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어려움 자체가 아닙니다. 어떤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한지가 초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이 내게 있는가, 그 점에 따라 어려움이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 할 제목도 많고, 문제들이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문제든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다 달라도, 하나님의 답은 똑같습니다. 그것은 ‘함께하심’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모든 문제의 답이고, 모든 상황에 동일한 은혜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이 정말 믿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믿어져야 힘이 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고 듣기는 했어도 믿어지지 않으면, 문제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우리의 과제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어떻게 실천할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주님이 늘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와 늘 함께하심이 믿어지는 순간, 그 믿음이 곧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교제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문제 해결을 바라고 계속 간구하는 것도 기도이지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알고 동행하는 삶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삶을 살아 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은 자가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사실이 가장 큰 복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만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끼리 서로 사이에도 서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훨씬 더 놀라운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실까?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릴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합니다.
그런데 이 일이 주님과 나만의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갈망을 가진 성도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 안에서 훨씬 더 강력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 갈망도 공동체를 위하여 (고전 14:1~25)
요즘처럼 어려움이 많은 때야말로 성령의 충만함이 정말로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우리 안에 성령, 곧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이 모여 이룬 교회에서는 당연히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도무지 믿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믿게 되거나,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변화되거나, 결코 끊을 수 없었던 죄를 끊어 버리거나, 기도를 통해 병든 자가 고침을 받는 역사 같은 일들이 성도의 삶과 교회 안에서 계속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참 많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모든 일들을 우리는 ‘성령의 은사’라고 부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 이런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게 일어나서, 여러분 모두가 성령의 놀라운 은사를 체험하고, 그 은사로 주님께 쓰임 받게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자 계획이기도 하고, 우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복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성령의 역사는 갈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분별도 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악한 영의 미혹도 많고 거짓 가르침도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이단이 영적인 현상을 통해 퍼져 나간 역사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매우 강하게 일어나는 교회였습니다. 방언과 예언 같은 은사가 자연스러울 정도로 나타났고, 여러 가지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영적으로 혼란스러운 모습도 있었습니다. 강력한 은사가 필요한 것은 맞지만, 분별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일어났던 영적 혼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방언’ 문제였습니다. 방언을 사모하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 방언이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보면 방언에는 두 가지 형태가 나옵니다.
첫째는 사도행전 2장 4절에 기록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하셨을 때, 배우지 않은 외국어로 말하게 된 경우입니다. 실제로 방언을 하시는 분들 중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기도하는 사례가 지금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 계셨던 어느 선교사님(보안을 위해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께서 중국에서 사역하셨는데, 한국에 잠시 와서 사역하시던 중 어느 부목사님의 방언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이 사역했던 중국의 한 지역 언어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셨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둘째는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천사의 말’이라고 표현된 방언입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나 단어가 반복되는 형태입니다. 우리가 흔히 ‘방언 기도’라고 할 때 대부분 이 형태를 말합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 상당수가 이런 방식의 방언으로 기도했던 것 같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십니다. 성령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내용이 담긴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기도의 힘이 생깁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몰라도, 기도 시간이 길어집니다. 평소 우리말로 기도할 때 5분도 하기 어려웠던 사람이 30분, 1시간, 때로는 몇 시간씩 기도하게 됩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애통한 마음이 생겨나면서 간절한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기도를 더 잘해 보고 싶은 분들 대부분이 방언 기도를 사모합니다. 방언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방언의 은사를 공적인 예배 시간에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방언이 근본적으로 ‘하나님만 알아들으시는 언어’라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예배 중에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송을 하면, 함께 예배드리는 이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적 예배에서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송하는 일은 절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예배 기도를 맡으신 장로님이 만약 방언으로만 기도하셨다면, 장로님 본인은 성령 충만했을지 몰라도, 우리는 어디서 “아멘”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절제 없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송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차라리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가르쳤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1절을 보면,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신령한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특히 예언하기를 열망하십시오”라고 합니다. 방언이 낫냐, 예언이 낫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방언은 혼자 있을 때 기도하거나 찬송할 때 사용해라. 예배 때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이 필요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하지만(고린도전서 14장 18~19절), 함께 예배할 때는 이성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기도하길 원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방언으로 찬송해도 되지만, 여럿이 함께 찬송할 때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찬송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차라리 깨달을 수 있는 다섯 마디 말을 통해 교우들에게 가르치겠다. 그게 일만 마디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이의 기본 태도를 보여 줍니다. “자기 유익보다 교회를 세우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예언’은, 세상에서 말하는 무당이나 점쟁이처럼 미래를 점치는 예언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말하는 ‘예언’이란, 성경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던 초대교회 시절, 성도들이 모여 예배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 권면, 위로, 깨우침을 누군가가 성령의 감동으로 받아서 성도들에게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설교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오늘날에는 예배 시간을 통해 설교자가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는 누가 예언(하나님의 메시지)을 받을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차피 무언가 말할 거라면, 차라리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대언하여 많은 성도에게 영적 유익을 주어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지금도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가정예배나 소그룹 모임, 중보기도 모임 등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마음에 뭔가 메시지가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나누는 것, 이것을 ‘예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그런 예언의 감동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라고 느껴질 때, 반드시 두 가지 분별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공동체를 통한 분별이고, 또 하나는 성경을 통한 분별입니다.
