시간 동안 예수님과 아무 대화가 없었는데도 ‘저는 예수님이 저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고 태연히 말씀하십니다. 만약 정말 예수님이 함께 계신다면, 말씀이 전혀 없었다는 건 오히려 굉장히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목사님이 교회로 돌아가시는 길에, 진지하게 주님께 여쭤보십시오. ‘주님, 오늘 저를 통해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셨습니까? 오늘 이 시간 제게 무엇을 깨닫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요. 그리고 마음속에 떠오르는 깨달음이 있다면 꼭 기록해 두십시오. 생각만 하고 넘기면 다음 날 바로 잊혀지기 쉽습니다. 꼭 적어 두십시오. 그것이 곧 ‘예수동행일기’입니다. 그렇게 매일같이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교우들과 말씀을 나눌 때 자연스레 ‘지금 제 안에 계신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고백하시게 될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정말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는 일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됩니다. 이 삶은 계속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낯설고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1장 8절 말씀처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실제로 예수님을 뵌 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우리처럼 뵌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면 정말 달라집니다. 그 삶을 시작해 보시길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일 일기를 써 보자는 것이고, 저는 그것을 ‘예수동행일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름대로 매일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기록하는 계획을 세워 보시기 바랍니다.
일상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세요. 변화의 힘 = 말씀
예수님을 믿어도 사람은 안 바뀐다?
저는 “일상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꼭 하시라고 말씀드립니다. 사실 저도 오래전엔 “예수 믿어도 사람은 잘 안 바뀐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아버님이 목사님이시라,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많은 그리스도인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아, 사람은 제 성격대로 계속 살아가는구나” 싶었지요. 저 자신도 별로 변하지 않으니, “사람은 안 바뀐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말씀합니다(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렇다면 제가 ‘사람은 안 바뀐다’고 생각하는 것과, “새 피조물이 된다”는 말씀이 충돌하는데, 어떤 게 맞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저에게 깨우쳐 주신 것이 “우리가 늘 보고 듣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믿음의 걸음을 걸어왔지만, 결국 소돔과 고모라 성으로 가서 살며 엄청난 비극을 맞았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6~8절에 따르면, 롯은 날마다 소돔 사람들의 음란하고 불법적인 행실을 ‘보고 들으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이처럼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이 우리를 망치기도, 세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흥회나 제자훈련 등에서 은혜를 받은 뒤에도, 일상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세상의 음란함과 죄악만을 보고 들으면, 결국 변화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 (굳어진 마음 회복하기) - 매일 보고 듣는 것을 조심하라
히브리서 3장 8절과 10절에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이 완고해진다, 즉 마음이 어떻게 굳어질까요? 사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됩니다. 전혀 마음을 돌보지 않고 그냥 방치하면, 마음이 점점 완고해집니다. 밭을 갈지 않고 1년, 2년 지나면 돌덩어리처럼 딱딱한 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한 번 굳어지면 스스로 회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특별한 사건이나, 엄청난 어려움 같은 ‘커다란 고비’를 겪어야 비로소 마음이 뒤집히곤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사는 일이 무척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했습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날마다 서로 무엇을 보고 듣는지 점검해 주고, 말씀으로 격려하며 권면하는 삶을 살아야, 이 문제가 극복이 됩니다. 그래서 일상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의 핵심은 “매일매일”에 달려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되,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고아가 어떤 사람인가요? 흔히 “부모님이 없다”고 표현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부모님이 안 계시거나, 혹은 계셔도 같이 살지 않아 혼자 사는 상태가 고아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은 고아처럼 삽니다.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고,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지며, 일상 속에서 예수님은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일상의 삶”에서 날마다 보고 듣는 것이 주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더 이상 고아처럼 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항상 내게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주님과 동행하겠다.” 이렇게 결심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듯 사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 생활하는 곳에서 이 훈련이 이뤄져야 합니다.