잘못된 예언도 있습니다. 예언을 빙자해 돈을 받는 등 직업적으로 예언을 하는 사람들은 무당이나 점쟁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또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예언’이라고 떠벌리거나, 그 예언을 근거로 교회를 어지럽히며 “내게 주신 말씀이니 누구도 간섭하지 마라” 하는 식으로 교만해지는 모습도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미래의 일을 점치듯 말하는 예언기도 역시 악한 영의 미혹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되어질 일을 알고 싶어 예언기도 은사를 찾아다니는 태도 역시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한 뜻을 보여 주셨는데, 성경을 읽고 분별하기보다 “예언기도로 답을 받겠다”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미혹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지 아닌지는 공동체를 통해 분별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 성도가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다”라고 할 때, 같은 성령이 다른 성도들에게도 그 말씀이 참인지 아닌지를 분별하게 하십니다. 다 함께 들어 보고, 기도해 보고, 만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이건 아직 하나님의 뜻으로 단정할 수 없다”고 기다려야 합니다.
또 반드시 성경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무렇게나 해석해서는 안 되므로, 성경 해설서나 사전 등을 활용하여 말씀의 정확한 뜻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목회자의 분별을 구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분별해 주십시오”라고요. 이런 과정을 거쳐야, 마귀가 성령의 역사를 틈타 교회를 시험에 빠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갈망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를 귀하게 여기면서도 미혹받지 않으려면, 고린도전서 13장 13절 말씀처럼 “사랑이 으뜸”임을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가장 귀한 것은 사랑이다. 결론은 사랑이다”라는 자세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 곧 어른이 된 사람의 태도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자매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에는 아이가 되되,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세상 악한 일에 대해서는 모를수록 좋지만, 영적인 일에는 성숙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최고 지식이 바로 “사랑이 제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를 전하면서 제 마음에 답답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 설교가 “방언, 예언, 성령의 은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성도”들이 아닌 분들에게는 남의 얘기처럼 들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방언도 못 한다. 예언이라는 건 꿈도 못 꾼다. 내게 어떤 은사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고 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이 무슨 상관이 있나 싶을 수 있습니다. 혹시 “방언, 예언을 보니 복잡하네. 조심해야 한다니 안 받는 게 낫겠다”라고 생각할까도 염려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가 너무나 풍성하게 나타나는 상태”가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절제하고 조심하라.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은사가 풍성하게 나타나는 것이 원래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너무 강하게 나타나서 절제해야 할 정도”가 되어야 할 만큼, 성령의 역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나는 은사가 없다. 방언도 못 하고, 예언도 모르겠고, 아무런 은사가 없는 것 같다”라고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분별하라, 절제하라”에 앞서 “기본적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가 개인적으로나 교회 안에서 강하게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영적인 역사가 전혀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서만 머무르고, 윤리·도덕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주일예배만 드리며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평범한 차원에서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흔히 “예수 믿는 사람” 하면, 술·담배 안 하고, 주일이면 교회 가고, 전도 좀 하는 정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예수 믿는 사람의 이미지가 그래서는 안 됩니다. 골리앗 앞의 다윗, 바벨론 포로 시절의 다니엘 같은 강력한 이미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세상보다 크신 성령 하나님이 계시니, “성령의 역사를 제 삶에 넓게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배당 건물도, 직분 체계도, 완성된 성경도, 목회자 제도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박해도 심하고, 이단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바로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신앙생활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독일교회는 지성적·신학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성령의 충만함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히틀러라는 악마적 정권이 들어섰을 때, 독일교회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없이 아무리 지적으로 뛰어나고, 사람이 착하고 성실해도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소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코로나19, 홍수, 경제적 위기, 또 강력한 세속의 물결 등등이 계속됩니다. 게다가 은밀한 죄와의 싸움, 부부싸움 하나도 성령의 충만함이 없으면 이겨 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사모하고, 실제로 내 삶에 일어나는 역사를 체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영국으로 유학 갔던 어느 자매는 1년도 안 되어 향수병이 심해져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을 만큼 힘들었는데, 어느 날 집주인이 여행을 떠나 혼자 남자, 마음껏 기도하며 통곡하다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 성령 체험 뒤에는 기쁨이 넘치고, 감사가 넘치고,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또 어떤 남자 집사님은 직장생활이 힘들어 사표를 내려다, 휴가를 내고 부흥회에 참석하며 은혜받은 뒤, 직장을 떠나는 대신 “여기가 나를 부르신 사명지”임을 깨닫고 전도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니, 문제가 달리 보이고, 상황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간혹 “저는 성령 체험이라는 것을 못 해 봤습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죄를 지으면 마음에 찔림을 느끼고,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것이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 내 안에 역사하고 계시는구나”라고 깨닫는 순간, 성령의 역사는 더 강력해집니다.
과거에는 교회가 함께 모여 부흥회나 철야기도를 할 때, 성령의 뜨거운 역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지금은 여러 사정상 모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인 회복과 성령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을까요? “모이지 못해도 영적으로는 모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동행일기 나눔방’ 같은 것이 좋은 예입니다. 많은 사람을 모으지 않더라도, 마음을 함께 열고 서로 나누면,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합니다.
‘하루 한 시간 기도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자리에 모이지 못해도, 매일 한 시간씩 시간을 정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카메론 페리 박사라는 목사님은 30세에 목사가 되었고, 60세가 될 때까지 30년간 목회하면서도 성령 체험을 못 했다고 합니다. 아내가 병들어 어떤 방법으로도 낫지 않자, “내가 정말 주님을 믿지 못했구나” 하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주님께 진짜 기도하면 병든 자를 고치신다”는 말씀을 제대로 믿지 못했던 겁니다.
믿음은 억지로 생기는 게 아니니, 어떻게 해야 참된 믿음을 소유할까 고민하던 중, 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여,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그때부터 매일 1시간씩 시간을 정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4년째 되던 해, 어느 날 기도 중에 강력한 성령 체험을 했고,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면 낫는 역사까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한 뒤 두 달간 전도한 열매가, 지난 30년 동안 전도한 것보다 많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예수님과 동행하는 50일 기도’를 하고 있는데, 8월 말까지 21일 정도 남았다고 합시다. 그동안 못 하셨던 분도, 지금부터라도 하루 한 시간씩 구별하여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옵소서.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공동체를 세우는 데 쓰임 받게 하옵소서.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어려운 이들을 일으키는 일에 제가 쓰임 받길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나도 살고 우리 공동체도 다 삽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으면, 지금 같은 시대에 직업을 견디기도 어렵고, 믿음을 지키기도 어렵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겠습니다. 이 기도는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주님, 저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쓰임 받는 삶을 살게 하소서.” 이렇게 기도드립시다.
성령의 역사, 절제가 필요하다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흥이 다시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갈망하고,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임하지 않는다면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성령의 충만함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대체 그게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아주 강력하게 성령의 사역을 하셨던 어느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이 성령 체험을 하셨던 날, 밤을 새워 하나님께 기도하신 뒤 새벽에 쓴 글이 있는데, 제가 그 글을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을 통해 어느 정도 느낌을 간접적으로라도 경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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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합니다. 웬 힘이, 웬 불이, 웬 능력이 그리도 많은지 미처 몰랐습니다. 지구를 회전시킬 것 같은 능력이 어디서 일어나서 나를 정복하고 무릎을 꿇게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웬일입니까? 제 안에서 원자의 불같이, 핵의 불같이 마구 붙습니다. 무쇠 덩어리도 녹일 듯한 그 강하신 불이 나를 태우기에 제가 소리칩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 소멸의 불같이 밤새도록 타올라서 모두 타서 없어졌을 것 같은데, 동이 트면서 나를 살펴보면 나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영과 육이 하나 되어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나’, 겸손히 무릎 꿇고 흐느끼는 ‘나’, 영혼 저 깊숙한 곳에서 ‘주여’ 하고 부르는 나만이 남아 있습니다.