한 번은 성지순례 중, 베들레헴에서 20분쯤 떨어진 큰 수도원을 가 봤습니다. 수도사들이 백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유대 광야와 기드론 골짜기가 펼쳐진, 정말 영감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골짜기 곳곳의 암벽 동굴마다 수도사들이 들어가 오직 하나님을 묵상하고 성경을 읽으며 지낸다고 하더군요. 참 감동이 됐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갈망하고 말씀대로 살려 했으면 여기서 평생을 보내나!”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수도원을 돌아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 모두가 이런 수도원에 살기만을 원하실까?” 저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모든 관계에서 단절되어 오직 성경만 읽고 지내길 바라시는 게 아닐 테니까요.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무슨 의미일까요? 바로 그 “일상” 속에서 주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수도원에서 아무리 주님을 깊이 묵상해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동행이 이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귀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특별한 장소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여기지 않고, 매일의 삶 전체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믿고 구했습니다. 시편 16편 8절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며”라고 고백했지요. 실제로 다윗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오른편에서 자신을 지키신다는 믿음으로 살아 냈습니다. 그래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내 영도 즐거워하며...”라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결국 평범해 보이는 일상 한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집니다.
한 선교사님이 10년째 중국 오지에서 훌륭하게 사역하시다가, 한국에 잠시 나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기 싫다고 솔직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매년 비자를 갱신하러 한국에 나오면, 함께 신학을 공부했던 동기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목회자 동기들이 해마다 달라진 모습으로 사역도 커지고, 여러 면에서 발전해 보이더랍니다. 반면 자신은 중국 오지에서 복음을 대놓고 전하지도 못하고, 노방전도도 하지 못하며, 예수님을 믿는 몇몇 형제들만 양육할 뿐이니, 오히려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다는 겁니다. 이번에도 들어가야 하는데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선교사님, 들어가시면 너무 ‘사역’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만 하지 마십시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까지,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선교사님과 지금 여기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어디에 가도, 누구를 만나도, 주님이 하시는 일에 선교사님이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일기를 써 보십시오. ‘오늘 눈 떴을 때 내가 주님을 얼마나 바라봤나, 주님을 의식하며 어떻게 살았나’를 돌아보는 겁니다. 그러면 일 년 뒤 한국에 다시 오셨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주님을 잘 아세요? 주님의 음성을 잘 들으세요?’ 하고 물으면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할 겁니다.”
그분이 “동기들은 큰 교회도 맡고, 교수도 되어서 부럽다”라고 하셨기에, “예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분, ‘그분을 보면 예수님 보는 것 같다’고 느껴지는 분이 몇 분이나 계신지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여쭙자, 그 선교사님이 가만히 떠올려 보시더니 딱히 누구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교회가 크고 사역 규모가 큰 것이 곧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의미하진 않는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히려 선교사님이 계신 중국 오지는 교인도 적고 사역도 크게 확장하기 어렵지만, 주님과만큼은 오히려 더 깊이 동행하실 수 있는 자리일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각자의 일상 속에 아주 소중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용조 목사님께서 23살에 폐결핵으로 요양소에 머무르며 쓴 일기들이, 훗날 온누리교회 사역 전체의 ‘설계도’처럼 되었던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알고 계시므로, 그분과 동행하며 일기를 쓰는 가운데 미래의 사역과 인도하심이 자연히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의 삶이 절대 의미 없는 일이 아닙니다. 매일 꾸준히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기를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일기가 훗날 여러분의 미래를 이끄는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나는 특별히 쓸 내용이 없어요. 맨날 똑같은 생활인데 무슨 일기를 씁니까?”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제대로 알고 사랑하게 되면, 똑같아 보이는 반복된 일상도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일상이 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깨닫고, 말과 행동도 달라집니다.