죄악된 것은 밤새 다 타버렸나 봅니다. 필요 없는 것은 몽땅 타서 재가 되어 날아가 버린 모양입니다. 이상한 기쁨이 나를 돕습니다. 은혜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느낍니다. 그가 기도하면 나도 기도하고, 그가 찬송하면 나도 찬송하게 되는데, 피곤할 것 같은데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병들 것 같은데도 더욱 샘솟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핍박과 비난의 소리가 높이 들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주춤하는 나에게 그가 소리칩니다. ‘핍박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서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명령하시고 책망하시기에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이 밤도 벌써 훤히 밝아 옵니다. 동이 트나 봅니다. 신령한 그날, 주님의 재림의 그날도 이토록 동이 트고 훤히 밝아 오기를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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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 느낌이 조금은 오십니까? 많은 분께는 알 듯 말 듯한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게 되면 거부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 안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방언을 하고, 어떤 분은 예언을 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이 나타나기도 하고,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며, 성령 안에서 쓰러지는 현상도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성령이 임하실 때 우리 가운데 실제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 은사나 능력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어지게 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게 되는 일, 말씀을 듣거나 찬양을 들을 때 은혜가 깨달아지는 일, 마음에 성령의 근심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일,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은 소원이 생기는 일, 누군가를 용서해야겠다는 마음,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일 등이 모두 실제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사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고, 전도도 하게 되며, 귀신의 역사가 떠나고 마귀의 권세가 꺾이고, 교회가 세워지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성령의 강력한 능력입니다. 시대가 아무리 힘들어도,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세상보다 훨씬 크신 주님이 이미 우리 안에 임하여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구하고 충만함을 갈망하더라도 조심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면 악한 영의 미혹도 함께 온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성령의 역사를 무산시키고, 무력화하려는 시험을 동시에 일으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과 하나님의 부흥을 갈망하되, 악한 영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를 구분해 낼 수 있는 분별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영의 역사라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 영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정확히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와 악한 영의 역사를 구분해 주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절제’입니다. 성령의 사람에게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삶이 아름답고, 불신자들이 볼 때도 감동이 되며, 공동체의 질서를 잘 지킵니다. 말과 행동에 절제가 있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성령의 역사를 보고 마음이 끌립니다.
반면 악한 영의 역사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감정대로, 고집대로 행합니다. 능력이 나타나는 듯 보이지만 공동체를 깨뜨립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거칠고 혼란스러우며, 시기와 질투, 다툼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질서를 말하고 절제를 강조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방언과 예언, 병 고침, 기적 등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을 때, 고린도 성도들은 굉장한 확신을 얻었을 것입니다. 핍박이 와도 신앙생활에 용기가 생기고, 오히려 전도도 일어나고, 교회가 흥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회 안에 무질서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서로 자기 은사를 내세우며 자랑하고 판단하다 보니 다툼이 생겨 큰 어려움에 부딪혔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부흥을 갈망하되, 능력 자체를 갈망하기보다 주님을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할 때만 성령의 역사가 절제 안에 놓여서 질서 있게 나타나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실로 바라보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면, 말을 하거나 행동할 때 함부로 할 수 없고, 교만하거나 분열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늘 마음속에 “이건 주님 앞에서 옳은가?”를 묻게 됩니다. 그 모습이 절제이고, 공동체 질서를 지키며, 다른 이에게 아름다운 감동을 주는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여자 성도들에게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말했던 것도, 그 교회 안에 은사를 체험한 여성도들이 많았으나 절제가 없어서 교회에 혼란과 시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울이 모든 여성을 차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고린도교회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방언·예언을 하며 질서를 깨뜨리는 여성도들에게 “집에서 먼저 배우고, 교회에서는 절제해라”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남자들도 성령 체험을 하면 영적으로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은사가 없다고 여기면 목회자를 무시하고, “내가 직접 들었다”며 독단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체험 자체가 우리의 믿음보다 앞서 갈 때, 악한 영의 미혹을 받기 쉽습니다.
사도 바울이 36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 났습니까, 또는 여러분에게만 내렸습니까?”라고 묻는 것은, “성령께서 내게 말씀을 주셨다면, 똑같은 성령께서 다른 성도들과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니 분별을 구하고 겸손하게 판단받아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제가 어려서 본 은사자들 중 다수가 영적 교만에 빠진 모습을 봤습니다. 은사체험이 없는 성도들을 믿음 없다고 치부하고, 교회의 권위나 질서를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모습은 결코 덕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거부감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 “주님보다 은사와 능력 자체”를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모든 은사와 축복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심지어 생명까지도 내어놓는 순교를 감당하게 하시기 위해 주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성령의 강력한 능력에 사로잡혔던 사도들과 성도들은 대부분 순교했습니다. 저도 한때 기적을 행하는 은사를 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목회가 더 잘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네가 더 힘들어져도 좋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은사를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더 큰 사명과 헌신이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령 충만과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유혹이 많고 핍박이 심한 세상에서,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친구, 이웃, 직장 동료까지 모두가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구원받아야 하는데, 그 복음을 전할 힘도 성령의 능력에서 나옵니다.
광복 75주년을 맞아, 여러 방송에서 독립운동가나 투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의 헌신은 참 귀했습니다. 그러나 광복은 그분들이 이룬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독립운동가들의 기도와 희생을 사용하셨지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점을 세상 방송은 잘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특별히 우리 민족에게 임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와 사회, 민족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합니다. 동성애 합법화 같은 반기독교적 문화는 정말 두렵고 우려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과 나라를 위해, 또한 북한·중국·일본·동남아·인도·아프리카·남미·중동·유럽의 무슬림·불교·힌두교 지역 등 전 세계 열방의 복음화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생각하면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많은 나라로 세우신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령의 역사를 구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주시는 성령의 역사,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9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예언하기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그리고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마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40절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적절하게 하고 질서 있게 하십시오.”
성령의 능력, 기적 같은 역사만을 바라보지 말고, 성령의 다스림과 질서 안에서 구해야 합니다. 방언이 중요하지만 통역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절제해야 하고, 예언도 하나님이 말씀 주셨다면 전해야 하지만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7절에 보면, 이것은 바울의 권면이 아니라 “주님의 명령”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도 필요하고, 성령의 절제도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 한국교회에 강력한 성령의 은사 운동이 일어났던 때를 기억합니다. 기적과 치유 역사로 부흥했지만, 동시에 부작용과 은사자들의 타락, 이단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도 강했습니다.
그런 시절에, 성령의 능력을 강조하면서도 그 열매가 아름다워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사례를 보여 주신 분이 강원도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성령 사역에 열려 있었고, 강한 성령의 역사도 체험하셨지만, 동시에 가난한 사람·소외된 사람을 돌보는 사회 정의 사역도 강조하셨습니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다는 사실이 저에게 큰 감동이었고, 제 목회의 방향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시려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갈망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먼저 능력만 구하기보다,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능력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려면 우리 마음이 늘 부드러운지 점검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온전히 사는 사람은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파라과이에서 사역하시는 임동수 선교사님이 예배당을 많이 지으셨는데, 대부분 나무로 건물을 지으며 ‘나무가 잘 마르면 돌처럼 단단해진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잘려져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딱딱해져서 망치로 못을 박기 힘들어지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주님과 단절되어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면 점점 굳어 버려 돌보다 더 단단해지고 맙니다.
에스겔서 36장 26~27절 말씀에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했습니다. 정말 주님을 바라보고 성령의 사람이 되면 마음이 부드러워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부드럽습니까? 부부 관계나 부모 자녀 관계, 교우 관계 등을 돌아보면, 혹시 시험들고 상처받고, 상처 주는 일이 있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굳어 있으면 반드시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감정과 고집대로 말하고 행동하다 보면, 결국 자신도 힘들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줍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능력이 임하면, 오히려 미혹에 넘어가기 쉬워집니다.