어느 목사님께서는 다섯 살짜리 딸이 어린이집을 안 가겠다고 떼를 써서 난감해하셨습니다. 엄마랑 떨어지기 싫다고 울고불고 하는 걸 달래도 안 통하자, “그럼 예수님께 여쭤보고 결정해 보자”고 하셨는데, 아이가 기도하고 나오더니 “예수님이 가지 말래요”라고 하는 겁니다. 그때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꾸미는 거지!” 하고 호통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셔서, “그래, 예수님이 가지 말라고 하시니 오늘은 안 가도 좋다” 하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다음 날은 별말 없이 어린이집에 가더라는데, 몇 달 뒤 아이가 또 안 가겠다고 하니 목사님이 조마조마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가 기도 후에 가방을 들고 나와 “예수님이 가라고 하셨어요”라며 “사실 가기 싫었지만,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야죠”라고 했다지요. 이렇게 매일 일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하면, 어린아이도 믿음의 눈이 열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생활, 교회생활, 직장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매일매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택배 기사로 일하시는데, 가끔 교회에 배달을 갈 때마다 서운함을 느낀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은 분명 교회 집사인데도, 교회 직원이나 성도들은 그를 ‘물건 배달하는 택배 기사’로만 대하고, 눈도 잘 안 맞추고 그냥 “거기 두세요, 수고하세요”라는 정도로 그친다는 겁니다. “내가 교회 집사라는 걸 모르는 분들이 많긴 해도, 만일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 상태였으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그리고 때로는 절(사찰)에 배달 갈 때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며 따뜻하게 대접받을 때, ‘교회는 왜 이러지?’ 하고 씁쓸해진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하셨습니다.
사실 이런 일들도 “내가 어느 순간 주님을 놓치고 살고 있구나” 하고 깨닫게 해 줍니다. 사소해 보이는 순간에도, “아, 주님이 함께 계시고, 내가 주님의 마음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의식이 없으니 놓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꼭 해 보시라. 그리고 그 내용을 일기에 적어 보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이를 “예수동행일기”라고 부르는데, 형식은 중요치 않습니다. 매일 “오늘 주님과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며 쓰는 것이 핵심입니다.
정말 제 마음으로부터, 여러분이 이 훈련을 해 보시길 간절히 권면합니다. “일상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삶,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주님을 의식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참된 신앙의 기쁨과 능력을 누리는 길입니다. 여러분이 이 은혜를 경험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수치심을 이기는 방법
‘영혼’에도 탄력성이 있습니다. 탄력성이 있는 영혼은 어려운 위기가 닥치면 물론 힘들고 괴롭지만, 그 위기를 딛고 한층 더 성장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혼에 탄력성이 없다면, 위기가 찾아왔을 때 문제가 우리를 압도해 버리고, 영혼이 산산조각나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영혼의 탄력성을 회복하는 방법”, 곧 “수치심 주장하기”라는 주제입니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는 매우 부정적으로 들리는데, 왜 그걸 ‘주장하라’고 하는지 의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실제로 몸의 통증보다 훨씬 더 압도적일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강렬한 감정이기 때문에,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영혼의 탄력성이 줄어들고, 우리는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수치심이 있는 사람은 흔히 그 수치심을 자꾸 감추려고 합니다. 수치스럽다고 느끼는 부분이 취약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기가 졸업한 학교가 왠지 창피하게 느껴지면, 학교 이름이 나올 것 같을 때 그 얘기를 돌리려 하거나, 대화 주제를 바꾸어 버리는 식으로 감추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숨기기만 하면, 그 수치심은 점점 더 거대한 괴물이 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수치심을 치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수치심을 개방할 때, 주장할 때 치유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가운데로 나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은 일어났고, 예수님은 “네 손을 내밀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그대로 하였을 때,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오른손이 말라 있었는데,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이러한 신체적 질병이나 장애를 종종 ‘신학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즉, “무슨 죄가 있어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것이다”라고 쉽게 단정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이 사람은 평소에도 스스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늘 뒤로 숨어 지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가운데로 나오라”고 하시더니, 마침내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장면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에게도 혹시 수치심이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오히려 “수치심을 주장”하십시오. 그 수치심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순간, 더는 그것이 괴물이 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할까 봐 너무 무섭습니다.” 이런 식으로 솔직히 인정하기 시작하면, 수치심은 차츰 힘을 잃어 버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라틴어 격언 중에 “Solvitur ambulando(쏠비투르 암불란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걸으면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작은 것이지만,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실천해 나가다 보면, 이전에는 탄력성을 잃었던 우리의 영혼이 서서히 탄력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새롭게 달라질 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도 변화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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