성령의 사람, 곧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순종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절제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은사나 능력을 사용하든, 늘 공동체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 모습은 아름답고 감동을 줍니다.
마음이 부드럽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간이나 혈관, 근육이 굳어지는 것만큼 두렵고 심각한 일은 없지만, 사실 마음이 굳어지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합니다. 마귀가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의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래야 절제가 가능해지고, 공동체의 질서를 지킬 수 있습니다. 그 위에 성령의 능력을 마음껏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적이 우리를 통해 일어나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부흥이 이 땅에 임하기를 구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 일을 위해 기도하기로 결단합니다. “하나님, 제 심령을 살려 주시고, 우리 가정과 교회, 한국 교회, 그리고 이 나라와 민족을 살려 주십시오. 우리에게 진정한 성령의 역사와 새로운 부흥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주님으로부터 다스림을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 제목을 잊지 마시고, 계속 기도하시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지금 ‘1시간 기도’, ‘50일 기도’ 같은 영적 운동이 진행 중인데,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기도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부활이 있기에 오늘이 중요하다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 주님께서 여러분들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시면서 우리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환경과 여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부활의 주님이 정말 함께 계심이 믿어지면 염려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갖는 일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은 정말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이란,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부활의 주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에는 또 한 면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면인데, 그것은 우리도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도 부활한다는 것에 대해 분명하게 믿으십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십니까? “나도 부활할 거야”라고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부활할 것이라는 정확한 믿음,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사람이 부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부활하셨지만,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겠느냐”라고 생각합니다. 고린도교회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라는 고린도전서 15장 12절 말씀이 그것을 보여 줍니다.
성경은 예수님만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예수를 믿는 사람도 부활한다고 분명히 증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다 부활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도 부활한다는 믿음이 왜 중요한가 하면, 만약 우리가 부활하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부활하지 못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절에서 “죽은 사람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것입니다. 참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려면, ‘죽은 사람이 부활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약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일이 전혀 없다면, 예수님의 부활도 없고, 십자가의 구원도 없으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는 것 또한 모두 헛된 일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15절에서는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19절에서는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라고까지 말합니다.
결국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통해, 예수를 믿는 우리도 반드시 부활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진리입니다. 우리에게 수많은 문제가 있고, 실패와 좌절이 있어도, “우리가 부활한다”는 이 한 가지 진리만으로도 모든 것이 새롭게 됩니다. 단순히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길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부활한다면, 오늘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정말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난 8월 19일에 전 세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온라인 청소년 연합 여름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여름에 여러 상황 때문에 청소년 수련회를 진행하기 어려워, 온라인으로 연합 수련회를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서 제가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먼저 질문·응답을 주고받는 토크쇼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진행하던 전도사님이 제게, “목사님은 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시는데, 그것이 청소년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건 청소년들에게만 어려운 게 아닙니다. 어른들은 다 이해하고 믿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이해가 되거나, 지성적으로 깨달아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야 믿어집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복음이 정말 믿어질 때,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바뀝니다. 성경이 실제가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물이 포도주로 바뀌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나도 부활한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것 역시 성령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23절에서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제 차례대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다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장례식 때만 사용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부활한다면, 지금 내 삶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질까?”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떤 분은 “죽어서 천국에 가면 되는 것 아니냐. 꼭 몸이 부활할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에만 국한한다면 기독교 구원관을 정확히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는 것까지가 구원의 완성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4~25절에서 “그때가 마지막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께서 모든 통치와 권위와 권력을 폐하시고 그 나라를 하나님 아버지께 넘겨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 아래 두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정말 있을까, 이 땅에 임하기나 할까?”라고 확신이 없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언젠가 새로 생겨나는 미래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미 영원 전부터 존재했고, 지금도 있으며, 영원히 계속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다만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지구만, 인간이 죄를 지어 마귀에게 넘어간 후 하나님의 통치가 잠시 유예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 주심으로, 이 지구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와 교회 공동체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왕이라 부르고, 주님이라 고백하며,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성도의 마음과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원래 이 세상은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짓고 마귀가 왕 노릇하게 되면서 세상도, 우리 자신도 망가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처지에 놓여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 창조 세계와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다시 회복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1장 15절에서도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결국 “우리도 부활한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나라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그 나라 안에서 이 세상을 주님과 함께 다스릴 자가 바로 부활한 우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세상이 완전히 멸망하고 없어진다면, 혹은 우리가 죽어서 곧바로 천국에 가서 끝난다면, 지금 이 세상을 애써 바로 세우려 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망할 세상이라면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빨리 천국만 가면 된다”고 기도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이 세상에서 원수까지 사랑하며 선하고 의롭게 살려 애쓰는 이유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고, 우리가 부활할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사도의 삶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운 것 같았다고까지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교회를 세우는 사역이 그토록 힘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이 세상이 멸망하고 끝난 뒤, 내가 죽으면 그저 천국 가는 것으로 끝난다면, 바울이 왜 그렇게 고생해야 했겠습니까?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오늘 먹고 마시자’ 하지 않겠느냐”라고 되묻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실제로 많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모르면, 당장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끝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환난과 박해를 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사도행전 14장 22절, 디모데후서 3장 12절).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 하면 박해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 길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며, 우리가 부활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을 생각하면, 지금의 고난도 참고 이겨 낼 수 있습니다.
한인 선교사 대회에 갔을 때, 전 세계에서 모인 선교사님들의 간증과 모임을 통해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가장 어려운 지역에서 가장 고생하며 사역한 선교사님을, 다른 선교사님들이 가장 존경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 원리이구나” 싶었습니다. 뜻대로 살려 하면 어려움을 겪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나 6.25 전쟁 당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전사한 무명 용사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들이 지금 다시 살아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까요. 그러나 현실에서는 “죽으면 그만이지. 가족만 불쌍하다” 정도로 그치기 쉽습니다. 결국 사람이 끝까지 의롭게, 희생적으로 살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분명히 이 땅에 임하고, 우리 모두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는지가 다 드러납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삶의 모든 평가와 의미를 완전히 뒤바꿉니다. 부활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고난을 당해도 감사할 수 있고, 힘들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보람이 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심는 일은 대단히 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2절에서도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과 수고, 기도가 결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6절에서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극심한 고통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생도, 우리가 심은 선한 씨앗도 죽음을 넘어 열매 맺을 때가 옵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부끄럽게 살았다면, 죽음 뒤에도 영원히 그 부끄러움이 남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원수를 용서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나 분명히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이 우리에게 유익함을 아십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 어디 가든 한국 사람을 알아보듯,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습니다. 부활을 분명히 믿고, 어떤 고난을 만나도 감사하고, 모든 사람과 화평하며 거룩하게 살려 애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나라 백성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기에 원망이나 낙심 대신 감사와 기쁨으로 삽니다.
물론 우리 눈앞의 구체적인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예를 들어 코로나19 확산이 언제 멈출지, 경제 상황은 어떻게 변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세한 부분을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결국 어떻게 될지는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우리는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될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너무나 확실해집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유혹이 오고 박해가 와도,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나는 그 길로 간다. 그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다”라고 선택하게 됩니다. “내가 이렇게 고생해도 아무 소용 없는 것 아니야?”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6~7절에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심는’ 사명을 주셨다면, 기쁘게 심으면 됩니다. ‘물을 주는’ 사명을 주셨다면, 기쁘게 물을 주면 됩니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심기만 하고 물만 주는 사람은 기운이 빠질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결국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실 때, 심었던 자도, 물 주었던 자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내가 죽는 순간까지 눈앞에 열매가 안 보여도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뒤에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심고 물 주어 열매 맺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다 이루실 테고,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바쁘고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도 하지 않았던 사람이 과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되어 있고, 기도할수록 하나님의 나라 영광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렇게 분명해지니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부활합니다. 증거가 너무나 명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그분이 지금도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부터 선한목자교회 전 교인들이 예수 동행 일기를 쓰며, 주님과 동행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고 합니다. 저도 오늘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 일기를 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삶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또 있을까요? 그 삶을 계속 이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부활 신앙의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삶이 모두 달라집니다. 오늘의 삶도 새로워집니다.
부활 신앙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염려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고, 오직 사랑만 행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성령의 역사를 더해 주셔서, 제가 부활할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 흔들리고 방황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길을 놓치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굳게 나아갈 힘을 주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서게 해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 다 같이 동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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